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인간에게 어떤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야말로 가능한 재앙은 모두 가져온 듯하다. 주먹만한 우박, 갑작스런 빙하기, 엄청난 위력의 토네이도 등등. 실제와 같은 완벽한 CG로 된 화면에 숨이 멈출 듯하다. 그리고 뭉뚱그려진 도덕적 교훈,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그러나 실상을 보라. 우리는 영화가 말하는 온난화의 주범인 차가운 에어컨 바람속에서 영화를 지켜본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보기위해 복사된 필름은 수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가며 공수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밖으로 나오면서 '아 너무 덥다' 하고 하늘을 쏘아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마도 프랑스나 칠레산 포도주라도 한잔 마신다면. 또는 열대 우림을 없애고 들어선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커피 한잔을 마실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에어컨을 빵빵히 틀어논 자가용을 타고서다.

그러니 영화속에서 보여진 재앙은 그저 영화속의 재앙일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빈 메아리로만 남는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행동해야 한다며 일회용 제품을 줄이고, 재활용을 생활화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일밖엔 안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화석연료를 대신할 대체 에너지의 생활화다. 그러나 이것은 석유 메이저 회사와 자동차 산업, 군수산업 등 현재의 자본주의를 굴리고 있는 막강한 경제적 파워로 인해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비전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투모로우]가 상상력이 빈곤한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미국 부통령이 말한 경제라는 문제 뒤에 감추어진 실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늦지 않았다는 교훈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실은 당장이라도 디지털화된 이 영화를 필름말고 디지털로 받고, 극장이라는 것은 자신의 집 근처에서, 그리고 움직이는 것은 대중교통을, 먹는 것은 원거리를 이동한 것보다는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먹는 것 만으로도 한발짝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각성과 함께 사회적 조직적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지만 가능하다. 물론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개인적 건강이 화두가 되어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 웰빙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간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속 의미와는 다른 진짜로 늦지않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불인(不仁)이라는 도덕경의 글귀를 새겨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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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전부 거짓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주인공 콜먼(안소니 홉킨스)은 유대인으로서 첫 대학총장에 올랐지만 흑인비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내려섭니다. 그 충격에 자신의 아내는 숨지고 그는 시간이 조금 흐른후 우연히 만나게 된 상처입은 젊은 여자(니콜 키드먼)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평생을 간직해왔던 비밀을 그녀에게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왜 그토록 억울해 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위선으로 가득차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가족과도 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죽기전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남편에게 폭행받고 자식마저 불에타 숨진 비극을 품고 사는 여인에게 털어놓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까지 할 수 없더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질수 있다는 것, 그의 가슴에 자신의 슬픈 마음을 전달할 수 있기에 그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끝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사랑은 비극이라기 보다는 희극입니다. 참사랑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죠.

1. 비아그라 먹은 아킬라스

콜먼은 강의중에 아킬라스 얘기를 합니다. 세상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오직 사랑하는 여인때문에 무너졌음을 이야기합니다. 총장을 그만두고 나서 젊은 작부를 사랑하게 됐을때 그의 제자는 콜먼을 비아그라 먹은 아킬라스라고 빈정댑니다. 자신이 비판했던 신화속 인물로 조롱받는 신세가 된 콜먼은 자신의 제자이자 변호사에게 버럭 화를 냅니다. 친구라면 심판하려 들지 말라구요.

그렇습니다. 사랑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친구라면 그렇지 말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가 아닙니까? 친구의 사랑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비아그라를 먹으면서까지 사랑받고 싶어했던 그 늙은 친구를 어찌 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2.까마귀로서 살아갈 수 없는 까마귀

집에서 키우던 까마귀를 숲으로 보내주어도 그 까마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들의 왕따. 까마귀는 결국 다시 사람의 손으로 되돌아옵니다. 까마귀지만 까마귀로서 살 수 없는 일, 누구를 한탄해야 할까요.

콜먼은 사실 흑인입니다. 하지만 흑인으로서의 삶이 가지고 있는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하얀피부를 가지고 있음을 이용해 세상을 속입니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게 됩니다. 가족과도 인연을 끊어야 하고, 인종모독에 대한 진실조차 말하지 못합니다.

휴먼 스태인. 인간의 결점은 이렇게도 큽니다. 사람의 영혼을 자유롭게 놔두지 못할정도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나는 얼마나 많은 벽들을 세워 놓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편견은 그 벽을 더욱 공고히 만듭니다.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선천적으로 가지게 되는 벽들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배우는 많은 것들중 벽을 높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야 할 것입니다. 현명한 바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3. 슬픔은 주관적.

콜먼의 안타까움과 함께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여주인공 또한 우리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남편, 도망쳐도 끝내 쫓아오는 그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희망이던 아이들이 불에 타 죽어버린 순간 그녀는 생의 모든 걸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콜먼을 만나면서 자신만이 절대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님을 깨우칩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깟 정도야 생각하는 것들도 어떤 사람들에겐 목숨을 던질만큼 아픈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자신의 손톱밑의 가시가 더 아픈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내 손톱밑의 가시를 아파했던 것처럼 타인의 손톱 밑의 가시를 뽑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주관적인 슬픔도 안아줄 수 있겠죠. 아파하는 마음. 아무리 그것이 작아보이더라도 꼭 꼭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결점투성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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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 까닭이나 필요가 없이

살아가다 보면 괜히 그랬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밥 해리스(빌 머레이)가 촬영차 온 일본에서 미국의 부인에게 전화를 건 후 내뱉는 말이 괜히 였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의 기대를 가졌지만 무참히 깨져버리는 순간 자신의 모든 행동은 괜히가 됩니다.

여자 주인공 샬롯(스칼렛 요한슨-옆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곡선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얼굴입니다)은 남편을 따라 일본에 왔지만 하루하루가 무료합니다. 아직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다 남편이 일에 빠져 자신에게 관심조차 갖질 않습니다. 우연히 밥을 만난 샬롯은 침대 위헤서 밥에게 묻습니다.

살다보면 결혼생활은 더 나아지나요? 살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더 나아지나요?

살다보면 정말 나아질까요? <괜히>우린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둘은 일주일간의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군요. 살다보니 말입니다.

무척이나 쓸쓸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는 김광석의 노래가 그리웠습니다. 쓸쓸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노래를 불렀던 그는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가버렸는지... 그래도 그의 노래가 남겨져 이렇게 저의 마음을 위로하는군요. 살아가는 그 쓸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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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민의 누드가 나온다며 시끌벅적했던 영화다. '한국에서의 청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라고 알려졌지만 벗은 몸이 꼭 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그리고 배우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오버하곤 한다. 벗은 몸과 이미지 굉장히 끌리는 화두다.

2.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 펼쳐진다. 영화 속 화면에 펼쳐진 설국은 '러브레터'의 풍경과 닮아 있으면서도 조금 다르다. 눈을 한아름 이고 있는 산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로서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나 구성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 덮힌 산, 흐날리는 눈송이, 다리가 푹푹 빠지면서도 눈 속을 걸어가는 여인. 그곳이 일본땅이든 한국땅이든 또는 알프스이든 꼭 가보고 싶다.

3. 왜 나는 그토록 눈에 미쳐하는가? 눈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가?

4. 눈은 욕심이 없다. 자신이 내려서야 할 곳을 골라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다 바꾸어 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풍경을 끝끝내 고집하지는 않는다. 햇볕을 받으면 자신을 녹여 원래의 세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햇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선 꽁꽁 언 얼음이 되어서 차디찬 마음으로 세상에 미련을 남긴다. 그 차디찬 마음에 사람이 또는 차가 미끄러져 다치곤 한다. 그러나 얼음은 투명한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따뜻한 곳에선 녹아내리고 차가운 곳에선 투명한 눈은 그 차갑디 차가운 손으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때론 성난 폭설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도 하고, 내린듯 안내린듯 살포시 내려와 어느새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눈. 바람과 친구가 되어 함께 내릴땐 거부하고 싶고 혼자서 천천히 내릴땐 손으로 받아주고 싶은 눈....

5. 사업에 실패하고 죽음을 각오한 채 찾아온 온천마을, 그러나 중년의 남자는 죽지 않는다. 자신의 연인을 눈 앞에서 잃으면서도 꿋꿋이 살아온 게이샤의 청순한 사랑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게이샤는 비로소 죽을 힘을 얻는다. 죽음으로써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남자의 말은 실은 자신을 향한 말이었을 게다.

눈이 따뜻한 햇볕에 녹듯 죽음도 그렇게 따스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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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엔리오 모리꼬네 음악. 실은 이 두사람이면 영화를 볼 가치가 충분하지가 않나? 더더군다나 피아니스트라는 제목이 말하듯이 음악에 관련된 영화라면 모리꼬네의 실력이 여실없이 드러날 것이고.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이드(1900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는 여객선 무도회장 피아노위에 버려져 있다 배의 석탄꾼에게 발견된다. 그리고 평생을 배에서 피아노를 치며 지낸다. 누구한테 한번도 배우지 않았던 피아노이지만 8살(?)때 그냥 아름답게 친다. 30이 넘은 나이에 딱 한번 뭍으로 발을 내디디려 하지만 끝내 다시 발길을 돌려 배로 돌아온다. 그리고 배가 폭파되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재즈를 만들었다며 기고만장해 있는 피아니스트와의 피아노 연주 대결이다. 서부시대 건맨들의 총싸움이나 춘추전국시대 칼잡이들의 대결같이 목숨을 걸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실은 이 대결이라는 것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끝없이 자기 확장을 해야만 하는 도시 말이다) 영화 전체를 흐르는 바다와 도시의 대조. 가장 인상적인 화면은 뉴욕의 고층빌딩을 뒷 배경으로 배 위에 혼자 남은 주인공이 깡통을 차며 나아가는 장면이었다. 그의 쓸쓸함이 고층빌딩의 불빛으로 인해 더 적막감을 드러낸다.  

항상 바다위에 떠 있으면서 바다의 소리(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격려의 소리다)를 듣기 위해 뭍으로 오르려 했던 주인공은 끝없는 도시의 풍경에 짓눌려 끝내 되돌아선다. 도대체 도시의 끝은 어디인가? 배위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희망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 희망의 소리 '아메리카'를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희망을 찾았는가? 그렇다면 왜 또 다시 배에 오르는가?

영화는 마치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를 옮겨놓은 것 같다.

빌딩숲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본다.

 이셋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영화속에선 한번도 도시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풍경은 이 노래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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