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함께 읽기다 -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이야기
신기수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올해 우리 독서회 회장이 바뀌었다. 전직 회장은 긍정과 화합의 달인이다. 어떤 불량(?) 책에서도 기어이 배울 점을 찾아내고, 들쭉날쭉한 회원들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끌어 왔다. 새로운 회장은 목표 지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말하자면, 소장파다. 올해 독서회는 조금 더 활력적이고 다소 힘겨운 도전을 할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첫 책으로는 북바이북 출판사의 『이젠, 함께 읽기다』가 선정되었다. 누구 추천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회장의 직권상정(?) 인 것 같다. 새롭게 출발하면서 독서회 자체에 대해 까놓고 얘기해 보자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도 대찬성이다.

 

『이젠, 함께 읽기다』는 ‘숭례문학당’ 이라는 독서공동체에서 공동 집필한 책이다. 숭례문학당의 독서토론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독서토론 길잡이 책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소개를 보면 숭례문학당은 “2013년 5월 4일, 숭례문 앞에 둥지를 틀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며 노는 학습놀이공동체다. 북콘서트, 원작영화 감상, 인문학 여행, 고전 낭독회 등 책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와 공부법을 실험하고 있다.” 이 책의 발행일이 2014년 9월15일이니, 뭐 그렇게 오랜 경험 끝에 나온 책은 아니다.

 

이 책이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잘 쓴 글도 아니고, 매우 감동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매우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일 년 반 동안 지금의 독서회를 하면서 내가 느껴왔던 문제점들이 거의 다 들어 있다. 물론 쌈빡한 해법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는 논제들을 던져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문제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어려운 것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구성원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문제’로 설정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방법이다. 혼자 나대다가는 무반응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나도 그렇다. 분명 옳은 말이긴 한데 괜히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마음이 열리지 않을 때는 그 어떤 것도 무용하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것들에는 공동의 보조가 필요하다. 이 책을 선택한 우리 회장은 현명하다.

 

첫 번째 문제는 책 선정이다. 작년에 독서회가 읽은 36권의 책을 대상으로 간략한 조사를 했었다. 가장 재미있는 책, 제일 유익한 책, 최악의 책으로 나누었는데,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작년 하반기부터 책을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참석인원도 줄어들어, 어쩐지 나 때문인 것 같아 고민하다 조사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엄청 원성을 샀던 책인데 제일 유익한 책으로 꼽은 사람도 몇이 있었다. 모두에게 다 만족스러운, 예컨대 재미도 있고 유익하고 쉬운 책을 찾고 싶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추상적 기준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천차만별이다. 가능한, 이탈을 막으며 균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숙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젠, 함께 읽기다』에서도 수준에 맞는 쉬운 책부터 읽으라고 조언한다.

 

「우선 그런 이들에게는 쉽고 친절한 책부터 추천한다.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을 때 생각도 분명해지고 정리도 잘 된다. 굳이 읽히지 않는 책을 낑낑대며 자학할 필요 없다. 결국 독서란 즐거워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독자가 죄책감을 갖게 하는 책 읽기란 ‘나쁜 독서’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이렇게 하니 되더라, 더 노력하라!”고 몰아붙이는 책은 불량서적을 넘어 ‘해악서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p17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 독서회의 최악의 책도 그 선정이유로 '어려워서'가 가장 많이 꼽혔다. 어려운 책 앞에서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굳이 독서회에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쉬운 책만 읽어야 할까? 그런데 『이젠, 함께 읽기다』는 뒤이어, 앞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말을 한다. 이번에는 다소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인식하고 경험하길 바란다. 창의적 존재를 꿈꾼다. 그렇다면 어찌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습관처럼 사서 읽어 넘기고 꽂아두는 독서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소 어려운 책, 낯선 책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에 따른 공부도 기꺼이 즐겨야 한다. 다른 생각을 접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경험적 독서로 가는 길. 바로 공독이다. p51 」

 

그런데 독서회를 경험해 보면 재미로 시작해서 성찰로 넘어가는 이 과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 여행서나 수필을 즐기는 사람을 인문학으로 유도하기가 참 힘들다. 많은 회원들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하고 즐거운 책을 좋아한다. 뭔가 불편하게 하고, 반성을 필요로 하고, 깊은 생각을 요하는 책은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미 삶 자체가 고달픈데, 책까지 왜 고민을 해야 하냐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신데렐라 드라마가 지치지도 않고 인기를 끄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 책 보다는 답이 있는 책을 좋아한다. 혜민스님이 인기가 있는 것은 잘 생긴 얼굴과 높은 학벌 이외에도 지혜라는 이름으로 답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숭례문학당의 저자들은 공독을 통해 한 단계 뛰어넘는 독서로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 현실을 보면 언제가 될까 싶다. 그래서 리더가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논제를 이끌어 내고, 회원들의 사유를 촉발하고,골고루 발언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야 한다. 리더란 딱히 회장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발제자가 리더가 될 수도 있고, 돌아가면서 할 수도 있고, 리더의 역할을 해보는 것, 그것 자체가 좋은 훈련일 것이다. 여하튼 재미와 성찰을 잇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어떤 독서회든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의 첫 번째 과제가 될 것 같다.

 

두 번째는 주부독서회 특성상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우리 도서관에는 세 개의 독서회가 있다. 두 개가 주부 독서회이고 하나는 직장인 독서회이다. 처음 가입할 때 나는 도서관에 두 주부독서회의 특징에 대해 문의했다. 나는 전문 분야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학 위주라든가 인문학 위주라든가 뭐 그런 독서 성향 자체의 차이를 예상했다. 그런데 담당 사서가 회장들과 직접 이야기 해보기를 권했다. 먼저 통화가 된 독서회 회장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7~8년 된 오래된 독서회이고 회원들도 거의 초기 멤버라 신입회원들이 적응하기가 좀 힘들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책읽기보다 친목이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연히 다른 독서회를 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여기서도 그런 문제가 눈에 띄었다.

 

첫 토론회에 나간 날 나는 깜짝 놀랐다. 소위 민증을 까야했기 때문이다. 다들 이름 뒤에 언니나 씨를 붙이거나 그냥 존칭 없이 불렀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무조건 ~언니, 어린 사람에게는 ~씨 혹은 ~야 였다. 이건 아니지 싶으면서도 처음부터 튈 수 없어 로마법을 따랐다. 덕분에 나는 졸지에 서열 2위가 되었다. 회원들은 아이디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런데 언니, 동생의 유사 가족 관계가 되면서 어딘지 분위기 전체가 토론보다는 화기애애함으로 흘러가는 느낌을 받았다. 토론이란 무조건적 수용이나 칭찬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비판이다. 상대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해야 하고, 때로는 불꽃 튀는 논쟁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피하면 독서토론은 사실 독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독서토론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시하는 회원들도 없지 않다. 물론 나도 우리 독서회의 따뜻함을 참 좋아한다. 그런데도 독서회는 기본적으로 독서회여야 한다. 시간상의 문제, 개인적인 문제 등으로 토론회가 끝나고 밥 먹는 자리에만 참석하는 회원들도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라도 얼굴을 보여 주는 회원들이 고맙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자연 뒤풀이 자리가 계모임으로 흘러가기 쉽다. 나는 뒤풀이 모임이 토론회에서 못 다한 이야기, 치열하게 논쟁을 주고받았던 회원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회원들도 많을 것 같다. 개인적인 고민, 아이들 이야기, 인간적인 이야기 등을 더 좋아할 수도 있고 그것이 실제로 독서회의 결속에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들도 책을 통해 논의될 때 훨씬 더 객관성을 가지고 서로에게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일이년 함께 독서회를 하다보면 수다를 떨 때보다 더 자기 삶을 속속들이 드러내게 된다.

 

「매달 한 번씩 전주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올라오는 주부 인정씨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앎에 대한 열망이 커진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책 읽기를 실천해왔지만 주부들이 모였다 하면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모임으로 빠지는 데 아주 넌더리가 났다고 고개를 저었다. 수다로 끝나는 독서모임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성장시키지도 못했다. p81」

 

세 번째는 발제와 진행의 문제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발제를 두려워한다. 사실 ‘주부’라는 말로 통칭되는 집단에는 가족 관계에서의 역할 이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엄마나 아내로서의 역할이 아닌 개인적 삶에서의 공통점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회원들만 해도 일찍 사회에 진출한 사람부터 문학 박사과정을 한다고 오랫동안 학교에 있었던 사람까지 다양하다. 발제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10여년을 문학 텍스트만 공부한 사람과 거친 사회생활을 헤쳐 온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때보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회원이 들어오게 되면 조금 더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사실 수강료도 안내고 공짜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발제와 비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좋은 발제는 매끄러운 말이나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남들이 학교에서 추상적 삶을 배울 때,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생생한 경험들이 책 속의 문자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전체를 요약하는 힘이 부족하면, 가슴에 탁 꽂히는 문장에 집중하여 자신의 삶을 엮어내면 더 할 나위 없는 발제가 될 수 있다.

 

진행상의 문제도 비슷한 점이 있다. 많이 알고 많이 읽은 사람이 많이 발언하게 된다. 더듬더듬하거나 주춤주춤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라먹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참고 기다려주고 들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개입하는 것이 그 사람의 부담을 덜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토론에서 최고로 좋은 공부는 새로운 관점을 접했을 때이다. 더듬더듬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 비스듬히 기울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을 툭 건드리는 발언이 최고다. 그 한마디야말로 나의 사유를 촉발하는 강력한 기호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제기의 능력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저자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는 걸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욕망이 발동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의성도 바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질문도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동선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그 동선이 나아가는 방향을 앞 설 수 있겠습니까? p153」

 

토론은 이론이나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관점이다. 새로운 관점. 물론 원활한 토론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태도의 바탕은 열린 마음이다.

 

「또 토론자가 갖춰야 할 태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열린 마음이다.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대화하겠다는 자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다른 참여자들과 소통을 위해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 더불어 긍정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 같은 말이라 해도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 상호관계성의 이해도 중요하다. 토론은 대화와 마찬가지로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제한된 시간에 이루어지는 독서토론은 참여자들에게 균등한 발언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물론 진행자가 그것을 관리하지만 다른 토론자들도 배려해야 한다. 발언권을 독점하려하지 말고 다른 토론자들도 배려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의 대가는 잘 듣는 사람이다. p201~2」

 

남의 말에 수시로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 물론 즉각적인 반박과 의견개진은 토론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상적인 토론은 4~5명의 토론자들이 갑론을박하며 불꽃 튀는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그런데 토론자가 많아지면 모든 토론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골고루 주어야 한다. 참석자 모두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감상을 말하는 순서에서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고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불쑥불쑥 끼어든다면 좀 곤란하다. 물론 틀린 정보라든가 당장에 꼭 해야 할 말은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물론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자기는 다른 말을 하거나, 그 말에 조금 더 보태어 말하면 된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개 생각도 많으니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더 좋을 것이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할 말을 되뇌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끼어드는 것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이런 문제들은 진행자가 적절히 조절해야 하지만,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런 사례도 있다.

 

「운 좋게 강연장에서 회장이라는 50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자세는 꼿꼿했다. 다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서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회원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 책을 잘못 읽었다며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라고 혼낸대요.” 그런 이유 때문일까. 독서회는 신입회원이 수혈되지 못한 채 기존 멤버들만 세미나 형식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그에게 책은 양식이 아니라 독이었다. p41」

 

『이젠, 함께 읽기다』는 독서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현실적인 고민들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공동저자들이 하는 모든 말을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도 말하듯이 독서의 기본은 비판적 시각이니까. 내 눈에도 몇 군데 의문스러운 대목이 보인다. 여기서 그 이야기까지 한다면 이미 너무 길어진 글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지난하고 지루한 작업이 될 것이므로, 한 군데만 짚고 끝내려 한다. 219쪽이다. “인문학이 밥 먹여 주나?” 라는 윤호의 당돌한 질문, 사실은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흔한 질문,에 저자들이 하고 있는 답변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일까? 그렇다면 돈 걱정 없는 부자들은 인문정신을 기르면서 살고 있을까.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이 전부일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선뜻 답할 수 없을 만큼 인생은, 또 인간은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p219」

 

이 말의 전제는 먹고사는 문제와 인문학이 관계없다는 것이다. 나는 먹고사는 문제의 틀을 결정짓는 것, 그 룰을 결정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인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인문학을 특히 철학을 읽는 이유다. 논거는 말씀드린 대로 생략한다. ^^;;

 

 

 

추기 : 오늘 빠뜨린 것. 쓰기에 관한 것. 독서 감상문이든 독서 후기든 쓰는 문제에 대해 이번 토론회 때 이야기 할 것!  잊지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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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7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7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5-02-0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시작할때 주제에 따른 토론회를 만드는것도 중요하더라구요. 문학, 철학, 역사 이런 식으로....
저도 독서모임은 토론이 주가 되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잡답은 가급적 못하게 합니다. 대신 점심 먹으면서는 잡담으로ㅎ
부담스러워하는 회원은 탈퇴하는데 냅둡니다^^ 그릇이 작은거죠.
회장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리더의 역할 중요해요.
독서토론회 책 선정 수준을 높이고, 토론 위주로 하시길 적극 추천합니다^^

말리 2015-02-08 10:46   좋아요 0 | URL
핫;; 제가 회장이 된 것은 아니고요. 저보다 훨씬 적극적인 분이 되었습니다. 3월 첫 토론을 통해 독서회의 방향을 잡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아야지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실 2015-02-08 15:18   좋아요 0 | URL
회장이 바뀌었다를 회장이 되었다로 읽었어요^^ 이런~~~

책통자 2015-02-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현답... 책보다 더 좋은 서평이네요... 길고도 깊은 리뷰, 감사합니다....

말리 2015-02-11 18: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까지 해주시니 더 없이 감사합니다.

샐리 2015-02-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감이 많이 되네요. 안내서 공유할게요 감사합니다.^^

말리 2015-02-12 16:47   좋아요 0 | URL
적지 않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처음이라 1월 내내 신간평가단 책을 기다렸는데, 이 작업은 참 더디게도 진행되었다. 추천받고, 선정하고, 출판사와 접촉하고, 다시 발송하기까지 거의 한달이 걸리는 것 같다. 지난주 후반에야 겨우 책 두권이 도착했는데, 서둘러 읽고 리뷰를 마치고 돌아서니, 벌써 이번달 주목 신간 페이퍼가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에 낙선한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이 오늘 배달된다는 문자가 왔다. 이번달에는 나의 책이 선정되기를 바라지만, ㅎㅎ ^^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1976년 판이다. 한동안 푸코를 노려만 보고 있다가, 『감시와 처벌』『성의 역사』『말과 사물』 이런 것들이 무척 겁나보였다, 몇년 전에 지인들과 『안전,영토,인구』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이것이 나의 첫 푸코 책인데, 예상외로 아주 재미있고 쉬웠다.

 

푸코는 1971년에서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했다. 오픈강의 같은데 학생,학자,교사,외국인, 푸코 이름만 듣고 온 사람 등등이 한꺼번에 몰려 강의실 두 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이런 강의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어디든 쫓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코가 한번의 강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했을까 놀라면서, 푸코 특유의 고고학이라든가 계보학이 어떤 방법의 학문인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박학다식함에 재미까지 곁들여 있으니, 푸코의 저작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먼저 이 강의록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푸코 강의록은 지금도 계속 번역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안전,영토,인구』에 이어 『생명관리 정치의 탄생』과 『정신의학의 권력』을 읽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정신병과 정신병원을 둘러싼 정신의학의 권력에 관한 연구인데, 조금 지루했다. 19세기의 정신의학이라는 것 자체가 지금보면 매우 조악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안전,영토,인구』와『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은 통치권력에 관한 연구인데,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이번에 재출간된(예전 번역본을 다시 출간했다고 한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1975~76년 강의로, 1977~78년 강의인『안전,영토,인구』의 전편인 것 같다. 책소개를 보니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을 처음 제시하며, 수많은 후속 연구를 낳고, 당대 철학의 패러다임을 혁신했다고 한다. 그러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후 『안전,영토,인구』와『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의 시발점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푸코 강의를 처음 맛보기 위해서도 적절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재미있고 쉽다고 해도, 에세이도 아니고 가벼운 책은 아니니, 얼마간의 각오는 해야 한다.

 

 

이번엔 약간 가벼원 보이는 책 한권 ^^

커피를 엄청 좋아하는 철학자와 커피 전문가 21명이 커피와 철학에 관해 풀어놓은 이야기쯤 되는 것 같다. 커피 하우스가 프랑스 혁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스타벅스, 공정무역 커피 등등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 목차에 보이지만,좋은 커피 한잔과 함께 휴식할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탕누어라는 대만 문화비평가의 한자 인문학? 저자는 한자라는 언어 자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한다. 전공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자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인문학적 진실들"을 알리고자 무모한 도전을 했다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을수록, 그리고 글을 쓰려할수록 후회가 된다. 영어가 아니라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것이. 우리 아버지는 말하자면 재야 한학자였다. 사서삼경을 읽으셨고 특히 주역에 심취하셨다. 어릴적에는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아보였는지 모른다. 가정경제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가 그때 무릎 앞에 앉혀놓고 명심보감이라도, 천자문이라도 좀 가르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어에 소질이 없는지, 혼자서는 잘 안된다. 나이가 먹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고. 한자... 그 탄생의 역사라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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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겔스 2015-07-1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보호는 새로 번역한 거지 예전 번역본의 재출간이 아닙니다. 관심과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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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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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틀로 한 세대 전체를 규정하려면, 그만큼 세대 구성원들이 균질적이어야 한다. 연봉 오천만원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 신입사원과 시급 오천 오백 팔십 원을 받는 알바 청년이 동질적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단적인 사회 환경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같은 세대로서의 공통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사회 환경 자체의 세대별 차이는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해도, 환경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각양각색의 세대론이라는 것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대론은 말할 것도 없이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이다.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주로 386세대, 즉 삼촌 세대의 눈으로 당시 20대인 조카세대를 분석했다. 이후 얼마나 많은 세대론 책들이 유행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2013년에 두 권의 세대론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 최태섭의 『잉여사회』다. 두 저자 모두 서른 즈음의 나이에 자신들의 세대에 관한 책을 썼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응답이다.

 

올해 서른이 된 일본 청년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1년 스물여섯 살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일본판 세대론으로 (홍보문구에 의하면)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후 작년 말에 한국에 상륙했다. 그의 충격파가 한국도 강타할까? 글쎄, 모를 일이다.

 

후루이치의 책은 마치 학위 논문 같은 느낌을 준다. 학위 논문이란 것을 별로 읽어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박사 보다 석사 학위 논문에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매우 조심스럽고, 성실하다. 주제는 간단하다. 2010년 말경 <뉴욕 타임즈>의 도쿄 지국장이 일본의 세대 격차에 관한 기사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 이 책은 후루이치의 대답으로, 그 이유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다. 그가 300쪽이 넘게 연구한 것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불행한 환경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매우 매력적인 주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 보인다. 절망적 환경에도 행복하다? 불행해 보이지만 사실 행복하다? 어떻게?? 후루이치는 이 ‘어떻게?’를 찾아 차근차근 나아간다.

 

1장은 도대체 젊은이란 무엇인가? 라는 개념 규정과 그렇게 뭉뚱그려 하나의 세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2장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간다는 매스컴의 비판에 맞서 작은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연대와 외향성을 주장한다. 2005년부터 각종 미디어가 비정규직, 워킹푸어, 피시방 난민 등 불행한 젊은이들을 부각시켜 왔지만 정작 2010년 내각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20대의 약 70%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 결과는 과거 40년 사이 15%나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왜 이러는 걸까요?(개그맨 황현희 버전)

 

「전 교토 대학교 교수인 오사와 마사치는 조사에 화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 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p133」

 

우리의 상식과 달리 통계에 따르면, 불황일 때 생활 만족도가 상승하고 오히려 고도 성장기에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난다. 저자 후루이치는 각종 표와 도표를 사용해서 이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결과를 뒷받침하는데, 마치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 코너 같다는 인상을 준다. 매스 미디어나 지식인들의 주장을 사실로 전제하고 분석이나 해석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하나하나 뒤져보는 끈기와 성실성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세대론을 쓴 젊은이들과 이런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 것 같다. 후루이치의 책은 많은 데이터들로 신뢰성을 확보하지만, 대신 뚜렷한 관점이 없고 따라서 독창적인 해석도 부족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라는 이 반어적이고 매력적인 주제가 없었다면, 사실 이 책은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여하튼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불우한 환경에 만족한다는 것은 결국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135~6」

 

참 슬픈 행복이다. 그럼에도 행복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불행한데 나만 특별히 불행할 이유가 없다. 불행이 일상이면 불행은 불행이 아니게 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 박탈감 없이 슬프도록 행복하게 산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저자 한윤형은 자신들의 세대를 ‘내려가는 세대’ 라 표현하며, 부모 세대의 ‘올라가는 세대’와 대비시켰다. 민족성의 차이인지 개인적인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경제적 차이가 더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일본 젊은이들은 행복을 느끼는데 반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불행을 느끼는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본 젊은이들처럼 불행을 달관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불행을 희화화시켜, 개그의 소재로 삼거나 ‘병맛’이라 부르며 자학적으로 즐기는 경지(?)에는 이르렀다. 어느 쪽에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분노가 남아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일본의 젊은이들도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미래가 없는 소소한 일상은 그만큼 나른하고 답답하고 때때로 불안하다. 불끈거리는 마음은 월드컵의 열기로, 넷우익으로, 축제같은 시위로,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자원봉사로 그 출구를 찾아 나선다. 이 책의 3,4,5장은 이런 현장 속에서 젊은이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의 없는 사회에서 “어쨌든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는 욕망이 어떻게 분출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방향성 없이 불끈거리는 욕망은 매우 위험하다. 뭔가 꽂히는 것이 있으면 앞뒤 없이 달려간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IS를 찾아 시리아 국경을 넘은 10대 김군, 신은미 콘서트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고등학생, 수많은 일베의 자칭 투사들. SNS는 네그리가 말하는 집단지성을 이루기보다 파시즘적 선동과 광기의 장으로 더욱 빠르게 변질되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사유와 토론이 아니라 즉각적 행위를 촉구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다.

 

6장은 프롤로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물론 모든 장이 일본 젊은이들이 불행한 환경 속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비밀을 파헤쳐 왔다. 특히 6장에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이 비밀의 경제적 토대와 이 비밀의 지속 가능성 여부를 탐색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젊은이들은 실제로는 빈곤하지 않기 때문에,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젊은이의 빈곤문제는 지금, 당장,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의 젊은이들은 정규직이든 아르바이트이든 격차가 크게 심하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만 하면 정사원 이상의 수입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소위 ‘가족 복지’가 있다. 부모님 밑에서 살면 아르바이트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용돈만 벌면 의식주는 부모가 해결해 준다.

 

문제는 미래다. 부모가 더 이상 부양해 주지 못할 때, 부모를 부양해야 될 때가 오면, 빈곤 문제가 눈앞의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때에 가능한 상황이다. 당장 결혼을 예정한다면 빈곤은 눈앞의 현실이 된다. 출산율이 저하하고,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은 일본의 젊은이든 우리나라의 젊은이든 가장 현명하고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개인이 아니라 세대 차원이 되면,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고, 노인 세대를 부양할 젊은이 세대의 부담이 늘어나면서,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출산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인 인구수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가 오천만이 아니라 이천만이 되면 살기에는 훨씬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인구수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평균수명 연장으로 고령인구는 폭증하는데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줄어들면, 다시 균형이 맞춰질 때까지 고령인구를 부양할 수 없게 된다. 저자 후루이치는 “원인불명의 고령자 대량 실종 사건이라도 발생하지 않으면 p276" 이라고 표현했는데, 웃기면서도 음울하다. 노인네들 먹여 살리려고 빈곤의 늪 속으로 빠질 것이 번한데도 애만 퍼질러 낳으라고 할 수도 없고, 노인네들이 집단으로 증발하길 바랄 수도 없다. 100세 시대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시 그들이 행복한 이유로 돌아가, 첫 째는 당장은 빈곤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보살이라도 절대 빈곤에서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수많은 민란과 혁명이 왜 일어났겠는가.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를 끊을 결심을 했든, 부모에게 기생하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지금 당장은 그다지 빈곤하지 않다. 두 번째는 나름대로 인정받고 살기 때문이다. SNS를 생각해 보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좋아요’, ‘공감’, ‘추천’ 들이 널리고 널렸다. 이런 소소한 인정이 당장의 삶을 행복하게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바뀌기는 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결국 트위터가 제공하는 ‘공동성’에 ‘사회를 바꾼다’라는 목적이 흡수되어 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98~9」

 

일본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들은 “일본은 끝났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젊은이 저자 후루이치는 당당하다. “그래서 뭐?” 라고 되묻는다. 일본이 끝장난들, 일본이라는 국가가 사라진들,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진들 그게 뭐가 대수냐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일본이라고 불렸던 땅에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갈 것인데! 물론 일본의 종말이 눈앞의 현실은 아니니,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묘하고 뒤틀린 행복이 지속되리라 말한다.

 

이 책이 석사 논문 같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꼼꼼하고 성실한 자료수집과 인터뷰 따위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의 가치관은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미덕일 수도 있지만, 가치관의 부재일 수도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런 행복 속에 살아도 좋다는 것인지,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다못해 모든 논문이 형식상으로나마 제시하는 어떤 방향성도 대안도 없다. 일본의 현상의 한 단면을 세세히 풀어놓았다는 면에서 저자의 역할은 끝났다.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열려있다.

 

 

추기 : 겉표지에 쓰인 ‘사토리 세대’라는 말은 저자의 글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충 감만 잡고 있는 이 개념을 확실히 알아볼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데, 한 번 언급도 되지 않다니! ㅠ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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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5년 쯤 전에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 라는 카페에 가입했다.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지만 한 2년간은 매우 활발했던 카페다. 자칭 B급 경제학자 우석훈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사회과학 무료 강의를 시작하면서 개설되었다. 오프라인 강의를 듣기 전, 강의 주제에 따른 과제를 카페 게시판에 올리며, 놀고 배우는 공간이었다. 온라인 회원들도 꽤 많았고, 뒤늦게 합류한 회원들도 많아서, ‘쪽글’이라고 불리던 과제물은 강의 일정과 관계없이 들쭉날쭉 올라오기도 했다. 나도 지인의 권유로 한참 늦게 가입한 온라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강의의 목적은 ‘일반인 저자’를 키우는 것이었고, 따라서 ‘쪽글’이라는 이 희한한 이름의 과제물은 일종의 글쓰기 훈련이었다.

 

늦깎이로 합류한 내가 맨 처음 쓴 쪽글은 장소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제 제시 글에서 우석훈은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의 ‘공간과 장소에 관한 정의’를 짧게 소개했다.

 

“나는 그렇게 강조하는 편은 아니지만, 앙리 르페브르라는 학자가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차이에 대해서 지적한 적이 있다. 공간은 물리적 개념이고, 장소는 거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누적적으로 개입하는 곳, 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 기억도 없는 곳이면 공간이고,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 혹은 추억이 있다, 그러면 장소로 변한다는 그런 단순한 논리지만, 이 정도만 생각해도 물리적 특징만 있는 공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제는 “자신의 탄생지, 거주지, 그리고 은퇴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그 공간의 의미,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쓰시오.” 였다.

 

내가 쓴 글은 다시 읽어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쌉쌀하지만,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고 맨 먼저 생각난 글이다. 그 과제를 하면서 나는 사십 여 년의 삶을 주르륵 훑으며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짚어 보았다.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는, 출렁이던 남학생들의 물결이다.

 

하교 길이면 4차선 도로 양 쪽의 넓은 인도가 하얀 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 남학생들로 새까맣게 뒤덮이곤 했다. 절묘한 위치에 있던 우리 집은 버스 정류장 두어 개의 거리 안에 대여섯 개의 남자 중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땅값을 이유로 학교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전이었고, 우리 동네는 말하자면 학원(학교)가였다고 할 수 있다. 어깨를 스치도록 빽빽이 걷는 남학생들의 수풀 사이로 나는 매일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한 번도 따라오는 남학생이 없었다는 사실이 왠지 슬펐던 기억이 난다. 예뻤던 나의 셋째 언니는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남학생을 피해 비명을 지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오래 전의 그 거리는 슬프고도 설레었던 추억의 장소이다. 그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있어 그 텅 빈 거리는 고향을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끝내 특별한 장소를 만들지 못했던 십 여 년의 삶이 있었다.

 

“나는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산다. 십여 년을 서울과 경기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경기의 북쪽 끄트머리든 남쪽 귀퉁이든 아파트들이 모여 이룬 소도시들은 여기가 저기 같아서 계속 한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 동안의 내 삶의 모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늘 같은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십여 년 내가 머물렀던 공간들을 아직 나는 어떤 장소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다. 특별한 사람도 추억도 삶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유랑을, (한때 그리고 지금도 유행하는 것 같은 말로 하자면) 유목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너무 텅 빈 이 공간을 어떤 이야기가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미끄러지기만 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간 카페에서 몇 조각 긁어온 문장들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대충 이런 식의 기억들로부터 글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이라는 그 ‘특별’한 도시에서 주거했던 기간은 20대의 한 10년간이다. 하숙촌에서의 4년과 결혼 전 강북 여기저기에서의 6년 정도가 전부다. 신혼집은 경기도 북부에서, 그 이후로는 경기 동부와 남부 등을 맴돌다, 지금은 수도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애당초 서울에서의 주거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은 내가 모르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도 아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것은 15기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간평가라는 것이 신문의 서평처럼 일정한 형식을 강제하지는 않아, 나는 평소처럼 책이 촉발한 어떤 기호를 따라 자유롭게 떠돌고 있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류동민은 <책머리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자리는 사회과학으로 때우려 하고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인문학으로 얼버무리려는 어설픈 짓을 한 것 같아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고백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두려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자의 인문학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까만 머리 남학생 물결에 대한 추억과 비슷한 것들이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지젝이 잘 하듯(요즘 유행이니 꼭 지젝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저자가 좋아한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에 빗댄 설명들도 해당될 듯하다.

 

여하튼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 새롭지는 않다.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포털 뉴스들에서, 화제가 된 트윗에서, 팟캐스트에서, 어디서건 보고 들었던 듯하다. 스타벅스가 제공하는 네 가지 선택의 ‘자유’, 아파트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대치동 학원가와 영등포 공시생, 압구정동 성형외과, 자본에 잠식되는 대학 캠퍼스, 상업화한 대형교회, 영세 상인을 몰락시키는 마트, 학벌의 카스트화, 계급에 따른 주거의 분리, 능력신화의 파탄 등등이 추억과 함께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 서울의 맨 얼굴, 한국사회의 민낯은 이미 훤히 드러나 있다. 그 이유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이렇게들 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이 계몽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출구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혔으니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무수한 자기계발서와 멘토를 표방하는 책들의, 아름답고 싱싱한 문장들을 걷어내면, 나타나는 네 글자는 ‘각자도생’이다. 한때 유행했으나, 각자도생은 벌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승자독식의 결과는 개미지옥임을 상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장그래’ 다.

 

정말 출구는 없는가? 류동민이 말하는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아마도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처럼 눈에 띄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없다. 학자들 이름 몇몇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거기서 어떤 빛을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전망을 한 명의 경제학자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에필로그에 제시한 시나리오는 얼마간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미래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자유시장경쟁의 가속화다. 류동민은 탈주자와 추격자의 관계로 묘사하는데, 추격자가 절망하여 추격을 포기할 때, 투 트랙의 사회가 완성될 것이라 본다. 빈부 격차의 극대화다. 저자가 희망하는 또 다른 시나리오는 추격이 가능한 민주적 사회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 더 나아가 능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요구와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때 사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지금 여기에서 생산적 의의를 갖는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P279”

 

이 주장에 의하면 류동민은 기본적으로 ‘탈주와 추격’을 바람직한 사회의 작동원리로 보고 있다.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는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말이다. 물론 자본이 능력 발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세습사회로 가는 길 보다는 개천의 용을 꿈꾸는 과거로의 회귀가 나아보일 수는 있다. 그런데 능력사회란 승자독식 사회와 다른 것인가? 능력주의의 극단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것이 바로 승자독식 아닌가?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로 이행된 것이 보험의 원리에서 복권의 원리로의 이행이었다면, 복지국가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노력에 따르는 성공이라는 복권을 꿈꾸는 사회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사보험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 재주껏 살아남기’ 라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정상을 향한 것이라고 여겼던 경주가 실은 바닥을 향한 경주임을 깨닫게 될 때, 추격과 탈주의 과정이 밟을 수 있는 미래 시나리오 중에서 어느 것이 실현될지가 결정 될 것이다. p280”

 

저자의 의도와는 (아마도) 다르게 이어지는 문장은 앞서 말한 투 트랙이 사보험과 복권으로 비유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일으킨다. 능력주의가 복권을 꿈꾸라는 것처럼 들릴 위험이 다분하다. 그런데 능력주의와 공공성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 이어 곧바로 공공적 ‘도시권’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도시권이란 도시의 일상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로 정의된다.

 

“그런데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터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주거지에서 일터까지 통근에 걸리는 금전적·비금전적 비용의 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과 젊은 세대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자본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28!21”

 

여기서 저자 류동민은 마치 안심하라는 듯 도시권의 요구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권리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증상’이 아닐까? 탈주와 추격을 사회의 기본 작동원리로 보고, 능력주의를 요구하고, 무의식중에 복권을 상위에 놓는 태도는 그가 자본주의적 틀 밖에서 사고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는 안 되지만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의 모델 또한 벗어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저자가 갈 수 있는 길은, 개천의 용이 복권에 당첨되기도 하던 능력사회, 유래 없는 경제적 행운을 누렸던 그들 386세대들이 사회에 막 진출하던 과거밖에 남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사민주의, 이른바 서구 복지국가의 공적보험 모델에 대해서는 왜 애시 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실패한 모델이기 때문에?

 

가장 난감한 것은 마지막 문단이다. 갑자기 앵겔스가 불려온다. 앵겔스는 사유재산 때문에 의사결정이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개념을 공간에 적용하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공적 도시권의 요구임을 강조한다.

 

“만약 공간 생산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라면, 그것은 돈의 논리가 우리들 각자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하므로 비록 추상적이지만, 돈의 논리 때문에 왜곡되는 우리의 기억, 억압당하는 이들의 기억을 복권시키는 것에서 공간 생산의 정치경제학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울의 정치경제학은 다시 공간의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p284~5”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결국 공적 도시권을 억압한다는 소리다. 기본모순이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민주와 평등을 주장해 왔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허용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자본주의 안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리뷰가 신간평가단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상당히 입이 쓰다. 사실 개인적 취향에 맞는 책은 아니지만,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심심찮게 읽을 만한 책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어떤 골목길, 잊었던 옛집의 우물과 개암나무 따위를 불현듯 불러오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내내 아쉬웠던 것은 너무 많은 것들의 나열과 이미 알려진 분석들이 대부분일 뿐, 저자의 독창적인 관점이나 깊이 있는 해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와서 저자가 어떤 관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결정적 느낌을 받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지극히 사적인 독해에 불과하다. 다른 신간평가단원들의 새로운 해석들이 지극히 편협한 나의 독해를 수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하루에 기껏해야 2~30명,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많아봤자 4~50명의 방문객을 맞는 한산한 서재 주인이다.  혹시 이 책의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게 되더라도 신경쓰지 않기를 바란다. (아..사족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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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2-0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 책 보니 데이비드 하비가 << 반란의 도시 >> 에서 주장한 도시권가 비스무리한 것 같습니다.

말리 2015-02-02 10:2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조금 애매한 것이 사회과학적 이론을 조금씩 언급하긴 하는데 별 설명없이 넘어가 버립니다. 이미 알고 있어야 그 문맥의 깊이? 혹은 적절성을 알수 있지요. 말씀하신 책은 읽을만한지 궁금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2 18:34   좋아요 0 | URL
반란의도시`도 그닥... ㅎㅎㅎㅎㅎㅎ
용두사미`로 끝나서 화딱지가 납니다.
공간지리학이 의외로 참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반란의 도시보다는

피터손더스가 엮은 < 도시와 사회이론 > 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지리학 입문서인데 요거 한 권 읽고 공간 지리학 읽으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말리 2015-02-0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찜해 두겠습니다.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독서회 첫 소설. 재미있다. 그런데 하고싶은 말은 없다. 속죄라기 보다는 변명이 아닌가? 교훈이라면 우리가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 그러나 진실을 오해하는 것 보다 진실 자체가 없다는 것, 그 진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야말로 충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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