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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 케임브리지 대학 노교수가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전하는 인류 성찰의 지혜
앨런 맥팔레인 지음, 이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수한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계통의 학문을 한 사람으로서 그가 손녀딸에게 주는 글은 감동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저명한 대학의 이름난 교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마치 편안한 동네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녀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얘기한다. 글의 내용도 평생 학문을 한 사람의 글이라기보다는 편안하고 쉽게 쓰여져서 손녀딸이 가슴으로 읽을 수 있게 써내려갔다. 하지만 내용은 녹녹하지 않다. 녹녹하지 않다는 말이 논리적이고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30년 학문이 한 주제의 5-6페이지의 내용에 쉬우면서도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듯 산업화로 인한 핵가족의 도래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가족에서 밀려나가버렸고, 전통사회에서는 삶의 지혜를 조언해주고 방향을 인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지식이 분화되고 전문가만이 대접받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버린 정보화사회에서 정보매체를 다루는 기술을 접하지 못한 그들은 의사소통의 통로마저 잃고 외롭고 고독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올 노년에 자신의 손녀딸에게 이렇게 삶의 아름답고도 성숙한 메세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노년을 미리 꿈꾸게 하고 있는 것이다.
30년간의 세계각지에 떠난 여행이, 그리고 평생에 걸친 진리에 대한 탐구가 그에게 남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나 틀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다를 수 있고, 그 다양함은 인간이 쌓아온 선택의 산물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도 우리들의 선택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어진 사회적 구조물로서의 어떤 정형화된 삶의 모습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삶은 어떤 것이든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것도 선택하에 놓여져 있고, 사랑도 마찬가지다. 섹스와 몸의 욕구에 대한 문제도, 학교와 조직, 불평등, 지식과 개인적 가치, 시민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 인류의 미래 등 28편의 인생의 주제들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서 다양하게 열려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네 인생을 온전히 누리라는 메세지이다. "세상에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자유롭고 인생의 열려진 가능성의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할아버지가 손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로서 이보다 아름다운 말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랑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펴라." 우리들의 삶이 위축되고 불행해지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씨앗때문이 아니던가? 자신의 삶을 열린 무한한 가능성 속에 던지고 모험 속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삶의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그 삶이 우리들의 영혼을 더욱 살찌우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생과 학문에 대한 그의 다양하고 폭넓은 지혜가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면에 있어서는 일종의 편견이 작용하여 무한히 열린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닫혀진 느낌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더라도 그것으로 다하지 못하는 삶의 중요한 자물쇠는 아직 열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