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행복한마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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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독서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책 선정이다. 스무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의 입맛을 고루 맞추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책이든 한쪽 구석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온다. 아~ 어려워!! 아~ 이게 뭐야!! 그러니 책 추천하기도 만만치 않고 해놓고도 신경이 계속 쓰인다.

전시륜의『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을 추천한 회원이 카톡을 보내왔다. "읽고나서 문자 주세요. 어떤 저자가 추천했길래 제안했는데, 읽고 나니 토론할만한 책인지 의문이예요... 저자의 단상들일 뿐이고...ㅇㅇ씨도 '쩝~'하는데, 바꾸는데 동의하신다면 그렇게 해볼까 싶어서요."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며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답했다.

 

이 책은 7월 첫째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마지막으로 순서가 밀렸다. 도서관에 책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중소도시에는 시립도서관을 비롯해 부설 작은 도서관까지 10여개의 도서관이 있다. 고전이나 베스트셀러의 경우 왠만하면 빌려 읽고 토론하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이다. 가끔 어느 도서관에도 없는 책일 경우, 담당사서가 신청해 주기도 한다. 이 책도 신청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나니 조금 미안했다. 신청해서 구비해 놓을만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전시륜은 1932년 생이다. 6.25 때문에 대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중년 이후에는 글쓰는 일과 관련된 일을 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1998년에 작고했다. 이 책은 저자의 말년에 쓴 글로 사후에 발간되었다. 육십대 노철학자의 인생 경륜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철학' 이라고 할만한 내용은 사실 없다. 삶 속에 녹여낸 철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인생철학이라는 것이 토론할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 엄마, 삼촌, 고모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종류의 철학이다. 입담이 뛰어나지만 월간지의 인기 칼럼을 넘어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토론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30년 전쯤의 아메리칸 드림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식인들이 어떻게 친미주의자가 되는지도.

히치하이커를 할 때, 차를 태워 주고 밥까지 사준 미국 청년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그리도 많은 외국인들이 반미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나그네에게도 호의를 베풀고 후대해 주는데, 수많은 신생국들이 미국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미국 유학생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반미 감정을 표현하는 사실에 대해 미국 청년 뿐만 아니라 저자 역시 난감해 한다. 심지어 그 유학생들은 미국 시민이 낸 세금으로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공부를 하는데 말이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외국 유학생들이 진짜 미국을 모르고 귀국하기 때문이라고. 미국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자신의 미국 가정 편력기를 나열하면서, 유학생들은 캠퍼스에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미국 가정을 방문하라고 권유한다.

저자를 비판하기 전에 참 해맑은 할아버지란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인 개인의 인간성 혹은 한 가정의 따뜻함을 곧 제국주의 미국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들 뿐이 아니겠는가.

마침 이번 주 독서회 선정작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이다. 미군정의 발포로 촉발된 4.3 사건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아마 전시륜은 미국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반도에 개입했다고 믿을 것이다. 그에게 4.3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수많은 신생국' 들이 왜 미국을 비판하고 항거하는지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비록 '무명' 이지만 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의 역사와 제국주의 정책에 그렇게 감감할 수 있을까? 나도 그 미국의 착한 청년에 못지 않게 궁금하다. 그리고 그 착한 미국 청년에게는 미국이 제3세계에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조금만 공부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메리칸 드림은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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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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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무난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제주 4.3 사건이 배경이라기에 극적인 전개와 격한 감정 따위를 예상했지만, 책은 예상밖에 잔잔했다. 유년의 풍경을 아스라이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중3까지의 이야기지만, 성장소설이 아닌 회고담, 기억의 수묵화라 할 수 있다.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듯, 아스라하고 안온한데도, 책이 술술 넘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눈치없이 하릴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할머니에게 붙들린듯, 마음이 다른곳으로 널을 뛰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책이 눈에 안들어와 마음이 산란한지 잘 모르겠다. 점점 서정적인 책들을 읽기가 어려워진다. 눈이 뻑뻑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뻑뻑해지는 것일까... 너무 많이 보아버려, 이제 아무 감흥이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여든이 넘은 엄마는 남루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전에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함께 보았는데, 엄마는 조금 언짢아 했다. 쪼글쪼글 늙은 것들이 연애질하는 것도 보기 흉하고, 치매 걸린 마누라와 자살하는 늙은 부부의 이야기도 심란하다고 했다. 오히려 나는  보지 않는 아이돌들의 춤을 더 좋아한다. 언뜻 생각하면 노인들 눈에 망칙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엄마는 그 터질듯한 생명력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에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 을 보았을 때, 나도 그랬다. 내가 살던 곳과 너무 닮아, 너무 끔찍하게 현실적이라, 너무 영화같지가 않아 지루했다. 운동화 두짝만 질질 끌고 나가면 보게 되는 풍경을 굳이 스크린에서 또 봐야 하다니, 짜증이 일었다. 영화는 영화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소설은 소설이니까 보는데....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보아버린 회고담이다. 작가들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유년의 기억들로 돌아가나 보다. 독서회에서 몇 달 전에 읽은 『관촌 수필』도 그렇고, 지금은 책 이름도 금새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젊은 시절 읽었던 여러 책들이 이런 유형의 회고담들이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 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유난히 담담하다. 유년에 겪은 4.3이 그저 스치듯 지나가버리니, 독자를 빨아들이는 극적인 사건이 따로 있을리가 없다. 평양냉면의 밋밋한 맛 같다고나 해야할까. 내게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있는데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처럼 읽게 한 것 같다. 나는 회고록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양 냉면의 맛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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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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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리뷰 상품을 세움판으로 잘못 선택해 올렸던 예전 글입니다. 예전 글을 비공개로하고(댓글들이 있어서)  민음사판 리뷰로 다시 올려 놓습니다.

 

다시 읽은 『이방인』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이상도 하지, 내 기억의 어디에도 『이방인』에 대한 옛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스무 서넛 무렵 까뮈에 푹 빠진 나는, 서점과 헌책방을 가리지 않고 까뮈의 책들을 찾아 다녔다. 온라인 서점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사실 나는 까뮈의 소설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재미도 없었고 이해도 못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당시 책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시론이 뭔지도 몰랐다.)인,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이었다.

 

『시지프의 신화』의 첫 문장은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이다. 까뮈를 대표하는 두 문장에 모두 죽음이 있다. 까뮈의 세계는 ‘죽음’과의 대면이다. 그의 시론들인,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와 자살, 『반항인』은 살인과 반항을 탐색하고 있다. (링크『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관한 리뷰) 이 두 작품은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데, 사실 까뮈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까뮈는 노벨 문학상 소감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상호 관련성 아래 철저히 기획된 것임을 밝혔다.

 

「 “나는 처음 시작 때부터 내 작품 세계의 정확한 계획을 세워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선 부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 가지 형식으로. 그것이 소설로는 『이방인』, 극으로는 「칼리굴라」와「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의 신화』였다. 나는 또 세 가지 형식으로 긍정을 표현하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 층도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다.”  이와 같이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 등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은 이미 그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기록해 온 『작가 수첩』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세 번째 층”은 작가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하여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방인』은 그러니까 카뮈가 구상한 첫째 번 층위인 “부정”, 즉 “부조리” 삼부작 중 하나로 그에게는 최초의 소설에 해당한다. 철학적 에세이는 설명하고 소설은 묘사하고 연극은 이 부조리의 감정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1939년 가을에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 관통한다. p170~1」

 

 

 

 

 

이 책들의 일관된 주제는 죽음이다. 그러나 까뮈의 ‘죽음’은 개인적 죽음이 아니다. 자살과 살인 혹은 사형이라는 죽음의 방식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이에 끝까지 맞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그러나 헛된) 인간 반항의 정신과 그 행위를 철학적, 역사적,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다. 까뮈의 출발점은 서양 근대정신의 바탕인 “신은 죽었다”와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절망적 세계인식이다. 신의 죽음이 절망적인 이유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 가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결박임을 쓰디쓰게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신, 옳고 그름의 가치 기준인 대타자의 부재는 이제 인간 자신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세계를 통일시킬 것인가? 이 험난한 과정이 서구 근대 사상의 역사다. 근대의 주인은 ‘이성’이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성은 또 다른 신이 되어 인간을 억압했다. 이성이 지배한 서구 근대의 역사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신을 죽이고 건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도, 퇴폐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인 나치즘 체제도,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지향한 공산주의 체제도 모두 대재앙을 초래했다. 세계는 통일되지 못했고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세계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실존의 조건은 부조리이다. 부조리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시지프의 신화』p68 ”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이 부조리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이 단절, 이 간극, 이 대립이 사실은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대립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세계의 무의미에 실망하여 자살하거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긍정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세계와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반항은 어떠한 통일이나 주인도 거부하고 순간순간 세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까뮈는 부조리가 소설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라마조프, 키릴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고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신의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야말로 20세기 이후,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가장 치열한 탐색일 것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젊은 청년이 알제의 어느 바닷가에서 아랍인 한 사람을 살해했다. 수사 결과 그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울지도 않고 그 다음날 바로 여자와 만나 수영과 섹스를 했다. 재판정은 아랍인에 대한 살해 사실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심한 태도’를 문제 삼아 이 청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사형 집행 전 교도소 부속사제가 회개를 설득하지만 그는 격렬히 거부하고,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린다.

 

『이방인』에는 세 가지 ‘죽음’이 나온다. 엄마의 자연사, 아랍인의 살해, 뫼르소의 사형이다. 죽음은 이 책의 주제이자 형식이기도 하다. 1부는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해변에서의 아랍인 살해로 끝난다. 2부는 아랍인 살해에 따른 재판으로 시작해서 사형이 언도된 뫼르소가 집행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 전체의 시작과 끝에 죽음이 배치되어 있고, 이 두 죽음은 또 다른 죽음으로 매개되어 있다. 아랍인 살해는 1부의 종결과 2부의 시작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사실 아랍인의 죽음은 매개 역할 이외에는 별 다른 중요성이 없다. “태양 때문이다.” 라는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진술 때문에, 아랍인 살해의 원인을 놓고 독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소설 자체에서 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로 취급되지 않는다. 살해자인 뫼르소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부조리한 사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 프랑스 식민지였던 당시 알제리의 현실에 비추어서도 사형은 예상 밖의 가혹한 판결이라고 한다. 뫼르소는 까뮈와 같이 프랑스 이주민 혈통의 백인이다. 백인이 아랍인을, 식민 종주국 국민(?)이 식민지 원주민을 쏘아 죽인 것은 중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뫼르소의 진정한 범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국선 변호사는 처음 만난 날, 재판에서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한다. 다만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서 보여준 태도일 뿐이라는 듯이.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 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며 나를 다그쳤다. p75"  재판정이 오직 관심을 갖는 것은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 날 보였던 '무심한 태도' 이다. 배심원 앞에서의 실제 재판에서도 어찌나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에 집중되었던지 변호사마저 이렇게 외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p107” 그러나 검사는 이 두 가지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p108"  이 엉뚱해 보이는 주장은 그러나 방청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변호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뫼르소는 검사가 주장하는 본질적인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무심한 태도'가 살인 자체 보다 더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무용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살해한 잔학한 범죄보다 뫼르소의 ‘무감각함’이 더 전율스런 공포가 된다. 부친 살해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부정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 혹은 사회의 가치 체계이다. 그러나 이 적극적 살해와 증오는 그것 자체에 대한 ‘무심함’ 보다는 덜 치명적이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그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든 가치에 대해 무심하다. 세계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들이 헛되이 부여한 가공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뫼르소는 인간들의 이 절망적 노력을 ‘무심함’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어떤 가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사회를 인간들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므로 뫼르소의 무심함은 용서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까뮈 스스로가 밝혔듯이  “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p141 ”

 

1년 가까이에 걸친 재판과정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구원을 주제로 한 격한 논쟁과 갈등이 놓여있다. 예심판사는 처음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뫼르소가 쓰러진 아랍인의 시체에 다시 총 네 발을 쏜 이유를 끝내 대답하지 않자,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며,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흥분한다. 예심판사에게 두 번째의 네 발은 뫼르소의 구원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마지막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주저앉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벌써 책상 너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나의 눈앞에다 내밀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 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p79~80 ”

 

변호사와 검사가 이 사건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적절한 애도이다. 그것은 사회의 질서, 법체계, 가치를 뫼르소가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사회가 원하는 애도를 거부하고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한편 예심판사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 판단의 기준이다. 한 사람이라도, 길 잃은 어린 양이 한 마리라도 있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세계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의 삶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라고 격분한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교회가 이교도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것은 길 잃은 어린 양보다 더 나쁜 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48” 라고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세계는 하나의 의문과 의심으로부터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는 브루노도 갈릴레이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항성체계는 수도 없이 많고, 지구는 태양을 오늘도 돌고 있다. 그러자 신은 죽고 이성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간들은 세계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예심판사는 이 격렬한 감정의 분출 후에 더 이상 뫼르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열한 달에 걸친 예심을 끝마친다. 그는 아마도 뫼르소를 세계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부속사제는 뫼르소에게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유한다. 뫼르소는 거절한다. 지루한 설득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뫼르소가 폭발한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p133”  뫼르소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권이 있다고 외친다. 모든 사람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특권은 죽음이다. 우리 모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분노인 동시에 기쁨이었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엄마가 왜 생의 마지막에 ‘약혼자’를 만들었는지,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을지 이해되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35~6 ”

 

뫼르소는 신의 구원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증오를 선택한다. 무관심한 세계에 마음을 열고, 행복을 느낀다. 고뇌와 함께 희망이 사라지자 행복을 찾은 것이다. 『이방인』은 『시지프의 신화』와 함께 부정 계열의 삼부작에 속하지만, ‘행복’ 이란 말로 끝이 난다. 뫼르소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희망을 버리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희망이란 구원에의 희망 혹은 세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투항이다. 부조리한 세계와의 힘겨운 긴장에 지쳐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까뮈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 달려 있으며 우리들은 신의 의지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시지프의 신화』p141”  고 했다. 자신의 관심은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아는 것” 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방인』은 그 가능성을 그려내고 있다. 독자로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신의 죽음은 서양 근대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도 불분명하고 세계도 분명하지 않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반항하는 인간” 을 주장하기 위해 까뮈가 철학뿐만 아니라 소설과 희곡의 형식을 택해야 했던 이유도 이 불분명함 때문이다.  “만약 세계가 명료한 것이라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시지프의 신화』p130 ” ,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시지프의 신화』p130”  고 했다. 그러니 『이방인』을 논리적으로 읽기 힘들다고 해서 서둘러 실망할 일은 아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죽였는지 답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방인』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뫼르소의 ‘태양’처럼 우리에게도 ‘뫼르소의 행복’ 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정서 판 『이방인』을 두고 알라딘 서점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논쟁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싶다. 논쟁이 한창 일 때는 『이방인』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이정서 판 역시 보지 못했던지라, 어느 편이 더 논리적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정서 측에서 “정당방위” 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끊어 버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음사 판으로 다시 『이방인』을 읽고 나니, 문득 그 심각해 보였던 논쟁이 우스꽝스러운 난리굿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랍인의 살해 원인이 정당방위라는 해석은 『이방인』을 그리고 까뮈의 부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아랍인의 살해는 권태 속에 살아가던 뫼르소가 어느 날 “왜?”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살해는 우연적이고, 사건은 부조리하다. 그것이 명료했다면, 『이방인』이 어떻게 사르트르의 말처럼 “부조리에 관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정당방위라면, 『이방인』은 살인 사건에 관한 하나의 흥미로운 판례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세한 번역의 문제에 관해서는 불어 원서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트윗 친구의 번역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글이 관련되어 싸움질 중인 상황 혹은 글 내의 생각을 싸움질의 에너지가 담기게 옮겨야 한다는 것.” “옮기는 작업이 아니더라도 독해란 그런 것이고 말의 힘을 안다는 것은 말과 맥락의 투쟁을 느끼는 것과도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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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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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관한 역설力說이다. 로자 아줌마는 전직 창녀 출신의 유대인으로, 창녀들이 낳은 불법적인 아이들을 길러 주는 일을 한다.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로자 아줌마는 히틀러의 사진을 침대 밑에 몰래 넣어두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꺼내보며, 현재의 삶을 위로받는다. 모하메드는 세 살 때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져 10여년을 함께 산 아랍인 아이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로자 아줌마는 치매에 걸려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로자 아줌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식물인간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의사 카츠 선생이 17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미국인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에게 식물인간이란 심지어 나치의 포로수용소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다. 연명을 위한 병원 치료는 나치의 학대고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병원이란 데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법이 그러니까. 나는 필요 이상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아무리 유태인이라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들은 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온갖 학대를 다 할 거다. 의사는 처방전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끝까지 괴롭히면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을 거야. 그것이 그들의 특권이니까.” 모하메드는 로자 아줌마에게 식물인간이 되게 하지는 않겠다고 맹세한다. 로자 아줌마의 상태가 절망적이 되자, 모하메드는 의사 카츠에게 안락사를 부탁하지만, 카츠 선생은 펄쩍 뛰며 거절한다. “그건요. 그런 권리가 있다면 로자 아줌마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신성한 자결권이 있다는 거죠. 아줌마가 자결하고 싶다면 그건 아줌마의 권리라고요. 그리고 아줌마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어야 해요.” 로자 아줌마는 온갖 고통 속에서 겨우 숨만 붙어 있다.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 ...” 그러나 카츠 선생이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자, 모하메드는 몰래 로자 아줌마를 비밀 은신처로 옮겨, 사랑하는 아줌마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지켜 준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주제는 인종문제다. 유태인, 아랍인,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사는 파리의 사창가가 배경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러 인종들이 파리 빈민가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아마도 프랑스 식민통치와 이민정책 그리고 나치즘에 기인할 것이다. 프랑스에 잡혀온 노예의 후손들과 불법이주민들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과 하층 프랑스인들이 서구 문명의 꽃, 파리의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다. 서구 문명의 찬란함이란 식물인간이 된 이 ‘불쌍한 사람들 - 레미제라블’의 희생 위에 피어난 것이다.

 

안락사의 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고 생각한다. 몇몇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의 권리라 주장하고 있지만, 나는 철저히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운명의 잔인한 장난에 놀아난 오이디푸스가 파국의 벼랑 끝에서 그 어떤 신의 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두 눈을 찌른 것처럼, 마지막 순간을 선택할 권리는 인간에게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에는 오이디푸스와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치매에 정신을 빼앗겨 가고 있던 로자 아줌마는 문득문득 정신이 늙은 육체에 되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순간 마다 식물인간을 거부하고 인간으로 죽을 권리를 주장했다. 십자가에 매달려 의사들의 속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으로 죽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자 아줌마는 파리 사창가의 식물인간들, 그 다양한 유색인종들의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 엉덩이를 내주며 사는 것은 곧 십자가에 매달린 채 연명하는 것, 빛나는 파리의 어두운 죄를 대속하는 식물인간과 같은 것이기에. 하지만 에밀 아자르가 식물인간을 파리의 사창가에 비유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그리고 있는 사창가는 구질구질하지만, 너무도 따뜻하기에. 여하튼 내게는 하나의 유비처럼 읽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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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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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었다고 하려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도 읽어야 할 것이다. 완역본으로 추정되는 펭귄 클래식판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아쉽게도 읽지 못하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실린 <작품해설>을 통해 개략적 정보를 얻었다.

 

문학 해설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김화영은 도표를 그려 두 작품과 그것들의 모델이 된 사건을 비교해 놓고 있다.

   

 

 

 

실존인물인 셀커크라는 선원은 1703년에 무인도에 혼자 남았고, 디포의 로빈슨과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각각 1659년과 1759년에 무인도에 난파되었다. 다니엘 디포가 소설을 발표한 것은 1719년, 미셸 투르니에는 1966년 이다.

 

디포의 시대는 17C의 과학 혁명을 거쳐 18C 말의 산업 혁명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서구 사회가 이성과 과학을 바탕으로, 자신감에 넘치던 때이다. ‘산업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시기인 셈이다. 이에 반해 1,2차 세계 대전을 겪은 20C 중반의 서구는 근대 합리주의의 폐허 위에 포스트모던의 이상을 세우고 있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어야 했던 것은 역사의 마땅한 귀결인 셈이다. 그러므로 『로빈슨 크루소』가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역설한 반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문명에 대한 자연의 귀환을 그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모던,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다. 디포의 로빈슨은 섬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섬은 지배의 대상일 따름이다. 인간 프라이데이 역시 철저히 대상화된 타자, 야만적 노예일 뿐이다.

 

포스터 모던은 주체를 타도의 대상 또는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주체가 물러나고 타자가 등장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변광배는 포스트모던을 “서구철학사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일자’의 폭력으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타자’가 그 중심을 향해 획책한 반란p18” 이라고 정의한다. 샤르트르에서 시작해서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라캉, 리쾨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 바로 타자이다. 타자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담론은 물론 제 각각이다. 그러나 타자가 더 이상 주체를 위한 단순한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에게도 처음에 섬은 단순한 대상일 뿐이었다. 섬은 개척과 지배의 대상으로, 창조주인 로빈슨 자신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아야 했다. 그러나 디포의 로빈슨과는 달리 투르니에의 로빈슨의 마음속에는 다른 가능태로서의 섬의 모습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방드르디가 왔다. 처음에 방드르디는 무시무시한 의식을 거행하는 야만적 타자들의 일원이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목숨을 구해주게 된 방드르디는 부려야할 노예 - 타자였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천진성과 무구함으로 로빈슨이 섬에 이루어 놓았던 모든 질서를 날려버리고 동료 혹은 타로 카드가 예언한 대로 쌍둥이가 된다. 타자는 주체와 하나가 된 것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 로빈슨과 섬은 모두 원소들로 화하고, 주체와 객체, 나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 ‘태양의 로빈슨’으로 태어난다. 사실 세계의 모든 것은 우주가 폭발할 때 발생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유기체와 무기물, 주체와 객체, 하늘과 땅, 모두 동일한 입자들에서 탄생했으므로, 결국에는 하나이다.

 

 

 

주체는 타자와 하나이지만, 동시에 주체의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무인도에 난파한 후 곧 로빈슨은 혼자만의 삶에 진저리치며 타자의 존재를 갈망한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느님, 그 누구인 것이다! p 67~8 ” 마지막 12장의 ‘죄디’ 역시 타자의 존재가 삶의 동력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방드르리가 화이트버드호를 타고 떠나 버린 것을 안 후 로빈슨은 죽으려고 동굴을 찾아 간다. 거기서 뜻밖에 화이트버드호에서 탈출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로빈슨은 그 소년의 손을 잡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소년에게 목요일이란 뜻의 ‘죄디’란 이름을 붙여준다. 죄디는 로빈슨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이다.

 

   

 

추기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원제는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이다. 불어 ‘Limbes’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림보이다. 천주교 자체를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지대이다. 말하자면 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사는 곳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자연의 무구한 상태 그대로다. 디포의 산업사회가 파괴된 곳 위에 투르니에는 림보라는 이상향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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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6-0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가 <에밀>에게 권한 최초의 책이 <로빈슨 크루소> 라 한다. 투르니에가 1759년을 시작으로 삼은 이유다. 그런데 루소가 왜? <로빈슨 크루소> 를 어떤 시각으로 본 걸까? 청교도적 자본주의 윤리와 식민지 개척을 옹호한 책인데. 하긴 프랑스 혁명의 모델이 로크가 기초한 영국 자본주의 국가였다니.. 루소의 자유, 평등 개념도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말리 2014-06-06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은 가장 빈약한 보수를 받고 있다...반면 한가한 사람과 부자만을 위해 일하는 소위 에술가라는 작자들은 불필요한 물건에 엄청한 가격을 매긴다... 부자가 그러한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유용성과 무관한 엄청난 비싼 가격을 보고, 어떤 물건이 값이 비쌀 수록 가치가 없다면, 그들 기술의 진정한 가치와 사물의 현실적인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로빈슨은 쓸모없는 장신구보다 도구를 훨씬 더 아끼고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존경한다. <에밀>

말리 2014-06-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어느 정도 행복까지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필요한 것을 단순히 책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여 좀더 자세히 배우기를 바란다. <에밀>

말리 2014-06-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의 블로그에 보니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인간에게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라고 했다고.

말리 2014-06-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검색한것 :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에밀은 끊임없이 산책하고 공터를 돌아다니면서 자연 가운데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떠오르는 태양, 별자리를 관찰하면서 자연의 법칙도 깨닫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스스로 숙련된 기술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도구를 만들어 충족 했던것처럼 에밀은 공예 기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공예 기술은 다수의 협력이 필요하며 사회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에밀은 직업기술을 배운다.

직업을 배우는데 있어서 우선 극복해야 할 것은 그것을 경시하는 편견이다.
루소는 이 시기를 육체 노동, 수공업적 기술 습득과 연결된 직업 교육에 힘쓰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이론적 지식은 금기이며 오로지 모든실험을 일종의 연역에 의해 연결시키면서 올바른 지식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육체의 교육은 앞으로 행해질 감성 교육의 토대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