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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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서양 고전을 읽을 때, 항상 놀라는 것이 있다. 한편에는『레미제라블』과 같은 너무 비참한 세계가, 한편에는 『오만과 편견』같은 화려한 귀족사회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어떻게 같은 시대일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시대라는 19세기는 정말 그랬다. 빈부의 격차가 정점에 이르러, 상위 10%가 90%의 부를 차지했다. 10%의 상류사회와 90%의 하류사회로 딱 양분되어서, 작가가 어디에 시선을 뒀는가에 따라, 19세기는 향락과 사치의 시대가 될 수도, 빈곤과 절망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10%의 상류사회 혹은 1%의 최상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선택받은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비주류 ‘라스티냐크의 수업시대’ 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라스티냐크를 이끄는 두 명의 선생은 사촌누이인 보세앙 자작부인과 같은 집의 하숙생인 보트랭이다. 자작부인의 살롱은 파리 사교계의 꿈의 무대이다. 젊은 라스티냐크를 후원하기로 한 자작부인은 그에게 성공의 발판으로 뉘싱겐 남작부인을 추천한다.

 

「자! 라스티냐크씨, 세상이란 이런 거예요. 세상을 알맞게 다루세요.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요? 내가 돕겠어요. 여성들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남자들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허영심에 빠져 있는지를 헤아리게 될 거예요. ․․․․․․․․․․․․․․․․․․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아실 테지만, 당신에게 관심 가진 여인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신에게는 젊고, 돈 많고, 우아한 여성이 필요해요. 당신이 진실한 감정을 가졌다면 보물처럼 숨겨두세요. 결코 그것을 남이 알아채게 해서는 안 돼요. 만약 그러면, 당신은 파멸이에요. 」

 

정체가 모호한 보트랭은 10여 페이지에 걸친, 일명 ‘보트랭의 설교’를 통해 라스티냐크에게 거액의 예비 상속녀인 빅토린 양을 유혹하도록 부추긴다. 보트랭은 악당이지만 그의 설교에는 19세기 사회의 진실이 축약되어 있다. 『21세기 자본』의 피케티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노동이냐? 상속이냐? 의 문제이다. 라스티냐크는 법률가로 성공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보트랭은 그것이 한낱 환상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는 노동을 통해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배경은 1819년 파리다. 라스티냐크는 1800년 전후로 태어났을 것이다. 당시 상위 1% 노동소득자가 얻는 생활수준은 노동소득 하위 50%가 얻는 생활수준의 10배 정도가 된다. 라스티냐크가 성공한 법률가가 된다 해도 하층민의 10배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위 1%의 상속인이 얻는 생활수준은 하층민의 25배가 넘는다. 수십 년을 노력한 끝에 사오십 살이 되어 검사장이나 파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변호사가 되어도, 당장 빅토린 양과 결혼해서 얻는 생활수준의 절반에도 미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법률가로 성공하기가 힘들다. 파리에는 좋은 일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우리가 개미굴로 표현하는 것을 발자크의 시대는 거미 항아리로 묘사하고 있다.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p148」

 

천재가 아니면 타락밖에 방법이 없다. 보세앙 자작 부인의 추천이나 보트랭의 유혹이나, 다를 것이 없다. 자작부인은 젊고, 돈 많고, 우아한 남작부인의 애인이 되기를 권하고, 보트랭은 100만 프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빅토린양과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단 빅토린 양이 상속녀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속자인 오빠가 죽어야 하고, 라스티냐크는 그 음모를 묵인해야 한다.

 

「보세앙 부인이 나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설명한 것을 저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해 주었어. 그는 내 가슴을 마치 쇠갈고리로 찢어놓은 것 같아. 나는 왜 뉘싱겐 부인 에게 가고 싶은 걸까? 저 사람은 내가 생각들을 가슴속에 품자마자 곧 그것들을 알아버린단 말이야. 어쨌든 한마디로 말해서 저 악당은 다른 사람들이나 책들이 나에게 얘기해 준 것보다도 더 많은 미덕을 가르쳐 주었어. p158」

 

‘라스티냐크의 딜레마’는 19세기가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 보다 훨씬 높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얻는 소득의 성장률은 1%정도인데, 자본은 해마다 5%의 성장률을 보인다. 지금으로 치면 연봉이 1000만원 올랐는데, 전세 값은 5000만원이 오른 셈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소득자는 전세를 줄이거나, 월세로 가거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는 소득이 오른 것이 아니라 내린 것과 같다. 거꾸로 임대업자는 일을 하지 않고도 노동소득자의 5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피케티는 이런 현상을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고 표현한다. 보트랭의 설교에 대입하자면 상속은 과거이고 노동은 미래이다. 상속이 노동을 잡아먹는 사회이므로, 라스티냐크가 아무리 출세한 법률가가 된다고 해도 빅토린양의 백만 프랑에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막 상류사회를 밟은 라스티냐크은 보트랭의 음모에 저항한다. 보트랭은 뉘싱겐 남작부인을 통해 출세하려는 라스티냐크나 음모를 꾸미는 자신이나 결국에는 다르지 않음을, 똑 같은 범죄임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자네가 연애라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다는 말인가? 여보게 학생, 덕성이란 잘게 쪼개지지 않네.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일세.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참회하라고 말하네. 게다가 덕성 때문에 깨우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멋진 이론 아닌가! 사회가 설치한 사다리 난간에 이르기 위해서 여성을 꼬드기고, 자녀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던지며, 각자의 쾌락과 이해를 목적으로 남모르는 장소에서 저지르는 모든 파렴치한 행위들이 자네는 신념과 희망과 박애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어린애한테서 재산의 반을 하룻밤에 빼앗는 신사는 어째서 두 달 동안의 징역을 받고, 위급한 경우에 천 프랑의 지폐를 훔친 불쌍한 녀석은 어째서 도형장으로 끌려가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자네들의 법일세. 어느 법조문 하나도 부조리하지 않은 게 없네. 장갑을 끼고 기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신사는 살인을 해도 피도 흘리지 않고 속여서 어물쩡 넘겨버리네. 살인범은 자물쇠를 열 때 쓰는 작은 지렛대로 문을 연다네. 이 두 가지가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 범죄일세! 내가 자네에게 제의한 것과 자네가 언젠가는 하게 될 행동 사이에는, 피를 많이 흘리느냐 적게 흘리느냐의 차이밖에 없는 것일세. 자네는 이 세상에 어떤 고정된 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인간들을 경멸하게. 그리고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보아 두게. 겉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큰 성공의 비밀은 바로 그것이 망각된 범죄라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 범죄는 정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세. p156~7」

 

보트랭의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처음 라스티냐크이 선택한 것은 피를 적게 흘리는 범죄다. 그러나 고리오 영감의 비참한 최후와 그 딸들의 비정함을 겪은 라스티냐크는 ‘투쟁’을 선언한다. 투쟁은 복종, 반항과 함께 이 사회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라스티냐크가 생각했던 것이지만 어느 것도 결심하지 못했었다. 복종은 가정을, 투쟁은 세상을 반항은 보트랭을 의미한다. 복종은 귀찮았고, 반항은 불가능했으며, 투쟁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의 무덤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화려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고 우렁차게 외쳤다. 그리고 뉘싱겐 부인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애인이자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이다. 마지막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임종도 매장도 보러오지 않았다. 고리오 영감의 최후를 지켜보며 딸들의 배반과 타락을 몸서리치도록 겪은 라스티냐크는 아마도 뉘싱겐 부인에게 일말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라스티냐크는 파리와의 대결을 결심하며 뉘싱겐 부인에게로 향한다. 왜? 아마도 보세앙 자작부인이 해 준 충고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마다 바꿔 타고 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뉘싱겐 부인은 라스티냐크의 첫 번째 역마가 될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어떻게 사교계를 정복한 것일까?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자극하지만, 사실 상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발자크는 처음으로 ‘인물 재등장 기법’ 을 시도했다. 여러 소설에서 똑 같은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라스티냐크는 스물다섯 편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 아마도 우리는 연 수입 이만 프랑의 여자와 결혼한 라스티냐크, 장관이 된 라스티냐크 등 라스티냐크의 일생을 다양한 소설로부터 짜맞추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입헌군주제와 카톨릭을 신봉했다. 19세기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발자크의 세계관은 다분히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귀족이 부르주아보다 두 배나 많고, 부르주아는 민중보다 세 배나 많다. 그에게 민중은 배경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럼에도 발자크는 엥겔스가 말했듯 ‘진보적 냄새를 풍기는 예술가’ 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이 계급의 부상과 프랑스 사회의 나갈 방향을 누구보다 재빨리 인식하고 깊이 있게 묘사했다. 발자크에게 혁명적 요소는 전혀 없지만,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전형적 인물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었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작품해설>에는 발자크에 대한 이런 평가가 인용되어 있다.

 

「귀족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귀족일 수 있으나 부르주아지는 모든 성공과 실패의 유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할 긴박한 사회적 투쟁 속에 휘말려 있다. 발자크는 안정되고 교양 있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않았으며 바로 대혁명에 의해서 창출된 서민적인 부르주아지에 속하였다. 그는 수세기의 성장 끝에 비로소 19세기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부르주아 세계를 표현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작가인 동시에 이 계급의 철저한 자기 인식과 탐구 그 자체에 의하여 이 계급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가 되었던 작가였다.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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