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저녁 11시 SBS 스페셜<유언...>을 보았다.

감당못할 좌절감에 온 몸을 불살러 죽으려 했던 권투선수가 극적으로 살아나, 도장을 꾸려가며 못 다 이룬 세계 챔프의 꿈을 제자들을 통해 이루려 하는 모습은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그의 유언 중에선 자신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진짜 환생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세에도 당신을 만나겠다. 비록 당신이 나를 거절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찾아서 이생에서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소개된 분은 루게릭 병에 걸린 아주머니. 남편은 암 투병중에도 자신을 간호하다 결국 1년전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딸이 자신을 거들고 있다. 몸이 점차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숨조차 쉴 수 없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녀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을때 딸들에게 전하고픈 글들을 남겨놓았다. 이렇게 투병에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도 잊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글은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일반 사람들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큰 딸의 모습은 감동이다. 특히 작은 딸에게 해준 것보다 자신이 받은 것이 더 많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되새긴다.

당뇨병에 걸린 아내와 암에 걸린 남편의 유언 등등.

<인생 9단>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매년 한번씩 유언을 쓴다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야겠다는 의지를 일깨운다. 이것이야 말로 아마도 방송 제작진이 의도했던 것이었으리라. 난 유언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가지 더 떠오른게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빚. 한없이 일방적으로 퍼주거나 받는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계 속에서도 채무감은 분명 들게된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 채무감을 깊게 느껴야만 하는 사회적 압력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사회적 압력을 떠나 개인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끝없는 채권채무의 사랑이 오간다. 비록 꼭 갚아야 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을지라도, 그건 빚이다. 빚이라고 생각한 순간 관계는 지속된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철저한 냉혈한이던가 세상을 초월한 도인일 것이다.

물론 내 삶이 빚에 얽매여서는 안될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와의 빚잔치가 끝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 청산의 관계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빚의 부담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준 게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플러스 마이너스에 대한 개념없이 항상 마이너스로 생각하는 삶이라면, 즉 난 언제나 채무자임을 자각한다면, 그리고 그 채무를 꼭 당사자에게만 갚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조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편안해지려나. 위의 유언을 남긴 사람들도 채무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눈물이 줄어드려나.

가슴에 빚을 지고 살아보자. 이미 나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 빚을 세상에 조금씩 조금씩 갚아가보도록 해보자. 한없이 가벼워질 몸과 마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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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도 현실은 다르지 않느냐고. 물론 다르다. 그러니 선택이랄 수밖에. 난 적어도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새장 밖은 불확실하여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백전백패의 무모함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새장 밖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새장 밖의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새장 안에서는 도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 한비야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새장 안에선 얼마나 평안한가? 누군가 시간이 되면 먹이를 가져다 줄 것이며, 맹수로부터의 접근은 일체 불가능한 곳. 그래서 평화롭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곳. 비록 날개짓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파란 창공을 날지 못하지만 애시당초 그것을, 또 그곳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은 망상일 뿐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소리친다. 새장 밖으로 나와보라고. 그곳이 때론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야만의 땅일지언정 한번 크게 날아보라고. 두려움에 떨었던 바로 그곳이 진정한 행복이 숨쉬는 곳이라고.

그러나 어찌하랴. 새장 속의 새들은 당장 눈 앞의 먹이가 걱정이다. 그냥 주어진 일만, 그러니까 잠시 노래를 불러준다거나 살짝 뛰어다니는 것만 잘하면 착착 주어지는 먹이를, 새장 밖에선 과연 어떻게 구할수 있단 말인가? 걱정이 태산이다. 무척 두렵다. 가슴이 뛰는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걱정은 하지 않는 삶을 저버리고, 궂이 열어젖힐 필요도 없는 열려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야만 할까?

새장 속에 갖힌 새들에게 한비야는 말한다. 새장 밖의 삶이 괴로워 혼자 감당하기에는 억울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에 겨워 말한다. 충만한 행복과 견딜수 없는 열정을 말한다. 분명 불확실하고 무모하고 백전백패의 가능성이 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니라고... 그러니 인생에 한번쯤이라도 가슴이 뛰는 삶을 위해 새장 밖으로 뛰쳐 나오라고 말이다.

그래, 나가긴 나가고 싶은데... 글쎄, 난 무엇에 가슴이 뛰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새장 속의 먹이가 열정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나 보다. 망각으로 빠져들게 했나보다. 새장 밖으로 뛰어나가기 전 먼저 내 가슴부터 점검해야 하려나, 아니면 일단 밖으로 뛰어나가면 가슴 뛰는 옛 기억을 되찾을수 있으려나? 한비야를 만나봐야겠다.(물론 책으로뿐이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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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최근 시집 <유목과 은둔>과 관련한 인터뷰를 듣다 감정의 혼돈에 휘말려 괴로웠습니다. 90년대 초반 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에, 자신의 생명사상을 근거로 분신을 만류해오던 목소리가 가져오던 혼돈과는 사뭇 다릅니다. 지금의 혼돈이 달리 다가온 것은 어찌 보면 저도 이제 나이를 점점 먹어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최근 '인생 뭐 별거있냐' 라는 우스개 소리가 삶의 진심을 담아낸듯 여겨지고 있는 와중에 시인의 은근살짝 사는 것이라는 말은 인생 뭐 별거없다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허망함이 잔뜩 가슴속에 스며드는 찰나에 인터뷰를 하던 탁석산 씨가 멋진 해석을 하는군요. 젊었을 적 치열하게 살았기에 나이들어 느슨하고 풀어헤쳐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말을 계속 듣다보니 그의 젊었을 적 고생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를 짐작케합니다. 외롭고 회한 가득한 긴 투쟁의 세월을 건너다 보니 어느새 백발...  삶이 얼마나 허망했을 것인지 말이죠. 전사로서라기 보다는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을뿐이라는 그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그의 외로움과 회한을 짙게 드리우게 만듭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꼭 그런 일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보다는 나에 대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아주 작은 욕심으로 느껴집니다. 물론 그 나의 삶이 사회와 따로 떨어져 별개의 것으로 이루어질 순 없을테지만 말이죠.

그래서 저도 혼돈된 마음을 어느 정도 씻어냅니다. 생명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라는 시인의 말에 동감하며, 그가 죽음의 근처에서 찬란한 생명의 꽃을 피워내기를 바랍니다. 그 꽃이 세상을 바꾸는 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꽃으로 피어날 것을 말이죠. 그래서 저도 배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정답이 없듯이, 그리고 그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은근살짝 훔쳐보기를 통해서 진짜 나의 삶을 나의 방식대로 찾아 내멋대로 살아가길 말입니다.

생명있는 것들은 왜 죽는거죠? 라는 시인의 질문이 귓가에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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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0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보았거든요... 클링턴이 나오는가 싶더니...끝나고 김지하 시인이 나오더군요... 그가 한 말 중에서...그 즈음의 나이가 되면...죽는 꿈을 많이 꾼다던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하루살이 2005-04-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물론이고 저도 아직 그런 꿈을 꿀 때는 아니겠죠?
활짝 꽃피는 동산을 거닐고 푸른 하늘을 나는 그런 꿈을 꾸시기를...
 

EBS 에서 방영하고 있는 <지금도 마로니에>라는 프로그램은 60년대초 서울대생 3명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학과의 김중태, 불문학과의 김승옥, 미학과의 김영일(김지하).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인들 천상병, 전혜린, 임권택, 신중현 등이 나오는데, 특히 앞의 세 주인공들을 둘러싼 고뇌와 그들간의 관계가 가슴을 저리게 만들곤한다.

항상 <죽고싶다>라고 소원하던 김지하에게 김승옥은 제발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말한다. 어렸을적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대한 강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김승옥은 진심으로 그가 살아있기를 원했다. 지하는 이 단어를 아마도 가슴 깊숙히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 고향 원주. 이곳에서 그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장일순을 만난다. 밥 한그릇에 담긴 우주와 밥 한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장일순을 뒤로 하고 김지하는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공산주의에 발을 담갔던 아버지는 <나는 실패자였다>라고 토로하고, 김지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외친다. 그리고 다시 원주를 떠나려 역에 도착할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일순이 전해주는 서예 한 점. 화선지를 펼치면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다라고 쓰여 있다. 김지하는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천리를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빨리 가려고 길이 아닌 곳을 가지 않는다. 그것이 길임에 바닥을 기어서라도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흙의 냄새를 맡으며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손과 발이 모두 흙과 함께다. 바닥을 김으로써 흘리는 땀방울이 땅을 적시는 것을 본다. 바닥을 김으로써 거친 숨의 의미를 안다. 바닥을 김으로써 삶의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게 한손 한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어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가리라.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리라. 결코 잘났다고 까치발을 하지 않고, 결코 잘났다고 자동차로 씽씽 달리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리라. 남에게, 세상에게 잘난체 말고, 기어 기어 그렇게 천리를 가리라. 온 생명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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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듣다 문득 깨닫습니다.

공자님 말씀 쭝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는 것이 있답니다.

전 이 문구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것 저것 마구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것]에다가 인생을 집어넣어 봅니다.

인생을 알려고 우리는 얼마나 발버둥칩니까?

그런데 그 아는 것은 실제론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할지도...

그러니 이 짧은 인생, 즐길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즐기는 마음을 갖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땅한 당위로 받아들이는 인생의 즐김이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로 다가서지 않도록.

부디 진정으로 즐겨보도록 한바탕 난장을 꿈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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