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49쪽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빨리 빨리, 뛰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또다른 목적지가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건 어떨까. 일단 멈춤.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이다. 흥겹게. 뭐 급하지만 않는다면 춤을 추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난 왜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걸까'하고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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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페셜 짝 3부는 부부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 다큐였다. 연애는 꿈이요 결혼은 실재라는 말로 흔히들 결혼생활의 팍팍함을 말하곤 한다. 실제 대한민국에서는 1시간에 14쌍의 부부가 이혼도장을 찍는다고 한다. 결혼 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 후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다큐에서는 정서적,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좀비형으로 변해갈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많은 부부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좀비처럼 하루 온종일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을 정도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손길이 스치는 것에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는 모습 속에서 남남 보다 더 못할 듯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 모양이 됐단 말인가. 

수십년을 함께 산 노부부들이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꿈에서 깨란 소리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면 환경부터가 변한다. 그렇게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애시절때 꿈꾸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좀비형 부부의 대부분은 환상과 현실의 격차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묵묵히 고통을 이겨낸다. 행복한 가정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부부가 된 순간, 환경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배우자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한다. 전문가들은 그래야지만 행복이 저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변화의 중심에 자기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가족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같다. 다큐에서 보여진 나름 행복해 보이는 부부(아내는 밸리댄스 전문가, 남편은 은행 부지점장)는 다소 이기적이라 보여질 만큼 자아 완성을 첫번째로 두었다. 그리고 그 완성의 과정에서 힘든 일에 부닥칠 때면 배우자에게 서로 기대며 도움을 주었다. 자기가 행복할 때 가족도 행복하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길에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윤활유가 되어주는 상대가 바로 짝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만 짝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내 곁에 있는 짝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혹시나 짝에게 희생을 강요하며-자발적 희생까지 포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그토록 사랑하는 짝과 함께 있으니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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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못할 땐 위치를 바꾸면 벗어날 수 있다. - 영화 '겟 썸' 중 

영화 '겟 썸'은 격투기를 소재로 한 성장영화다. 아버지의 음주운전사고를 방치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면서 가족과 화해하고, 사랑을 이해하며 성숙해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위기탈출법에 있었다. 마운트와 같은 상황에서 옴짝달싹 못할 때 스승은 위치를 바꾸어야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누워서 제압당하던 몸을 180도 뒤집어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누운 상태에서 팔을 밖으로 빼내고 발을 상대방에게 걸어둘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좌절의 상황에서도 이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위치를 바꾸는 기술은 우리의 사고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역지사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좌절에서 탈출하는 것도 물리적 외부환경 보다는 정신적 위치의 자리바꿈에서 더욱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머니와 화해하고 여친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탈출구는 버스 속 유리를 깨는 망치를 통해 유리창을 깨뜨리기 보다는 반대편 창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영화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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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에 가서 주례사를 귀담아 듣는 일은 별로 없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결혼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례는 여전히 흘려듣기 십상이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지난 달 지인의 결혼식장에 갔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밥이나 먹고 수다나 떨고 오자는... 그런데 주례를 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 여기 오신 하객분들은 신랑.신부를 축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오히려 신랑.신부를 갈라놓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귀가 솔깃했다. 

목사님의 말씀은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혼 초기에 상대방을 휘어잡아야 한다고 충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남들이 잘 사는 것을 두눈 뜨고 보기에는 아니꼬와서,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이 남편을 또는 아내를 손아귀에 휘어잡기 위해 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신혼부부를 유혹한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은 오히려 그 반대였을 때, 즉 서로 양보하고 배려했을 때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쓰레기 없는 국토’를 만들겠다며 ‘정토회’라는 실천공동체를 만들고 탈북자를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던 법륜 스님의 2001년도 주례법문도 이와 비슷한 뜻이 담겨 있다.

전략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 볼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 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 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 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 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 주고 70% 덕 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 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 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 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100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후략 


덕 보려는 마음, 내 입맛에 맞추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정말 결혼생활은 행복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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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에 대한 공포가 떠돌고 있다. 어떻게 전염이 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데서 그 공포감은 배가 된다. 구제역으로 인해 도살된 소와 돼지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들다. 구제역에 걸린 소, 돼지 뿐만 아니라 근경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소와 돼지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뉴스 화면 속에 비쳐진 도살된 소와 돼지는 그저 고깃덩어리로만 보인다. 더군다나 농장에서 길러진 소와 돼지는 일종의 상품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는 소와 돼지가 도살되는 것으로 인해 입게되는 경제적 손실만이 숫자로 어른거릴 지도 모른다.  

그런데, 농가 한 곳 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와 돼지는 피 흘리는 생명체가 된다. 적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십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간 그들은 가족과 다름 없다.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소처럼 말이다.  

다른 농가들과 다름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살고 있는 집. 7년이 넘게 함께 해 온 소가 한 마리 있다. 그런데 인근 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할아버지 집까지는 3킬로미터 정도 거리. 도살 될 것인지, 그냥 넘어갈 것인지 경계선에 있다. 하루하루가 할아버지에겐 1년 2년 처럼 길게 느껴진다. 옆에 농가들 소와 돼지는 살처분 됐지만 운좋게도 할아버지 소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농사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람들이 몰려온다. 실수로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에 가 치료를 하고 낫기 위해 애쓰면서, 왜 동물들은 이렇게 다 죽여야만 하느냐" 

수백만 수천만 마리(대한민국에서만)를 헤아리는 현대소비사회의 가축들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똑같다. 이들이 공산품 취급을 받지않고 생명체로서 대우 받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아마도 치료제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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