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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방병선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2월
평점 :
조선시대 도자사는 대략적이고 복잡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도자기는 수 백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실물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박물관을 찾거나 개인 수장가를 찾지 않으면 실제 그들이 사용하다 전세된 물건을 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도자사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면 인용된 기물과 사진은 어딜 찾아봐도 나오는 기물이라서 새로운 도자양식에 의한 것이나 새로운 기법이 사용된 기물을 만나게 되는 날은 특별한 날이다. 나아가 도자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를 얻게 되어도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이미 빌려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구입해서 다시 읽으려고 한 의도가 있다. 기록물로서 왕조실록이 가지는 중요성과 신뢰성 때문이고 또 그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첨단 공예품이었던 도자에 대한 수요층이었던 왕실의 기호와 그 전용공급처였던 분원의 설치와 변화과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왕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도자기 안료구입, 중국도자기의 사신을 통한 영향 그리고 그에 대응한 한국도자의 변천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의 백분장사기의 제작과 그 방식 그리고 다양한 기법의 사용과 제작가마의 이름을 쓰게 한 점. 그리고 그 자기의 사용처 등을 명시하게 된 점 나아가 세종 때의 중국 선덕황제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그 때 제작된 청화백자의 쑤마리청의 빛깔과 모습의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회화기법 또한 선덕년제 때의 영향으로 자기의 공간을 가득 채운 회화가 시문된 점과 용의 형태와 종속문양 또한 독자성을 드러내지 않았던 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물이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상감백자는 연질백자 형태의 사진이 실려 있고 유약색과 빙렬의 유무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사진 기물과 비교하면 빙렬이 나타나고 경질백자를 사용한 것과도 비교해볼 수 있었다. 조선산 토청의 사용에 대한 점과 그 기물도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연산군 때의 청화백자매조문항아리를 통해 그 빛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조선 청화안료의 발견을 위해 노력한 흔적을 왕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거칠 때의 국가의 상황에 따른 청화백자 제작의 어려움으로 그 기물이 전하는 바가 적고 또 철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이 왕조실록에 기록된 점을 통해 도자 제작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항아리의 굽에 새겨진 한글의 사용과 회화의 변화 과정을 통해 그리고 굽과 항아리 구연부의 형태변화를 통해 도자기의 문화적 지형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란 이후 상공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화는 더욱 도자기법과 형태의 변화를 초래했고 이러한 사실 역시 왕조실록을 통해 조금은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분원'의 설치와 그로 인한 도자의 제작은 이후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
청화백자 묘지석의 제작과 다양한 형태의 제기 제작, 철화를 사용한 다양한 도자기의 제작 그리고 달항아리의 제작 등은 조선도자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숙종, 영, 정조 시대의 도래는 도자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기간이었다. 전문화원을 동원한 도자기 회화의 실현은 한국적이고 예술성 높은 18세기 도자기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었던 기간이었다.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들 그리고 갑번을 사용한 기물들 그러나 정조는 검소한 조선왕실의 전통을 강조하였고 이는 상업 발달에 따른 도자제작의 시대적 흐름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순조 때에 잠시 활성화되는 듯 하다가 도자산업은 쇠퇴를 맞게 된다.
비록 도자기 제작 장인의 땀과 열정 그리고 예술성을 알 수 없고 또 시장의 수요 또한 알 수 없지만 왕조를 통해 도자기법의 변화와 제작의 변화 환경의 변화 등을 알 수 있었던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