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올리비아 핫세


어렸을 적 보았던 영화중 어떤 장면들은 각인이 되어서 절대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핫세는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죠. 이 사진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퍼 왔습니다.  저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건 도박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머릿속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것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마지막 옥상씬 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목숨이 다해(에너지가 다해라고 해야 하나요)  고개를 숙인 안드로이드 로이(롯거 하우어)를 배경으로 하얀 비둘기가 날아 오르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서정적 비극입니다. 게다가 비까지 주르륵.

아름다움도 슬픔도 모두 심장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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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은 SF의 진보 또는 진화를 이루어내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영화들을 잘 조합해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 나오는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시작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을 그대로 드러냈던 로보캅, 기계들의 반란을 다루었던 메트릭스와 인간이 되고자 했던 AI 등등. 영화 속에선 이전의 공상과학 영화들이 다루었던 주제들을 맛있는 비빔밥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은 끝내 극복되지 못한다.

다만 로봇들이 움직이는 것을 섬세히 담아낸 화면과 터널안 추격과 액션씬은 정말 기억에 남을 만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트릭스를 뛰어넘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용도 액션도 새로울 것이 없는데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은 주인공 윌 스미스가 매일 꾸는 악몽속에 드러나는 에피소드에 있다고 생각된다.

교통사고로 트럭 조수석에 앉아있던 어린아이와 자신의 차에 타고 있던 윌 스미스 모두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둘 다 모두 죽을 운명임을 윌 스미스는 직감한다. 그 때 NS4 로봇이 나타난다. 그리고 윌 스미스를 구한다. 윌 스미스는 자신이 아닌 소녀를 구하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로봇은 오직 생존확률이 더 높은 사람을 논리적인 이성에 따라 구한 것이다. 40%대와 10%대의 차이.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오직 한가지 잣대였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둘 중의 한 명을 구할 수밖에 없다면, 어린아이를 구했을 것이라는 것이 윌 스미스의 생각이다.(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터이다) 비록 그 확률이 떨어지더라도, 즉 현실적인 가능성이 더 낮더라도 사람은 어린아이를 구하려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이 영화의 핵심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영화의 끝부분 '써니'라는 인간과 같은 로봇은 끝내 수리적 이성을 택하기 보다는 인간적 이성, 감성에 따라 행동을 선택한다. 진화된 로봇, 인간과 같다는 것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확인을 하듯이.

이런 선택의 과정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숱하게 겪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잘 알지 못하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북한산 관통도로의 경우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 때문에 그만  둘 수 없다는 논리나, 이라크 파병에서 미국과의 현실적인 관계때문에 철회하지 못하는 것 등등 우리는 수치적, 통계적 현실을 벗어나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허다하다. 월급의 수치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조금 더 받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인간관계들 말이다.

인간이란 것이 무엇이라고 딱 정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끝내 해결하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을 것같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참 인간적이다라고 하는 그 감정은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인간적이다는 것에 대한 통찰, 그것은 절대 숫자가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숫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한번 새겨볼만한 일인것 같다.

로봇의 혁명은 또는 인간의 혁명은 그렇게 숫자에 대한 혁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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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건대 스파이더맨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왜 2편을 봤냐고?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왜 할리우드 영화는 그렇게 유혹적인가? 전편이 실망감을 줬다면 2편 또한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왜...아무래도 광고의 파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1편보다 더 발전되어진 CG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입소문에 솔깃, 마땅히 볼 영화가 없던 차에 그냥 표를 끊는다.

2편은 1편보단 낫다. 그러나 그냥 나을뿐 썩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전철에서의 전투씬 정도가 조금 기억에 남을뿐 쓱쓱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화면에 그냥 정신을 놓을 뿐이다. 가끔 하품을 한다. 몸이 굉장히 피곤했다면 잠을 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묘한 것은 왜 그렇게 이다지도 재미없다고 생각한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는냐는 것이다.

2편에선 영웅들의 내면, 왜 내가 나를 희생하고 대중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나 내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고민등등이 녹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영웅 만세를 외치는 따분한 면이 많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런 영웅주의에 대해 냉소를 퍼붓는데 이상하게도 눈은 흐릿해진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군대시절 유격훈련중 편을 갈라 상대편을 웅덩이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있었는데 이런 훈련들을 마지못해 그리고 우습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저 멍하니 당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지 못한다. 어느새 난 헐크가 되어 상대편을 하나 둘씩 밀쳐내고 있다. 머리는 가만 있으라고 하는데 몸은 머리를 따르지 않는다.

감정에 휘말려 움직이는 몸뚱아리. 몸은 무엇을 기억하고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복수심이나 오기, 또는 충정의 마음같은 것은 원초적 본능인가 문화적인 배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울고 하는 것일까? 왜 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흘릴뻔 했단 말인가?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래서 파시즘은 무섭다.(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일상적 의미에서. 내가 내 감정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이끌려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다. 내가 잠깐 의식을 놓는 순간 감정은 누군가에 의해 조정될 수도 있는 끔찍한 현실을 상상해본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말똥말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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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누군가가 당신에게 알약을 주며 선택하란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이곳과 진짜로 진짜로 너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살아갈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를.

나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곳이 보다 살만한 세상임을 확신할 수 있다면 선택에 대한 갈등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암흑에 쌓여 있다는 것이며 또한 그곳이 진정 현재보다 나은 곳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선택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네오마냥 선택되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온다. 현실에 대한 한치의 의혹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에겐 선택이란 우스운 상황일 뿐이다. 아마 그들에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가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니. 이렇게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살고 있는데...

자, 난 그래도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갈등이란 그래서 좋다. 무엇인가 다른 것을 행할 기회가 1%라도 있는 상태가 갈등이라는 상활일 수 있다. 알약을 집는다. 삼킨다. 내가 삼킨 알약의 색깔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엄습해 온다. 몸에 전율이 돋는다. 고통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 고통이 끝나면 난 현재라는 발판에 서 있을것인가? 현재를 망각할 것인가?

참, 그 알약은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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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대한 영화는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각기동대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기억의 집합이라는 것. 그래서 기억이 바뀐다면, 또는 조작되어진다면 나 또한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찾아오는 혼돈. 토탈리콜에서도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중심요소다. 이것 뿐이랴. 최근의 영화 메멘토 등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기억에 매달리는 내용의 영화들은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나의 기억을 갖고 있는다는 것이 소중한 것 만큼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소중하지 않을까? 기계들, 특히 첨단의 기계 사이보그들 또한 그들만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비록 그것이 조작되었을지라도 기억을 통째로 지니고 있다면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나 임을 뛰어넘어 내가 사람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나라는 자아, 그 거친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회나 제도 등이 만들어 놓은 높은 담을 뛰어넘어 내가 사람임을 또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행동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는 것. 이 세상을 떠나버리거나 또는 변혁을 꿈꾸는 등의 행동을 취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살아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사이보그라 할지라도 말이다.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그리고 인생이라는 궤도에서 만들어지는 추억만을 씹으며 사는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사람이라고 여길지라도 그는 로봇과 다름없는 기억덩어리의 유기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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