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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길이 다른 이유
양혜원 지음 / 비아토르 / 2018년 11월
평점 :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수년간 70여권의 기독교서적을 번역했으며, 목회자의 아내이기도 한 저자 양혜원은 카톨릭 신자인 박완서와 공지영의 젠더와 종교 경험 주제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를 수료했으며,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에서 종교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연구 활동 중이다.
나는 여성학에 빚진 게 많다. 지금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도 여성학에서 배운 바에 많이 기인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 여성학은 내게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출구가 되어 주었고, 그만큼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나 여성학을 하면서 또 경험한 것은 여성학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속으로 존경하는 이 여성들은 여성학에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우리는 여성을 부당하게 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에 계속 분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과의 화해는 타협일 뿐이었다. (18쪽)
책의 부제가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길이 다른 이유>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이 어떤 식으로 결론지어질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읽기다. 저자는 리타 그로스의 『페미니즘과 종교Feminism and Religion: An Introduction』(청년사) 속 ‘종교’에 대한 정의를 인용해 페미니즘이 신념 체계의 하나로서 작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종교로서의 페미니즘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신념’의 전달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기독교를 경험한 저자로서는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에 관해 부정적이다. 4년여간의 미국 유학 생활 중에 페미니즘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해 가는데 한계를 느낀 그녀의 결론은 이러하다. 페미니즘 공동체 보다는 기독교 공동체가, 페미니즘 서사 보다는 기독교 서사가 나를 더 정확히 설명해준다.
아시아 여성 신학에 대한 서구의 기대 역시 저자의 이런 생각을 강화했다. 흑인 여성, 인디안 여성, 남미 여성과는 상황과 조건이 분명하게 상이한데도 ‘제3세계 여성’이라는 거대한 범주 속으로 내던져진 ‘아시아 여성’이라는 상은 서구 페미니즘 카테고리 중 하나일 뿐이며, ‘아시아 여성’이라는 위치 혹은 재현이 현재 한국 여성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면서 갈등 많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애쓰는 교회의 여성들, 무보수 가사/육아 노동에서조차 나름의 의미를 찾고 보람을 느끼는 전업주부 여성들 등 저자가 만났던 많은 여성들의 경험과 삶이 상대적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했다.(54쪽) ‘의식화’ 되지 않은/않을 여성에 대한 비난, 가정제도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심은 저자로 하여금 페미니즘의 한계를 확인하게 할 뿐이다.
저자의 생각에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더러 있었지만, 페미니즘이 여성학이라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 일반 여성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가 닿아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에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페미니즘을 미워(?)하는 개신교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목회자의 아내인 그녀로서는 그것마저 큰 도전이 아니었을까 싶어서다.
여성 서사에 대한 그녀의 말은 귀 담아둘 만하다.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기록을 계속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오늘따라 유독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남성보다 결코 작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다 표현할 적절한 서사와 언어를 찾지 못할 때가 많다. ‘단지’ 여성으로 축소되지도, 남성의 서사를 어설프게 따라가지도 않는 우리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는 일단 이렇게 저렇게 많이 써 보는 수밖에 없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되지 못한다. (12쪽)
나는 여러 번, ‘페미니즘과 기독교’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써보려 했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실패했다.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위치에 대한 인식은 항상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제3세계에 속하지만 이미 제1세계에 버금가는 물질 문명을 누리고 있는 나.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 전업주부라는 단어가 ‘기생’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시대이지만, 가정 밖으로 나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환경 속의 나.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교회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나. 하나님을 아는 나. 하나님을 경험한 나.
인간 구성 요소 중 물이 70%라고 해서 인간은 대체로 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 사회, 문화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나’의 생각과 신념이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상, 세상은 예전과 똑같지 않다. 페미니즘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이제 뒤로 돌아서거나 물러설 수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주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게 나다. 본질로서의 나, 영혼 속의 나에 대해 페미니즘은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지난주부터 ‘세이레(3주) 특별새벽기도회’ 기간이라 새벽마다 교회에 간다.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아 첫 주에는 참석과 불참을 퐁당퐁당했는데, 이번주에는 찬송가 반주라 어쩔 수 없이 삼일 연속으로 참석했다. 마지막 찬양 반주를 마치고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기도를 했다. 최근들어 자주 하는 기도, 바로 그 기도를 했다.
주님, 제가 읽는 페미니즘 책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수 있을까요.
주님, 제가 읽는 페미니즘 책들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답을 들을 때까지.
보통은 그 분의 답을 들을 때까지, 나는 기도를 한다.
답은 그 분의 몫이고 나는 질문을 한다.
질문과 기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여성의 인권을 지지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깊고 복잡하다.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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