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은 “연극의 합창단처럼 2분마다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크게 노래 부르며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인간만은 되지 말자”고 말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학교는 물론 의료집단의 개혁에 큰 공헌을 했다. 그 변혁의 밑바탕엔 바로 다름아닌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해선 일체 생각않고 오직,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력이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로만 그치지 말고 한발자국 떼어보자. 어차피 흘러갈 인생의 조류라면 배 위에서 힘차게 노를 저어볼 일이지 않겠는가. 풍랑에 휩쓸려 난파당하지 않도록, 가보고 싶은 풍경을 둘러볼 수 있도록. 노를 저어야만 배는 나아가지 않겠는가. 비록 배가 꼭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지라도 노 한번 저어보지 못하고 후회하느니, 땀을 흘리고 팔에 근육이 우락부락 붙을 때까지, 햇볕에 검게 그을릴 때까지 저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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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는 보도사진기자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신 전쟁터에서 항상 군인들보다 더 가까이 현장에 접근했다. 그의 기자정신으로 '카파이즘'이라는 말이 탄생되기도 했다. 그는 마흔 한 살의 젊은 나이에 베트남에서 취재를 하다 지뢰를 밟고 숨졌다.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하면서 또한 그가 종군기자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에서 총탄을 맞아 쓰러지는 병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 덕분이다. 도저히 인위적인 설정으로는 불가능한 숨막히는 순간을 담아냈다.
또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사진이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담은 것으로 핀트가 맞지 않은 사진이다. 하지만 전쟁의 절박함을 오히려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그 전

후사정을 살펴보면 인생이란 참 우연이라는 것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만든다. 노르망디에서 찍은 파카의 사진은 총 106장이었다. 그런데 '라이프' 암실 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소실되고 겨우 10장 정도만 남는다. 이 사진들이 라이프에 실리면서 오히려 빛을 발하게 됐다.

소실된 사진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대 발표되지 못한 96장의 사진 중엔 제대로 포커스가 맞고 구도가 잡힌 사진이 몇 장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잘 나온 사진이 보도자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사진은 흔들리는 촛점의 사진. 그 뒷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순전히 상상을 해본다. 편집자는 무척 고민을 했을 것이다. 초점도 맞지 않는 이런 사진을 실어야만 할 것인가. 사진은 실렸다.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이름으로. 사진은 이 제목 하나로 더 큰 힘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인생은 때론 실수가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그의 흔들리는 사진은 목숨을 걸고 찍은 것이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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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6-2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좌절하지 않을랍니다.

하루살이 2007-07-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TL금지...
 

도사가 되고 싶은 청년이 뛰어난 무술을 지닌 스님이 있다는 절을 찾아갔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청년의 정중한 요구에 스님은 수수씨앗을 땅에 하나 파묻더니

"이 씨앗을 하루에 1000번씩 뛰어넘거라" 는 말만 하고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청년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스님을 믿고 1000번씩 열심히 뛰어넘었다.

봄부터 시작한 청년의 뜀박질은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었다.

스님은 청년을 보더니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말하며 총총히 사라졌다. 

청년은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그를 지켜본 다른 사람들은 그의 무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수수는 가을에 3m까지 웃자라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어느새 아무런 도움없이 3m를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높이뛰기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라고 괜히 비꼬고 싶은 심정이다. 정작 이 이야기의 뜻은 높이 뛰었다가 아니라 날마다 1000번을 뛰었다에 있겠지만 말이다.

목표를 정하고 끝까지 정진하는 자세를 잃은지 오래다. 당장 눈앞에 어떤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당장 포기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차츰차츰의 의미보다는 훌쩍훌쩍을 선호하는 세상이다.

10억 모으기 열풍이 한순간 휩쓸고 갔다가 잠잠해지는 것은 그 또한 차츰차츰을 근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련지도 모르겠다. 아마 누군가가 복권 당첨의 비결을 알려준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다. 세상은 그런 걸 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 어떤 것도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 그 속에서 속도는 더욱 광폭해진다.

차츰차츰 이뤄보는 마음을 되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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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3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츰차츰, 조금씩, 보이지 않게, 꾸준히,,, 어려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너무 빨리, 단번에 많은 걸 바라는 데서 문제가 일어나겠지요.^^

하루살이 2007-01-3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벅터벅 걸아갈 길, 축지법을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축지법을 익히려는 수십년의 세월동안 차라리 걸어가는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풍경도 천천히 구경하면서
 



최근 케이블 TV로 재패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푹 빠져 있다. 만화책으로 읽으려다 좀체로 읽지 못하더니만 인연이 닿았는지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게 됐다.

<바람의 검심>은 일본의 근대기, 메이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칼잡이들의 이야기다. 시시오와 켄신이라는 두 칼잡이로 대변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적 낌새를 알아채린 시시오는 오직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한다. 그리고 제국과 맞서기 위해 석유와 같은 자원에 눈을 뜨기도 한다. 다만 오직 약육강식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단 한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시오를 막으려는 반대편에는 켄신이 있다. 한때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그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돌아다니던 전설의 칼잡이. 그리고 다시 스승으로부터 깨달은 것은 생명의 소중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강한 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거나 언제든지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도구적 인생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한자들에게 거름이 되어주고픈 켄신. 그들의 삶도 소중한 것임을, 그리고 그 약한 힘들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큰 힘이란 강하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삶에 대한 격려를 일으켜 준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서구 열강의 침입과 맞물려 벌어지는 두 사무라이의 대결이 지금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최근의 FTA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영화배우 이준기에게 "자신이 없냐"라고 물었던 그 순간에 갑자기 시시오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경쟁에서 이겨라. 세상 앞에 당당히 맞서라. 실력을 키워라. 그렇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보다 강한 자의 칼날 앞에 놓인 이들에게 그와 맞서서 싸울 실력을 키울 시간도 없이, 또 시간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 정말로 대부분의 약자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당한 강요인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강자는 웃을 것이다. 아니,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강자가 누릴 이권에 웃음을 흘릴 것이다. 강한 후에 약자를 돌보면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그 변명이 사실일지도. 강하게 살아남아 약자를 돌보아준다는 희망. 그런데 오직 약육강식으로 자라난, 또는 무장한 그들이 살아남아서 그 원칙을 저버리고 자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약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원할 뿐이다)를 베풀기만을 바라는 약자의 삶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시시오의 야망이 불타는 시대, 켄신의 자비의 칼날이 세상 곳곳에 번뜩이기만을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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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 스피노자

홍세화 씨가 자주 인용하는 글.

나도 돌이켜보면 고집불통이다. 나를 부수고 새로운 나를 짓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 누에고치를 뚫어야 하듯, 데미안처럼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새처럼...

더군다나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면 이 고치와 껍질의 두께는 너무나 견고해져 제 아무리 거센 칼끝으로도 깨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하나의 창으로 통해버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창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벽을 허물어 그 자리에 창을 만드는 일. 하지만 두꺼운 벽에 흠집을 내는 것마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창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고마운 책들이 분명 주위에 많을 터인데, 나에게 만들어져 있던 창은 너무나 견고하다. 이 창은 홍세화 씨의 말처럼 강압적인 교육을 통해 형성되었고 현실의 길을 통해 다뎌졌다. 따라서 왠만해선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그 책들마저 이 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창을 내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 간혹 기존의 창을 조금 넓혀주기는 하지만.

나이 마흔은 불혹이라 했다. 아직 마흔까진 시간이 많다. 불혹의 마음을 갖는다는 건 내 주위가 담으로 쌓인 것이 아니라 통유리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니 말이다. 벽으로만 둘러쌓여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미혹될 것인가?

이젠 내 창을 의식해보자. 분명 지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의식의 벽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밀알 한 알이 썩어야 비로소 새로운 밀알들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죽여가는 작업을 해보자. 두렵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아직은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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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