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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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내 아이가 그랬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으며 수도 없이 이 말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의 외침에 심정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말이 변명으로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고개가 끄덕여진다. 죽음은 상실이다. 아이의 죽음은 가장 큰 상실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들였던 모든 노력과 사랑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제 끝이다. 아이가 죽었으므로.

 

자식이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귀한지를 말하기에 난 너무 무심한 사람이기에 부끄럽기는 하지만. 첫 아이를 낳은 다음날 아침, 오똑한 콧날과 티없이 투명한 양 볼. 그림처럼 예쁘게 잠든 아이를 보고, 나는 평생 이 아이를 사랑하기로 맹세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좋아져 연애하고,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을 대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게 또 자식이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게 자식이다. 내 의도와 다르게 생각하고, 내 계획과 다르게 커가는게 자식이다.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도, 가고 싶었던 대학도, 동경했던 직장도 포기할 수 있고, 어느 순간 자연스레 포기하는게 일생살이지만, 자식을, 어떻게 자식을 포기할 수 있는가.

 

가장 큰 기쁨과 가장 무거운 실망을 안겨주는 존재.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식이다. 그럼에도 자식은 ‘내’가 아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키웠지만, 사랑하고 아끼며 보살폈지만, 자식이 곧 ‘나’는 아니다. 나는 그녀의 외침을 이해한다. 난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여기까지 『콜럼바인』 읽기 전 마음 준비.


 

『콜럼바인』의 저자 데이브 컬런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저널리스트다. 2만 5천쪽이 넘는 자료, 9년간의 조사 및 집필을 통해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한 다면적 조사 보고서로서 이 책을 출간했다.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는 비극의 날 1년 반 전부터 살상극을 준비했다. 1년 전쯤에 4월 학생식당으로 시간과 장소를 잠정 합의했으며, 학생들이 제일 많이 이동하는 시간인 11시 16분에서 18분 사이에 폭탄이 터지도록 계획했다. 실제로 그 날에는 계획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두 사람은 11시 14분 직후에야 식당에 들어가 폭탄이 든 불룩한 더플백을 두고 나왔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계획이 실패했음을 파악한 에릭은 당황한 딜런의 차로 이동해, 두 사람은 같이 서쪽 출구로 이어지는 외부계단으로 올라갔다.  11시 19분, 캠퍼스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더플백을 열고 산탄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했다. 총을 쏘기 시작한 건 에릭이 거의 확실하다. (86쪽) 12시 8분, 공격 개시 49분만에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사 1명을 포함해 사망자가 13명, 부상자가 24명의 참극이었다.

 

비극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냉정하게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인자들을 ‘이들’이라고 지칭하며, 이들에게 공동의 목표와 목적이 있을 거라 가정했다. 언론은 트렌치코트 마피아 출신의 부적응자 고스족 두 명이 오랫동안 반목해온 운동선수를 공격한 사건으로 이 비극을 설명했다.(252쪽) 무차별적 공격이 사건의 본질이었지만, 이 사실은 금세 잊혀지고 ‘트렌치코트 마피아’만 남았다. 문제는 반복이었다. 콜럼바인 학생들은 목격자와 앵커들이 텔레비전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알았으며’, 비슷한 보도를 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를 사실로 확인했다. 살인자들을 알지도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하위문화 고스족에 대해서는 가장 악랄한 비난이 쏟아졌다. 검은색 코트를 입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에릭, 딜런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고스족에게 말이다. (267쪽)

 

저자가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신뢰했던 사람은 콜럼바인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학생의 아버지이자 FBI 베테랑 요원이며, 임상심리학자, 테러리즘 전문가인 퓨질리어인 듯 하다. (125쪽) 퓨질리어는 에릭과 딜런이 찍어두었던 필름, 에릭의 일지, 웹사이트를 세심히 살펴보면서 비극의 진짜 원인을 추적하고자 했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에릭은 상황에 맞게 거짓말을 하고, 거짓이 탄로났을 때 부모를 안심시키고, 적정하게 비밀을 털어놓아 교화 프로그램 담당자의 신뢰를 얻을 만큼 매우 교묘했다. 퓨질리어는 에릭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살인 행위를 즐기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 추측하며, 에릭이 사이코패스로 변해가는 과정 중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사고 현장에서) 딜런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반면 에릭은 계단 위에서 총을 쏘고 깔깔 웃고 파이프 폭탄을 던지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91쪽) 

 

 

에릭의 아버지 웨인 해리스 소령은 집에서 엄격했다. 잘못에 대해 신속하고 가혹하게 처벌하는 한편, 바깥에서 가해지는 위협에는 군인 특유의 방식으로 대항했다. 어린 시절의 에릭은 건강하고 말쑥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1997년 2월, 에릭의 친구 브룩스는 둘 사이의 다툼 이후에, 에릭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에게 말했다. 그들은 경찰을 불렀다. 브룩스의 엄마 주디는 에릭을 완연한 범죄자로 보았다. 에릭의 아버지에게 이에 대해 수차례 이야기했고, 경찰을 계속 불렀다. 하지만, 웨인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주디의 행동을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애들이라면 누구든 가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족 내에 묻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웨인은 브룩스가 공공연히 에릭을 헐뜯고 있다고 생각했고, 에릭을 한참 동안 유심히 관찰한 웨인은 결국 아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278쪽).

 

브룩스의 부모가 경찰에 알려준 에릭의 웹사이트에는 폭탄을 만들겠다는 글이 존재했고, 실제로 에릭의 집 근처에서 설명과 일치하는 폭탄이 발견되었음에도 에릭의 집에 대한 수색영장은 발급되지 않았다. 보안관서, 지방검찰청, 형사재판소의 윗선들은 에릭에 관해 각 기관이 내린 조처를 서로 알지 못했다.(372쪽) 사건 발생 이후, 제퍼슨 카운티는 13개월 전에 총격자들의 친구 브룩스의 부모가 에릭의 살인 협박을 이유로 두 아이에 대한 민원을 접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7년부터 공적인 파일이 있었다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지휘관들을 향한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당국은 브룩스의 부모들이 조사관과 접촉한 사실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들은 신청서의 존재를 숨겼고, 수년 동안 자신들이 알고 있던 내용도 거짓말했다. (283쪽)

 

시를 좋아했던 클레볼드 부부는 딜런 토머스와 로드 바이런의 이름을 따서 두 사내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집은 늘 규칙적이고 지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딜런은 영재 지원 프로그램에도 등록할 만큼 총명했다. 지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수줍음을 많이 탔고, 며칠 혹은 몇 달을 얌전히 있다가 노여움이 끓어 오르면 사소한 장난에 폭발하고는 했다. (217쪽) 사랑은 딜런의 일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다.(315쪽) 딜런은 사랑받고 싶어했고, 열렬히 짝사랑하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 했다. 딜런의 기분은 시시각각 변했고 한순간 희망을 품었다가 금세 숙명론으로 돌아섰다.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가 금세 자기혐오로 사그라졌다. “안으로 향하는 분노가 바로 우울입니다.” 퓨질리어는 지적한다. 딜런은 최소 2년 동안 자살을 열망했다.(296쪽)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맥베스』 『리어왕』 『테스』를 읽고 니체와 홉스는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던(442쪽) 에릭에게서 윤리적 혼란이나 정신병의 징후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에릭은 자신의 우월함에 대한 확신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쓸모 없는 존재로 인식했으며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상상했고, 그것을 좋아했다. 비극의 날이 다가오자 에릭과 딜런은 자주 카메라 앞에 섰다. 저주와 분노를 쏟아 붓는 그들의 언행은 청중을 위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연기였다. 대중에게, 경찰에게, 또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 특히 그냥 보기에는 딜런이 주동자 같지만, 실제 책임자는 에릭이었다. 에릭은 계속에서 딜런의 분노를 부추겼고, 딜런은 에릭이 원하는 만큼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쏟아냈다. (548쪽)

 

에릭과 딜런은 그렇게 서로를 도와 비극의 문을 열어 젖혔고, 설치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것부터 경찰과의 마지막 대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들의 예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총을 들었고, 살인하고, 자살했다. 서로를 도왔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에 털어놓는 자백이다. 총격자의 81퍼센트가 자신의 의도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 절반 이상의 총격자들이 적어도 두 명 이상에게 말했다. 대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렁설렁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눈여겨봐야 한다. (538쪽)

 

딜런은 이제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파이프폭탄을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NBK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이런 현상은 더욱 잦아졌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총에 대해 알았다. 파이프 폭탄을 아는 사람도 많았다. 에릭과 딜런은 갈수록 대담하게 사람들에게 무기를 시험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550쪽)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가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에릭 곁에 딜런이 없었다면 콜럼바인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에릭이 아니었다면 딜런은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날, 에릭은 살인하기 위해 학교에 갔고, 딜런은 자살하기 위해 학교에 갔다. 에릭이 완연한 사이코패스의 사고와 행동을 나타내고 있음을 그와 관련되었던 학교 상담사, 교화 프로그램 담당자, 지역 경찰관들이 알았더라면, 서로의 정보를 제대로 공유했더라면 에릭이 품고 있었던 위험한 계획들은 제지당하고, 폭탄과 총기는 압수당했을 것이다. 딜런이 오랫동안 강력한 자살 충동에 시달려 왔음을 가족들이 일찍 발견했더라면 그는 적절한 치료와 처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모두 다 예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예상 가능한 모든 변수를 차단한다 하더라도 비극과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 행동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범죄 구성 요건들이 각자 자기의 몫을 다했다. 에릭은 학교의 교화 프로그램을 조기 이수할 정도로 상담사를 완벽하게 속였고, 딜런은 사고 발생 일주일 전에도 부모와 함께 자신이 다니게 될 대학교를 방문했다. 미성년자였지만 친구를 통해 총기를 구매할 수 있었고, 폭탄 재료를 구입해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로 파이프 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분노와 대량 학살에 대한 의지를 홈페이지에 자세히 서술했음에도 그들을 막지 못 했다.

 

다만, 비극이 우리 앞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거대하고 위압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실수’라고 부를 만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게 두렵다. 에릭의 아버지 웨인이 에릭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브룩스의 부모와 갈등 상태에 있었을 때, 아들의 말을 믿어 주기로 결정했다는 지점이 특히 그렇다. 웨인은 아들의 행동을 흔한 고등학교 남자애의 방황 정도로만 생각했다. 당연하다. 에릭은 사이코패스로서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인 아버지 앞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약속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쉽지만, 부모는 더 속이기 쉽다. 속이는 자식, 속이려는 자식에게 부모는 완전히 속아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자식을 적확하게 알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1997년 8월 7일        “나는 증오한다”라는 폭언이 수록된 에릭의 웹사이트가 경찰에 신고됨.
1998년 3월 18일       딜런이 브룩스 브라운에게 에릭이 죽이겠다는 위협을 했다고 경고.
1998년 4월 8일        에릭이 교화 프로그램 등록.
1998년 11월 13일      에릭이 나치에 관한 리포트 제출.
1999년 2월 7일        딜런이 “부잣집 애들”을 살해하는 내용의 소설 제출.
1999년 4월 17일       학교 댄스파티.
1999년 4월 20일      대학살.




<20일 덴버 캐피톨 건물 앞에서 컬럼바인 고교 총격사건 1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컬럼바인 고교 재학생들과 희생자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희생자 13명을 상징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다. 

[LA 중앙일보, 2009/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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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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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친구이며 굳건한 동지인 다락방님은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리뷰에서 린디 웨스트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있다.’ 동의한다. 천천히 깨닫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좋아하는 작가와 이별하는 시간은 슬프고도 아쉽다.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하게 되었을 , 독자는 소설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자가 스스로를 길가메시와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엘리자베스 베넷과 동일시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독자가 스스로를, 롤리타에게 동일시할 일어난다.(246)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여자로부터 빼앗은 작품으로서, 독자가 남자의 이야기만을 듣게 된다는 관점에서 『롤리타』에 대해 언급했는데, 남자들은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타나서는, “당신이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다”, “ 책은 사실 알레고리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252)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나는 한권의 책이 인생의 목표를 정해줬다거나 삶을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안다. 내게는 그렇게 삶을 구해준 한권의 책이랄 만한 없지만, 그것은 그저 수백 혹은 수천권의 책들이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249) 



나를 구해준 수백권(수천권은 아닌 같다) 중에 여자가 읽지 말아야 책이 다수 포진해 있음을 확인한 글은 <여자가 읽지 말아야 80>이다.

 


작가 에밀리 굴드Emily Gould 벨로, 필립 로스,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는 “20세기 중반 여성혐오자들이라고 명명했는데, 『에스콰이어』 목록에 올랐고 목록에도 오를 남자 작가를 지칭하기에 알맞고 편리한 별명이 아닐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 노먼 메일러와 윌리엄 버로스는 독서 금시 목록에서 상위에 오를 것이다. 아내를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지 않은 작가들 중에서도 읽을 작가는 너무 많으니까 ...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모비 딕』마저도 여자가 명도 나오는 책은 모든 인간에 대한 책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비해 여자가 부각된 책은 여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목록(『에스콰이어』 추천남자가 읽어야 최고의 80’) 좇는 독자는 제임스 M. 케인과 필립 로스에게서 여자를 배울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찾아가야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없는 남자들이다.(234-6)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필립 로스의 이름이 번이나 언급됐다. 『유령 퇴장』을 읽을 어떠했나. 나는 누구에게 감정 이입했나. 나는 누구였나. 내가 동일시했던 사람은 누구였나. 



나는 만찬회 같은 데도 참석하지 않고 영화 구경도 가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휴대전화나 VCR DVD플레이어나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계속 타자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월드와이드웹이 뭔지도 모른다. 선거 같은 것도 더는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대개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보낸다. 독서도 하는데, 주로 학생 처음 접했던 책들을 읽는다. ...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쓴다. 외에는 침묵한다. (15)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스스로를 네이션 주커먼에게 감정이입했고, 소설 속의 주커먼이라고 말할 , 그를 자신으로 여겼다. 나는 주커먼을 사랑한다. 그를 동경하는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주커먼이었고 주커먼이어야 했으므로. 나는 주커먼이 되기를 원했으니까. 



레베카가 말한다. 



나는 점에서만은 진지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용되고 버려지거나, 쓰레기처럼 그려지거나, 침묵하거나, 아예 나오거나, 무가치하게 그려지는 책을 많이 읽으면,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세상을 만드니까. 예술은 중요하니까. 예술은 우리를 만드니까. 혹은 망가뜨리니까. (255) 



이별을 준비하는 작가가 있기는 하다. 『남한산성』을 사랑하지만 다시는 『칼의 노래』를 읽고 싶지 않았던 나를, 나의 감각을, 느낌을 이젠 조금 믿어보려고 한다.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자각할 때의 슬픔은,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는 나의 몫이다. 머리에 삶의 목적이 오로지 섹스인 인간, 섹스에만 특화된 존재로 그려진 종이, 바로 나와 같음을, 나와 같았음을 기억할 때의 절망 또한 나만의 것이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필립 로스를 읽어야 할까. 『유령 퇴장』을, 『휴먼 스테인』을, 『울분』을,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포트노이의 불평』을, 『미국의 목가』를, 『굿바이, 콜럼버스』를, 『전락』을, 『네메시스』를, 『죽어가는 짐승』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해서, 직시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까. 아니면 흐린 기억 속에 그를 묻어, 조금이라도 그를 소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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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14: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휴먼 스테인 읽으면서 얼마나 슬펐던지요. 글을 너무 잘썼는데, 그 잘 쓴 글로 페미니스트를 까는 거예요. 너무 잘써서 설득력이 있는거죠. 그 책으로 여자를 배우면, 페미니스트는 극도의 신경질적인, 젊고 예쁜 여자를 질투하며 자기 모순에 빠지는, 그런 존재인 거예요. 너무 슬펐어요. 그런데 이미 다른 사람은 필립 로스를 읽지 말아야 할 작가에 포함시켰었군요.

단발머리님, 그 감을 저도 믿으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제가 사람들이 다 좋다는 칼의 노래를 읽고, 정체를 뭔지 모르겠는 불편함에 시달리며, ‘김훈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을 때, 남들이 다 좋다 그래도 좋지 않았을 때, 그때 저에게 있었던 감을 저는 이제는 믿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지금 분노의 포도가 슬퍼요. 여기에 대해 글을 적고 싶지만, 제가 오늘 일이 많아요. 흙.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저를 미워하는 걸 깨달으며 슬퍼요. 페미니스트를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중에 이미 아주 많이 글을 잘 쓰며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슬퍼요. 그래서 스티븐 킹이 더 좋아요, 단발머리님. 스티븐 킹이 세상에 얼마나 강간범이 많은지, 피해자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뒤집어 씌우는지를 말해줘서 너무 소중해요. 흙흙.

단발머리 2017-09-25 11:47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전, 휴먼 스테인을 읽을 때, 흑/백의 구도에 아주 집중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씀하신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기도 하구요. 아마 작품을 읽는 그 순간은, 저는 스스로를 흑인임을 속이고 싶어하는 백인.
그것도 백인 남자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크고요. ㅠㅠ

필립 로스는, 자기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인상을 작품에 옮겨 놓았을 테고 그 글은 너무 근사해서... 그래서 설득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겠죠. 그래, 페미니스트는 이래. 아... 슬프네요.

제게 아주 오랫동안 불편했던 작가가 김훈이거든요. 전,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고.
일면 저도 그 비장한 문장을,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최근에 문학계에서도 김훈의 시선에 대해 평론가가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아무튼 이제 한 발짝 나아가야 할 시점이기는 해요.

우리의 슬픔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사실에 또 슬퍼지네요.
더욱 슬픈건 다락방님이 좋다고 하신, 스티븐 킹이 전 너무 무서워서... 그게 또 슬퍼요.
스티븐 킹을 읽지 않고 스티븐 킹을 좋아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우린 오늘 슬프네요. 흙흙ㅠㅠ

munsun09 2017-09-25 12:09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에 대한 두분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그 불편함이 싫어서 어느순간부터 읽지 않고 있어요. 필립 로스 작품 읽은지 좀 되는데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오늘 알았네요.
독서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고집이 어느정도 필요한 거 같아요. 많고 많은 책 중에 나에게 땅기는 거 읽는 다,가 제 독서론! 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쭉 밀어 붙이고 있어요. 주저리주저리^^

단발머리 2017-09-26 09:37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좀 더 믿어야해요. 저는 번역서를 읽다 어려우면 이해못하는 스스로를 탓하지 번역이 이상하다,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이제는 우리 나름의 생각, 판단, 고집도 그것대로 인정하고 비판적 독서의 새 장을 열어야겠어요.
(저... 너무 비장해요?!! ㅋㅋㅋ)
아무튼 굿모닝이예요~~
다락방님, munsun09님^^

AgalmA 2017-09-26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들레르도 여성혐오 대단했다고 하죠ㅎ; 유명한 작가 상당수가 혐의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죠. 그러면서 여성에게 매혹도 되니 미치겠지ㅎㅎ
남성이라는 상징적 본성이 아니라 각자가 그 시대를 살면서 가지게 된 젠더 인식이 반영된 거라 봐야 할 텐데 그 상태에서 작품을 쓰니 벗어나기 쉽지 않죠. 끊임없는 문단 내 성폭력도 그런 우월주의가 깔려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란 말은 일종의 면죄부가 되기 쉽죠. 인식이 반영되지 않는 글, 작품이란 게 가능합니까. 입력된 정보로 움직이는 컴도 그건 불가능하던 걸요ㅎ 데이터축적으로 온갖 차별과 비하 발언을 하던 뉴스가 나오기도 했잖아요ㅎㅎ;
존 쿳시 <포> 읽었을 때 남성작가가 여성을 이렇게 깊게 이해할 수도 있구나 놀란 적 있습니다. 존 쿳시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대개 그랬어요. 환경적으로 많이 겪고 보다 보니 쿳시는 온갖 차별에 대한 반감을 작품에도 늘 드러내죠. 노벨상 받을 만 하다는. <포>는 꼭 읽어 보시길^^

단발머리 2017-09-27 10:53   좋아요 0 | URL
여성을 혐오하거나 지나치게 숭상하는 건 하나의 뿌리라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들어요.
너무 좋으니까 너무 싫은 것 아닌가. ㅎㅎㅎㅎㅎ

존 쿳시의 작품은 <포> 밖에 안 읽어봤는데,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큰 감동을 못 느꼈어요.
Agalm님이 노벨상 받을만하다 하시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AgalmA 2017-09-2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가 흑인 노예 프라이데이를 더 부각시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를 썼듯이 <포>도 남성 로빈슨이 아니라 여성 주인공을 부각했다는 게 첫번째로 중요했고요. 서술의 방식도 남성적 서사 방식-뚜렷한 줄기가 아니라 여성적- 호소, 내밀함을 잘 살려 냈다는 점입니다. 남성적-여성적 발화방식을 가르는 것도 차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니 감정의 섬세함을 더 다루려 했다 정도로 하죠^^

단발머리 2017-09-29 08:44   좋아요 0 | URL
아니.... 우리 선생님은 왜 Agalma님처럼 야무지고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Agalma님은 페이퍼도 페이퍼지만, 댓글마저도 독서를 부르네요.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오늘 아침에 읽은 책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글이 있더라구요.
감정의 섬세함, 여성적-호소, 내밀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기도 하구요.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쌀쌀하네요~~~ 이제 정말 가을인가봐요^^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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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있다. 극중주의를 주창한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극좌''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출처 : 2017.8.29. 프레시안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6835&ref=nav_search)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극중주의란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긴다는 건데, 극한의 중간이 정말 국민의 뜻에 가까운가. 촛불을 들었던 국민의 요구는 명확했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국민의 뜻 또한 정확하다. 오해의 소지가 1도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수, 정확히는 극우를 포기하지 못 해, 보수를 넘어 극우까지를 포용하여 정확히 반을 잘라, 그 가운데선을 굳건히(?) 지켜가겠다고 하니. 그 가운데선은 필시 보수의 땅 위에 그려져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정말 모르고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실망할 여유조차 없다.

 

성의 구별이 사회적 억압 제도가 아니라 단지 대칭 집단이라는 사고방식은, 최근 몇 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린 극심한 미소지니(misogyny, 여성에 대한 혐오) 현상과 이에 대항한 여성들의 대응을 남혐으로 명명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 집단에게 가장 많이 취조한 내용은 여성주의는 일베와 다를 바 없다.”, “여혐이나 남혐이나 같은 이혐(異嫌)이다.”, “여성의 저항에는 동의하지만, 일베와 같은 방식에는 반대한다.”였다. (24)

 

성별 관계는 계급, 인종 문제처럼 정치적인 것이다. 지배 대 피지배, 중심 대 주변, 강자 대 사회적 약자, 주체 대 타자의 관계다. 그러나 대개 젠더 관계는 남녀상열지사’, ‘음양의 조화처럼 상///우가 균형 잡힌 대칭(/, sym/metry)으로 생각한다. (25)

 

양성 평등에 반대한다는 과격한 제목이 가능한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는 대칭적이지 않다(22, 소제목). 어느 책에선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미소지니(misogyny)’여성혐오로 번역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소지니여성혐오로 번역되면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어. 너희가 하고 있는 건 남혐(남성혐오)’이야. 너희가 여혐을 말한다면 우리는 남혐을 말할거야.

 

원래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인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가시화되면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이 같은 여성들의 사회 운동에 대해 여자들이 남성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비난한다며 이를 남혐현상으로 명명했다. 여성과 남성은 상호 혐오를 통해 드디어 평등해진 것일까? (10,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일까?>)

 

여당, 야당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쟤네가 더 많이 잘못했지만, 너희에게도 잘못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한 걸까. 기계적 중립이 정의일까. 죽다 살아나거나, 죽을 뻔 하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여혐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도 불편한 적이 많았어,라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 제대로 된 반응일까. ‘우리도, 우리도~~’라는 응석이 성인에게, 성인 남성들에게 이렇게나 많이 애용(?)되고 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비유하자면,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에 몇 배에 해당하는 발본적(撥本的, radical)인 변환이다.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을 임의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여성 노동력 동원을 일과 가정의 양립정책이라고 속이지 말고, 시민 사회와 여성 운동 세력은 여성의 과다한 노동 상황을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운동의 발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53)

 

그녀의 제안은 여성을 직장으로보다는 남성을 가정으로에 가깝다. 남성의 가사 노동 참여, 군대식 직장 문화 개선등을 통해 일과 육아,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노동하는 여성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의 문제이자, 남성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주장하는데(56),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남성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시 칼퇴근, 정해진 날짜에만 가능한 회식, 남성의 육아 휴직 강제, 획기적인 육아 수당 지급 등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런 강제력이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히게 된다면, 자신의 예쁜 아기를 아기띠로 매고 아내 손을 잡고 밤산책을 나가는 남성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선선한 가을 밤, 아내와아기와의 산책을 행복한 순간이라 느끼는 남성들이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런 남자가 많다고, 아주 많을 거라고, 난 믿고 있다.

 

매주 토요일만 기다리게 만들었던 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99일자로 연재를 마쳤다. 인기 코너였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연재가 끝나게 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이미 절판되어 어떻게 구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서평의 일부다. “이 책은 2의 성과 함께, 내가 여성학 공부를 시작할 때 외워버린 책이다.” 이런 구절에 혼자 흥분해서는, 2의 성을 바짝 끌어안고는 둥가둥가를 하곤 했다. 그녀는 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나는 굳이 여기에 이렇게 쓴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희진님.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사유이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반(反)담론(counter discourse)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양한 인식자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 입장과 조건을 경합하는 사유이다. (12쪽)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하면 안 된다)”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gender role,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24쪽)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정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참여하지도 않으며, 약속은 계속 변화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오해, 오식, 편견,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진리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백해무익한 정보가 절실한 신앙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는 신이 만든 공정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누군가 먼저 말한 사람(주체)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언어는 필연적으로 당파적이다. 이분법은 언어가 만들어지는 가장 일차적인 원리다. (29쪽)

젠더(gender, 性別)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3쪽)

평등 개념은 개인의 고유함(in/dividual, 타인과 공통분모가 없는, 양도 불가능한, 분할할 수 없는 몸)에 근거를 둔 가치다. 다시 말해,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sameness)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fairness)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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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2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계적 중립 정말 화가 납니다.
제 프사 보이시죠? 화 잔뜩 난 거.

단발머리 2017-09-22 14: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앞으로 어떻게 될려고~
근데 syo님 프사는 귀여운 맛이 있어서 화낸 마음 평가절하되겠어요 ㅋㅋㅋ

syo 2017-09-22 14:18   좋아요 2 | URL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얼굴이 시뻘개졌구만 ㅋㅋㅋ
컨셉은 ˝분노의 포도알갱이˝입니다.

단발머리 2017-09-22 14:33   좋아요 1 | URL
네, 자세히 보니 그렇군요.
가을은 포도의 계절~~
이제 분노의 포도알갱이가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기계적 중립, 극중주의라며 어정쩡한 스탠스로 국민을 속이려 한다면!!!
저도 분노의 포도알갱이로 변신하겠습니다!!! ㅎㅎㅎ
 
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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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녀 이야기속 배경이 되는 상상 속의 나라 혹은 미래 사회 길리어드는 성경의 가르침 중 남성에게 유리한 부분에 근거해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원칙과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다. 영문판 The Handmaid’s Tale의 헌사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이 시녀 이야기에는 없다. 본문에 나와 있기 때문에 뺀 것 같은데, 내 생각으론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이 구절이 중요한 부분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관심과 애정 그리고 The Handmaid’s Tale을 함께 보내주신 님께 감사드린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멀리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야곱은 사촌 라헬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위한 7년 무임금 노동을 라반에게 제안한다. 사랑하는 마음에 7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야곱. 하지만, 결혼식 다음날 아침, 술 깨고 정신차리고 보니,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 야곱은 라반에게 이게 무슨 경우냐며 크게 화를 내고, 라반은 이 동네는 언니 먼저 시집가야 한다며, 라헬도 아내로 주겠으니 7년 더 일하라고 한다. 7 더하기 714. 그렇게 야곱은 자매를 아내로 맞는다. 야곱이 사랑한 건 라헬 Rachel이지만, 아들을 낳은 건 그의 언니 레아 Leah. 남편의 사랑 없이도 레아는 연거푸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이 부분은 그 때 라헬이 한 말이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창세기 30:1-3)

 

시녀 이야기에서도 지체 높은 남자들은 파란 드레스의 아내를 공급받고,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빨간 드레스시녀배급받는다. 시녀는 인격으로서 대우받지 못 한다. 시녀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첩이나, 게이샤나 창녀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를 그 범주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우리들에게서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했고,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다. 특별한 총애 따위는 그쪽이나 우리 쪽에서 미리 알아서 정리할 테니 사랑이 싹틀 발판조차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 (236)

 

아내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은 남편의 아이를 낳게 될 시녀들을 증오한다. 시녀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눈 앞에서 아내들에게 아이를 빼앗긴다. 시녀의 존재 가치는 출산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기에 시녀는 아이 갖기를 소망한다. 남편은, 지체 높은 남자들은 의례의 밤마다 아이 만드는 의식에 참여한다. 시녀와 함께.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시녀와 함께. 그렇게 셋이 함께.

 

폐쇄적인 지배체계가 도래하는 방식 또한 놀랍다.

 

대재앙 직후, 그들은 대통령을 쏘아죽이고 의회를 기관단총으로 쓸어 버렸고, 군대는 계엄령을 선언했다. 당시 그들은 이슬람 광신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침착하십시오. 그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말했다. 상황은 완벽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

 

그 때가 바로 그들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을 때다. 그들은 한시적인 조치라고 했다. 거리에선 소요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밤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298)

 

대통령 사살(체포/감금), 의회 강제 해산, 계엄령.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동요하지 마라, 일상의 생활을 계속하라. 가만히 있으라.

그들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철저하게 물리력에 근거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가임 여성, 임신이 가능한 기혼과 미혼의 여성들을 시녀로 차출해 가는 과정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이 아니라 F(여성, Female)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306)

 

그들은 여성의 은행 잔고를 동결시킨다. 여성의 돈을, 여성에게서 빼앗으면서부터, 여성의 돈을 남편에게 귀속시키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특별 조치를 필두로 여성에 대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시작된다. 이제 여성은 돈을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행복했던 과거를 흔적 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절망적인 현재를 사는데 더 나을 것인지 생각했다. 이건 꿈일거야,라고 말하며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또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살 때의 절망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 생각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와 아이 낳는 그릇으로서의 여자, 그리고 그 와중에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읽는 시간 내내 무겁고 힘들었다. 무겁고 힘들었는데, 다시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창에 커서를 놓는다. 그리고는 자판을 두드려 이렇게 쓴다.

 

마거릿 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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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안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폭력적인‘ 리뷰네요...

단발머리 2017-09-06 14:31   좋아요 0 | URL
저의 폭력성이 syo님에게 잘 전해졌군요.
그럼 성공입니다. ^^

2017-09-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강렬하네요! 딱히 상상, 미래사회 같지 않아요 ㅠㅠ
마거릿 애트우드.

단발머리 2017-09-06 14:32   좋아요 0 | URL
네, 행복했던 과거와 암울한 현재가 계속해서 교차되는데, 아....
전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반했습니다.
애정과 경외의 반함이요^^

꼬마요정 2017-09-06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찾았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데 말입니다. 요즘 재조명 되면서 마치 어제 읽은 것처럼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아마 제가 여자라서일지도요.

단발머리 2017-09-06 14:33   좋아요 0 | URL
아... 꼬마요정님은 진작에 읽으셨군요.^^
전 이 책을 통해 처음 이름을 들었구요. 오늘 아침에서야 <눈먼 암살자>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 이제 막 끝나서 강렬함에 아직도 두근두근~~

cyrus 2017-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에게 ‘파란 드레스‘, ‘빨간 드레스‘를 입도록 강요하는 남성중심사회가 과거 현실에도 있었습니다. 마녀로 낙인 찍힌 여성, 창녀에게 특정 색깔의 옷을 입혔어요. 그렇게해서 남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단발머리 2017-09-06 14:35   좋아요 0 | URL
폐쇄적 통제 사회 속에서 남자들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편안합니다. 여자들의 희생으로 얻는 편안함이죠.
복잡하고 세세한 규칙 속에 여자를 밀어넣고 강제하는 건 남자들이고,
밤마다 규칙을 벗어난 여자들 혹은 벗어나도록 용인해준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남자들이죠.
흐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정희진 외 62인 지음, 김지선 옮김, 알렉산드라 브로드스키 & 레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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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We want more.’의 외침이 현실로 이루어진 유토피아를 한국과 미국의 페미니스트 64인의 에세이, 픽션, , 그림, 인터뷰로 담아냈다. 정희진의 <동네급식소>를 읽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배운 여성이었던 어머니가 전업주부가 되어 아버지의 ()’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차려 놓은 밥도 못 드시는 아버지. 수저통에서 수저가 나와 있어야 하고, 옆에서 생선을 뜯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밥을 드시는 아버지(54). 물론이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 아버지들이 그러했고, 요즘에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에도, 바로 이 순간에도 오늘 저녁 반찬을 걱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취업, 계층, 비혼 여부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산다. 계급을 초월해 남성들은 이 고민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들은 그 시간에 정치와 문학과 술과 여자를 논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주의 이론에서 여성들 간의 공통점, 즉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가능한 것은 섹슈얼리티(성폭력과 모성)라고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밥이다. (55)

 

모든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모든 남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이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 가끔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저녁에는 뭐 먹어? 이런 경우는 고민이라기보다는, 고민에 대한 을 구하는 경우다. 오늘 저녁에는 뭐 하지?가 아니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할거야?의 물음.

 

정희진은 그 해결책으로 동네 급식소를 제안한다.

 

여성들의 식사 준비 스트레스, 노동, 고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또 음식 낭비를 막기 위해서 최소한 열 가구 단위로 급식소가 있어야 한다. 이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누구나 언제든지 들러서 이용할 수 있다. 노숙자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우선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친환경 유기농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24시간 개방 무료 식당이 500미터 간격으로 있는 것이다. 이 정도 간격이면, 식후 걷기를 위해서도 좋다. 편의점이나 ‘00 바게트100미터마다 있지 않은가!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농촌은 배달 차량을 운영한다. 한마디로, 집에서는 취미외에는 식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56)

 

 

무척이나 애청하던, 시즌 2를 고대하는 <알쓸신잡>에서는 이런 장면을 보았다.

    

 

 

 

 

 

 

김영하 : 저희 집은 요리는 거의 다 제가 해요. 제 처는 졸업했어요, 요리.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있더라고요. 주부니까. 아예 그런 걸 없애기 위해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하고.

 

집에서 자신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여성(남성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여성)을 고용할 수 있는 극소수의 여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뭐 할까에 자유로운 사람을, 한 명, 찾기는 찾았다. 여기 있다, 은수씨.

 

 

아침에 읽은 책 속에 인용된 시를 재인용한다(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민음사, 2003).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

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

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 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를 따라 쓰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멈춘다. 오늘 저녁 뭐 할까. 감자국 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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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8-30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씀 중 저 부분이 가장 멋졌어요.
어쩜 단발머리님이 똬악~캡쳐를!!!
멋집니다^^

단발머리 2017-08-30 21:15   좋아요 1 | URL
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 뭐, 이런 행복한 경우가 있나~ 해서요 ㅎㅎㅎ

AgalmA 2017-09-02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담배 안 피는 여성인데도 폐암 선고 받은 일 관련해 여러가지 요인 추정이 있었는데요. 간접흡연보다 더 충격적인 건 부엌에서 일 많이 하면 가스불 흡입량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얘길...도시괴담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 여성들이 이제껏 오죽 부엌데기였으면 이런 말이 나올까 싶기도 했다는...

단발머리 2017-09-05 20:56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저도 그런 기사 본 것 같아요.
그래서 가스레인지도 광파가스레인지로 많이 바꾸기는 하던데....
요리 자주 안 했던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