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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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다. 책을 읽고 이런 우울함을 느낀 건 또 처음이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평판때문이다.

 

영화 <명량>을 둘러싼 설전을 힐끗힐끗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뭐라고 껴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대중적 취향이라 천만 넘는 영화는 나름대로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거리가 되었든, 웃기기 때문이든 혹은 싸구려 신파라 할지라도,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영화에는 분명히 우리를 움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을 찾는 작업이 평론가의 일일텐데, 간혹 어떤 비평들은 대중의 싸구려 취향을 비웃거나 훈계함으로써 SNS의 시비를 불러일으킨다. 명량에 대한 집단 열광은 병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관객의 발걸음은 치료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 비록 관객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지독한 증상이다. 증상을 두고 그걸로 치료가 되겠냐고 묻는 것은 분석가의 태도가 아니다. 증상에서 적절한 병명을 찾아내는 것, 그가 먼저 해야할 일은 그것일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 나는 평자도 분석가도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두 개의 대하소설이 있다. 토지와 태백산맥이다. 그때 토지는 완간되지도 않았고, 태백산맥도 막 출판이 되기 시작할 때였다. 서울에 갓 올라와 사투리는 부끄럽고, 서울말은 낯간지럽던 시절이었는데, 토지와 태백산맥은 사투리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내가 쓰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정감 넘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영 낯설던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찰방지고 멋드러진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 토지는 지금도 '나의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로 책꽂이에 남아있지만, 태백산맥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내가 좋아한 태백산맥은 딱 6권까지이다. 한권 한권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7권부터의 태백산맥은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똑 같은 작가의 손에서 나온 책일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7권부터는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구호와 선전만 남은 느낌이었다. 내 사춘기 시절을 달구었던 김영숙의 순정만화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뒤늦게 알았지만 김영숙의 만화들은 일본 만화를 베낀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정성들여 베껴내어 우리를 꼼짝없이 사로잡았지만,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림이 엉망이 되어갔다. 첫 권과 마지막 권을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태백산맥의,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에 대한 묘사가 딱 그랬다. 살아있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형들만이 남았다. 그래도 아리랑이 나왔을 때,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어권을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이후로는 조정래의 책은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정래의 명성은 하늘 높이높이 올라, 한국 문학계의 큰별이 되었다. 내 하늘에는 뜨지 않았지만.

 

독서회를 하며『정글만리』에 관한 말을 간간이 들었다. TV 광고에서도 들었다. 오빠집에도 있었다. 군에 있는 중국어 전공의 조카에게 1권을 보내고 2,3권이 남아 있었다. 오빠의 일을 이어받아 무역업을 하기를 바라는 새언니가 발빠르게 사보냈다. 담배보다 끊긴 힘든 저 어찌할 수 없는 사교육열이라니, 나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렇게 소문만 듣던 『정글만리』를 이번 주에 읽었다. 9월 독서회 책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읽었다니까 우리도 서둘러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자본주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진 결과이다. 사실 내가 읽자고 추천했다. 중국식 자본주의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망했다. 이런 책을 3권씩이나 읽어야 하는 우리 회원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솔직히 문학작품으로 치기에는 민망하다. 캐릭터도 문장도 조악하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너무 천박해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중국은 돈과 꽌시와 얼라이 외에는 없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 이라는 지젝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그대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하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들과 그것을 중국 인민들이 어떻게 내면화하면서 어떤 충돌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인물들 속에 훌륭히 형상화되면 말할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실의 차원에서 깊이있게 탐구되고, 사유되었기를 바랬다. 현실적으로도, 돈밖에 모르는 중국놈들이라는 관념이 중국시장 개척에 나서는 한국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퇴직하는 전부장을 통해 작가가 마지막에 쏟아내는 사변들이 뒤늦게 무언가를 채우려는 듯해 보이지만, 소설은 이미 끝이 났고, 이 소설에 대해 남은 인상은 그저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버린 중국과 그럼에도 2~30년은 뜯어 먹을 것이  어마어마한 시장이라는 것뿐이다.  

 

한 소설이, 명성 높은 작가의 한 소설이 내 기대를 배반했다고, 우울할 이유는 없다.  실망은 우울과 같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 반응이다. 리뷰를 쓰려고 '리뷰상품' 검색을 했더니, '알라딘 2013년 올해의 책' 파란 딱지가 눈에 뜨인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낸 것일까? 혼자서만 답을 찾지 못한 것인가? 이것은 나의 증상인가?,  대중의 증상인가?   나는 늘 대중적 감성의 편에 있었는데, 왜 이 책에 유독 별 한개를 주면서, 이렇게 우울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평자거나 분석가라면..., 그러나 나는 그냥 독자이고, 다만 우울해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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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글만리는 선물은 했지만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백산맥을 4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10권을 한결같이 쓴다는건 굉장히 힘든가 봅니다.
이곳엔 비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말리 2014-08-21 14:07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곳도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더위도 없이 여름이 다 가고 있네요. 10권을 힘빠지지 않고 쓰기도 어렵겠지만 읽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글만리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각선으로 읽었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ㅎ

icaru 2014-08-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대출해서 1권까지 읽었구요. 김에 2권 읽겠다고 예약해 놓은 상태인데, 문학적인 것은 고사하더라도 정보나 얻을 수 있겠지 해서 봤는데, 읽긴 읽되 정체모를 거부감을 정말 거부할 수 없더라고요, 참 아쉽더라고요...

말리 2014-08-21 16:34   좋아요 0 | URL
일본 상사원 두명을 <나홀로 집에> 어벙벙한 도둑들처럼 그려놓고 쾌감을 느끼는듯한 부분도 굉장했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사람을 중시하는 사업을 하는지를 익히 들어온 터라 더 놀랐지요.

책읽는여름 2014-08-2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대하소설은 토지와 태백산맥만 읽었습니다. 이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둘 다 다 가지고 있지만...그 뒤로 나온 다른 대하소설은 읽지 않았지요... 저는 토지도 중간부터 좀 그랬거든요 ㅜㅜ

말리 2014-08-22 10:32   좋아요 0 | URL
네^^ 토지도 3부부터는 굉장히 사변적이죠. 박경리의 역사관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지루하긴 했어요 저도.

책읽는여름 2014-08-22 15:14   좋아요 0 | URL
ㅎㅎ 3부라고 찍어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그뒤로 주구장창 이어지는 토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봐 참았거든요. 말리님이 콕 집어 말씀하시다니 통했네요! ㅋㅋㅋㅋ찌찌뽕입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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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말 할 수 있을까..

알아도 알지 못했던 것들..

 

한강은 "제대로 써야합니다" 의 압박을 어떻게 이기고,

제대로 쓸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지켜며.

 

나도 리뷰를 제대로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다만, 습기많은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아침에,

나는 펑펑 울었다,

고 써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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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에 대한 평이 다들 좋군요....

말리 2014-07-15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아는 이야기를 흡인력있게 써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원래 제가 한강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인물들이 구체적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감성적 공감과 전체적 조망이 모두 가능한 소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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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반쯤 읽었는데도 재미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다 읽나 한숨이 났다. 좋은 책이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집중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슬렁슬렁 살았다 해도, 중년으로 보일 정도가 되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이 꽤 되기 마련이라, 대부분 아는 내용들이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하숙촌에는 이름이 거창한 만화방들이 몇 군데 있었다. 또렷이 기억나는 이름은 집현전과 만화궁전. 24시간 만화방이었는데, 나는 가끔 등굣길에 기어들어가 해가져서 빠져나오곤 했다. 그때 ‘만화광장’ 이라는 월간 만화잡지가 굉장한 인기였다. ‘만화광장’의 꽃은 단연 허영만의 <오! 한강> 이었다. 들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오! 한강>은 안기부의 요청으로 그린 반공만화라고 했다. 일제강점 말기부터 80년 오월 광주까지, 주인공 강토의 파란만장 인생사의 끝을 놓고 보면 친공이랄 수는 없지만, 이런 것이 반공만화? 우리는 안기부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려갈긴 허영만에 환호하고, <오! 한강>에 열광했다. 그 후 ‘만화광장’이 폐간되었는데 (일시 정간이었는지, 폐간이었는지, 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 한강>때문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오! 한강>은 안기부가 선전용으로 기획했지만, 그 기획 의도의 촌스러움과는 정반대로 80년대 정치만화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념을 별개로 한다 해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엄청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만화였다.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책이다. 안기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만, 이 책 역시 이를테면 계도 혹은 홍보의 목적으로 쓴 책이다. 아홉 가지 영역의 인권을 다루고 있는데, 쉽고 흥미 있게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읽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이제 워낙 흔하기도 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라 일반적 독법으로 영화를 풀기 때문에 구미가 그다지 크게 당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물론 좋은, 혹은 선한 책이다. 아쉬움이라면, 좋은 책이니 더욱,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긴장감 넘치게 쓰였다면 하는 것이다.

 

삼분의 이 정도 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8장과 9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9장 제노사이드 편은 더 그랬다. 중앙아프리카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진 인종청소에 관한 사실들은 내가 모르던 것들이다. 간혹 르완다에 관한 단신을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너무 먼 나라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 후진국의 미개한 종족 간의 분쟁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프리카 종족들 사이의 학살전이 맞지만, 거기에는 벨기에와 독일의 과거 식민통치가 그 배경원인이라는 진실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 비극의 배후에는 서방세계의 제국주의가 있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유엔군이라는 명목으로 르완다에 들어온 서방국가들이 자국 국민들만 구해 나가고, 현지인들은 학살의 현장에 그대로 버려둔 냉혹한 ‘인권’ 의식을 고발한다. 그들의 인권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 즉 서방세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권리인 것이다. 동물들에게 인권이 없듯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도 인권은 없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언제나 인권을 떠든다. 북한의 인권이 어떻고, 중국의 인권이 어떻고... 고맙게도 그들에게 동양인들은 그래도 사람이긴 한 건가.

 

그런데 인권이 인간의 타고난 권리로만 규정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렇게 접근하면 인간 개개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의 휴머니즘이 해법으로 제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권이란 사회구조와 결부되어 있다. 식민통치가 있는 한 식민지 원주민의 인권은 없다. 독재가 있는 한 그 국민들의 인권은 없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저개발국의 기아는 해결될 수 없다. 김두식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는 잘 설명해 놓고도 결론은 이런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매달 약간의 기부를 하면 충분합니까? 먹을 것을 줄여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약간의 기부’와 ‘먹을 것을 줄여서 도우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리 많은 도움도 그저 ‘도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도움이기도 하지만, 잔혹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고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그 구조를 향한 진정한 분노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부추기는 갈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중단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지젝이 말하듯 지구상 최고의 자선가 빌 게이츠는 한 편으로 그 어마어마한 빈부격차를 유발하는 장본인이다. 소로스 역시 그렇다. 그는 업무 시간의 반은 인도주의적 활동에 할애하지만 나머지 반은 금융투기를 함으로써 (바로 그 인도주의가 필요하도록) 빈곤을 만들어낸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p52 <폭력이란 무엇인가?>

 

김두식의 이런 시각은 5장 노동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설명한 후 비정규직으로 불안정성을 높이면 잘리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자본의 생각이 다음의 이유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불안정성이 외형적인 생산성을 높일지는 몰라도, 불안한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에는 혼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혼이 빠진 상품이 고객에게 감동을 줄 리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경제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면이 너무 많습니다.....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날로 행복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양극화만 심화됩니다. p188” 날이 갈수록 경제가 악화되는 것은 상품에 혼이 들어있지 않아 사람들이 사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늘어가고, 임금이 낮아지는데, 혼이 들었건 넋이 빠졌건 어떤 상품이건 구매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순환이 가장 중요하다.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지면, 단기간 자본의 이익은 증대하겠지만, 노동자 즉 소비자의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판매량 자체가 감소한다. 사고파는 흐름이 막히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노름판과 마찬가지다. 큰 손이 싹쓸이를 하면 판은 끝난다. 고스톱을 칠 때도 개평이라며 딴 돈을 떼어주는 이유는 딴 놈이 착해서가 아니다. 고스톱 판이 돌아가려면 참가자 모두에게 일정액의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파산은 곧 소비자의 파산이다. 그것은 곧 자본가의 파산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전히 착취할 후진국이 존재하는 한, 원료는 싸게 사고, 생산품은 비싸게 팔 그런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자본이 쉽게 파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 하나, 둘 손을 털면 자본도 끝장이다. 당장 눈앞에,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라고 모른 척 하지만, 계산은 간단하다. 출산율 저하 운운하면서,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느니 경제가 후퇴하느니 난리를 칠 때, 나는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많아서 이 난리인데,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하면 사람이 필요한 일이 더 적어질 텐데, 평균수명도 늘어나 일할 수 있는 연령도 훨씬 높아질 텐데, 왜들 문제라고만 할까? 사실 우리나라는 국토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많은 편이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와서 알게 되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활동인구가 준다는 말의 진실은 일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로봇이, 아무리 높은 기술이 저 비용으로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면 무엇할 것인가? 그걸 사 줄 사람이 없는데. 혹시 미래에는 로봇이 구매자가 될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소비자들의 목을 이렇게 옥죄이는 것일까?

 

 

여하튼.... 나도 훈훈하게 마무리 ;;

착한 책이고, 필요한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으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폭넓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권감수성의 핵심은 ‘불편’이라고 한다. 불편해도 인권을 위해서라면 괜찮아. 좀 지루해도 인권을 위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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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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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를 다시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았는데, 올해 『투명사회』가 나오면서, 저자 한병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자, 어느 회원이 제안을 했고, 『투명사회』보다는 『피로사회』가 읽기 쉽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2012년,『피로사회』가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던 여름 즈음, 나는 서점 간이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훑어보고 살까 했는데,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워낙 얇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면역학에 빗댄 시작이 매혹적이었으나, 2012년 현재 우리사회와는 조금 엇나있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스스로를 닦달하며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자기 탓만을 하던 시기를 지나, 이미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2011년 9월의 ‘월가를 점령하라’를 통해 명시된 ‘99% : 1%’의 사회구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1%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게 되었다. 알지 못했던 것, 알고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하필 미국에서, 그 경제 대국 미국에서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미쿡’ 사람들이 보따리를 안고 쫓겨나는 판에, 그깟 토익 만점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1%를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사회는 이미 피로사회를 지나 잉여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었다.

 

오늘 독서회 책은『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다음 주가 『피로사회』인데, 회원들의 반응이 큰일이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단다. 『투명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인데,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않는 회원들에게는 너무 압축적이어서 힘든 것 같다. 한병철은 길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대중에게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발제해야 할 지 고민이다. 처음에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먼저 책 내용을 쉽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내가, 쉽게 가능할까? ;;

 

  

 

 

 

(이게 더 어려울까? ::)

 

 

 

피로사회란 한마디로 성과사회의 이면이다. 성과사회란 자기가 자기를 달달볶는 사회다. 이거는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 9시 출근 6시 퇴근, 눈치 볼 것도 없다. 오후에 느지막이 출근하든, 아예 집에서 뒹굴든 관여하지 않는 회사도 많다. 규율과 통제가 사라져 간다. 다만 성과만 있으면 된다. 이제 호봉제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우리 기업들은 급속도로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회사 오래 다녔다고 월급 많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성과만 좋으면 대리도 팀장이 되고, 연봉이 과장을 능가할 수 있다. 무능하고 연차만 높은 상사들은 눈치가 보여, 쪽팔려서 회사를 떠난다. 성과사회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성과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없다. 자기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다.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닦달하는 부모의 방식도 ‘성과사회’ 적이다.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저자 김두식이 딸에게 한 말이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데 대학을 가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에 빠져 살기 쉽다. 네가 그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이렇게 세련되게 나오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제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열 받아도 욕할 대상이 없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내가 무능하고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탓할 대상을 잃은 분노는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 속에서 곪아터진다. 우울하다. 하나의 일에 느긋하게 집중할 시간도 없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이 기본이다. 성과사회의 우리는 모두 집중력결핍과잉운동장애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특별한 목표 없는, 그래서 성과도 없는 어떤 활동도 낭비다. 여가활동마저 전투적이 되어버린다. 등산을 좋아하면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하고, 여행을 다니면 20대에, 30대에 꼭 가보아야 할 명소는 다 찾아다녀야 한다. 산에서도 뛰어다니고, 여행지에서도 녹초가 될 때가지 걸어야 한다. 책을 읽어도 일 년에 50권 목표를 세운다. 등굣길에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고, 차를 몰며 일어 회화를 들어야 하고, 청소를 하면서 고전읽기라도 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제레미 벤담처럼 우리 역시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나 과부하하가 걸린 기계가 정지하고, 무리하게 뛰는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처럼 과잉활동의 결과는 완전한 소진과 고갈이다. 피로가 몰려온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증상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가 되었을까? 왜 자본은 더 이상 직접 착취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틀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자기착취의 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됨에 따라 착취의 방법도 발달했지만 노동자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규율과 통제에 의한 강제적 착취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방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노동자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성에 목매달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졌다. 성과급이란 같은 시간을 일해도 그 실적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동료는 더 이상 나의 동지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내가 가져야 할 몫이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면서, ‘만인(의 동료)에 대한 만인(의 동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피로사회』의 개요만 짚자면 대충 이렇다. 이런 정도는 한병철의 고유한 분석도 아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져온 사회구조적 현상에 대한 많은 통찰들이 빠져있다. 아무리 자기착취를 해도 낙오할 수밖에 없는 승자독식 체제, 무한 경쟁 체제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받았던 것은 20세기의 규율사회를 면역질환으로, 21세기의 성과사회를 신경증으로 해석해낸 그 독특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병철 스스로도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시기다. 면역학에서 신경증으로의 변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이 모두 우리가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0세기는 면역학의 시대다. 면역반응이란 나와 이물질, 나와 타자의 투쟁이다. 면역학의 시대란 타자와의 대립의 시대다. 타자는 나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주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복종의 주체가 된다. “~해서는 안된다” 혹은 “~해야만 한다” 라는 금지와 강제에 따라야만 한다. 규율을 어기면 범죄자가 된다. 규율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광인이 된다.

 

면역치료는 나를 침입하는 이물질을 길들여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예방주사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우리 몸에 집어넣는 역발상이다. 약한 균을 미리 상대해 본 우리 몸은 자체의 방어력을 갖추게 되고, 진짜 실전이 벌어졌을 때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하자면 부정의 부정이다. 한병철은 헤겔의 ‘부정성’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투명사회』도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투명사회는 긍정성 과잉의 사회이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생각이다. 부정성의 회복,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가 그가 주장하는 해법이다. (『투명사회』리뷰)

 

21세기는 신경증의 시대다. 세계는 하나다. 우리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다. ‘살색’이란 말이 용납될 수 없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다양성과 차이의 시대, 관용이 제 1의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타자와의 대립이 없는 동질성의 시대,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평화롭고 행복할까? 함정은 긍정성이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부하고, 버리지 못한 것들이 모두 몸 안에서 쌓인다. 소화불량이 되거나, 비만이 된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더 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의 주체다. 무엇이든 “Yes, we can." 할 수 없으면 낙오자가 된다. 낙오에 대해서는 외부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오롯이 나의 탓이다. 젠장! 내가 못난 놈, 내가 쓸모없는 놈이다.

 

적이 사라지면 오히려 무기력에 빠진다. 맹렬한 적의는 분노를 불타게 하고 삶은 활력을 띤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적에게 돌려진다. 환상 속에 살 수 있다. 저 놈만 없으면, 저것만 없으면, 한순간에 유토피아가 열릴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장애물이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은 환상이다. 문제는 그대로다.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없다. 적은 상대하기 쉽다.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을 구조 짓고 있는 틀은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자연처럼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적응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틀 속에서는 어떤 해답도 없다. 젠장! 울하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쉽게 반유대주의에 빠져들었던 이유다. 삶의 피폐를 모두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유대인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몽땅 차지했다. 유대인만 사라지면 자본주의 경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빈곤과 퇴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는 유대인 탓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속되도록 유대인이라는 적을 독일인의 분노 속에 던져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진정 피로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인가? 이제 좀 지나갔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멘토 열풍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악착같은 자기계발과 자기착취 속에 기진맥진하면서도, 힐링 주사를 맞아가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한편에는 더 이상의 자기착취를 거부한 인생들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란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1~10%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낙오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이후 최근에는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이들 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회학을 생산해 내고 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 『잉여사회』, 그리고 약간 다른 각도의 분석이지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이 내가 읽은 책들이다.

 

『잉여사회』에서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은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이다.(리뷰) 나는 25년 전쯤에 입사원서 딱 두 장을 쓰고 취직했다. 그러나 이런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수십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쓰고도, 겨우 계약직으로나 사무실 책상을 가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구조적으로 많은 임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나 골라 쓸 수 있는 예비 노동자들이 항시 대기 중인 한 아무 문제도 없다. 여전히 많은 청춘들이 성과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자기착취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잉여사회다. 취업준비생의 사회는 잉여사회, 그것도 탈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잉여사회다. 애써 외면하며 “노력이 나를 바꾼다.”고 써붙여 보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처지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신물이 난 청년들은 스스로 잉여를 선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잉여다. 우리가 병맛이다. 개콘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잉여들, 자신을 희화하며 차라리 즐긴다. 그 극단에 일베가 있다.

 

물론 우리사회는 여전히 성과사회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자기착취가 한쪽에서는 자기 희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과사회인 동시에 잉여사회이고, 자기착취인 동시에 자기 희화이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성과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해법은 ‘부정성’ 이다. 헤겔의 부정성, 니체의 ‘아니오’ 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을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동일시하여 비판한다. 생각 없는 활동의 연속은 천재 백치, 자폐적 성과 기계를 낳는다. 니체는 “활동적인 사람은 보통 고차적으로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고 했다. 멈추어 서는 부정성, 무위의 부정성이야말로 사색의 본질이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부정성의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한병철이 아렌트를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인상이다. 아렌트는, 잘 모르지만 몇 권 읽은 책으로는, 행위와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 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은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이지 행위가 아니다. 설마 아렌트가 돈 받고 하는 일은 노동, 자유롭게 하는 일은 행위 따위로 단순하게 구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다.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유이다. 아렌트는 노동이 아니라 사유와 행위를 주장했다. 한병철의 과잉활동은 그것 자체로 성과사회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과잉활동을 굳이 아렌트의 행위개념과 무리하게 연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하튼 과잉활동에 대한 무위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한병철이 가져오는 것은 ‘바틀비’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 ~" 로 유명세를 타면서,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한병철은 바틀비의 무위를 규율사회의 무감각과 동일시하며 기각한다. 사실 『필경사 바틀비』를 직접 읽어보면, 이게 뭐? 하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의 필경사인데, 맡겨진 일들을 하나씩 거부한다. 그는 항상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며, 긍정문을 써서 거부한다. 끝내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가라는 말도 거부하고, 감옥에 가서는 먹는 것도 거부하고, 죽는다. 그런데 짧고 어이없는 이 단편을 두고, 많은 철학자들은 찬사를 쏟았다. 들뢰즈는 “바틀비는 간장병과 위축증 환자이면서도, 실은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 메디슨 맨,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다.” 라 했다. 내가 바틀비를 처음 접한 것은 지젝을 통해서다. 지젝 역시 한병철과 마찬가지로 무위의 부정성을 역설했다. 이것저것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 조용히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과는 달리 바틀비를 그 무위의 부정성으로 보았다. 여기서 지젝을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데,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틀 자체를 건드릴 때, 바틀비의 무위는 어떤 행위보다 파괴적인 전복이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이제부터 “우리는 삼성의 주식을 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면, 삼성은 일시에 파산할 것이다. 삼성의 주가는 삼성의 생산력 자체와는 관계없이 움직인다. 삼성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주가이지,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따위가 아니다. 혹은 “우리는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며, 한꺼번에 모두가 현금을 인출한다면 금융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은행은 가상의 돈으로 움직인다. 은행에는 실제로 모든 예금을 인출해 줄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이 만들어 놓은 시장의 틀,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단순한 거부나 무기력, 무력함이 아니다. 목숨을 건 투쟁이다. 바틀비는 결국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가 무시무시한 부정적 힘이 되는 것이다.

 

한병철이 바틀비를 기각하는 데에는 성과사회에 대한 그의 대안이 다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부정성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성과사회가 한병철의 말대로 자기착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따름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는 달리 외부의, 타자의 착취가 없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틀렸거나 제한적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아니 잉여사회에서는 구조 자체가 착취를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승자독식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무한 경쟁을 유발하며, 자기착취에 빠져들게 한다. 수레를 훔친 도둑의 이야기와 같다. 수레를 샅샅이 뒤져도 무엇을 훔쳤는지 찾지를 못했는데, 사실 그 도둑이 훔친 것은 수레에 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수레 자체임이 밝혀졌다. 성과사회 안에서는 착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과사회라는 수레 그 자체가 착취이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는 잉여사회의 우리 젊은이들은 그 속임수를 벌써 알아챘다. 그 수레를 되찾기 위해, 그 틀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성과사회를 사는, 잉여사회를 사는 우리의 과제이다.

 

구조의 착취에 눈을 감은 한병철의 결론은 그러므로 모호하다. 결론에서 그는 난데없이 나쁜 피로와 좋은 피로를 구분한다. 피터 한트케를 가져와 ‘부정적 힘의 피로’를 주장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한병철이 원하는 사회는 ‘오순절-사회’와 같은 피로사회다.(신자가 아니므로 이 비유는 더욱 절망적이다.)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가 무장을 해제하여 막간의 휴식과 평화를 주는, 그런 피로 사회다. 그의 피로사회는 긍정성이자 또한 부정성인데, 그래서 그런 부정성의 피로가 말 그대로 ‘막간’의 휴식 외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카프카의 말처럼 피로사회의 끝에 치유가 저절로 올까?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한병철 역시 돌고 돌아 성과사회의 그 많은 ‘힐링’ 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뿐인가?

 

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다. 그는 독일사회와 한국사회가 본질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이 잉여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궁금하다. 처음에 나는 독일은 아직도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부러웠다. 독일이 상황이 좋은 것인지 한병철이 일면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투명사회』도 우리사회와는 어딘지 어긋나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하튼 저자 소개에 의하면 한병철은 『피로사회』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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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좋은 리뷰를 본 적 없는데 이 리뷰는 책보다 좋군요....

말리 2014-07-09 19:34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을 ^^ ;; 감사합니다.

말리 2014-07-10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기: 어제 '너구리'가 몰고온 열기에 컴터 열기까지 더해, 끙끙거리며 리뷰를 쓰다 지쳐 버렸다. <우울사회> 편의 건강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데, 힘이 빠져서 그냥 끝내버렸다. 조금 덧붙여 둔다. P112~113의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좋은 삶이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을 뿐이다. 삶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다.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건강이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왜 건강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오래살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사라지고, 건강 자체가 목적이 된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아감벤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울사회의 우리는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이다. ... 요즘 우리사회의 건강 열풍에 딱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 알려지고 너나할 것 없이 따라하기 바쁘지만, 정작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다.

말리 2014-07-1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글을 읽다가.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은 적은 없는데, 어떤 글에서 보게되든 놀랍다. 한 편의 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회원들에게 소개해주려고 여기 옮겨 놓는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8 15:37   좋아요 1 | URL
자본주의는 좋은 삶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아메리카드림'이나 코리안드림처럼 말이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열려 있지 않은 데 말입니다. 가짜 판타지를 작동시키고는 사람들이 그 목표를 향해 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뛰죠. 문제는 그게 다람쥐집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람쥐집 통을 돌릴 때 나오는 에너지로 먹고 살죠. 결국 희생은 ....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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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다. 20대까지는 열심히 읽었는데, 30대를 넘어서자 소설이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나도록 잘해야 한 해에 한두 권정도 읽었는데, 지방 소도시로 내려와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한 달에 두세 권씩 읽게 된 것이 벌써 일 년 째다. 현대 소설 반, 고전이 반 정도 되는데,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읽을 때 마다 이것이 내가 읽었던 그 책인가 싶다. 그 사이 민음사나 펭귄 클래식 등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본들이 많이 나왔고, 번역자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원어로는 읽지 못하지만, 원작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고전이 전혀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책 자체에도 있지만, 그 동안 나의 책읽기 방식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놓으며 책과도 좀 뜸해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철학하면 사주팔자가 떠오르고, 서양철학하면 소크라테스 어쩌고 밖에 모르던 처지에,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주체가 ‘나’지, 이까짓 걸로 무슨 학문을 하나, 처음엔 웃기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 저 책 손을 대고 철학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봤자 어설픈 교양도 안 되지만 여하튼 그 재미를 살살 알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에는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을 계기로 역사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역사 자체 보다는 역사적 눈으로 고전을 읽는 방식을 배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소설을 읽으면서도 줄거리나 캐릭터 자체 보다는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역사적 배경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은 어떤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따위가 더 흥미로웠다. 그런 면에서 현대 소설보다는 고전이 훨씬 재미있다. 고전이란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 이지만, 또한 당대의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전은 사건과 지문을 중심으로 읽었다면, 요즘은 다소 장황한 사변과 배경 묘사에 집중해 읽는다. 그러니 다시 읽는 고전은 예전의 그 고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문학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이 좋은 것인가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다. 가끔 나도 그런 의문이 든다. 가슴으로,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고, 분석하고 곱씹으면서 읽는 것이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번거롭게 문학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제 10, 20대의 감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감수성으로 읽는 책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그런데 철학적, 역사적 눈으로 작품을 뜯어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작가가 가치관을 형상화하는 방식에 경탄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구조적 틀이 개인을 옥죄이고 파멸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하기도 한다. 문학이 구체화 해내는 철학과 역사는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역사 그 자체가 갖지 못한 감동과 힘이 있다. 내게는 그것이 문학의 힘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도식적 책읽기로 비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가장 즐거운 책읽기인 이유이다. 감수성을 잃었지만, 희미하나마 눈 하나 얻었으니, 아직은 문학작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막상 철학적, 역사적 배경이 확연히 드러난 작품은 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인물이나 사건 속에 녹아들지 않고, 저자가 생목으로 내질러 버리는 가치관은 지루하고, 힘이 없다.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이슬람 여성은 발뒤꿈치만 보여도 육감적이라는데, 해변의 비키니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 마련이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말하자면 비키니다.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유명한 ‘~부인’ 시리즈의 원조인데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노골적이라 매력의 반을 잃어버렸지 싶다. 아쉽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출판 금지와 삭제의 험난한 역사가 보여주듯, 노골적이고 화끈한 섹스 묘사에 눈을 반짝이는, 감각적 방식이 하나이다. 어릴 때 그 고리타분한 우리 근대문학에서도, 입을 맞추거나 몸을 더듬는 장면이 나오면, 그것만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아일보가 그 명성이 짱짱하던 80년대에, 아침 등굣길에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신문을 남몰래 주워, <어우동>이란 연재물을 열에 들떠 읽기도 했다. 십대는 그런 때고, 그 시대는 영상보다는 활자가 더 성에 접하기 쉬운 때였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최고의 고전으로 기억된다면, 아마도 단연 여덟 번이나 되는 그 숨 막히는 장면들 덕분일 것이다. 어쩌면 요즘 10대들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벗고 노는 포르노물 보다 지루한 문학 작품 속의 성적 묘사는 분명히 더 매혹적인 면이 있다. 차도르에서 살짝 비어져 나온 발뒤꿈치처럼, 관능적이다. 물론 로렌스나 로렌스 전공자들은 무척 억울해하고, 왜곡된 읽기라고 주장하지만, 일차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 자극성으로 치자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따라올 고전은 없을 것이다. 고전이 이렇기만 하다면, 청소년들은 그리고 우리 독서회원도 그러리라 짐작되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째로 사서 읽으려 덤빌지도 모른다.

 

로렌스가 이렇게 파격적인 섹스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 원초적 자연성을 산업사회,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는 두 번째 방식은, 그리고 로렌스가 가장 좋아할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는 것이다. 사실 로렌스의 의도는 논의의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백하다. 심지어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지도 않고, 섹스 묘사만큼 노골적이다. 민음사 판 작품해설을 인용해 보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주제 의식은 이렇다. “그것은 기계적 관념성과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거부이며 이에 대응할 구원적 가치로서 살아있는 인간적 관계의 회복 가능성이다. p328"

 

채털리 경인 클리퍼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채털리 부인인 코니와 그녀의 연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원적 인물로서의 한 쌍이다. 이 대립 구도는 기독교도들의 선과 악만큼 뚜렷하다.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성공의 암캐 여신’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집착하는 클리퍼드는 처음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에, 코니 부인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는 사업가로서의 명성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클리퍼드는 두 가지 명성을 모두 얻지만, 혼자서는 산책조차 하지 못하는 하반신 불수이며, 점점 아이처럼 퇴화한다. 육체는 마비되고, 정신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 그 정신이란 것은 모든 것을 비웃거나 모든 것을 공허하게 여길 뿐이며, 내면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누구나 그렇다. ‘資本자본’, 재물-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불구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p315)”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구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 즉 자본가는 더욱 불구다. 성공의 암캐 여신이 그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라는 면에서 클리퍼드는 탄광의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돈을 위해 클리퍼드의 육체는 불구가, 불능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한 명작,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제국의 왕좌는 모든 인간성을 제거한 돈의 노예에게만 허락된 자리이다.

 

채털리 부인의 애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로렌스 자신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주인공이다. 채털리 부인은 사실 보조적 인물이다. 멜러즈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 동반자이지만, 그 이상의 틀을 짜는 것은 멜러즈 이다. 채털리 부인, 코니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멜러즈에 의한 각성이다.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 게다가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인간의 육체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을 따름이라고요. 육체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아름다운 불꽃을 한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 뒤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밟아 꺼버렸고, 이어 예수가 나타나서는 완전히 끝장내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이제 육체는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다고요. 정말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그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으로 피어날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말이죠. 2권 p167”

 

로렌스의 대안은 기형적으로 발달한 정신적 삶에 대비되는 육체적, 자연적 삶이다. 데카르트는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 ‘생각하는 실체’만을 주체로 보았고, 그 이외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주체의 육체마저도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res extensa 연장’ 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근대정신의 출발점으로 그 영광과 오욕의 대명사이다. 근대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뿐만 아니라 자연을 타자화해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산업문명과 물질문명의 시원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1차, 2차 대전으로 위대했던 근대는 파국을 맞았고, 그 주범으로는 데카르트가 지목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1928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출판되었다. 로렌스의 비판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그 근간이 되는 근대정신 전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삶에 대한 육체적 삶의 찬양은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자, 철저한 거부이다. 로렌스가 육체적 삶, 관능적 환희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근대정신과 철저히 단절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육체적 삶이 혹은 자연적 삶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작품해설을 통해 옮긴이 이인규는 “로렌스의 그러한 비판과 모색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것인가? 나아가 그의 비판과 모색은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만큼 현재성과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2권 p336”를 묻는다. 이인규는 문명비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육체와 성의 중요성에 관한 로렌스의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이제 성이 인간성 해방의 상징이 되기에는, 너무 개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을 즐기라는 압력에 시달린다. 성은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로 취급된다. 남자들의 의무방어전에 대한 스트레스는 그들의 남근을 점점 위축시키고 있다. 그런데 육체적 삶에 대한 로렌스의 주장을 말 그대로 ‘육체적’, ‘성적’ 관점에서만 비판해야 하는 것일까? 로렌스의 대안이 로렌스의 시대, 즉 성적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에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 <아바타>는 로렌스 주장의 현대적 판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문명에 의한 판도라 행성의 파괴. 그 첨병 역을 맡은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또한 하반신이 마비된 불구다. 그런데 제이크는 여기서 일종의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채털리경인 클리퍼드의 역할을, 후반부에서는 사냥터지기인 멜러즈의 역을 맡는다. 이 변화에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네이티리가 있다. 네이티리는 채털리 부인인 코니 역을 맡지만, 제이크와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나비족인 네이티리가 기계문명에 찌든 제이크를 자연적 삶, 순수한 육체적 삶으로 이끌어 낸다. 그런데 자연적 삶으로 돌아간 제이크가 지구인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현대인은 여기서 물질문명을 끝장내고 일제히 자연적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멜러즈의 주장을 읽고 있자면, 16세기 에스파냐를 비롯한 서구 문명인들에게 짓밟힌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야말로 자연에 동화되어 건강한 육체적 삶을 살았다. 자본 - 돈이 중심이 된 것도, 인본 - 인간만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닌, 자연인으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망했다. 그들이 나빠서 망한 것은 아니지만, 발달된 기계문명의 총칼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 앞에 멸망했다. 그리고 돈의 노예가 아니라 글자그대로 노예가 되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뭔가 굉장히 쇠락한 느낌이 든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그렇다. 명성을 얻지만 공허하고, 지식인들이 모여 떠들지만 알맹이는 없고, 세상의 모든 일들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것을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노쇠함이 아닌가했는데, 영국문학을 하는 지인께서, ‘제국의 피로감’ 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데카당스 문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피로감’, 그것이 주는 우울함이나 허무 따위 말을 들으면, 제3 세계 피식민지인의 후손으로 참 기분이 더럽다. 피식민지인을 앞에 두고, 그들의 눈앞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제국민이 피로감을 운운하면, 피식민지인들, 노예들은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여하튼 그 피로한 제국의 멋진 후예들 몇몇은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공동체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가 보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그들만의 이상향이었다. 제국은 더욱 강고해지고, 자본은 더욱 악랄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예속되었다.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 밖에 세운 유토피아는 결국 도피적· 은둔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 자체, 권력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궁극적 변화는 없다. 로렌스는 사회주의를 은근히 비꼬고, 볼키를 비난한다. 볼키 역시 기계적 삶을 추구하며,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볼키가 어땠건, 현실 사회주의가 어땠건 그들은 적어도 권력을 장악하여 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키려 했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짓이겨진 삶 한가운데서 투쟁했던 것이다. 모두가 망하든지 모두가 구원받든지 함께 새로운 체계와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세계의 밖이 아니라 세계의 안에서, 그 내부에서,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우리의, 우리 모두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문제이면 정신을, 물질이 문제이면 물질을 바꾸어 내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삶은 육체와 그리고 자연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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