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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평점 :
역사는 남기는 것이 있다. 하나는 뒤에 남기는 것으로서 인과관계에 의한 역사의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속에 남기는 것으로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기는 정신과 뜻이요. 그 사회와 세상에 남기는 인류 존재의 고갱이다. 아무리 과거의 사실을 해명하는 보존이 잘 된 사료와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뒤에 남긴 것으로 추측하는 인과관계의 찌꺼기일 뿐이다. 진정한 역사는 인간 존재의 깊은 의미를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묻게 될 때 역사란 주어진 사료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정신적 속알을 헤아리는 것이 되고 우리 사회와 세계에 주어진 절대자의 뜻을 읽는 것이 된다.
함석헌 선생님의 전기에서 다석 선생님의 역사 강의는 무척이나 인상 깊고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바로 역사를 듣는 이의 가슴 속에 민족적인 기상과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이며 우리 고난의 역사에서 수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아프고 한스러운 우리 역사에서 가슴에 사무치도록 가야할 방향을 일러주는 역사 수업이야말로 참된 역사 수업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바로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세우는 역사이자 우리 마음과 정신을 더 높게 하고 더 넓게 펼치는 역사를 말한다. 여기 선생님의 말을 조금 인용해보기로 한다.
빈 소리 하지 말고 공상하지 마라. 우리가 받은 유일한 역사적 유산은 이것뿐이다. 못생겼지만 이것뿐인 우리 마음, 우리 정신, 닦으면 얼마든지 닦이고, 키우기만 하면 곧 크는 마음, 그 대신 없다 하면 아무것도 없다. 5천 년인지 6천 년인지 모르고, 세계 몇 나라, 몇 문명인지 모르나, 그것이 흐르다 흐르다 그 결과 이 가엾은 늙은 갈보같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이것이다. 사실 어느 나라 무슨 문화도 복잡한 듯하지만 들추고 보면 수북한 껍질뿐이요, 마지막에 정말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유하는 정신, 이렇게 하느라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 예측에 벗어나게 하셨다.
5천년의 역사동안 한 번도 우리의 기상을 한껏 펼쳐보지 못하고 수많은 침입과 억압 속에 무수한 좌절과 고통만이 수많은 지층으로 쌓이고 쌓여서 하늘까지 닿은 민족, 바로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그는 승화시켜낸다. 세계사의 하수구인 우리 역사가 있기에 침입자들이 즐거움의 궁전에서 놀 수 있게 되고, 이 하수구가 있기에 그들의 편한 생활 가운데 나오는 보기 싫은 것들을 모두 받아주고 처리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드르의 살찐 육체와 어긋난 욕망의 문명을 뒷받침해주고 양분을 제공해주는 것도 또한 이 하수구가 아닌가 하고 선생님은 말한다.
'뜻'은 곧 씨알인 민중을 뜻한다.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억압 속에서도 면면히 그 생존을 지켜나가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그들이야말로 우리 고난의 십자가를 두 어깨에 묵묵히 지고 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제 36년의 통치기간에도 우리 조국의 국권이 사라졌음에도 다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정신을 가지고 조국의 언어를 사용하며 조국의 뜻을 이어갔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일제에 빌붙어 자신의 영달을 꿈꾸었던, 조국의 정신을 버렸던 자들이 아니다.
'뜻'은 곧 민족 정신의 바탕을 뜻한다.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위험과 격랑의 파도에 휩쓸릴 때에도 그 마음 속에는 항상 외부자를 수용하는 마음을 품었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품으려 했던 우리들의 인과 겸손함을 뜻한다. 한번도 먼저 타국을 침입하여 그들을 노예상태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던 순박했던 하지만 마음만은 웅혼했던 민족정신의 고갱이를 말한다. 비록 역사적으로 한번도 변변히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지만 그렇기에 우리들의 마음의 이상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민족 정신의 노스탤지어다.
'뜻'은 곧 인간 존재의 바탈이자 인간 의식의 궁극적 존재인 절대자의 의지이다. 따라서 우주 본체이며 그것의 움직임의 정해진 방향이다. 모든 고난의 역사는 그것이 주는 교훈이 있다. "간디의 말과 같이 수난은 결코 약한 자의 일이 아니요, 강한 자의 일이다. 자기 안에 보다 더 위대한 힘을 믿는 것이 수난의 도다. 우리 싸움은 불행을 남에게 떠밀자는 싸움이 아니라, 죄악의 결과인 고난을 내 몸에 달게 받음으로써 세계의 생명을 살리자는 일이다. 우리 양심에 준비가 부족할 때까지는 우리는 스스로 약함을 염려하여 겁낼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치고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불붙을 때 현대의 무력 국가들은 결국 한낱 골리앗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생님이 말한 바와 같이 고난의 역사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속에서 절대자를 찾게 만든다. 그것이 고난이 가진 의미자 교훈이다.
역사 서술을 이런 뜻으로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각성의 눈으로 들여다 본 세상은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비록 근 현대사 부분에 와서 동학의 의미라든지(무위당 선생님이 다시 재조명하셨다.) 해방과 남북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해석이 나름대로 수긍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역사를 이렇듯 큰 맥락에서 한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왜 모 신문사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도서 100선에 선정되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곤붕의 이야기 중에 큰 새가 되어 한반도의 역사의 상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역사의 시작과 끝을 한 눈에 쳐다보고 있는 시원하고 웅혼한 느낌을 주었다. 더불어 분노해야 할 곳에서는 가슴을 치게 하고 슬픈 곳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그 분노와 슬픔 속에 담겨진 깊은 뜻에는 말없이 수긍하게 하는 정신적 깊이를 가진 서술에 우리 나라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책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