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명이 모였고요.

소크라테스를 공부하였습니다.

 

철학을 몰라도 철학자하면 맨 먼저 머리에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의 무엇이 그를 철학의 대명사로 만들었을까요?

사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렇다 할 철학적 이론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다수의 대화편들은 모두 플라톤이 남긴 저작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한 일은 아고라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붙들고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입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존재조차 모를 뻔 했습니다.

아,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 플라톤 한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세밀하게 스승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긴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손과 머리를 통해 전해진 소크라테스는 온전히 소크라테스 그 자신인지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으로 가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딱 분리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이 초기에 쓴 대화편들은 비교적 소크라테스 자신을 충실히 묘사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우리나라에서도 합본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파이돈』『향연』이 그것입니다.

『향연』은 작년에 정암학당에서 펴낸 번역본으로 읽었고, 나머지 세 대화편은 이번에 읽었습니다.

『향연』도 그다지 긴편은 아닌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과 『크리톤』은 각각 50쪽과 20쪽 정도  『파이돈』은 110쪽 정도입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강유원 선생님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방법론으로서의  변증술, 소크라테스의 핵심 주장,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차이입니다.

변증술dialektikē 은 논박술elenchus(elenkhos)과 산파술maieutikē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논박술은 대화 상대를 아포리아(막다른 골목, 난문)로 몰고가서 당혹감에 빠뜨린 후 이전까지 확신을 갖고 있던 것들에 대해 근원적 회의를 하도록 만듭니다.

근원적 회의를 통해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 앎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입니다.

논박술에 이은 산파술은 진리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의 공적으로 돌려서 옳은 것들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귀납적 논구와 보편적 정의이다."

귀납적 논구가 변증술에, 보편적 정의가 산파술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올바름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관습적으로 혹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올바르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논박하여 올바름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산출하는 것이 변증술이라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수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현명하다고 이름난 각분야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소크라테스는 논박술을 이용하여 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자인하도록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갑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이른바 현인들은 부득부득 이를갈며,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수 없이 소크라테스에게 동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지를 자인한 후 진리 즉 보편적 정의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분노를 품게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이들에 의해 아테나이 법정에 서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 과정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무척 재미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소된 죄목을 특유의 논박술로 깨부순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아테나이 시민들을 잠에서 일깨운 공로로 자신에게 상을 줄 것을 법정에 요구합니다.

이것은 당대 아테나이의 정치적 상황에서 자살적인 행위인 동시에  아테나이 시민을 향한 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형선고 이후 슬퍼하는 친구와 제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뿐입니다."

 

 

다음주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플라톤의 철학을 공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플라톤 - 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자? p 103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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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제를 공부하였습니다.

정치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슬슬 놀면서 하였습니다. ?

열 명이 참석하였고요.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시대부터 조운제도가 있었습니다.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치게 된 고려는 조세로 걷어들인 곡식을 배를 이용하여 바닷길이나 강을 따라 개경까지 운송하였습니다.

전국에 13조창(漕倉)을 두고 가까운 고을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5월에 운송하였습니다.

조창, 조운 등의 '조漕'는 배로 실어나른다 혹은 배를 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도 선박이 값싸게 대량의 화물을 운반하는 주요 수단인데, 도로와 수레 등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에는 배를 이용한 운송이 가장 효율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선 전기에는 9개의 조창이 있었습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덕성창, 법성포창, 영산창이 있었습니다.

나주 조운로는 사고가 잦아서 중종7년(1512)에 폐쇄됨에 따라 영산창도

없어지고 영산창으로 운송되던 세곡은 법성포창이 담당하였습니다.

익산에 있던 덕성창이 군산으로 이전하여 군산창이 되면서 법성포창 관할 고을을 일부 넘겨 받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창은 필요에 따라 추가, 폐쇄, 이전되어서 그 변천을 정확히 알려면 매우 복잡합니다.

조선 전기 영산창이 패쇄되었지만, 후기에 와서 익산에 성당창이 하나 더 생기면서 전라도 지역의 조창은 군산창, 성당창, 법성포창으로 다시 3개가 되었습니다.

군산창은 전성기에 25개 고을의 세곡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 사상이 발달하여 관이 아니라 사상이 운송하는 세곡이 많아짐에 따라 조창이 쇠퇴하였고, 군산창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7개 고을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조창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시험에 자주 나오는 조창은 충주의 가흥창, 아산의 공진창, 원주의 흥원창 정도 인것 같습니다.

특히 가흥창은 경상도의 세곡이 집결된 곳으로 이 세곡은 남한강을 따라 경창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대부터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기본적인 조세(광의의 의미)는 조세(전세), 공납, 역입니다.

조세는 토지, 군역은 정남 (요역은 호), 공납은 가호를 수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 기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수취제도는 조선 초기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해서 후기 세도정치기에  극에 달합니다.

조선 전기에 가장 수탈이 심했던 것은 공납입니다.

경저리, 서리, 상인들이 결탁하여 농민들이 직접 특산물을 납부하는 것을 방해하고 (방납), 농민들로부터 수십 혹은 수백배의 대가를 받고 대신 구매하여 납부하는 방납이 자행되었습니다.

중종 때 조광조, 선조 때 이이, 유성룡 등이 공물 대신 쌀로 걷어서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안을 내놓았지만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방납업자들은 중앙의 고위 관료와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임진왜란 이후 민생과 국가재정이 파탄되자, 수취제도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08년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대동법이 실시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고장마다 각각 다른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대신 모두 통일하여 (대동) 쌀이나 포 혹은 동전으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기까지 100년이나 걸린 이유는 양반 지주들이 극렬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대동법이 혁신적인 세제로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특산물을 곡식으로 납부하도록 하는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취의 기준이 혁명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가호의 등급에 따르기는 했지만) 집집마다 부담해야 했던 공납과는 달리 토지 1결당 12두를 납부하게 함으로써 수취의 기준을 가호에서 토지로 바꾸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은 세를 부담해야 했으므로 양반지주들이  제도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명종 이후 지주전호제가 확산됨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사실상 지주는 거의 양반이고 일반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소작농민은 대동미를 하나도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혼란을 틈타 지배층은 어떤 제도 아래서도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게 됩니다만.

 

 

다음주는 조선 경제에 이어 사회를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노트>

 p 71 ~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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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명이 함께하였습니다.

본격적인 희랍철학에 들어왔구요.

희랍철학이라고 하면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원전 7세기말에서 기원전 6세기초에 시작된 희랍철학은 에게해 동쪽의 소아시아가 출생지라 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지역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퍼져나갔다가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야 희랍본토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자 솔로몬과 히긴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을 하나의 물질에서 찾았던 자연철학자들이 그 첫 번째입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 아페이론을 내세웠던 아낙시만드로스, 공기라고 했던 아낙시메네스가 있습니다.

세 번째에 분류된 철학자들 역시 자연철학자들입니다.

다만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복수의 혹은 수많은 물질들을 근원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두 번째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연철학자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주의 작동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법칙 혹은 숫자라고 한 철학자도 있고, 세계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원화되어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도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가상들의 세계에 불과하고 참된 세계는 누스로만 파악할 수 있는 초월적 일자의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사고는 플라톤으로 이어져 형이상학의 계보를 만들어 갑니다.

 

 

다음주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입니다.

우주의 근원을 탐색하던 철학이 인간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읽어올 내용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87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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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만에 조선 정치사를 마쳤습니다.

무엇보다 인명이 많이 나와서 힘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 것 같아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들춰보니,

한 시대를 휘둘렀던 인물들이라 몇 전년 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도

이럴 수 있나 싶었습니다만, 나이탓이려니 합니다. ;;

오늘은 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선조부터 시작된 붕당정치는 광·인· 효· 현을 거치며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공론을 중히 여기며 당파간 경쟁도 견제와 균형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숙종 시절부터 당파 투쟁의 성질이 급변합니다.

이른바 숙종식 탕평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조선후기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한번 권력을 놓치게 되면 재기하기 힘든 승자독식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탕평책은 조선후기 정치의 극심한 폐해가 되어버린 당파 투쟁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입니다.

미봉책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은 탕평책이 붕당을 혁파하고 정치 제도를 구조적으로 변혁한 것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의 쟁투를 일시적으로 억눌렀던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숙종과 영조, 정조 시대에 탕평책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정조 사후 허약한 왕권이 이어지면서 이전에 이룩했던 탕평책의 성과가 역효과를 발휘하여 민생이 더욱 피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신교의 거센 확산에 놀란 구교는 교리를 정비하고 교세 확장에 나섰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을 비롯한 동양으로 가톨릭 선교사들이 포교에 나섰습니다.

대표적인 종파가 예수회입니다.

명말-청초에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포교활동과 함께 서양 과학을 전파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7세기 초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도 크리스트교가 유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에 서학이라 불린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적 관심보다는 학문적 관심에 의해서 도입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8세기 정조때부터 서학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조의 탕평 정치에 반대하던 노론의 벽파가 앞장서서 서학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이들을 공서파라고도 불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정조는 정학이 바로서면 사학은 자연히 없어진다는 논리로 서학 탄압에 미온적이었지만 전라도 진산에서 어머니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여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있었습니다.

1791년 정조 15년의 신해박해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순조가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는 벽파 즉 공서파의 핵심인물입니다.

정학을 바로세워 사학을 다스린다는 서학에 대한 정조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선언하면서 대대적인 천주교박해를 실시하였습니다.

신해박해 10년 만에 일어난 신유박해입니다.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 박해는 완화되었습니다.

헌종의 집권으로 풍양 조씨 가문이 득세하면서 다시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습니다.

헌종때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가 있었습니다.

 

 

다음주는 조선 경제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67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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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명이 함께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철학의 서론에 해당하는 공부를 하였습니다.

 

인간이 농사를 짓고 배를 타고 나가면서 더욱 간절히 올려다보게 된 하늘, 그 우주에 대한 사색이 고대 우주론을 탄생시켰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탐구는 또한 인간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탐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우주와 인간사회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우주-소우주 모형이라고도 하는 이 신인동형설에 따라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과 행위는 인간의 그것과 닮게 됩니다.

 

희랍신화는 고대 희랍인들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는 고대 희랍인들이 생각한 우주의 구조와 생성 과정에 관한 논의가 들어있습니다.

강유원의 『철학 고전 강의』가 첫 번째로 다루고 있는 고전이 <신들의 계보>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주론은 철학의 가장 주요한 분과라 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입니다.

 

<신들의 계보> 중 우주 생성에 관한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철학 고전 강의』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내게 이것들을 처음부터 말씀해주소서, 올륌포스의 집들에 사시는

무사 여신들이여, 그들 중 어떤 것이 처음 생겼는지 말씀해주소서.

맨 처음 생긴 것은 카오스고,

그다음이 눈 덮인 올림포스의 봉우리들에 사시는 모든 불사신들의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인 넓은 가슴의 가이아와

〔길이 넓은 가이아의 멀고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라와〕

불사신들 가운데 가장 잘생긴 에로스였으니,

사지를 나른하게하는 에로스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이성과 의도를 제압한다.

카오스에게서 에레보스와 어두운 밤이 생겨나고

밤에게서 다시 아이테르와 낮이 생겨났으니,

밤에 에레보스와 사랑으로 결합하여 이들을 낳았던 것이다.

가이아는 맨 먼저 자신과 대등한 별 많은 우라노스를 낳아

자신의 주위를 완전히 감싸도록 함으로써 우라노스가 

영원히 축복받은 신들에게 안전한 거처가 되게 했다.  

 

최초로 출현한 세 가지 원초적인 힘은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입니다.

카오스는 구별없는 혼돈 즉 공백, 틈입니다.

이 공백을 가이아로부터 탄생한 우라노스 그리고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이 채워나갑니다.

에로스는 우주의 원초적 생식력입니다.

에로스가 신들과 인간을 이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랑으로 결합하게 만듭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가는 단계에는 분리와 (재)결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카오스는 구별없는 혼돈이므로 한덩어리입니다.

코스모스, 질서있는 세계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의 신화는 하늘과 땅의 분리에서 시작됩니다.

분리 후에는 분리된 것들의 결합이 일어나서 또다른 존재들을 탄생시킵니다.

분리된 것들의 결합은 보통 근친상간으로 표현됩니다.

근친상간은 우주를 가득채울 다양한 존재자들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결합은 인간사회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아와 타자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엄마와의 분리, 나와 타자를 분리하여 인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와 타자가 분리된 채로만 지속되면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재결합 즉 관계맺기를 통해 사회의 구성원,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우주탄생 신화처럼 분리와 결합을 거쳐야만 질서있는 사회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희랍철학에 들어갑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70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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