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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생활자의 요가 - 생각 많은 소설가의 생각 정리법
최정화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평점 :
구원으로서의 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편 읽어봤는데, 이 책은 또 나름대로 의미와 재미가 있다.
학교에서 제일 많이 나를 곤란에 빠뜨린 과목은 늘 체육이었다. 한 번도 내가 체육을 좋아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한 욕을 듣거나 매를 맞은 때도 체육시간이었다. 국, 영, 수 시간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7쪽)
여기까지. 여기까지 나랑 똑같다. 나와 달라지는 지점은 저자가 장편소설을 준비하면서 체력 보충을 위해 요가를 시작하는 지점부터다.
동네 주민을 위한 요가 수업에 일 년 반 정도 나간 적이 있는데,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강좌라서 50대부터 70대까지의 어머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스트레칭에 가까운 쉬운 동작이 주를 이뤘고, 그런데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자세가 꽤 있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고 언니가 접수해 주어서, 같이 가주어서 시작한 운동이라 툭하면 빠지기 일쑤였다.
꾸준히 하다 보니 순서에도 익숙해지고, 묘기처럼 보였던 쟁기 자세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잘하려고 한 적이 없고 그냥 몸에 좋으려니, 언니가 하자고 하니까, 수업 끝나고 언니들이랑 잠깐 놀 수 있으니까, 그렇게 수업에 참여했다. 안 되는 자세를 해보려고 힘써 본 적이 없었다. 하다가 안 되면 매트 위에 살포시 누워버렸다. 다리로 하는 동작들은 어렵지 않았지만, 코어의 힘이 약하고 팔 힘도 약해서 팔을 이용해 몸을 떠받치는 동작은 모두 어려웠다. 드세요!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하나 늦게 시작해서, 그만! 하시기 전에 혼자 내려왔다. 무리하지 말라, 는 선생님의 충고를 지나치게 충실히 따랐다. 무리한 적이 없으니 힘들지도 않았다. 운동을 마치고 느끼는 몸의 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개운할 만큼 애쓰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런 나다. 심지 않고 거두려 하고,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 하고, 애쓰지 않고 받으려 하는, 도둑 심보를 가진 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결국 이런 나다. 열심히 하지 않는 나. 포기가 쉬운 나. 늦게 시작하고 먼저 끝내는 나.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자체적으로 휴식 시간을 갖는 나.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동작은 아무 힘도 쓸 필요 없는 사바 아사나였다. 지금은 틈만 나면 하는 동작인데 처음에는 그 자세로는 아무래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일단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이완하지 못하게 했다. 모르는 사람이 곁에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힘을 풀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누군가는 거친 호흡을 하고 있다. 나는 사바 아사나 시간에 오히려 더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누군가와 그렇게 가깝게 있다는 것은 나를 긴장 상태로 몰고 갔다. (68쪽)
45분 요가 수업을 마치면 마지막 수련 자세는 ‘사바사나(Sabasana)’다. 사바사나는 말 그대로 매트 위에 누워있는 게 전부다. 턱을 당기고 다리를 편안하게 벌리고, 팔을 몸 옆에 그대로 놓고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하고 손가락에 힘을 빼고.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호흡을 통해 몸을 치료하는 수련이 사바사나다. 요가는 미용상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련을 위한 운동이다. 복잡한 동작을 배우고 익혀서 이효리 같은 동작을 따라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원하는 바가 그쪽이라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 사진 참조), 결국 요가 수련을 통해 도달하고자 목표는 명상이다. 사바사나는 명상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다. 단순하게 누워서 쉬는 자세 같지만, 사바사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바사나가 쉽지 않은 이유다.
45분 요가 수업을 마치면 ‘사바사나’다. 나는 ‘사바사나’가 너무 좋았다. 수련에 열심히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내내 쉬었는데, 공식적으로 쉬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매트에 똑바로 누워 팔, 다리, 손가락의 힘을 빼고 명상에 빠지는 그 짧은 5분이 그렇게나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빛 때문에 깨어난(?) 나는, 다른 분들은 이미 선생님과 인사하기 위해 바르게 앉아 있는 걸 보게 됐다. 나는 이제 막 일어났는데. 괜히 옆에 있던 언니에게 짜증을 냈다. 언니! 나 왜 안 깨웠어요? 그 다음 주였다. 이번에는 나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바르게 앉았는데, 내 앞에 옆의 옆에 앉으신 분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하신다. 아이고, 누가 코를…… 그 누구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차가운 마룻바닥. 피곤하지 않은 오전 시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있노라면 걱정이, 염려가, 딴생각이 몰려올 것 같기도 하다만. 아, 나는 사바사나 전문가가 되어서는 끝도 알 수 없는 명상의 저 어느 깊은 곳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아! 나의 명상이여! 아! 나의 사바사나여!
별로였던 요가 수업을 계속하게 해준 나의 즐거운 사바사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다음 수업부터 ‘사바사나’ 시간에는 진정한 명상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처음에는 딴생각을 했고, 그다음에는 ‘오늘의 할일’을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혼잣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오늘의 기도’를 했다. 의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50분 수업 시간 중에서 가장 애쓰는 시간이 되었다. 진정한 명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물론 수면은 사바사나와 다르다. 수면은 생리적인 의식 상실 상태로서, 외부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상태인 데 반해, 사바사나는 의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며 몸의 순환에 집중하며 에너지와 호흡을 느끼는 수련이다. 하지만, 깊이 있는 명상의 순간과 수면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꿈과 환상과 깨달음은 수면과 사바사나 중 어느 한 곳에만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몸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얕게 호흡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가는 과정은 수면인가 아니면 사바사나인가.
즐거운 사바사나 시간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코로나 시대에는 홈트를 통해 새로운 사바사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무리하지 않기. 늦게 시작하고 빨리 끝내기. 마무리는 사바사나로. 이제 결심만 남았다. 어디 보자, 결심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