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 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 과연 나는 찾으로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이 물건이라면 포기하겠지만 사람이라면 아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100% 동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따라오지 않겠다면 어떡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있긴 한걸까.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위의 말은 또 어떤가. 맨처음 했던 가정에 대입해보자. 이번엔 반대로 내가 남겨진 대상이라고 해보자. 홀로 낯선 곳에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 믿는 그 사람이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끝끝내 나를 찾으러 올 것인가. 그 믿음이 흔들린다면 세상이 흔들린 거다. 그러나 믿는다. 누군가 흔들리는 나의 손을 잡아줄 것임을. 나또한 흔들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을 것임을.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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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는 불교의 나라다. 이곳의 스님들은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놓기를 가장 큰 보시로 여긴다. 여기서 다리놓기란 서로간의 소통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의미라 여겨진다. 이러한 다리놓기는 비단 마을과 마을 뿐만의 일은 아니다.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도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것은 나를 위한 가장 큰 보시일 것이다.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면 항상 저편에 닿아야 한다. 저 편에 닿지 못하면 다리는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우리는 타인과 다리 놓기를 힘들어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다리를 놓기보다 도랑을 파기 일쑤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영혼이 건강한지 자꾸 물어본다. 인간은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다리를 놓기보다 깊은 도랑을 파는 일이 허다하다. 날선 흉기로 돌변하는 말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침묵을 배운다. 침묵하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말, 누군가의 밤잠을 설치게 한 말, 허투루 내뱉은 말이 그들의 하루를 망치지 않았나 더듬어본다. 명상은 어쩌면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책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차 이야기 1> 165쪽)

 

섬으로 존재하는 우리. 그리고 그 섬을 잇는 다리들. 그러나 온전한 다리는 드물다. 언제나 허물어지고 부서지고 쪼개진다. 다시 보수하고 잇고 조여매지만 다리는 흔들리고 뒤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편에 닿고 싶은 섬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도 이렇게 다리를 놓고자 침묵의 소리로나마 다가설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부디 저편에 생채기를 내지않고 무사히 닿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와 너 사이에 언제 휩쓸려갈지 모를 섶다리라도 놓여지기를 소망한다. 그건 당신의 마음에 한번이라도 내가 들어갔음을 의미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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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이 방에 있으면 오물이 되지만, 밭에 있으면 거름이 된다.- 법륜 스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똥은 물로 씻어내려야 할 오물이다. 강아지똥은 공원에서 벌금을 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치워야만 한다. 그렇게 똥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하지만 똥은 밭으로 가면 훌륭한 거름이 된다. 혹시 나를 인상쓰게 만든 그 사람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보석처럼 훌륭하게 빛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타인을 함부로 대해선 안될 일이다. 누구나가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곳, 즉 적소에 쓰여지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특급 인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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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SBS TV 스페셜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에서 고양 원더스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성근 감독을 다루었다. 만년 꼴찌팀을 우승팀으로 바꾸어 놓았던 그의 리더십이 주된 내용이다. 1%의 희망이라도 찾아내고, 절대 선수들을 버리지 않는 마음.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는 잠자리의 눈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별명 야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승리 야구가 재미없다고 비판한다. 벌떼 같이 투수들을 바꾸고 희생번트가 많은 경기는 지루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승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하일성씨가 "김성근식 야구가 싫다면 그의 야구를 이기면 돼요. 간단한 거죠."라고 표현한 것은 그야말로 한국야구가 김성근의 색깔을 닮아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김성근 감독의 어떤 점이 그의 야구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김성근 감독은 "살기위해 일하면 안되요. 일하기 위해 살아야죠"라고 말한다. 아뿔싸. 그가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의 열정은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방망이를 휘둘러대다 보면 어느새 그것에 중독되어 버린다. 50이 한계였던 사람이 100으로 그 한계치를 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 과정에 중독되어 버리지 않을까. 김성근 감독은 "사람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요. 그래서 자기 한계를 만들죠. 그 한계 안에 있으면 편하니까"라고 말한다. 게으름을 거부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찌보면 희열을 맛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멘토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정과 끈근함이 그의 팀을 강팀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팀이 꼭 강팀이 되어서 우승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더라도 재미있는 야구를 해선 안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아마추어에겐 어떨지 몰라도 프로의 세계에선 절대 통할 수 없는 일일까. 만약 팬들이 팀의 우승보다도 야구의 재미-물론 승리가 주는 재미도 크지만, 경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있지 않겠는가-에 손을 들어준다면 꼴찌라도 박수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마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미쳐야 미친다>를 모토로 삼고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얼토당토 않은 일일 것이다. 그정도 까진 아니더라도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죽어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시간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리더론이 나의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면서도 섬뜩하도록 경계가 되는 것은 최근 읽은 <피로 사회>라는 책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서는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발걸음보다는 잠깐의 멈춤, 그리고 돌아봄, 명상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는 일은 정말로 피곤한 인생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멋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실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라는 시스템에 기름칠을 해준 것은 아닐까. 모두가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물론 쉬엄쉬엄 살아간다는 것은 먹고 살만했을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김성근 감독처럼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 그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야구를 못해도 그냥 즐길 수는 없는 것일까. 메이저가 되려고 내 온몸을 불사르며 살아가는 길과 반대로 마이너로 살면서도 유쾌하게 살 수 있다면(물론 마이너가 유쾌하게 살아가는 일은 현실에서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지 또한 누가 알겠는가),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정상-리더에 너무 목말라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김성근 감독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본다. 목표를 향해 정찰하듯 똑바로 나아가기 보단 때론 해찰을 하며 비틀비틀 걷는 것도 행복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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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새로운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엔터테이너로 성공한다는 뒷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라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거나 기획사 연습생으로 몇년씩 땀을 흘려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베짱이가 되려고 해도 그냥 놀고 먹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인 것이다. 휴일도 없는 연습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나를 불사르는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찌 연예계만의 일일 것인가. 정치인들도 경제인들도 학자들도 성공을 위해서는 쉼없이 달려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또 어떤가. 살기 위해서, 올라서기 위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 조금씩 나를 잃어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함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덕목인 셈이다.

 

아~,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 것인가. 게으름도 부리지 못하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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