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했구요.
카페에 손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중년의 남자분이 등을 돌리고 공부를 하는 것 같았는데요.
부끄러웠습니다.
3년 가까이 카페에서 스타디를 해왔지만,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하는데, 그분의 귀에 제 말이 들렸을 것을 생각하니 진짜 부끄럽더군요.
부디 그분이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
우리의 철학 공부는 이렇게 위태합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는지, 그야말로 " 너 자신을 알라" 고 논박술을 펼쳐줄 소크라테스를 갈망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 다음주도 꿋꿋이 해야겠죠? ^^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의 철학자입니다.
세상 만물을 분류 탐색하여 우주의 원리를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학문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이라는 큰 분류 아래 각각의 세부 학문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론학에는 자연학, 형이상학, 수학이, 실천학에는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이, 제작학에는 수사학과 시학이 포함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학문의 도구로서의 논리학이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함께 희랍 철학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철학 전반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 더 훌륭한 수준으로 그는 자신의 시대 이후의 철학이 걸어갈 길을 규정했다. 그는 형이상학적 물음들의 깊은 지층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정신이 사물들의 존재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또한 지금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한 한계들 안에서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그리고 철학사 전반에 걸쳐 아주 뛰어난 두세 명의 전력에 의해서만 수정되었던, 분과로서의 논리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너무 방대하므로, 그리고 지루하고 이루말할 수 없이 꼼꼼하다고 합니다, 철학사 차원에서 개략적으로 훑는다고 해도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공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스타디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것은 논리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이었습니다.
논리학은 '올바른 사유의 형식과 방법에 관한 이론' 입니다.
사유는 개념에 의해서 전개됩니다.
개념 규정된 말, 의미있는 말을 logos라고 합니다.
logos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즉 본질을 말해줍니다.
'A는 B이다.' 의 형태로 개념이 규정되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필수적인 종과 유 그리고 종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은 사기치는 포유류다."
인간은 종, 포유류는 유입니다.
포유류에는 인간 뿐 아니라 곰, 돼지, 소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포유류다.' 는 말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개념이 그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차가 부연되어야 합니다.
곰, 돼지, 소 등 같은 포유류에 속하는 다른 종들과 인간 종을 구별짓는 본질적인 차이, 그것이 종차입니다.
예시문에서 '사기치는' 은 인간 포유류에만 속하는 특징입니다.
물론 '사기치는'을 본질이라고 하면 너무 슬픕니다만, 재미있는 예시라고 생각하고 예로 들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다' 고 하였습니다.
희랍 폴리스 시대에 인간 즉 시민은 폴리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본질 즉 종차는 폴리스입니다.
여하튼 개념 정의된 말 즉 로고스는 그 대상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다시 위의 책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기에 진리의 도구다. 사물들의 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거쳐간다. 즉 인간은 사물들을 발견하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진리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물들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존재와 그 존재를 알고 표현하는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토대는 앎, 소피아, 철학이다. 철학에서 존재는 자기의 진정한 실재를 진리의 빛 속에서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을 계승하였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플라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이데아들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나뉘어 있습니다.
현상세계의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모방물이거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이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들이 아니라 이데아를 탐구했던 것은 이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형상은 사물과 별개로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속에 있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것이 형상인데 어떻게 형상이 사물들 밖에 있을 수 있는가 반문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형상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은 형상내재론이라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이 사물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물안에 형상 즉 본질적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과 사물은 분리불가분의 하나입니다.
이를 우시아라고 하는데, 우시아는 '형상을 내재한 각각의 사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다섯 단계로 설명합니다.
감각 → 기억 → 경험 → 기술 → 학문적 인식(episteme) 까지는 사물에서 시작하여 이를 수 있는 앎입니다.
학문적 인식은 논증적 앎, 원리들에 대한 앎입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의사는 환자가 느끼는 감각에서 시작하여 많은 환자를 상대하며 얻은 경험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처방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의대에서 두통의 원리 등을 모두 공부하여 학적 인식까지 성취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의사도 환자도 왜 하필 그에게 유독 그런 질환이 일어났는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1원리는 학적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하느님의 뜻" 혹은 "업보" 로 받아들이는 것이 희랍철학의 제1원리, 근본원인과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을 누스라고 했습니다.
누스를 통해 직관적인 앎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피스테메와 누스를 모두 획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혜 즉 소피아에 이릅니다.
대상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의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근대 자연과학자들은 학문적 인식을 목표로 하지, 제1원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보다 자연과학자의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를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철학자 중의 철학자가 플라톤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고, 저는 당연히 누가 제 일의 철학자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스타디 교재로 사용하는 『세상의 모든 철학』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에서 앎의 층위를 논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희랍철학은 초월적인 세계에 있는 것을 제1원리로 삼고 그것에 근거하여 학문적인 인식을 추구한다."
희랍철학에서 앎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형이상학』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
강유원 선생님은 이 말을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로 꼽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 플라톤의 『향연』에서 인간을 앎으로 이끄는 에로스, 에로스의 사다리 윗층을 차지하는 앎의 아름다움 등 희랍철학에서 앎, 이성, 사유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 중의 최고의 앎은 테오리아, 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적 사유, 사유에 대한 사유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불멸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최고의 행복은 테오리아, 관조적 삶이라고 합니다.
신적인 삶은 말그대로 신의 삶이니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꿈꾼 스승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살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다음주는 조금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양대 산맥을 넘었으니, 웬만한 길은 평탄하게 느껴지겠지요.
고대 철학의 마무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135 ~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