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쌀 씻어 불려놓고, 그렸다. 잠깐이면 될 것 같아 예전에 정리해 둔 것을 도표로 살짝 바꾸었는데, 컴터에 앉으니 시간이 휘리릭~, 아침상은 허둥지둥, 버섯찌개는 정체불명의 맛으로 항의를 했다. 오늘 『고리오 영감』발제에 쓰려고 괜한 욕

심을 부렸다. 

프랑스 혁명은 짧게는1789년~1799년 사이의 10년간을 말한다. 흔히 대혁명으로 부르는 기간이다.  길게는 1871년 파리꼬뮌 시기까지의 약 100년을 전체 혁명의 역사로 본다. 공화정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공화정으로 체제는 정신없이 바뀐다. 이 100년의 격동을 보면 곧바로 직진하는 역사는 없다. 지금 갈짓자를 그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리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역사는 나아가고, 세상은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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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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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서양 고전을 읽을 때, 항상 놀라는 것이 있다. 한편에는『레미제라블』과 같은 너무 비참한 세계가, 한편에는 『오만과 편견』같은 화려한 귀족사회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어떻게 같은 시대일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시대라는 19세기는 정말 그랬다. 빈부의 격차가 정점에 이르러, 상위 10%가 90%의 부를 차지했다. 10%의 상류사회와 90%의 하류사회로 딱 양분되어서, 작가가 어디에 시선을 뒀는가에 따라, 19세기는 향락과 사치의 시대가 될 수도, 빈곤과 절망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10%의 상류사회 혹은 1%의 최상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선택받은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비주류 ‘라스티냐크의 수업시대’ 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라스티냐크를 이끄는 두 명의 선생은 사촌누이인 보세앙 자작부인과 같은 집의 하숙생인 보트랭이다. 자작부인의 살롱은 파리 사교계의 꿈의 무대이다. 젊은 라스티냐크를 후원하기로 한 자작부인은 그에게 성공의 발판으로 뉘싱겐 남작부인을 추천한다.

 

「자! 라스티냐크씨, 세상이란 이런 거예요. 세상을 알맞게 다루세요.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요? 내가 돕겠어요. 여성들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남자들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허영심에 빠져 있는지를 헤아리게 될 거예요. ․․․․․․․․․․․․․․․․․․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아실 테지만, 당신에게 관심 가진 여인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신에게는 젊고, 돈 많고, 우아한 여성이 필요해요. 당신이 진실한 감정을 가졌다면 보물처럼 숨겨두세요. 결코 그것을 남이 알아채게 해서는 안 돼요. 만약 그러면, 당신은 파멸이에요. 」

 

정체가 모호한 보트랭은 10여 페이지에 걸친, 일명 ‘보트랭의 설교’를 통해 라스티냐크에게 거액의 예비 상속녀인 빅토린 양을 유혹하도록 부추긴다. 보트랭은 악당이지만 그의 설교에는 19세기 사회의 진실이 축약되어 있다. 『21세기 자본』의 피케티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노동이냐? 상속이냐? 의 문제이다. 라스티냐크는 법률가로 성공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보트랭은 그것이 한낱 환상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는 노동을 통해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배경은 1819년 파리다. 라스티냐크는 1800년 전후로 태어났을 것이다. 당시 상위 1% 노동소득자가 얻는 생활수준은 노동소득 하위 50%가 얻는 생활수준의 10배 정도가 된다. 라스티냐크가 성공한 법률가가 된다 해도 하층민의 10배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위 1%의 상속인이 얻는 생활수준은 하층민의 25배가 넘는다. 수십 년을 노력한 끝에 사오십 살이 되어 검사장이나 파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변호사가 되어도, 당장 빅토린 양과 결혼해서 얻는 생활수준의 절반에도 미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법률가로 성공하기가 힘들다. 파리에는 좋은 일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우리가 개미굴로 표현하는 것을 발자크의 시대는 거미 항아리로 묘사하고 있다.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p148」

 

천재가 아니면 타락밖에 방법이 없다. 보세앙 자작 부인의 추천이나 보트랭의 유혹이나, 다를 것이 없다. 자작부인은 젊고, 돈 많고, 우아한 남작부인의 애인이 되기를 권하고, 보트랭은 100만 프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빅토린양과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단 빅토린 양이 상속녀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속자인 오빠가 죽어야 하고, 라스티냐크는 그 음모를 묵인해야 한다.

 

「보세앙 부인이 나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설명한 것을 저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해 주었어. 그는 내 가슴을 마치 쇠갈고리로 찢어놓은 것 같아. 나는 왜 뉘싱겐 부인 에게 가고 싶은 걸까? 저 사람은 내가 생각들을 가슴속에 품자마자 곧 그것들을 알아버린단 말이야. 어쨌든 한마디로 말해서 저 악당은 다른 사람들이나 책들이 나에게 얘기해 준 것보다도 더 많은 미덕을 가르쳐 주었어. p158」

 

‘라스티냐크의 딜레마’는 19세기가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 보다 훨씬 높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얻는 소득의 성장률은 1%정도인데, 자본은 해마다 5%의 성장률을 보인다. 지금으로 치면 연봉이 1000만원 올랐는데, 전세 값은 5000만원이 오른 셈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소득자는 전세를 줄이거나, 월세로 가거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는 소득이 오른 것이 아니라 내린 것과 같다. 거꾸로 임대업자는 일을 하지 않고도 노동소득자의 5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피케티는 이런 현상을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고 표현한다. 보트랭의 설교에 대입하자면 상속은 과거이고 노동은 미래이다. 상속이 노동을 잡아먹는 사회이므로, 라스티냐크가 아무리 출세한 법률가가 된다고 해도 빅토린양의 백만 프랑에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막 상류사회를 밟은 라스티냐크은 보트랭의 음모에 저항한다. 보트랭은 뉘싱겐 남작부인을 통해 출세하려는 라스티냐크나 음모를 꾸미는 자신이나 결국에는 다르지 않음을, 똑 같은 범죄임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자네가 연애라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다는 말인가? 여보게 학생, 덕성이란 잘게 쪼개지지 않네.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일세.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참회하라고 말하네. 게다가 덕성 때문에 깨우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멋진 이론 아닌가! 사회가 설치한 사다리 난간에 이르기 위해서 여성을 꼬드기고, 자녀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던지며, 각자의 쾌락과 이해를 목적으로 남모르는 장소에서 저지르는 모든 파렴치한 행위들이 자네는 신념과 희망과 박애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어린애한테서 재산의 반을 하룻밤에 빼앗는 신사는 어째서 두 달 동안의 징역을 받고, 위급한 경우에 천 프랑의 지폐를 훔친 불쌍한 녀석은 어째서 도형장으로 끌려가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자네들의 법일세. 어느 법조문 하나도 부조리하지 않은 게 없네. 장갑을 끼고 기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신사는 살인을 해도 피도 흘리지 않고 속여서 어물쩡 넘겨버리네. 살인범은 자물쇠를 열 때 쓰는 작은 지렛대로 문을 연다네. 이 두 가지가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 범죄일세! 내가 자네에게 제의한 것과 자네가 언젠가는 하게 될 행동 사이에는, 피를 많이 흘리느냐 적게 흘리느냐의 차이밖에 없는 것일세. 자네는 이 세상에 어떤 고정된 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인간들을 경멸하게. 그리고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보아 두게. 겉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큰 성공의 비밀은 바로 그것이 망각된 범죄라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 범죄는 정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세. p156~7」

 

보트랭의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처음 라스티냐크이 선택한 것은 피를 적게 흘리는 범죄다. 그러나 고리오 영감의 비참한 최후와 그 딸들의 비정함을 겪은 라스티냐크는 ‘투쟁’을 선언한다. 투쟁은 복종, 반항과 함께 이 사회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라스티냐크가 생각했던 것이지만 어느 것도 결심하지 못했었다. 복종은 가정을, 투쟁은 세상을 반항은 보트랭을 의미한다. 복종은 귀찮았고, 반항은 불가능했으며, 투쟁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무덤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화려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고 우렁차게 외쳤다. 그리고 뉘싱겐 부인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애인이자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이다. 마지막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임종도 매장도 보러오지 않았다. 고리오 영감의 최후를 지켜보며 딸들의 배반과 타락을 몸서리치도록 겪은 라스티냐크는 아마도 뉘싱겐 부인에게 일말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라스티냐크는 파리와의 대결을 결심하며 뉘싱겐 부인에게로 향한다. 왜? 아마도 보세앙 자작부인이 해 준 충고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첫 번째 역마가 될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어떻게 사교계를 정복한 것일까?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자극하지만, 사실 상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발자크는 처음으로 ‘인물 재등장 기법’ 을 시도했다. 여러 소설에서 똑 같은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라스티냐크는 스물다섯 편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 아마도 우리는 연 수입 이만 프랑의 여자와 결혼한 라스티냐크, 장관이 된 라스티냐크 등 라스티냐크의 일생을 다양한 소설로부터 짜맞추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입헌군주제와 카톨릭을 신봉했다. 19세기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발자크의 세계관은 다분히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귀족이 부르주아보다 두 배나 많고, 부르주아는 민중보다 세 배나 많다. 그에게 민중은 배경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럼에도 발자크는 엥겔스가 말했듯 ‘진보적 냄새를 풍기는 예술가’ 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이 계급의 부상과 프랑스 사회의 나갈 방향을 누구보다 재빨리 인식하고 깊이 있게 묘사했다. 발자크에게 혁명적 요소는 전혀 없지만,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전형적 인물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었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작품해설>에는 발자크에 대한 이런 평가가 인용되어 있다.

 

「귀족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귀족일 수 있으나 부르주아지는 모든 성공과 실패의 유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할 긴박한 사회적 투쟁 속에 휘말려 있다. 발자크는 안정되고 교양 있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않았으며 바로 대혁명에 의해서 창출된 서민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였다. 그는 수세기의 성장 끝에 비로소 19세기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부르주아 세계를 표현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작가인 동시에 이 계급의 철저한 자기 인식과 탐구 그 자체에 의하여 이 계급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가 되었던 작가였다.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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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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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 가 언제 적 이야긴데, 아직도 아버지 애가哀歌? 사진만 얼핏 봤던 작가소개를 다시 보니, 1980년생이다. 큰조카랑 동갑이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우리가 IMF 직격탄 세대야, 이모, 하던 기억이 난다. 1997년에 조카는 아마도 고등학생이었겠다. 아버지의 권위와 역할이 눈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가장 예민한 시기에 보아야 했을 것이다. 등록금이 버티고 있는 대학교는 생존의 현장이었을 것이고, 취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나는 1997년에 대한 좀 색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나라가 폭삭 망할 것이라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던 그 해 추석, 나는 버스투어 팀에 끼여 십 여일 가량 유럽 관광을 했다. 스무 명 남짓한 관광 팀의 대부분은 정년퇴직을 전후한 연배였는데, 같은 버스에 여러 날을 부대끼다 보니, 하기 싫은 자기소개도 해야 되고, 물 사오기 같은 소소한 심부름도 했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그 분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분이 있다. 아들은 학원 강사고 본인은 주식으로  많은 수익을 냈다고 했다. 힘들게 회사는 뭐 하러 다니느냐고, 학원을 해야 돈을 번다는 조언도 하셨는데, 그 분이 흔들리던 버스에서 마이크를 쥐고 주식 예찬론을 펴던 것이, 연이어 터졌던 IMF 때문에 더욱 인상 깊게 남았다. 가진 돈을 모두 주식에 넣었던 그 분은 IMF 이후 어떻게 되셨을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성실히 일만하다, 돈이 돈을 버는 신천지를 발견한 생초짜의 열변에,  슬몃 혀를 차는 분들도 계셨지만, 첫 인사에서 ‘나, 이대 나왔어요.’ 하던 사모님 보다는 훨씬 좋았다.  1997년의 가을은 그랬다. 너도나도 돈만 있으면 주식투자를 하고, 흥청거렸다. 그래서 그해 겨울은 더욱 더 혹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비들에게도 그리고 그 당당했던 아비를 기억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2003년, 갓 스무 서넛이 되었을 김애란 작가가 더듬고 있는 아비가 IMF 이전의 든든했던 아비인지, IMF 따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아비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포레스트 검프처럼 세계 곳곳을 달리고 있을 아비를 상상하며 떠난 아비를 기다리는 그녀의 책에서 나는 IMF를 통과하며 보아야 했던 수많은 아비들의 몰락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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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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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 회원의 열살짜리 아이와 몇 달째 동화책을 읽고 있다. 이 엄마에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대출을 부탁했는데, 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 모두를 넘어가게 했다. 지난 달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그녀의 딸과 함께 읽었는데, 내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부탁하자, 오~ 앨리스 시리즈를 전부 하려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 잠깐 이상하긴 했다고. 이 앨리스가 그 앨리스? 모두 허리를 젖히며 깔깔거렸다.

 

나도 깔깔거렸는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보니, 앨리스 시리즈 라고 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시리즈라고  혼자 써야 하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 구보씨가 있지 않은가. 박태원의 구보씨, 최인훈의 구보씨, 주인석의 구보씨. 그 이후로 또 다른 구보씨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주인석의 구보씨가 살던 90년대 이후로 나는 우리나라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세계적인 소설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니 요즘 문지와 창비 같은 '문학동네'를 주름잡는 소설가들은 알지 못한다. 김영하를 소설보다는 조영일과의 논쟁을 통해 알게 되었을 정도다. '문지'라고 써놓고 보니, 문지 4金 중 김치수 선생이 몇 일 전 돌아가셨다. 4金인 김현, 김치수, 김연주, 김병익은 문지 창간 주역들이다. 주인석의 구보씨는 문지 사무실 한켠에서, 바둑을 두는 이 김씨들 옆에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제일 먼저 작고한 김현의 마지막 일기인『행복한 책읽기』에는 김치수와 등산을 가던 이야기도 나온다. 내게 한국의 문학동네는 이런 이름들로 떠오른다. 그러니 황정은이라는 이름은 듣도보도 못했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추천한 회원의 말처럼,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무엇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참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읽을만 하다. 다만 내가 살아온 그만큼 보았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는 무수한 앨리시어들이 혹은 앨리스들이 있었다. 쉽게 익숙해지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둔감해져서 다 비슷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소년은 아니지만, 영화 <똥파리>의 양익준이 생각났다. 상훈(양익준 역)은 친아버지를 사정없이 패버리는데, 앨리시어는 차마 그러지 못했는지 친구의 아버지를 패버린다. 그리고 부랑아로 세상을 떠돈다. 상훈처럼 독하기는 어렵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흥미로웠던 것은 내용이 아니라 서술의 시점이다. 전문용어로는 무어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서술의 시점이 마구 뒤바뀐다. 처음엔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시점의 혼란 때문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 …… …… …… …… ……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첫 문장은 익숙하다. 1인칭 화자의 시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부터 뭔가 이상하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이는 것은 앨리시어인가? 그런데 몇 문장이 지나면 갑자기 '앨리시어'가 3인칭 주어로 등장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인가? 그런데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적' 시점이 왜 추측을 하지? '길을 건널 것이다.' 혹은 '체취를 맡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전지적 시점인가? 전문가가 아니니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다. 3인칭이긴 한데 전지적 시점은 아니고, 뭐 인간적 시점인가? 3인칭 관찰자적 시점 같은거. 그런데 관찰자가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고 단정 할 수 있나? 혹은 '불쾌해지는 것이다.'는?  3인칭 심리학적 관찰자 시점인가? 이런 것도 있나?  

 

이런 복잡한 것들을 따질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뒤섞음과 혼란이 어떤 효과를 주는가 이다. 작가가 막 썼을 리는 없고 도대체 왜 이렇게 쓴 걸까?  물론 그 의도까지 알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다만 그래서 내가 어떻게 느꼈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뒤섞인 시점이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다. 이 낯선 시점때문에 이 전형적인 이야기가 새롭게 읽히고 있나?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도 않다. 나의 느낌도 왔다갔다 하는구나..

 

왔다갔다...라고 하고 보니, 더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갑자기, '나는'이 등장한다. 이 책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가 아닌가 싶다. 뚫어지게 찾아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나'는 책 첫머리의 앨리시어를 가리키는 '내 이름은 앨리시어' 의 그 '나'가 아니다. 앨리시어와 고미와 동생을 지켜보는 제 3의 '나'다. 심지어 이 '나'는 앨리시어를 놓치고 혼자 남겨지기 까지 한다. 나는 전지적 관점도 관찰자적 관점도 잃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하나, 시제도 바뀐다. 대부분의 시제는 현재다. 깨닫는다, 바라본다, 좆같다, 삼킨다 등등. 그런데 "그 밤에 고모리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로 시작하는 일련의 서술은 과거시제다. 말하자면 '왔다갔다' 하기가 이 책의 주 형식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어서, 새로운 포장이라도 입히려고 한 걸까?

 

마지막에 또 한번의 혼란이  있다.

 

오래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커다란 나무와 앨리스 소년에 관해서.

앨리스 소년은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라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 새끼가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 아닐까?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앨리시어는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엔 당연히 앨리스 소년이 앨리시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앨리스 소년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상황 끝, 오케이?' 하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앨리시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3인칭 관찰자, 그리고 문득 '나는'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 '나'가 모두 앨리시어라는 말인가? 앨리시어가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런 질문들은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황정은 작가가 직접 나온다. 나는 앞부분에서 살짝, 이 작가의 매력적인 목소리만 듣고 책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는 어떤 평문도 어떤 이야기도 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 걸레질을 하며, 아마도 나는 오늘 밤의 이 어지러움을 깨끗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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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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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체스터튼의 책을 읽으며 영국 추리소설의 계보를 찾아 본 적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에서 코난 도일, 체스터튼, 아가사 크리스티로 이어지는데, 포와 코난 도일 사이에 뜻밖에도 찰스 디킨스가 있었다. 그 유명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정작 읽지는 않는, 디킨스가 추리소설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 인 디킨스는 포와 함께 추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모양이다. 실제로 디킨스는 미완성 추리소설을 남기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을 때, 이 책이 내가 완역본으로 읽은 디킨스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받은 느낌은 아주 몽환적이지만, 추리소설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 독자가 가장 많이 읽은 책!’ 이라는 광고에 솔깃해서 선택한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니, 왜 디킨스를 빼고는 추리소설의 역사를 쓸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거의 끝날 때까지, 사건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 퍼즐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비로소, 왜 그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그곳에 있는지, 무엇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때까지 독자는 오백여 쪽의 흐릿한 어둠 속을 팽팽한 긴장 속에 내쳐 달릴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서야, 희끄무레하던 형상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얼굴을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이렇게 숨 가쁘게 내달린 끝에 이렇게 놀라운 탄성을 질러냈던 추리소설을 내가 예전에도 본적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를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추리 이전에 이것은 역사이다. 더없이 숭고했고, 또 말할 수 없이 광기에 가득 찼던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859년 작 『두 도시 이야기』는 1862년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1789년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하며 1871년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10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두 도시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1789년 대혁명의 시대는 혁명이 화산처럼 폭발하여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열정과 광기의 시대였다. 자유와 희망의 시대였지만 또한 파괴와 학살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왕의 목을 날려 버린 민중들은 희망에 들떠있었다. 한편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은 희망과 절망이, 혁명과 반동이 되풀이 되는 기나긴 과정에서 일어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혁명의 성과는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혁명에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은 혁명에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역사는 묵묵히 새로운 시대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디킨스와 위고, 둘 중 누가 프랑스 혁명을 더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디킨스가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인인 위고에 비해 좀 불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디킨스 역시 위고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작품 속에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열렬한 혁명주의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두 도시 이야기』와 『레미제라블』모두 혁명을 배경으로, 혁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혁명의 이념 보다는 인간의 사랑을 구원의 힘으로서 강조한다. 루시와 코제트라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소녀)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숭고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아베쎄의 벗들’ 이라는 이상주의적 학생들을 통해 혁명의 이념을 긍정하는데 비해, 디킨스는 ‘드파르주 부인’을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함으로써 혁명의 이상 보다는 혁명의 어두운 현실, 그 파괴와 광기에 우려를 나타낸다. 위고가 1832년 6월 봉기를 소설의 핵심 배경으로 삼은 것도 비록 서투른 이상주의자들의 실패한 봉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과 이상만은 숭고하게 기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 디킨스가 유독 기요틴의 칼날 아래 하루에도 수 백 명 씩 죽어나가던 자코뱅의 공포정치에 집중한 것은 혁명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이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런지.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어떤 해석이나 평문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 첫 느낌은 그렇다.

 

 

 

그런데 혁명은 파괴와 공포 없이 가능한 것일까? 한 방울의 무고한 피에도 혁명은 불의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레미제라블』1부에는 공포정치시대에 국민공회 의원을 지낸 노인과 미리엘 주교의 긴 대화가 나온다. 예전 글에서 조금만 옮겨와 보겠다.

 

「국민공회 의원은 손을 뻗어 주교의 팔을 잡았다. "루이 17세!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요? 죄 없는 아이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겠소. 하지만 왕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소. 카르투슈(1693~1721년. 파리 부근에 출몰했던 도적단의 두목. 산 채로 수레바퀴 형에 처해졌음)의 동생은 단지 그의 동생이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묶인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었소. 이 죄 없는 소년의 죽음은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성의 탑 속에서 죽어간 루이 17세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 "거듭 말씀 드리오만," 하고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꺼냈소. 이 점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싶소. 우리들은 죄 없는 사람들, 순교자들, 어린아이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는 거지요? 그건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793년 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루이 17세 이전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오. 나도 당신과 함께 국왕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신다면."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하고 주교가 말했다. "평등하게 말이지요!" 하고 G가 외쳤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루이 17세는 마리 앙뜨와네트와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과 왕비가 기요틴 아래 목을 잃었고, 그들의 어린 아들 루이 17세도 죽었다. 단지 국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오랜 세월 민중의 아이들은 단지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굶어죽고 맞아죽고 병들어 죽었다. 혁명이 없었다면 민중의 아이들은 수 백 년이 흘러도 또 수없이 죽어나갔을 것이다. 왕의 아들의 죄 없는 목숨 하나와 수 없이 많은 민중의 아이들의 죄 없는 목숨들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빅토르 위고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왕의 아들은 단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왕의 아들이 왕의 죄와 관계없다면, 왕의 아들은 왕의 부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죄의 물림에는 부당함을 외치면서도 부의 물림에는 한마디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왕은 사라졌어도 부의 물림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왜 아무도 묻지 않을까?

 

『두 도시 이야기』의 디킨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는 누구도 핍박하지 않았고,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다. 응당 자신이 받아야 하니 내놓으라고 가혹하게 대하는 그런 사람과도 거리가 멀기에 스스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고, 그런 혜택이 없는 세상으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힘으로 밥벌이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가벨은 서면 지시를 받아 복잡하게 얽힌 재산을 관리하면서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얼마 되지 않지만 줄 수 있는 것 - 겨울에는 연료를, 여름에는 여분의 곡식 따위를 -을 주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탄원서라든지 증거물에 이런 사실을 기록해 두었을 테니 필요하다면 보여 주면 될 것이다. p347」

 

잔악한 귀족처럼 수탈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고 살기에 이 착한 남자는 두려움 없이 파리의 혁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귀족의 아들은 진짜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그는 농민의 아들이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고 있을 때, 포동포동 살이 쪄서 자랐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의 아들이 파리의 빈민가에서 도둑질을 할 때, 교육을 받은 이 남자는 부모의 특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손으로 밥벌이를 했다. 그런데 그의 밥벌이가 진정 자신의 손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그 손에 외국어와 교양을 쥐어준 것은 무엇일까? 도둑놈이 된 농민의 아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그 곡식은 아니었을까? 이 착한 귀족의 아들은 진정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드파르주 부인은 애원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저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시고 당신의 영향력을 내 남편에게 불리하게 행사하지 않기를 바라요. 남편을 도와주세요. 같은 여자로, 언니 같은 마음으로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아내이자 어머니예요!”

드파르주 부인은 이런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다 동료인 방장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처럼 어렸을 때, 아니, 그 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본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한 번이라도 배려 받은 적이 있었나? 그 아버지와 남편들은 감옥에 갇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 않아? 우리가 평생 봐온 우리 언니들이나 그 아이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에 걸려 비참하게 살면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지 않았던가?”

“다른 모습은 못 봤지.” 방장스가 말했다.

“우린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왔어.” 드파르주 부인이 말했다.(가능하면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상대의 이름은 생략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아내이자 어머니가 겪는 고통이 지금 우리한테 그렇게 대단해 보이겠어?” p385」 

 

디킨스가 그리는 드파르주 부인은 냉혹한 괴물이 되어버린 복수의 화신이다. 드파르주 부인을 충실히 따르는 방장스는 그 이름이 복수를 의미한다. 드파르주 부인에 대한 묘사는 프랑스 혁명속의 광기, 민중의 냉혹한 광기에 대한 디킨스의 비판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손이 닿지 않은 여자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이 무자비한 여자보다 더 무서운 여자도 없었다.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에 예민한 감각과 준비성, 강한 결단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결의와 증오심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도 직감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운 시대가 그녀를 높이 끌어올려 주었으리라. 어린 시절 키운 악에 대한 감각과 어떤 계급에 대한 만성적인 증오심이 그녀를 암호랑이로 키웠다. 그녀는 동정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혹시 내면에 미덕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p522」

 

그런데 분노와 증오심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최루탄 한방과 물대포 한줄기에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나약한 인간들이 ‘나를 불태우는 지옥의 복수’ 없이 대포와 총검 앞에 몸을 던질 수 있을까? 촛불과 노래만으로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성적 호소가 권력자의 총칼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을까? 혁명은 뼛속까지 박힌 증오와 분노,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리는 순수한 정신의 광기어린 결합이 아닐까? 혁명이란 순교자적 정신이 이끄는 이상향을 향해 돌진하는, 가난한 민중의 분노와 증오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까? 누가 드파르주 부인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혁명이 멈추기를 바라는 자가 아니라면. 혹은 혁명의 방관자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끝없이 무고한 피를 흘린다. 복수는 눈멀어 있게 마련이다. 기요틴이 만든 피의 강물은 디킨스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죽음의 수레가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하루에 여섯 번씩 호송 마차는 기요틴에 포도주를 갖다 나른다. 상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된 이래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온갖 괴물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 바로 기요틴이다. 그러나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도 다양한 프랑스에는 아직 잎사귀 하나, 이파리 하나, 뿌리 하나, 후추 열매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이렇게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는다면 예측한 대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자랄 텐데. 똑같은 망치를 가지고 사람을 내리쳐 보라, 똑 같이 끔찍한 모습이 될 뿐. 똑같은 탐욕의 허기증과 압제의 씨앗을 뿌려보라, 틀림없이 똑같은 열매가 열릴 것이니. p535」

 

디킨스는 귀족들의 망치와 민중들의 망치를 똑 같은 것으로 본다. 똑 같이 사람을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귀족들의 탐욕과 압제가 민중들의 탐욕과 압제와 같은 것일까? 맞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갖기를 원하고 민중들도 자신들이 갖기를 원한다. 그런데 전자는 1%가 99%를 가지기를 원하고, 후자는 99%가 99%를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도 똑 같은 것일까?

 

하지만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서 절망만을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은 죄 없이 기요틴 아래 끌려 온 어린 처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로 끝난다. 가난한 처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선생님의 강인하고 친절하신 얼굴을 보면 큰 위안을 얻지만,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덜 배고프게 해주고 덜 고통 받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준다면 그 애는 오래 살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 텐데요.” p540 」

 

그리고 한 남자가 마지막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디킨스는 전한다.

 

「 “나는 알고 있다 ····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 ” p542 」

 

디킨스는 혁명의 광기가 도달하려는 자유와 진정한 자유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광기 없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의 혁명 시인 세자르 시락은 반혁명의 죄로 끌려온 기요틴 아래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혁명에 배반당한 시인은 그래도 혁명을 배반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 홀연한 정신은 이제 간다.

저 건너편의 나라로.

 

세모 속에 네모를 넣을 수도 있고,

네모 속에 세모를 넣을 수도 있는 나라.

 

천년의 세월을 1년에 밀어 넣으려던,

우리들은 찬란한 신의 이단자.

 

이후 혼돈의 세월이 얼마를 더 흐른 후에라도ㅡ

멋대로 떠들지 마라!

가볍고 무책임한 입술들이여!

 

어째서 우리는 일어설 수밖에 없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러고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단 세 방울의 눈물 외엔

더 기도할 것도 남지 않았다.

 

웃지 마라, 폭양아.

 

바람 속에서도

제비꽃은 지고 또 피느니ㅡ.

 

친구여! 나는 저 열월의 길로틴 아래

한 송이 제비꽃으로 태어나고 싶다…

 

 

 

『두 도시 이야기』는 멋진 추리소설이자 훌륭한 역사소설이다. 이 책의 팽팽한 긴장을 제대로 느끼려면 가능한, 스포일러가 적어야 할 것 같아 줄거리는 생략했다. 디킨스가 서술한 프랑스 혁명의 공포와 광기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코뱅이 집권한 짧은 시기는 기요틴의 시대였고,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이 뒤섞여 무자비하게 숙청당했다.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혁명에 넌더리를 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 같다. 디킨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잡아내어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기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라고. 물론 디킨스는 민중들이 어떻게 증오와 복수심에 타오르게 되었는지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드파르주 부인은 우연하게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저지른 죄악과 민중의 증오가 새롭게 만들어낸 죄악을 동일한 차원에 놓음으로써 세자르 시락과 같은,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시인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디킨스가 제시한 사랑은 저 세계의 자유와 평등은 약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 어디 한번이라도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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