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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퇴계 이황 -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下)

(2007. 4. 14. 경향신문)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下)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퇴계집’을 읽어보며, 그의 학문의 본산인 도산서원 일대를 둘러보고 그가 태어난 마을인 안동 온계리(溫溪里)의 퇴실과 수백 년 동안 누워계시는 묘소를 돌아보고 종손(宗孫)들이 터를 지키며 살아오는 퇴계종택을 둘러보면서, 위대한 학자의 흔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는 큰 교훈을 느끼게 했다. 태어난 지 500년이 넘은 학자! 유적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역사를 외면하고 선현들의 업적을 소홀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풍속에서, 그 정도로 퇴계유적지가 존재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보아져 고마운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퇴계의 이기철학(理氣哲學)
 


퇴계 학문이 꽃을 피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고택에 ‘도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누가 뭐라 해도 퇴계야말로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임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의 일급 제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퇴계의 이기철학에 문제를 제기하며 7년 동안이나 편지를 통해 학술논쟁을 벌인 찬란한 전통이 있고, 까마득한 후배 율곡 이이가 ‘이발(理發)’이라는 두 글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높은 학술논쟁을 벌였지만, 퇴계학단의 끈질긴 변론과 세력의 힘으로 퇴계학설의 비중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퇴계는 천리의 공심(天理之公)에서 나오는 도심(道心)과 인욕의 사심(人慾之私)에서 나오는 인심(人心)으로 구별하여, 사단(四端)은 도심이고 칠정(七情)은 인심으로 여겨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라주고(四端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七情氣發而理乘之)”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확정되기까지에는 고봉 기대승의 학설이 첨가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율곡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는 말이야 옳지만 ‘이발(理發)’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이런 논쟁이 학파의 분열만이 아니라, 당쟁으로 연계되어 그야말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 지 200년, 다산 정약용은 두 학파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훌륭한 답안이자, 자신의 철학으로 이기논쟁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이라는 짤막한 두 편의 논문은 ‘학자들이 이런 뜻을 살펴 깊이 실천하기’를 염원하면서 논쟁의 종결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퇴계가 말하는 이(理)와 기(氣)는 율곡이 말하는 이와 기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퇴계는 ‘전취(專就)’하여 ‘이기’를 사용했고 율곡은 ‘총집(總執)’하여 ‘이기’를 사용했으니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이 퇴계는 퇴계대로, 율곡은 율곡대로 ‘이기’를 사용하여 자기대로의 학설을 폈던 것이니, 여기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오랫동안 전개되던 두 학자의 시비에 대한 결론을 맺어, 퇴계도 옳고 율곡도 옳다는 윈윈의 멋진 이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퇴계는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공(功)에 일생동안의 힘을 기울였다(退溪一生用力於治心養性之功)”라고 하여 성리학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은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대체로 국조 이래 현실정치에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蓋國朝以來識務之最)’은 바로 율곡 이이였다는 평을 내렸다. 퇴계는 성리학자의 최고봉이고 율곡은 성리학과 함께 통치원리까지 가장 잘 알았던 학자라던 다산과 성호의 평을 오늘의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실익 없는 논쟁은 끝나리라 믿어진다.

# 주자학 전파의 최고 공로자



퇴계 선생의 묘비문.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지었다. / 사진작가 황헌만 
퇴계는 충실한 주자학의 계승자였다. 선비라면 의당 학문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택민(澤民)의 공(功)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들의 권유에 의해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벼슬살이도 했던 퇴계, 그라고 택민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으리오마는 허약한 몸으로 언제나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충실한 주자의 제자가 되어 ‘치심양성(治心養性)’의 성리학 논리를 후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공(功)도 만만찮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런 논리의 개발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자였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산서원 일대를 산책해보면, 퇴계가 얼마나 심신수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건물 하나, 연못 하나, 자연 경관 하나하나를 설계하고 배치했는지를 알기에 어렵지 않다. 거기에서 퇴계의 이상(理想)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할 수도 있다. ‘수양에 의해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실천하는 인간상’이었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동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런 인간상의 실현을 위해 일생동안 가장 힘을 기울인 일이 다름 아닌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길이었다. 경에 살며 이치를 궁구함, 바로 그것에 퇴계는 생을 걸고, 도산서원 일대라는 아름답고 고적한 산천과 강산을 사랑하면서 70 평생의 세월을 보냈다. 도산서원 일대를 수도(修道)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 속에 모든 건물을 퇴계의 뜻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 생전의 강학(講學)하던 곳이요,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후학들이 맨 위에 상덕사(尙德祠)를 짓고 퇴계의 신주를 모시며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까지 합해진 전체의 이름이다.

도산서당의 명칭에서 퇴계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서당은 세 칸인데,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했다. 주자의 글에서 인용했다. ‘중용’이나 ‘대학’의 오묘한 뜻을 즐기며 완상하겠노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쪽의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인데, 이것도 주자의 ‘운곡(雲谷)’이라는 시에서 얻어온 글귀다. 산속에 깃들어 살면서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얻겠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덩실하게 서있는 건물의 이름도 모두 거경·궁리를 통한 수양의 길에 도움 되는 내용을 이름으로 삼았다.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가 그러하고, ‘관란헌(觀瀾軒)’이니 ‘농운정사(●雲精舍)’가 모두 그런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서당의 동쪽에는 연못을 만들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우물에 ‘몽천(蒙泉)’이라 이름하고, 몽천 위쪽의 산기슭에 매화·소나무·대나무·국화를 심어 놓고 ‘절우사(節友社)’라 했으며,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 동네 어귀는 ‘곡구암(谷口巖)’이라 했다. 또 여기저기에 대(臺)를 만들어 ‘천연대(天然臺)’,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 하고, 시내의 한 줄기는 ‘탁영담(濯纓潭)’이라, 그 가운데 있는 편편한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이라 이름 했으니, 모두가 수도·수양과 관계없는 것이 없고, 도학적 함의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 수양의 도장 도산서당

1561년은 퇴계가 회갑을 맞은 해다. 모든 세상의 욕심은 다 버리고 오로지 학문연구, 거경·궁리에 생애를 바치기로 마음먹고, 도산서당 일원을 수양의 도장으로 꾸미고 7언 절구 18수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짓고 겸하여 ‘도산기(陶山記)’라는 산문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넉넉하게 밝혔다. 품격 높은 시에 격조 높은 산문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옴소롬히 보여주고 있다. ‘반타석(盤陀石)’이라는 시는 정말로 좋다.

도도히 흐르는 탁류에 살짝 숨더니                                                黃濁滔滔便隱形
물결 가라앉자 분명하게 형체 보이네                                             安流帖帖始分明
저처럼 치고받는 급물살 속에서도                                                 可憐如許奔衝裏  
천고의 편편한 바위는 구르지 않다니 참으로 사랑스럽네                 千古盤陀不轉傾

45세에 맞은 을사사화(乙巳士禍), 그런 어려운 난리 속에서도 학문을 향한 염원을 못 버리고 은거하면서 거경·궁리만 일삼았던 퇴계. 마치 개울 가운데의 편편한 바위가, 홍수가 질 때는 몸을 숨겼다가도 끝내 구르지 않다가 물이 가라앉아 개울에 평화가 오면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듯, 숨어살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읊은 시가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지금도 반타석은 개울 가운데에 의젓이 버티고 있으며, 500년 동안 퇴계학문이 버티고 숨 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기’도 세상이 알아주는 명문이다. 산림(山林)에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은자, 그러면서 그 즐거움은 도의를 즐기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즐거움이었으니 역시 성리학자다운 글이었다.

선조 3년, 퇴계 나이 70세인 1570년의 12월에 계상서당에서 고요히 퇴계는 눈을 감았다. 23세의 청년으로 58세의 노선생을 찾아뵈었던 율곡 이이, 퇴계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만사를 짓고 제문을 올려 바쳤다. 그는 퇴계를 이렇게 평했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퇴계유사’)라고 했다. 학자와 시인으로 유명하고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朴淳)은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인도해주어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가 우리 조선에서 찬란하게 다시 밝혀지게 했던 분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퇴계묘지명’)라는 평은 가장 고전적인 퇴계에 대한 찬양으로 정론(正論)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책에 관한 정보는 저번주에 소개를 했다.  

참고 사이트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9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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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사진 한 장을 위해 목숨을 던진 기자 -로버트 카파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

1913~1954년, 41년의 생애를 산 남자.
어떤 위대한 역사가와 작가도 광포한 야만의 20세기를 이 남자처럼 사실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이 남자가 찍은 사진 한 장만큼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또 어떤 방대한 분량의 전쟁문학도 극한 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이 남자처럼 비극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했다.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포토저널리즘의 신화(神話),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 보도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그 이름 앞에 붙는 형용어들이다. 그가 전 생애를 던져 찍은 사진 140점이 지난 3월 말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모든 사진기자의 우상이자 영웅이 된 남자, 그의 이름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다. 너무나 유명한 이름.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아니다.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먼(Endre Erno Friedmann)이 본명이다. 왜 그는 본명을 쓰지 못하고 영어 이름을 썼을까? 여기에 그의 생애를 규정짓는 운명적 역사성이 숨어 있다.

로 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는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심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그 주변부였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럽에 살면서도 비(非)유럽인으로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14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가 한 살 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프로이센(독일)과 한편이 되어 프랑스·러시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의 유년기 기억은 전쟁의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채워졌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생필품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는 또다시 유럽 전역에 반(反)유대주의 기독교운동을 불러왔다. 반유대주의운동은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 는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베를린대학을 다니며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사진통신사 데포트(Dephot) 암실보조원으로 취직한다. 이것이 프리드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암실보조원으로 일하면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소소한 취재를 하게 된다.

1932년, 러시아의 레온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망명길에 오른다. 그 해 12월, 트로츠키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데포트 통신사에서는 트로츠키의 강연을 취재할 마땅한 사진기자가 없었다. 대신 취재를 나가게 된 프리드먼은 단 한 번의 기회에서 사진 특종을 건져 올렸고, 이로 인해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된다.

1933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광풍(狂風)에 편승해 권력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베를린을 떠난다. 프리드먼은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들어갔다. 파리는 반유대주의의 영향에서 비켜선 도시였다. 그는 파리에서 세 살 연상의 포르투갈 출신 사진작가 게르타 포호라일(Gerta Pohorylle)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35년, 프리드먼은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작가 행세를 한다. 게르타는 프리드먼이 찍은 사진을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꾸며 신문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작업을 하다 프리드먼은 로버트 카파로, 아내 게르타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아예 이름을 바꿔버린다.

로 버트 카파가 된 프리드먼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카파 부부는 인민전선 진영에 서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카파의 생애를 결정짓는 첫 종군취재였다. 당시 세계의 지성들은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을 지지하면서 앞다투어 참전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파블로 피카소 등이 인민전선 편에 선 지식인이다.

1936년 9월, 카파는 인민전선 진영의 코르도바 전투를 취재한다. 인민전선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 찰나의 장면이 카파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로버트 카파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전쟁 사진작가로 이름을 굳혔으며, 이 사진은 20세기의 전쟁기록 사진 중 가장 뛰어난 사진으로 평가 받게 된다.

1937 년 7월, 카파는 잠시 파리에 가 있었고 게르다는 혼자 전선에 남아 사진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다가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어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카파는 보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카파 나이 스물넷.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후 카파는 평생 독신을 고집했다. 카파는 수차례의 스페인 내전 취재를 통해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알게 되고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게 된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카파는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린다. 카파는 6개월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일전쟁을 취재해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1939 년 9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헝가리 국적을 갖고 있던 카파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적성국(敵性國) 시민이었다. 미국 당국에 의해 카메라를 압수당할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위기를 넘긴 카파는 1942년 미국 잡지 ‘콜리어스’와 계약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군에 종군하게 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인… 1954년 베트남전서 지뢰 밟고 사망

카파는 1943년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탈환·시칠리아 탈환·나폴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
아 반도 전쟁을 취재한다. 2차 대전은 종군사진기자 카파의 명성을 또 한번 드날리게 했다.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 지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안 상륙작전 취재였다. 연합군의 상륙작전 동행취재에 선발된 기자는 20명이었다. 이 중 사진기자는 네 명이었고, 로버트 카파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카파는 2차 대전 종군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를 남겼다. 카파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제1파 부대와 함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렸다. 카파는 총알이 쏟아지는 그 순간을 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닷물은 너무 차가웠고, 해안까지의 거리는 아직 100m 이상 남아 있었다. 내 주위로 총탄이 날아들어 물을 튀겼다. 나는 제일 가까운 철제 장애물을 향해 내달렸다. 병사 한 명도 나와 동시에 그 장애물 뒤로 뛰어들었다. 몇 분간 우리 둘은 장애물을 나눠 썼다. 그는 소총에서 방수포를 떼어내고는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해안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그제야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는 나처럼 장애물 뒤로 움츠리고 숨어 있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찍기에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정책참모들이 디자인한 초현실주의 작품 같은 장애물 뒤에 작게 움츠린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이때 카파가 찍은 사진은 모두 106장이었으나 ‘라이프’지 암실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쓸 수 없게 되고 10장만 살아 남았다.
카파는 1945년 초 또 한번 목숨 건 취재를 감행한다. 미군 제17 공수단 대원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한 것이다.
1945 년 6월, 카파는 파리에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 2년간 연인으로 지낸다. 버그만은 딸을 둔 유부녀였으나 카파에 빠지고 만다. 종전 후인 1946년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버그만의 권유로 잠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영화에서 손을 뗀다.

1947년 카파는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설립했다. 1948~1950년 중동전쟁을 취재했고, 1950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3년간 매그넘사 대표로 일했다. 1949년과 1951년에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때가 카파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중 ‘라이프’지로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파의 친구들은 베트남행(行)을 만류했다. 이미 낙하산 침투 취재까지 한 경험이 있는 카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
카 파는 1954년 5월 24일 북베트남에서 프랑스전투 부대원을 따라 취재하던 중 타이빈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1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913년에 태어나 종군기자로 다섯 전장에서 10년 이상 최전선을 지켰던 카파. 그의 마지막은 그의 생애만큼 영웅적이었다. 카파는 전쟁 혐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죽음으로 그 피날레를 장식했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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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한국 성리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큰 스승 이황의 관한 책을 이 기사와 함께 몇 가지 소개를 하려고 한다. 먼저 <퇴계 이황>(살림, 2007)은 ' 사단칠정론.성학십도.무진육조소'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단 칠정론과 성학십도는 어려워 그동안 전공자들 외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지만, 이번 이 책을 통해 좀더 퇴계 이황의 성리학 사상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이 들려주는 경 이야기 - 초급, 중급, 고급>(자음과 모음, 2006)는 초, 중, 고등학생들 용으로 퇴황 이황의 성리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출판했다. <활인심방 - 퇴계선생의 마음으로 하는 몸공부>(예문서원, 2006)은 퇴계의 생애와 활심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소설 퇴계 이황>(가람기획, 2005)은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서 뽑힐 만큼 내용을 검증받은 작품이다. 이 책의 특징은 퇴계 이황의 생애를 기본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읽기에는 무난 하리라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서적을 세개만 더 꼽자면 <성학십도와 퇴계철학의 구조>(서울대학출판부, 2001), <퇴계선집>(현암사, 1982),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2003)이다. 특히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기대승과 이황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 글들은 아직도 주옥같은 문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서 꼭 보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도서이다. 또한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 선정되어 있는 도서이다. 아울러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안에 퇴계선집이 들어있다.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동아일보에서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2007. 4. 6. 경향신문)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퇴계 이황 당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의 산실이자 조선 성리학의 고향이다. 오른쪽 사진은 퇴계 선생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대하여 동양의 정통학문으로 발전된 유학, 이름하여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상과 학설이 첨가되며 발전도 했으나 때로는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 끝내는 성리학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에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업적이 더해지면서 조선왕조로 승계되었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 성리학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정치와 학문의 기조로 여기면서 통치원리로 정착시켰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세워 공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유학을 강(講)하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세워 선비들을 양성해냈다. 그야말로 유교천국의 나라가 세워진 셈이다.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경상도 예안의 온계리에서 태어나고, 중종 31년인 1536년에 강원 강릉의 북평촌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양대 산맥을 줄기로 하여 참으로 혁혁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른바 영남학파는 퇴계를 존숭하는 학파로,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통을 이으면서 조선 성리학의 두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퇴계는 태어난 다음 해인 6월에 부친을 잃었으니 돌도 지나지 않아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부인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李●)공으로부터 글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는 모두 닦을 수 있었다. 12세에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면 10세 전후에 벌써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여 밥 먹고 잠자는 일까지 잊을 정도였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아도, 약관에 학문이 익었음을 알게 해준다. 28세에 진사가 되고 32세에야 어머니와 형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에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급제 직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37세에 끝내 어머니가 타계하고 말았다. 39세에는 옥당벼슬에 오르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받았다.

학자로서 벼슬살이도 살았던 퇴계는 자신이 해야 할 본령이 학문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여겼다는 뜻이다. 마음이 항상 학문연구와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선비로서 벼슬을 철저히 단념할 수가 없어 임금의 부름에 마지못해 응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퇴계는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에 오르는데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46세 때에 장인상을 당해 하향한 뒤 관직에서 해임되고는 고향에 은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6세 이후부터는 벼슬을 받아도 나가는 경우보다는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50세부터 오늘의 도산서원 터에 하나씩 집을 지으면서 은거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최초에 지은 집이 퇴계라는 개울의 서쪽에 있는 ‘한서암(寒棲菴)’이었다. 그 무렵 좌윤(左尹)벼슬에 있던 형인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유배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벼슬할 생각은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1558년 율곡과의 만남

나아가기를 그렇게 싫어했건만 조정에서 벼슬은 계속 내려졌다. 53세에는 대사성, 54세에는 형조참의, 56세에는 홍문관 부제학, 58세에는 공조참판, 66세에는 공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서 내리기도 하였다. 69세에도 의정부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사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대략의 벼슬살이 경력이다. 퇴계 연보를 보면, 50세의 2월에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은거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를 찾아가 시를 짓고 함께 즐기던 생활의 기록이 있고, 이 무렵에 지은 시 한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심경을 제대로 읊고 있다. 제목이 ‘퇴계(退溪)’라는 시다.

몸이 물러나오니 내 마음이야 편안하나                  身退安愚分
학문이 후퇴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처음으로 살 곳을 정하고보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할 일이로세               臨流日有省


50세의 노숙한 학자 퇴계의 심경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시냇가에 살 곳을 정해놓으니 몸이야 무척 편안하지만, 행여 학문연구에 등한할까 걱정이 많음을 토로하고 있다. 공자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저것들과 같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당한 그 순간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경계의 뜻이어서, 퇴계도 흐르는 물가에 이르고 보니 허송세월해서는 안된다는 반성의 마음이 앞선다는 생각을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51세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 생활하면서 그 무렵 학자들이 글을 물으려고 찾아오는 수효가 늘어나자 도산서당을 영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던 어느날 조선의 천재로 조야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 율곡 이이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의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다. ‘퇴계집’에는 기록이 없으나 ‘율곡집’에는 그들의 만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율곡의 연보 23세 조항에 나와 있다. ‘봄에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뵙다’라는 대목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해는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는 58세의 노숙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1558년의 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흠모하며 뵙고 싶던 퇴계,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뵙다’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벼슬에서 물러나 제제다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계상서당에 은거하던 퇴계. 근엄한 노학자를 뵙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율곡은 우선 시 한수를 올려 바친다.

시내는 공자 마을 시내에서 갈려나왔고                      溪分洙泗派
산봉우리는 주자 살던 무이산처럼 솟았네                   峯秀武夷山
생활하는 살림이야 경서가 천권인데                           活計經千卷
살림집이야 초옥 몇 칸이로다                                     行藏屋數間
품은 마음이야 구름 갠 달처럼 열렸고                         襟懷開霽月
점잖은 말씀과 웃음 미친 물결도 그치게 하네              談笑止狂瀾  
어린 제자는 도를 묻고 구하려 함이지                         小子求聞道
반나절인들 허비하려고 찾아옴 아니올씨다                 非偸半日閒


퇴계라는 시내는 그 근원이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흘러나왔고, 산은 주자학이 완성된 무이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면, 공자의 학문과 주자의 성리학이 모아진 곳이 바로 퇴계선생이 살고 있는 퇴계라는 시냇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의 그런 높고 큰 학문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왔지 그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퇴계의 높은 학덕과 율곡의 구도정신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학문이 깊고 시를 잘하던 퇴계가 그냥 시를 받고만 말 것인가. 퇴계도 즉각 율곡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몸져 누워있어 문을 닫고 봄도 못 봤더니
그대 오시니 가슴 열려 정신이 깨는구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 알겠으니
지난 세월에 몸 경건하게 하지 못함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잡초 잘 자람 허락하지 않으며
노니는 티끌은 잘 닦아진 거울 그냥 안두네
지나친 표현의 싯귀야 모름지기 깎아내고
노력하고 공부하며 절로 친하게 지내세

평생 공경스럽고 겸허하게 살았던 노학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다. 기묘명현이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외손자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던 율곡은 세상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하던 젊은이였기에 퇴계도 이미 그의 이름을 기억했나 보다. 그래서 율곡의 수작을 들어보고 올린 시를 읽어보자,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알겠네”라며 율곡의 재주를 칭찬해주고, 곧바로 23세의 젊은 천재에게 어른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학(正學)의 공부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문이 제대로 익으면, 마치 잘 자라는 곡식에서 피가 자라지 못하듯이 잡된 학문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하여 한때 불교공부에 몰두했던 율곡에게 넌지시 정학에 분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흘러다니는 티끌이 있다면 아무리 거울을 닦고 갈아도 맑게 남아있지 않는 것이니 잡된 생각을 버려야만 맑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와 주자에 비긴 과장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겸손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대단한 학자들의 대화였다.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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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해제

(2005. 6. 18. 동아일보 -  책읽는 대한민국) 퇴계선집(퇴계문선) - 이황
 
유교 전도사로 자처하는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항상 한국 지폐를 지니고 다닌다. 1000원권과 5000원권에 있는 퇴계와 율곡의 초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학자가 화폐에 등장하는 예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면서 조선이야말로 유학의 이념을 구현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은 유교가 아직 살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고 치켜세운다. 이러한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퇴계와 퇴계사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퇴계가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훌륭한 유학자이고 중국의 성리학자보다 더욱 정밀하게 주자를 연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흔히 퇴계사상의 핵심은 이기론(理氣論)보다 도덕적 마음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데 있다고 한다. 퇴계는 욕망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덕적 직관이 가능하며, 성인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일반적인 마음은 기의 드러남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원리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소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는 조선시대 최대의 성리학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자신의 학설을 약간 수정하여 ‘행위를 유발하는 일반적인 감성은 기의 드러남이나 양심의 규제를 받고, 도덕적 감성은 이가 드러난 것인데 기에 의해 현실화된다(七情氣發而理乘之 四端理發而氣隨之)’고 한다. 아마도 퇴계는 도덕을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계는 도덕적 감성을 일반적인 감성과 분리하고 이를 기에서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고 지적인 훈련보다는 감성적 수양(敬)을 중시하게 된다고 한다.

거칠지만 쉽게 요약한다고 해 보았는데 현대의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퇴계선생문집’을 단지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그리고 참된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학문적 고집은 있지만 제자뻘인 후배와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고, 고고한 선비이면서 매화가 피었다고 술에 취할 수 있는 인간 퇴계는 그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퇴계 선생의 글을 직접 접할 필요가 있다.  ‘퇴계선생문집’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다 읽기 힘들다. 퇴계의 성리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학문적 태도를 아울러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봉과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퇴계의 사상을 두루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퇴계문집’(민족문화추진회)을 권하고 싶다. (허남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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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매화가 왔다




올해도 매화는 나에게 왔다 
봄비 치고는 사나운 기세가
매화의 여린 잎을 무참히 짓뭉개놓았어도 향기는 여전하다. 

팔이 아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름나그네와 같은
좋은 한 시절을 호사하는 새봄에
아침 일곱시면 매화 향기에 몸을 적시러 마당끝으로 나선다.

소동파는 모춘 10여일을 노래했지만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노라고
돌아보면 그 때가 꽃시절이었음을
매일 아침 일곱시마다 가슴을 흔들며 소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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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3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께서 올려주신 매화 꽃 아주 이쁘죠. 잘 지내시고 계시죠. 오늘은 하늘이 맑게 개어 있네요.

달팽이 2007-03-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늘 빛이 아름답게 깃든 하루입니다.
내일은 다시 비와 바람이 대지에 스며들 것이라 하더군요..
 
 전출처 : 짱꿀라 > 반계수록 - 실학자 유형원

# <반계수록>(명문당-여강출판사, 1991)을 번역해 출판한 곳은 명문당과 여강출판사(4권-절판)였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손꼽는 번역본은 여강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추천하고 있다.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은 실학자의 눈으로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2007. 3. 9. 경향신문) 반계 유형원 ‘반계수록’ 의 산실 (上)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변산반도를 형성한 변산(邊山)의 산자락을 따라 질펀한 평야가 널려 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유형원 선생의 묘소 전경 <사진작가 하세영> 

이곳 평야의 상당 부분은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이자 이름 높은 정승이던 하정(夏亭) 유관(柳寬:1346~1433)에게 임금이 내린 토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유관의 6대손인 유성민(柳成民)은 과거에 합격하여 형조정랑을 지낸 분이나, 선조가 물려준 땅을 찾아와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민의 사위이며 뒷날 반계 유형원의 고부(姑夫)이자 스승이던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유형원은 32세 이후로 할아버지가 자주 찾았던 우반동으로 이사와 정착하면서 ‘반계’라는 호를 사용했고, 그의 유명한 대저의 이름도 ‘반계수록’이라고 명명했다.

유형원(柳馨遠)은 본디 서울 태생이다. 1622년 1월21일 외가인 소정릉동, 지금의 정동(貞洞)에서 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시 정릉에 살던 여주 이씨 집안은 학문과 벼슬로 나라에서도 알아주며 떵떵거리던 집안이었고, 이지완의 아들이자 유형원의 외숙인 이원진(1594~1665)은 명문 출신으로 대단한 벼슬아치이자 큰 학자였다. 유성민의 사위인 김세렴은 호조판서를 지낸 고관으로 학문까지 높아 처조카인 유형원의 어린 시절에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 28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유형원이 태어난 다음 해에 이미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 유흠(1596~1623)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자결하는 불행을 맞았다. 반계는 두 살에 고아가 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래서 유형원은 외숙과 고부(姑夫)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에 학문을 익히고, 벼슬보다는 산야에 묻혀 지내는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 더구나 15세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겪으며 아버지도 없이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고초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국제질서의 변동 속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물러나 미래의 설계를 위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외숙 이원진과 고부 김세렴을 통해 기초학문을 닦은 유형원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돈독하게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염원을 잊지 못해 33세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응하지 않았다.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32세에서 5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실학의 비조’라는 호칭에 걸맞게 자기 이후의 모든 실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반계수록’을 완성해놓았다. 31세에 시작하여 49세까지 19년에 걸친 기나긴 천착 속에 불멸의 명저가 탄생했으니, 반계서당이야말로 ‘반계수록’의 보금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소란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산이 아름답고 강이 푸른 우반동. 거기에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기에,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반계의 묘비문이 새겨진 비석의 뒷면. 

이 시 한 편을 읽어보면 그의 생각이 어디에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뜻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평야와 들이 있어 농사도 짓고 바닷고기도 낚아서 생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도 놀라 날아가지 않는 갈매기들과 무리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겠노라는, 자연과 전원을 그리워했던 생각이 여실하다.

# 삶의 족적

1673년 52세로 유형원이 세상을 떠났다. 죽은 지 100년 다 되는 1770년에야 ‘반계수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으나, 그 이외의 많은 저서들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근래에 이우성·임형택 두 교수의 노력으로 ‘반계잡고’와 ‘반계일고’가 수집되어 간행되면서 그의 시문(詩文)도 얼마 정도는 읽어볼 수 있고, 그의 연보까지 간행되어 삶의 전체를 대강은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상을 걱정하고 나라를 근심했던 유형원. 그는 산속의 서재에 묻혀 글만 읽고 책만 쓰던 서생의 학자는 아니었다. ‘실학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는 현실과 세상의 실상을 파악해야만 문제를 알아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형원은 글을 읽고 책을 쓰다가는 불현듯 일어나 조선 천지를 유람하는 여행길에 오르던 때가 많았다.

18세에 영의정 심수경의 증손녀와 결혼한 그는 22세에는 경기도 여주로 이사가 살다가 고부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나가자 그를 찾아가 함경도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역사의 옛터를 고루 살피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평안감사로 옮기자 그곳으로 찾아가 평안도 일대를 여행하며 고구려의 옛 도읍과 국토를 유람하기도 했다. 이 무렵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자 정세 파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집에 안주하지 못하고 줄곧 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다.

27세에는 처음으로 경상도 일대를 찾아나섰다. 29세에는 충청도 일대를 여행한다. 30세에는 처음으로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에 올라 세상을 굽어본다. 이 무렵은 아직 조부가 생존하던 때로 명령에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그해에 조부가 세상을 떠났고, 마음 편하게 저술 작업에 착수한다. 상(喪)중에 ‘수록’의 저술에 착수했고, 32세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글을 짓고 부안으로 낙향했다.

반계서당에서 글을 읽고 책을 쓰면서도 때때로 상경하여 세상을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33세에는 진사시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왔고, 34세에도 서울에 왔다. 35세에는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책을 저술했고, 36세에는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일대를 두루 여행하면서 각 곳의 풍토와 물산을 모두 살폈다. 37~38세 무렵에는 정동직(鄭東稷)·배상유(裵尙瑜) 등 친구들과 성리학에 대한 심도 깊은 학문토론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38세에 또 다시 호남지방 여행길에 올라 한 달이 넘는 긴 여행을 했다. 39세에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서울에 왔고, 40세에는 또 다시 영남지방 답사에 나섰다.

#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유형원은 애국자였다. 나라의 강산을 사랑했고, 조국을 사랑했다. 병자호란에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41세에는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보이고 있다.

45세에 다시 서울에 온다. 마침 스승이자 외숙인 태호 이원진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또 서로 만나기를 그렇게도 바라던 미수 허목 선생을 뵈려고 연천으로 찾아갔다. 그해가 1665년이니 44세의 장년인 학자 유형원과 71세의 원로 학자 허목의 해후가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허목의 가까운 제자들이 모두 유형원의 친구들이어서 이미 간접적인 교류야 많았지만 실제로는 처음의 만남이었다. 근기학파의 개산조인 미수와 실학의 비조인 반계의 만남은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수는 반계를 만나 며칠 동안 학문을 토론하면서 그의 깊이를 알아보고 ‘왕좌재(王佐才)’, 즉 임금을 도와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인재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고경(古經)으로 돌아가 현실을 개혁하자는 논리로 두 분의 의견이 모아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편지야 이전부터 주고 받았지만 그때부터 더 자주 편지가 오고갔으며 46세에 또 다시 반계는 미수를 찾아 경기도 연천을 방문한다. 며칠을 묵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구제할 토론을 거듭했다. 49세인 1670년에야 마침내 26권 13책의 ‘반계수록’이 완성되었고 그 대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못한 52세인 1673년 3월19일 꼭두새벽에 아까운 나이로 대학자는 눈을 감고 말았다.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2007. 3. 16. 경향신문) ‘반계수록’ 의 산실을 찾아서(下)
-토지공유·선거제 주창… 묘소는 천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의 전경. 실학의 대저 ‘반계수록’은 이곳에서 쓰여졌다. 

반계 유형원이 31세에 저술을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한 ‘반계수록’은 한국 학술사에서의 의미로 보아 정말로 획기적인 책이다. 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불철주야 저술 작업을 계속했던 전라도 부안군의 우반동 ‘반계서당’은 그 책의 산실이었기에 참으로 뜻이 깊은 역사의 땅이고 사상의 고향이다. 그렇건만 보존이나 관리 상태는 너무도 등한하고 초라했다. 우리가 반계의 흔적을 찾느라 살펴볼 때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당 건물의 관리도 부실하고, 그곳에 거주하며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었지만 그 보존 상태는 정말로 한심했다.

웬만한 유학자라면 ‘반계수록’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 저서가 조선후기 사회나 현재에 쉽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그 책의 산실이 그처럼 천대받는 모습은 참으로 처참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다.

# ‘반계수록’은?


반계수록 

이제 정설로 자리 잡았듯이, 조선 실학의 1조(祖)는 반계 유형원이며 2조는 성호 이익이며 3조는 다산 정약용이다. 반계의 ‘반계수록’으로부터 조선의 실학사상은 본모습을 보였고, 그 이후의 실학자들은 대부분 반계의 경륜과 경세론(經世論) 및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경제사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계수록’의 서문을 짓고, ‘반계유선생전’이라는 전기를 지은 성호 이익이 가장 존숭하고 사숙했던 학자가 반계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지칠 줄 모르며 세상을 경륜하려던 뜻은 유독 반계옹에게서 볼 수 있네…”라는 시를 지어 반계의 학문을 찬양한 다산 정약용도 반계처럼 존숭한 선학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학파가 다르던 연암 박지원도 ‘허생전’에서 세상을 건질 대표적 인물로 반계를 거론했던 점으로 보면 그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반계와 동시대의 인물로 ‘반계수록’을 읽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학자로는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과 그의 뛰어난 제자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1665~1742)이었다. 재야 학자로서 학덕으로 추앙받아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분이 윤증이고, 학문적 역량으로 천거받아 은일 승지에까지 오른 분이 양득중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가 최초로 ‘반계수록’의 진가를 알아주어 끝내는 세상에 공간(公刊)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윤증은 반계보다 7세 연하로, 83세이던 1711년에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동받고 책의 발문을 썼으니 반계가 타계한 38년 뒤의 일이었다.

“‘수록’이라는 책은 고 처사(處士) 유형원군이 지은 책이다. 그 글을 읽어보면 그 규모의 큼과 재식(才識)의 높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이 있는 사람이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그대가 저술했던 공로는 그때에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불멸의 저서가 될 것을 이미 윤증은 예언하고 있었다. 활용할 임자만 만나면 그 책은 천하국가를 다스릴 훌륭한 저서라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윤증에게서 책을 빌려 읽어본 제자 양득중은 더 감탄한 나머지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양득중의 상소가 있기 4년 전에 약산 오광운(吳光運)은 반계수록의 서문을 지은 바 있고 그의 일대기인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1746년에는 홍계희(洪啓禧)가 반계선생전을 지어 그 공덕을 상세히 나열하기도 하였다. 오광운은 “우리나라 같은 조그마한 나라를 위해서 설계했지만 그 범위가 넓고 커서 실제로 천하 만세에 유용한 책이다”라고 찬양하였다. 홍계희는 경세학이야 말할 것 없지만 반계는 성리학에도 밝아 경세학에 근본이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반계학문의 충실한 후계자는 누가 뭐라 해도 성호 이익이다. 성호는 나라를 다스리면서 당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으로 역사 이래 두 사람을 꼽는다면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이라고 확언을 했다. 세상을 경륜할 능력의 소유자도 율곡과 반계를 꼽은 성호의 주장은 옳았다. 그래서 성호는 “조선을 세운 이래로 세상을 경륜할 인재로 말하면 모두가 반계를 첫머리로 꼽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조선 말기의 해사(海史) 홍한주(洪翰周)라는 선비는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조선 500년 동안 가치 높은 책으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허준의 ‘동의보감’, 반계의 ‘반계수록’ 및 이만운의 ‘문헌비고’ 등 네 종류를 지목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경륜할 책으로 그 역량과 경륜은 비록 천백년 뒤라도 종당에는 실행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현실적 타당성을 지녔고, 실제 일에서 반드시 실천할 논리를 지닌 경세서라고 평했다.

# 반계의 사상과 정책

근래에 발견된 반계의 논문으로 ‘정교(政敎)’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반계가 마셨던 샘물. 지금도 마르지 않고 물이 샘솟고 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치를 잘 해도 헛된 일이 되고 만다”라고 하여 통치원리로 토지의 공유와 인재발탁의 방법으로 공변된 천거제도 활용을 강조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토지 공개념과 선거제도를 통한 인재의 등용이니 얼마나 탁견의 예언인가. 대단한 발상이었다.

“토지 공개념이 제대로 실행되면 모든 제도가 바르게 된다. 빈부가 저절로 균등해지고 분배가 저절로 확정되고 호구도 저절로 밝혀지고 군대도 저절로 정돈되어지니 이렇게 한 뒤라야만 백성을 교화하는 정책이 정해질 수 있다”라고 하여 통치 원리가 어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추천제도가 없이 글짓기나 경전 암송하는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뽑는 일 때문에 중세의 긴 밤이 계속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수록’ 이외에도 반계는 한우충동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기총론’, ‘논학물리’, ‘동사강목조례’, ‘군현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다행히 근래에 여기저기서 새로운 저서들이 나타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특히 ‘병서’, ‘음양율려’, ‘성문(星文)’, ‘지리’ 등의 저서가 아직 전해지지 못함은 마음 아픈 일이다.

# 묘소를 찾아서

반계의 생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릉동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반계서당 아니고는 오직 그의 묘소가 유일한 유적지로 전한다. 1673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반계. 처음에는 반계서당 뒤편에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바로 그해에 아버지의 묘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당시로는 경기도 죽산현 죽산읍 북쪽 15리 지점인 용천리 정배산 기슭이었다.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인 듯 반계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묘소 아래에 묻혀있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의 산등성이에 편안히 누워계신다.

설날 며칠 전, 찬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처음으로 찾아간 역사의 유적지 반계 묘소는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어 산길을 헤매야했으니 힘이 들었다. 조그만 묘에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나, 오래된 빗돌에 문인석이 우람하게 지키고 있어 그래도 덜 서운했다. ‘유명조선국 진사증집의겸진선 반계유선생형원지묘(有名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라는 비의 전면 글씨에 그의 간단한 일대기를 적은 뒷면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홍계희 작품이었다. 묘를 쓴 100년 다 되는 1768년에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라는 분이 평소에 반계를 사모하던 터여서 부임하자마자 글을 지어 묘소에서 제를 올리고 여러 선비들의 도움을 받아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2년 뒤인 1770년에는 ‘수록’의 공간과 함께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높은 벼슬의 증직을 내렸으나 이미 세워놓은 비여서 예전의 벼슬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숙부인에 증직된 부인 풍산심씨와 합장으로 금년까지 324년 동안 반계는 묘안에서 눈을 감고 ‘반계수록’에 담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가 실현되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누워 계실 것이다.

반계 유형원, 그가 누구인가. 공리공론의 관념론에 사로잡혀 공언(空言)만 판치던 세상, 문약(文弱)하기 이를 데 없어 끝내 삼전도에서 인조대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던 치욕의 나라, 그런 나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고 변혁시키려던 꿈을 품었다.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 혼이 지금도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데, 그런 위대한 선구적 학자의 묘소가 그렇게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오호통재로다.

위대한 계승자 성호는 반계를 평했다. “반계선생은 호걸의 선비였다. 학문은 천인(天人)을 꿰뚫고 도(道)는 온 인류를 포용하고 있다.… 정치의 실무를 알게 해주는 요결(要訣)이며… 그 강령(綱領)의 웅장함과 절목(節目)의 치밀함은 읽는 이들이 절로 알리라”는 대찬을 바치고 있다.

그렇다. 우리도 그 웅대한 뜻을 따르자. 그래서 부국강병의 길을 열고 남과 북을 통일하고 동과 서도 합해지는 위대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하리라.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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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2. 12. 경향신문) 유형원 ‘반계집’ 필사본 발굴·공개 
 

이름만 전해오던 반계 유형원(1622~73)의 시문집 ‘반계집’의 필사본 일부가 발견됐다.

실학의 창시자인 반계의 저술은 각종 제도개혁안을 담아 실학사상의 토대를 놓은 명저 ‘반계수록’ 외에도 시와 산문 등을 실은 ‘반계집’도 있었으나 실전돼 학계를 안타깝게 해왔다.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대동문화연구원장)는 11일 “‘반계집’의 일부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발굴, 한국한문학회 학술대회에서 공개한 데 이어 조만간 출간될 한문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하겠다”며 “‘반계집’의 잃어버린 일부라는 뜻에서 필사본에 ‘반계일고’란 명칭을 붙여 그 내용을 고찰했다”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반계일고’가 그동안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반계의 사상과 학문 세계는 물론 문학적 성취, 내면세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다. ‘반계일고’는 필사본 46장으로 묶여진 상태로 마음과 몸을 가다듬기 위한 경구들, 169수의 시, ‘和歸去來辭(화귀거래사)’ ‘書隨錄後(서수록후)’ ‘東國文後序(동국문후서)’ 등 3편의 산문 등으로 구성됐다.

시 중에는 20세에 쓴 잠언인 ‘四箴(사잠)’, 학문의 방향성을 독백으로 표현하고 이상적 인간형으로 이황을 설정한 ‘感懷(감회)’ 3수, 호남지방을 5언절구로 표현한 ‘又和朴道一(우화박도일)’ 등이 있다. 임교수는 “시는 청년기~말년까지 창작 시대순으로 배열됐다”며 “반계의 문학적 소양은 물론 실학파 문학의 원류를 찾아볼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또 “반계의 시는 ‘시인의 시’가 아니라 ‘학자의 시’”라며 “형식이나 기교보다는 삶에서 겪은 감흥을 실학적 의미를 담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계일고’에는 특히 당시 유행한 시조를 한문으로 옮긴 한시가 ‘번속가’(번俗歌)란 제목 아래 모두 17수 실렸다. 임교수는 “17수중 5수는 현존하는 가집류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편찬연대가 가장 오래된 ‘청구영언’(1728년)보다도 앞선다는 점에서 국문학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유형원이 낙향해 ‘반계수록’ 을 완성한 전북 부안의 반계 유허지.
 

산문중 ‘화귀거래사’는 반계가 서울을 떠나 ‘반계수록’을 완성한 전북 부안 우반동으로 떠날 다짐을 한 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한 형식을 띠고 있다. ‘반계수록’에도 실려 있는 ‘서수록후’는 조선의 개혁을 강조한 글이며, ‘동국문후서’는 수백종의 문집들을 검토해 ‘동국문’을 엮은 뒤 붙인 산문이다. 임교수는 ‘반계집’과 관련, “반계의 학문적 계승자인 성호 이익은 (반계수록 외에) ‘반계집’ 6권이 있는데 치신치가(治身治家)로부터 인민애물(仁民愛物)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곡진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밝혔다”면서 “반계 제자인 김서경 또한 반계의 덕행은 ‘문집’(반계집)에 드러나며 사업은 ‘반계수록’에 밝혀져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반계일고’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로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유형원의 학문과 문학의 연구에 귀중하다”고 말했다. (도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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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과서’의 모범, 『반계수록』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17세기 중, 후반의 시기는 주자성리학이 대세가 되어가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실학을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유형원(柳馨遠 : 1622~ 1673)이다. 유형원은 북인이었던 부친 유흠이 인조대에 광해군의 복 위를 꾀하였다는 혐의에 연루되어 사망하자, 관직에 뜻을 버리고 조상 대대로 하사받은 전북 부안의 우반동을 중심지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의 호 반계는 ‘우반동의 계곡’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

개혁 절실한 현실, 실재 현실에 필요한 정책 제시

안정복은 유형원의 연보에서 ‘선생은 당쟁이 횡행할 때 태어나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저술하기를 즐겼다’고 하여, 유형원이 실학자가 된 것이 당쟁과는 깊은 연관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특히 유형원을 존경하여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 던 분을 손꼽아 봐도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을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하여 왕정(王政)의 시초를 삼으려했다’고 하여 유형원을 탁월한 경세가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형원’하면 떠올리는 개혁가, 실학자의 이미지는 그의 저술 『반계수록』이 담고 있는 토지, 교육, 과거, 관직제도에 이르는 탁월한 개혁안 때문이다. 『반계수록』은 총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치밀하게 사회와 경제 문제를 고민하고 그 대책을 제시한 저자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스스로가 쓴 서문에서 유형원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현실임을 강조하면서,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권1~2는 전제(田制), 권3~4는 전제후록(田制後錄), 권5~6은 전제고설(田制攷說), 권7~8은 전제후고설로, 무엇보다 저자가 토지제도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에서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고 환수할 수 있는 균전제(均田制)의 실시로 자영농 육성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권9~10은 교선지제(敎選之制), 권11~12는 교선지설(敎選之說)로 교육과 과거의 문제점과 그 대책을 담고 있다. 유형원은 과거가 출세의 도구가 되어 선비들이 오직 옛 문구만 모으는 것에만 치중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 대안으로 천거제를 주장하였다.

권13은 임관지제(任官之制), 권14는 임관고설, 권15~16은 직관지제(職官之制), 권17~18은 직관고설로, 관직의 정비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유형원은 관료의 임기제를 철저히 지켜 행정의 실효성을 주장하고, 왕실을 위하여 설치된 많은 관청은 대폭 축소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정책에도 실현되고 있는 ‘작은 정부’의 구상과도 유사하다. 권19는 녹제(祿制), 권20은 녹제고설로 관료의 봉급을 증액시켜 부정이 없도록 하며, 특히 봉급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 하위직 서리에게도 일정한 봉급을 지불하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목을 끈다. 권21에서 권24는 병제 등 국방과 군사제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병농일치의 군사조직과 함께 성지(城池)의 수축과 무기의 개선, 정기적인 군사훈련의 실시 등을 주장하고 있다.

영조 정조 시대에 가치 인정 받고, 실학의 원류가 되다

1670년경에 완성된 『반계수록』은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 까닭으로 처음에는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78년(숙종 4) 유형원과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가 상소문을 올려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1741년(영조 17)에는 승지 양득중이 경연에서 『반계수록』을 강론하자는 요청을 하는 등 꾸준히 『반계수록』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영조 때인 1760년 『반계수록』은 경제에 관련한 탁월한 저술로 인정을 받아 국가에서 3부를 인쇄 간행하였다. 재야 학자의 저술이 사후 100여년 만에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조 역시 『반계수록』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성제(城制)에 관한 이론을 검토한 끝에 『반계수록』에서 수원에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주목하였다. 정조는 ‘1백년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하였다’면서 유형원을 높이 평가하고, 수원성의 건축으로 그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이처럼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활동하였던 시대를 뛰어넘어, 영조와 정조 처럼 현명한 군주의 시대에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다. 또한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의 개혁 사상의 원류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개혁교과서’의 모범으로 그 제목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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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ilis 2014-11-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문당에서 나온 것은 번역본이 아닌 영인본입니다. 여강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1959년 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에서 옮긴 것을 그대로 출판한 것입니다. 남한의 국역본으로는 60년대에 충남대학교에서 나온 것(전4권)이 있습니다. 이 번역본의 성립에 대한 뒷얘기가 많으니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