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남긴 글은 무척 많다. 마음 속 깊이 주옥같이 남을 명언들도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혼란스럽던 내 영혼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조계산 산방에서 수행을 하던 시절. 한 스위스의 철학자가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그 철학자가 "스님이 혼자서 이런 산중에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법정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산중에서 사는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틀에도 갇힘이 없이 그저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오히려 먼지투성이 사회의 본모습을 자각하게 만든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움. 법정스님이 우리에게 준 또다른 가르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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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딛는 것에 있다. 

하늘을 날고 물위를 걷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우리는 그것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 속의 기적들을 깨우치고 그 기적에 감사하며 한발 한발 걸어가는 것에 있지 않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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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2010-03-1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끝내 주네요^^
 

"잘~ 쉰다" 

이제 열세살이 된 초등학생이 수족관의 금붕어를 보며 내뱉은 말이다. 무슨 뜻일까. 때론 동음이의어로 의미전달이 혼동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전후맥락을 살펴보는게 마땅한 일일 터이다. 

이 아이는 지난 임진강 수해때 아버지를 잃은 아이다. 6명이 죽었던 참사의 희생자 가족이자 그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난 아이다. 갑자기 불어난 물로 인해 아버지의 희생을 담보로 겨우 살아났던 것이다.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아이는 마음 속에서 곪아가고 있는 흉터를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유일한 취미는 금붕어 키우기다. 그리고 자신이 키우고 있던 금붕어를 바라보며 한탄식처럼 내뱉은 말이 바로 "잘~ 쉰다" 였다. 

맨처음 이 내용을 들었을 때는 휴식의 의미인 줄 알았다. 너는 물 속에서 참 잘도 쉬는구나. 아버지도 이 험난한 세상을 떠나 그렇게 잘 쉬었으면 좋으련만... 이런 뜻으로 내뱉은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는 숨을 쉰다는 뜻으로 한 말이였다. 금붕어처럼 자신도 물 속에서 숨을 잘 쉴 수 있었다면 아버지도 구하고 아무일 없었을 텐데 하는 죄책감이 녹아든 말이었던 것이다. 

'쉬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망을 항상 품고 살아왔던 것이, 그리고 아이의 시선 보다는 부모의 시선에 보다 접근해 가고 있다는 것이, 아이가 내뱉은 그 짧은 말을 오역하도록 만든 것 같다. 문득 살아가면서 이런 오역과 같은 오해도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오역임을 알게 된 것은 끝까지 아이의 말을 들었던 덕분이다. 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끝까지 듣는 것. 내 멋대로 생각하지 않는것. 그것이 오해라는 그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다. 

아이는 어떻게 됐냐고. 다행히 어머니와 사고를 이야기하며 묻어두었던 슬픈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비로소 곪았던 것을 터뜨렸다. 비록 흉터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상처로 인해 삶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리라 확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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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8일 제 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 경 환 씨의 이임사 중에서 

국제적 기준에 따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소임은 한 사안에서 나라 전체의 균형을 잡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의 남용과 부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일, 그것이 인권위원회의 본연의 소임입니다. 모든 국가기관을 대리하여, 약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고언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강자와 다수자에게 생길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국가. 인권국가, 법치국가의 본령입니다. 힘없는 자의 분노를 위무하고,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을 담아내는 일에 인색한 정부는 올바른 정부가 아닙니다. 흔히 소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수자의 인권이 더욱 중요하다고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인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부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기재가 다수자와 강자의 관점과 이해를 옹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세상의 자연적 속성이기에 인권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출처] 내 아이에게 꼭 읽혀주고 싶은 글... |작성자 시골의사
 

인권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라는 글귀가 오랫동안 귓가에 맴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갈구하는 사회 속에서 인권은 최대다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 그렇기에 최대다수를 만족시키겠다는 정부와 최대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인권은 관심 밖에 처하기도 한다. 그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인권을 관심사로 만들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권위원회였고, 그래서 악다구니가 필요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악다구니가 자기를 물어뜯는 것인줄 착각하는 정부나 사람들에게 실은 썩어가는 양심을 살리고자 하는 천상의 노래임을 자각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악다구니 또는 노래도 힘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 저항하는 힘, 견뎌내는 힘, 지속하는 힘...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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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9-07-1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수결이 폭력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살이 2009-07-17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은 때로 다수결이라는 이름, 즉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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