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보니 유효기간이 다 된 계란 4개가 생각났다. 아차. 한꺼번에 4개를 다 부쳐 먹을 수도 없고 어쩌지. 하다가 계란말이를 해먹자 했다. 계란 4개를 톡톡 깨어 노른자와 흰자를 설렁설렁 섞고 소금을 뿌리고 나서는 속으로 넣을 파를 쏭쏭 썰었다. 그리고 후라이팬을 달군 후 계란을 후욱 부어 살살 저어주며 익히고 말고 파를 뿌리고... 하하. 그렇게 해서 계란말이 일곱 덩이가 완성되었다. 아래에 3개밖에 없는 건... 4개가 내 뱃속으로 갔기 때문이죠 흠흠.
그깟 계란말이 하나 한 거 가지고 무슨 사진을 올리고 설명을 하고 난리란 말이냐. 비웃음을 당해도 싸지만, 오늘 아침 이걸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비연. 이제 살림이란 걸 하는구나. 뒤늦은 나이에 독립이란 걸 한 게 2018년 7월이었다. 한참 전에 마련한 집에 계속 전세를 두면서도 나가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이 때 불현듯, 아 나가 살아야겠다 라는 마음이 솟구치는 바람에 그냥 불쑥 해버린 독립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닦고 쓸고.. 청소를 거의 3일에 한번씩 하고 장도 모자랄까봐 꾸역꾸역 사서 쟁이고 요리도 막 요리책을 보면서 뭔가 그럴싸한 걸 만들려고 애쓰고. 사실 이건 집이 아니라 거의 노동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집이 내 집 같은 느낌이 없어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수십 년 간 부모님 집에서 소공녀처럼, 해주는 밥 먹고 깨끗이 치워진 방에 들어가고 설겆이며 빨래며 엄마한테 다 미루고 살다가 (핑계같지만.. 엄마는 내가 살림에 관여하는 걸 절대 못하게 하셨다. 결혼하면 다 하게 된다고. 미리 고생하지 말라고. 어머니. 결국 결혼도 안할 걸 그냥 할 걸 그랬죠.. 흠냐) 독립이란 걸 해서 모든 걸 내가 다 하는 공간에 와 있다 보니 전부 내게는 뭔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던 거다.
이젠, 청소도 대충 하고 가끔 하고 (혼자 사는데 먼지는 왜 날까) 밥도 있는 재료로 대충 해서 먹게 되었다. 뭔가 좀 흐트러져 있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그래, 이제 이 집이 내가 '사는' 공간이 된 모양이다. 어느날 문득 일어나서 남은 계란으로 뭘 할까 하다가 후르륵 계란말이를 하는 비연이, 그래서 참 정감있다 싶은 거다. 계란말이 하나에 엄청 오바하는 아침이기도 하네. 크.
한 해가 다 갔다. 어떤 사람들은 2020년은 없애버려. 라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없애고 싶은 해가 한두 해인가. 내 인생에서 좀 뺴버리고 싶은 해는 숱하게 많다. 오히려 2020년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라서 기억해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질병과 두려움과 제약 속에서 나를 넘어 남을 생각하고 배려를 하고자 했던 한 해로.
올해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나 싶다.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고객 갑질에 마음이 너무나 멍이 들어서, 그것도 뭔가 좀 수준이 되는 갑질이 아니라 저열한 갑질을 몇 년 당하다보니 이러다 내가 미치겠다 라는 마음에 그냥 미련없이 그만두었다. 남들은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냐 좀만 버텨라 했지만 난 옮긴 이 곳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돈은 별로 안 되고 신경은 많이 쓰이는 일이지만, 내 적성엔 맞기도 하고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수많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나눠주는 재미로 지내고 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제로에 수렴한다는 게, 문득문득 놀랍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온 몸이 아프고 피곤하고 쓰러질 것 같던 나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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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좀 생겼다고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책읽기는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책을 많이 사대기는 했다. 읽혀지지 못한 채 저렇게 계속 나를 째리는 책(무더기)을 보며, 내년엔 책을 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책장을 더 사야지 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제정신인가 싶지만.
O 마음에 남는 글귀
예전에 페이퍼에도 썼었지만,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다크룸>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책이었고, 특히 마지막 문구는 계속 기억에 남아 내 생각의 향방을 좌우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밀크맨>의 마지막 글귀. 묘하게 마음에 남는다.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나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p623)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p492)
O 페미니즘 책
여성주의 책 함꼐 읽기를 겨우겨우 따라가면서도 올해는 읽은 책들에서 많은 영감과 생각을 얻었다. 혼자 읽는다면 절대 다 끝내지 못했을 책들을 어쨌든 끝내는 나를 보며, 함꼐 읽기라는 것의 소중함과 힘을 느꼈다.
O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에서 소설은 읽은 게 손에 꼽을 정도다. 대신에 자기 이야기를 쓴 책, 하지만 허접한 일상생활 얘기로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대신 자신의 분야에서 뭔가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내게 훅 다가왔다. 읽는 내내, 이것이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기쁨이구나 라고 느꼈었다.
O 새로운 발견들
원래 좋아했던 작가들, 샤론 볼턴, 리베카 솔닛, 마이클 코넬리, 미야베 미유키, 요 네스뵈 등의 책이야 나오는 대로 잡아서 읽고 있지만, 올해 새로 내 머리에 각인된 작가들이 몇 있다. 도나토 카리시, 할레드 호세이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마여 안젤루, 베르나르 미니에. 그리고 아마 지금 읽고 있는 콜슨 화이트헤드도 그 대열에 합류할 것 같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내일까지 읽을 책은 <니클의 소년들>. 역시나 소설로 시작하여 소설로 끝내는 비연. 둘다 가슴아픈 소설이라는 것도 공통적일까.
얘기가 길었다. 흠냐.
올해도 알라딘과 함께 해서 즐거웠던 한 해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보면 너도나도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올리는 분들이 많아서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것마냥 취해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여전히 이 곳의 일원인 내게 힘을 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내년, 신축년. 여전히 책 많이 읽고 글 많이 올리고 모두가 건강한 알라디너들이길. 그 속에서 나도 열심히 읽고 쓰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올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복복복 왕창 받으시길.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