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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ㅣ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평점 :
얼마 전 체스터튼의 책을 읽으며 영국 추리소설의 계보를 찾아 본 적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에서 코난 도일, 체스터튼, 아가사 크리스티로 이어지는데, 포와 코난 도일 사이에 뜻밖에도 찰스 디킨스가 있었다. 그 유명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정작 읽지는 않는, 디킨스가 추리소설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 인 디킨스는 포와 함께 추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모양이다. 실제로 디킨스는 미완성 추리소설을 남기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을 때, 이 책이 내가 완역본으로 읽은 디킨스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받은 느낌은 아주 몽환적이지만, 추리소설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 독자가 가장 많이 읽은 책!’ 이라는 광고에 솔깃해서 선택한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니, 왜 디킨스를 빼고는 추리소설의 역사를 쓸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거의 끝날 때까지, 사건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 퍼즐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비로소, 왜 그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그곳에 있는지, 무엇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때까지 독자는 오백여 쪽의 흐릿한 어둠 속을 팽팽한 긴장 속에 내쳐 달릴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서야, 희끄무레하던 형상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얼굴을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이렇게 숨 가쁘게 내달린 끝에 이렇게 놀라운 탄성을 질러냈던 추리소설을 내가 예전에도 본적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를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추리 이전에 이것은 역사이다. 더없이 숭고했고, 또 말할 수 없이 광기에 가득 찼던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859년 작 『두 도시 이야기』는 1862년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1789년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하며 1871년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10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두 도시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1789년 대혁명의 시대는 혁명이 화산처럼 폭발하여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열정과 광기의 시대였다. 자유와 희망의 시대였지만 또한 파괴와 학살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왕의 목을 날려 버린 민중들은 희망에 들떠있었다. 한편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은 희망과 절망이, 혁명과 반동이 되풀이 되는 기나긴 과정에서 일어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혁명의 성과는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혁명에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은 혁명에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역사는 묵묵히 새로운 시대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디킨스와 위고, 둘 중 누가 프랑스 혁명을 더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디킨스가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인인 위고에 비해 좀 불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디킨스 역시 위고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작품 속에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열렬한 혁명주의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두 도시 이야기』와 『레미제라블』모두 혁명을 배경으로, 혁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혁명의 이념 보다는 인간의 사랑을 구원의 힘으로서 강조한다. 루시와 코제트라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소녀)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숭고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아베쎄의 벗들’ 이라는 이상주의적 학생들을 통해 혁명의 이념을 긍정하는데 비해, 디킨스는 ‘드파르주 부인’을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함으로써 혁명의 이상 보다는 혁명의 어두운 현실, 그 파괴와 광기에 우려를 나타낸다. 위고가 1832년 6월 봉기를 소설의 핵심 배경으로 삼은 것도 비록 서투른 이상주의자들의 실패한 봉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과 이상만은 숭고하게 기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 디킨스가 유독 기요틴의 칼날 아래 하루에도 수 백 명 씩 죽어나가던 자코뱅의 공포정치에 집중한 것은 혁명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이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런지.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어떤 해석이나 평문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 첫 느낌은 그렇다.
그런데 혁명은 파괴와 공포 없이 가능한 것일까? 한 방울의 무고한 피에도 혁명은 불의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레미제라블』1부에는 공포정치시대에 국민공회 의원을 지낸 노인과 미리엘 주교의 긴 대화가 나온다. 예전 글에서 조금만 옮겨와 보겠다.
「국민공회 의원은 손을 뻗어 주교의 팔을 잡았다. "루이 17세!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요? 죄 없는 아이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겠소. 하지만 왕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소. 카르투슈(1693~1721년. 파리 부근에 출몰했던 도적단의 두목. 산 채로 수레바퀴 형에 처해졌음)의 동생은 단지 그의 동생이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묶인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었소. 이 죄 없는 소년의 죽음은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성의 탑 속에서 죽어간 루이 17세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 "거듭 말씀 드리오만," 하고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꺼냈소. 이 점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싶소. 우리들은 죄 없는 사람들, 순교자들, 어린아이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는 거지요? 그건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793년 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루이 17세 이전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오. 나도 당신과 함께 국왕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신다면."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하고 주교가 말했다. "평등하게 말이지요!" 하고 G가 외쳤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루이 17세는 마리 앙뜨와네트와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과 왕비가 기요틴 아래 목을 잃었고, 그들의 어린 아들 루이 17세도 죽었다. 단지 국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오랜 세월 민중의 아이들은 단지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굶어죽고 맞아죽고 병들어 죽었다. 혁명이 없었다면 민중의 아이들은 수 백 년이 흘러도 또 수없이 죽어나갔을 것이다. 왕의 아들의 죄 없는 목숨 하나와 수 없이 많은 민중의 아이들의 죄 없는 목숨들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빅토르 위고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왕의 아들은 단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왕의 아들이 왕의 죄와 관계없다면, 왕의 아들은 왕의 부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죄의 물림에는 부당함을 외치면서도 부의 물림에는 한마디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왕은 사라졌어도 부의 물림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왜 아무도 묻지 않을까?
『두 도시 이야기』의 디킨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는 누구도 핍박하지 않았고,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다. 응당 자신이 받아야 하니 내놓으라고 가혹하게 대하는 그런 사람과도 거리가 멀기에 스스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고, 그런 혜택이 없는 세상으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힘으로 밥벌이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가벨은 서면 지시를 받아 복잡하게 얽힌 재산을 관리하면서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얼마 되지 않지만 줄 수 있는 것 - 겨울에는 연료를, 여름에는 여분의 곡식 따위를 -을 주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탄원서라든지 증거물에 이런 사실을 기록해 두었을 테니 필요하다면 보여 주면 될 것이다. p347」
잔악한 귀족처럼 수탈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고 살기에 이 착한 남자는 두려움 없이 파리의 혁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귀족의 아들은 진짜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그는 농민의 아들이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고 있을 때, 포동포동 살이 쪄서 자랐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의 아들이 파리의 빈민가에서 도둑질을 할 때, 교육을 받은 이 남자는 부모의 특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손으로 밥벌이를 했다. 그런데 그의 밥벌이가 진정 자신의 손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그 손에 외국어와 교양을 쥐어준 것은 무엇일까? 도둑놈이 된 농민의 아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그 곡식은 아니었을까? 이 착한 귀족의 아들은 진정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드파르주 부인은 애원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저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시고 당신의 영향력을 내 남편에게 불리하게 행사하지 않기를 바라요. 남편을 도와주세요. 같은 여자로, 언니 같은 마음으로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아내이자 어머니예요!”
드파르주 부인은 이런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다 동료인 방장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처럼 어렸을 때, 아니, 그 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본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한 번이라도 배려 받은 적이 있었나? 그 아버지와 남편들은 감옥에 갇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 않아? 우리가 평생 봐온 우리 언니들이나 그 아이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에 걸려 비참하게 살면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지 않았던가?”
“다른 모습은 못 봤지.” 방장스가 말했다.
“우린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왔어.” 드파르주 부인이 말했다.(가능하면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상대의 이름은 생략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아내이자 어머니가 겪는 고통이 지금 우리한테 그렇게 대단해 보이겠어?” p385」
디킨스가 그리는 드파르주 부인은 냉혹한 괴물이 되어버린 복수의 화신이다. 드파르주 부인을 충실히 따르는 방장스는 그 이름이 복수를 의미한다. 드파르주 부인에 대한 묘사는 프랑스 혁명속의 광기, 민중의 냉혹한 광기에 대한 디킨스의 비판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손이 닿지 않은 여자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이 무자비한 여자보다 더 무서운 여자도 없었다.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에 예민한 감각과 준비성, 강한 결단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결의와 증오심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도 직감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운 시대가 그녀를 높이 끌어올려 주었으리라. 어린 시절 키운 악에 대한 감각과 어떤 계급에 대한 만성적인 증오심이 그녀를 암호랑이로 키웠다. 그녀는 동정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혹시 내면에 미덕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p522」
그런데 분노와 증오심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최루탄 한방과 물대포 한줄기에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나약한 인간들이 ‘나를 불태우는 지옥의 복수’ 없이 대포와 총검 앞에 몸을 던질 수 있을까? 촛불과 노래만으로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성적 호소가 권력자의 총칼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을까? 혁명은 뼛속까지 박힌 증오와 분노,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리는 순수한 정신의 광기어린 결합이 아닐까? 혁명이란 순교자적 정신이 이끄는 이상향을 향해 돌진하는, 가난한 민중의 분노와 증오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까? 누가 드파르주 부인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혁명이 멈추기를 바라는 자가 아니라면. 혹은 혁명의 방관자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끝없이 무고한 피를 흘린다. 복수는 눈멀어 있게 마련이다. 기요틴이 만든 피의 강물은 디킨스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죽음의 수레가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하루에 여섯 번씩 호송 마차는 기요틴에 포도주를 갖다 나른다. 상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된 이래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온갖 괴물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 바로 기요틴이다. 그러나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도 다양한 프랑스에는 아직 잎사귀 하나, 이파리 하나, 뿌리 하나, 후추 열매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이렇게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는다면 예측한 대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자랄 텐데. 똑같은 망치를 가지고 사람을 내리쳐 보라, 똑 같이 끔찍한 모습이 될 뿐. 똑같은 탐욕의 허기증과 압제의 씨앗을 뿌려보라, 틀림없이 똑같은 열매가 열릴 것이니. p535」
디킨스는 귀족들의 망치와 민중들의 망치를 똑 같은 것으로 본다. 똑 같이 사람을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귀족들의 탐욕과 압제가 민중들의 탐욕과 압제와 같은 것일까? 맞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갖기를 원하고 민중들도 자신들이 갖기를 원한다. 그런데 전자는 1%가 99%를 가지기를 원하고, 후자는 99%가 99%를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도 똑 같은 것일까?
하지만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서 절망만을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은 죄 없이 기요틴 아래 끌려 온 어린 처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로 끝난다. 가난한 처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선생님의 강인하고 친절하신 얼굴을 보면 큰 위안을 얻지만,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덜 배고프게 해주고 덜 고통 받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준다면 그 애는 오래 살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 텐데요.” p540 」
그리고 한 남자가 마지막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디킨스는 전한다.
「 “나는 알고 있다 ····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 ” p542 」
디킨스는 혁명의 광기가 도달하려는 자유와 진정한 자유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광기 없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의 혁명 시인 세자르 시락은 반혁명의 죄로 끌려온 기요틴 아래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혁명에 배반당한 시인은 그래도 혁명을 배반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 홀연한 정신은 이제 간다.
저 건너편의 나라로.
세모 속에 네모를 넣을 수도 있고,
네모 속에 세모를 넣을 수도 있는 나라.
천년의 세월을 1년에 밀어 넣으려던,
우리들은 찬란한 신의 이단자.
이후 혼돈의 세월이 얼마를 더 흐른 후에라도ㅡ
멋대로 떠들지 마라!
가볍고 무책임한 입술들이여!
어째서 우리는 일어설 수밖에 없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러고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단 세 방울의 눈물 외엔
더 기도할 것도 남지 않았다.
웃지 마라, 폭양아.
바람 속에서도
제비꽃은 지고 또 피느니ㅡ.
친구여! 나는 저 열월의 길로틴 아래
한 송이 제비꽃으로 태어나고 싶다…
『두 도시 이야기』는 멋진 추리소설이자 훌륭한 역사소설이다. 이 책의 팽팽한 긴장을 제대로 느끼려면 가능한, 스포일러가 적어야 할 것 같아 줄거리는 생략했다. 디킨스가 서술한 프랑스 혁명의 공포와 광기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코뱅이 집권한 짧은 시기는 기요틴의 시대였고,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이 뒤섞여 무자비하게 숙청당했다.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혁명에 넌더리를 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 같다. 디킨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잡아내어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기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라고. 물론 디킨스는 민중들이 어떻게 증오와 복수심에 타오르게 되었는지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드파르주 부인은 우연하게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저지른 죄악과 민중의 증오가 새롭게 만들어낸 죄악을 동일한 차원에 놓음으로써 세자르 시락과 같은,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시인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디킨스가 제시한 사랑은 저 세계의 자유와 평등은 약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 어디 한번이라도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준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