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가 자해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잊고 있던 세월호가 다시 돌아왔다. 세월호에 화물차를 싣고 승선했던 김동수씨는 소방호스로 학생 20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못했다.

 

"다 보상받고 해결됐는데 왜 그때 일을 못 잊느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들이 생각나고, 창문을 보면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어요.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해요.”

 

어떤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다 보상받고 다 해결되었던가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다음 달이면 세월호 1주기가 돌아오니까. 그만하면 잊을만한 시간이긴 하다. 충분히 잊어야 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세월호 생존자들에게도,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에게도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무엇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도 없다. 제대로 책임진 사람은 있었던가.

 

사람들은 잊으라고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긋지긋하니 잊으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잊어야 한다고 걱정스레 말한다. 맞다. 잊어야 한다. 당사자들도 우리 국민들도 이제 세월호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귀를 틀어막고 입을 굳게 다물고 열심히 살면 잊히는 걸까? 기억을 꼭꼭 눌러 어둠 속에 묻으면 잊을 수 있는 걸까?

 

 

이번 주 우리 독서회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떠나보내는 방식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 작가 브룩호번의 <쥘과의 하루>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알리스는 아침에 일어나 남편 쥘이 돌연사한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남편을 곧바로 장례라는, 공적 의례에 넘겨주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떠났지만, 한 평생 묻고 살았던 남편의 외도와 아이의 죽음, 그 한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한만 풀어 줄 대상 없이 덩그마니 남았다. 그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한 쥘은 알리스에게 영원히 되돌아 올 것이다. 알리스가 죽은 쥘과 일상처럼 하루를 지낸 것은 쥘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다. 쥘을 잊기 위한 알리스 식의 의식이다. 알리스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보낸 편지를 꼼꼼히 기억해 낸다. 기억하기도 싫을 그 편지를 한자 한자 되살린다. 죽은 남편 옆에 앉아 맨 먼저 알리스가 했던 일이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를, 남편의 배신을 생생히 되살리는 것이란 사실이 처음에는 너무 의외였다. 사랑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남편의 외도를 찬찬히 되돌아보는 앨리스가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도였다. 쥘을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기억 속에 억압했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므로.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영원히 잊기 위한 마지막 기억이다. 망자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지 않도록 말이다. 수많은 민담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모두 단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돌아온다. 다시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저승으로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귀신 이야기는 결국 산자들의 두려움이다. 어떤 죽음에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있을 때, 죽은 사람의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한다. 그 죽음은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느새 되살아난다. 억압하면 할수록 되돌아온다. 이것이 귀신이나 유령 같은 허황된 이야기에 아직까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억압된 기억이 귀신을 만들어낸다.

 

김동수씨가 지금도, 창문에 매달린 아이들을 보는 것은 그 아이들의 죽음이 여전히 의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당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300명이 넘는 목숨이 한꺼번에 물속에 가라앉은 그 죽음을, 아직 살아있는 목숨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면서도 그대로 죽어가게 했던 그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영원히 보낼 수 있을까..

 

거기다 날이 갈수록 세월호에 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폄훼가 난무한다. 우리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미친것처럼 날뛴다. 그것을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철없고 위험한 유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상대할 필요도 없다고? 그 바탕에는 어른들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억울하게 죽는 목숨이 어디 그뿐이냐고. 서둘러 덮으려는, 재빨리 잊으려는 그 마음들 위에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이 미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장난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장난으로도 그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단호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한 세월호는 두 번 세 번 죽음을 되풀이 할 것이고, 우리는 그 죽음의 기억에서 놓여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다음달에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기로 했다. 올해 1월에 발간된 이 책은 작가들이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을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읽기가 힘들 것이다. 나도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구매를 미뤄왔다. 오랫동안 우리 집 근처 대형마트에는 노란 깃발들과 함께 유가족들의 편지를 판넬로 전시했다. 오다가다 잠깐 서서 조금만 읽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혔을 이 책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 이 고통을 되살려야 하는지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를 진정으로 잊기 위해서라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생존자들과 희생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극한의 고통 속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의 천분의 일을, 만분의 일을 알 수 있을까... 김동수씨는 화물차를 잃고 생계마저 막막하다고 한다. 그들의 고통은 세월호가 제대로 해결되어야, 아니 어느 정도라도 납득이 되어야, 그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도 세월호의 상흔에서 놓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하기일 것이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십여 명의 작은 모임이지만, 구석지고 작은 곳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세월호가 기억 아래 억압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서로 알리면 좋겠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백만부가, 천만부가 팔린다면 그것이 그대로 해일 같은 여론이 되어 정부를 압박하고, 위험한 욕설질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회원들도 이 책만큼은 사서 읽기로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판매 부수가 그 자체로 국민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더불어 <눈먼 자들의 국가>도 함께 구입하겠다는 회원들도 많았다. 이 책은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와 가을호에 게재된 12명의 작가들이 쓴 세월호 추모 글을 모은 것이다. 이 두 책과 함께 어제 나는 <세월호를 기록하다>도 주문했다. 일주일 전에 출간된 이 책은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을 기록한 책이다. 세월호 사건을 다시 정리해 보기에는 딱 알맞은 책이 될 것 같다. 띄엄띄엄 뉴스로만 들었던 재판 내용 이외에 어떤 진실들이 드러났는지 혹은 어떤 조작과 은폐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볼 계획이다. 마침 택배 아저씨가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잠시 후  벨이 울렸다.)  

 

 

*이글은 독서회 카페에 올린 것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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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임희선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제목만 보고 현대 소설인 줄 알았다. 작가들의 트윗에 고양이 자랑이 하도 많아서, ‘고양이’라는 글자만 보고 또 어느 고양이 집사가 쓴 책이라 속단했다. 그야 물론 내가 ‘나쓰메 소세키’란 이름도 몰랐고, 일본 문학이라는 것 자체에 깜깜하기 때문이다. 뭐 그 유명한 ‘하루키’도 한 권 읽어보지 않았으니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일감정 따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일본 대하소설에 물려서 그런 것 같다.

 

막내 외삼촌과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ROTC 장교 복무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외삼촌이 일본 대하소설을 여러 질 가져왔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대망』이고, 그 외에 료칸의 하녀로 시작해서 거부가 되는 여자 이야기, 우리로 치면 거상 김만덕 정도 될까?, 뭐 그런 대중소설(?)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무렵이었으니, 책의 가치는 잘 몰랐지만, 진짜 재미있었다. 수 십 권의 책을 사탕 빨듯 빨아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 뭔가 일본적인 것에 대한 감각 혹은 선입견이 생겼던 것 같다. 실컷 먹고 질려버린 것처럼 정형화된 인물과 한결같은 성공 스토리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일본소설에 손을 대지 못했다. 『설국』은 읽었던 것 같은데, 역시 일본 냄새를 맡았던지,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후로는 누가 뭐래도 일본소설은 읽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말하자면, 숙제니까 읽었다. 독서회 선정 책이니 어쩔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소설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선입견이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과는 성공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내가 읽었던 일본소설과는 전혀 달랐다. 1905년에 시작해서 1906년까지 연재된 소설인데, 그러니까 러일전쟁 직후였고, 심지어 을사늑약 체결기의 소설인데도 일본소설에 대한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 안에 러일전쟁이란 말이 몇 차례 나오고 조선인삼이란 말도 한 번 나오지만, 제국주의적 시각도 반제국주의적 시각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풍자소설이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체제가 생활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한 시기의 (일본역사니 대충 짐작만할 뿐이다.) 지식인과 자본가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하면 될까? 여하튼 그 비판, 그 비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600쪽 가까이 되는데, 앞부분 반 정도는 정말 낄낄대며 읽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글이 늘어져 파안대소할 기회를 상당히 상실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유쾌․ 상쾌․ 통쾌하기로 한두 손가락 안에 든다. 100여 년 전의 작품에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가 일본보다 많이 뒤져 쫒아가기 때문일 것도 같고, 소세키 할아버지의 글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도 저도 아니면 봄바람이 허파를 파고들었거나.

 

 

‘나’는 고양이다. 팔자 좋게 사람 집사를 거느린 그런 고양이는 아니고, 식모 발길에 채이고, 애들한테 노리개로 시달리고, 몰래 먹다 들켜서 캑캑 거리는 옛날고양이다. 배가 고파 그냥 들어온 집에 눌러앉아 사는 눈치꾸러기지만, 인간 못지않은 총기와 혜안을 갖고 있다. 마침 눌러앉은 집의 주인이 학교 영어 선생이고, 주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괴짜들이어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쓴 글이 이렇게 훌륭한 풍자소설이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의 화자, 이름도 없는 고양이(로소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물론 주인인 쿠샤미 선생이다. 아내가 연말 선물로 연극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갖은 핑계를 대다가 결국 나가기 직전에 오한이 들리는데, 연극시간이 지나자마자 씻은 듯이 나아버리는 그런 사내다. 그러고도 벗겨진 아내의 정수리를 보고 시집올 때 말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한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이렇게 쪼잔한 사내가 지식인을 자처하며 보이는 행태다. 주인은 어느 날 편지 한통을 받고 “상당히 의미심장하네. 아무래도 어지간히 철학적인 논리를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야. 대단한 식견이군.” 하며 감탄한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이지 알아보기 힘든 문장이다. 결국 이 편지는 어느 정신병자가  보낸 것으로 밝혀진다.

 

「주인은 무엇이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버릇은 굳이 우리 주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닐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들고, 학자들은 아는 것도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다. 대학 강의에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인이 이 편지에 감탄한 것도 의미가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취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해삼이 나오기도 하고, 고뇌의 똥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이 이 문장을 존경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매한가지로 전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전혀 모르는 채로 있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자기 멋대로 주석을 붙여서 뭔가 이해한 척한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며 존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기분이 좋은 일이다. 주인은 공손하게 두꺼운 글씨의 명필을 둘둘 말더니 이것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품안에 손을 넣고 명상에 잠겨 있다. p409」

 

홍상수의 영화가 풍자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긴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오늘날의 문제는 지식을 숭배하는 것보다 지식을 폄하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100년 전에는, 아무리 일본이 우리보다 빨랐다고 해도, 100년 전에는 지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풍자의 대상으로 매우 정당하고도 급진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주인은 오늘날 유능한 사람보다는 고급의 인간이다. 무능하기 때문에 고급이다. 지금 세상의 유능함은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허세로 남을 위협하고, 함정을 파서 남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유능함이 이것이다. 주인은 잔꾀를 부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점 때문에 고급하다.

 

여기에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주인의 철학자(?) 친구 도쿠센이 주로 이 비판의 담당자이다.

 

「서양인들의 방법은 다 이런 식이야. 나폴레옹이든 알렉산더이든 승리하고 만족한 사람이 하나도 없네. 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싸움을 하네.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거야. 법정에서 이기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지. 마음의 안정은 죽을 때까지 애써봐야 될 일이 아닌 거야. 과인정치가 나쁘다고 의회체제로 만들지. 의회체제가 쓸모없다고 또 다른 것을 하려고 드네. 강물이 문제라며 다리를 걸고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터널을 파지. 교통이 힘들다고 철도를 깐다네. 그렇게 한다고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인간인데 어디까지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서양 문명은 적극적, 진취적일지 모르지만 말하자면 불만족스럽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만든 문명일세. 일본의 문명은 자기 이외의 상태를 변화시켜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야. 서양과 가장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주변의 환경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커다란 가정 하에서 발달해 왔다는 것일세. p388」

 

우리의 관점으로 이런 말을 일본인이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일본이 서양처럼 딱 그렇게 했고,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짓밟혔다. 1867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한 소세키로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해서 무지했을까? 아니면 서양문명을 추종하는 일본이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여하튼 소세키는 서양문명의 적극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동양의 소극성이 더 나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때 소극성은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군신관계든 부부관계든 계급관계든. 그런 면에서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존재하는 인도보다 더 동양적인 곳이 있을까?

 

서양문명 중에서도 소세키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주인과 한동네에 사는 실업가 가네다의 위력은 대단하다. 돈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을 가네다는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정말이지 실업가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다. 타다 남은 석탄 같은 주인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도, 괴로워한 나머지 주인의 머리가 점점 파리가 미끄러지는 대머리가 되는 것도, 그 머리가 에스킬루스와 같은 운명에 빠지는 것도 모두 실업가의 세력이다. 지구가 지축을 회전하는 것은 무슨 작용 때문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돈이다. 이런 돈의 힘을 잘 알고, 이런 돈의 영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자는 실업가 여러분 외에는 아무도 없다. 태양이 무사히 동쪽에서 나와서 무사히 서쪽으로 지는 것도 온전히 실업가들 덕택이다. 지금까지 고지식하고 가난한 학자의 집에서 살면서 실업가의 은혜를 몰랐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p376」

 

소세키는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 사유재산까지 비판한다.

 

「이렇게 널따란 대지에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치고 팻말을 세워서 누구누구의 소유지랍시고 나누고 있는 행위는 마치 저 푸른 하늘에 줄을 둘러치고 이 부분은 내 하늘, 저 부분은 남의 하늘이라고 신고하는 꼴이다. 만약 토지를 이리저리 잘라서 한 평에 얼마씩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를 한 척으로 된 정육면체로 나누어 잘라 팔아도 되지 않겠는가? 공기를 잘라 팔 수 없고 하늘을 가르는 것이 부당하다면 지면의 사유화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p166」

 

소세키는 아무리 지식인이 우스꽝스럽다 해도 이런 실업가 따위에 비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고대 희랍인들은 체육을 아주 중요시해서 모든 경기에 귀중한 상품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자의 지식에 대해서만큼은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들 그리스인들이 경기에 임해서 얻는 상은 그들이 보이는 기능 그 자체보다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포상이 되기도 하고 장려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지식 그 자체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지식에 대한 보수로 무엇인가를 주려고 한다면 지식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 이상으로 귀중한 보물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물론 있을 리가 없다. p202」

 

소세키는 이외에도 미학자 친구 메이테이 선생, 이학사 제자 간게츠, 시인 제자 오치 도후 등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세태를 풍자한다. 어쩌면 사회란 미치광이들의 집합이고, 오히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푸코 보다 앞질러 광기에 대한 통찰을 보인 것일까? 여하튼 두꺼운 책을 온통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 채우다니, 소세키의 눈도 당대 일반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 대출한 도서관책은 H&book의 2006년판 옮긴이 임희선입니다. 인용페이지는 이 책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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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어머머! 재미있어!!” 라 했을 것 같다. 훌륭한 책, 걸작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세이 분야에서 특히 여행(?) 에세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책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참 오랜만에 낄낄거리며 읽었다.

 

알라딘 서점의 프로필에 올라온 빌 브라이슨은 산적 같다. 책을 읽으며 내내 카츠는 이런 모습일 것이라 상상했던 딱 그 얼굴을 브라이슨에게서 보다니, 너무 놀랐다. 카츠가 혹시 브라이슨이 아닐까? 브라이슨이라면 캐릭터 바꾸기 쯤은 유쾌하게 해치울 것 같다. 카츠 같은 브라이슨과 진짜 뚱뚱이 카츠가 ‘스루 하이커’를 꿈꾸었던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이렇게 생겨먹었다. 미국이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 길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p13”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전히 종주하려면 적어도 5개월이 걸린다.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150일을 매일매일 걷는다면 얼마나 신날까! 진짜? 종주를 결심한 브라이슨은 맨 먼저 흑곰에 희생된 불행한 하이커들의 이야기로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숲은, 깊은 숲일수록 으스스하다. 큰 숲을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을 때는 정말 으스스하다.

 

『나를 부르는 숲』은 그 유쾌함으로 또는 그 유쾌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숲, 자연에 관한 것들 뿐 아니라 사람에 관한 생각들, 특히 사람에 관해서 그렇다. 브라이슨의 동반자 카츠도 독특한 인물이지만, 나는 메리 앨런을 보며 너무너무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앨런. 플로리다 주에서 왔고 카츠가 공포에 질린 어조로, 순간적으로 지어낸 ‘한 편의 걸작’이라는 별명이 영원히 따라붙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개가 소파에서 내려와 다른 방으로 피신할 만큼 격렬하고 강력하게 코를 풀어 귓속의 유스타키오관을 정돈할 때 -자주 그렇게 했다- 외에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나는 살다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과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신의 섭리라는 것을 안다. 메리 앨런은, 심지어 애팔래치아의 깊은 산중에서도 그 섭리를 피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p86”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내 교우의 상․ 하한치를 훌쩍 뛰어 넘는 ‘한 편의 걸작’이 불쑥 인생에 뛰어들 때는 있다. 앨런처럼 모두 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불쑥 사라지지만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쩔쩔 매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였던 사람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한 편의 걸작’으로 남아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1852년부터 산 위에 지어진 호텔들, 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전에 본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생각나게 했다. 톱니바퀴 궤도 기차에 수영장, 골프 코스, 엘리베이터를 갖춘 호텔들이 우후죽순으로 세워져, 1890년대까지 화이트 마운튼에는 200개의 호텔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자동차는 사람을 한 곳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았다. 호텔들은 관광객이 최소한 2주일을 머물 것이라는 가정 아래 지어졌지만 사람들은 하룻밤이면 미련 없이 떠나갔다. 20세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한 곳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렇게 사라져 간 호텔 중에 하나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주변의 곳곳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입구를 연상시킨다. 브라이슨이 유머 속에 비판하는 관광지의 상술과 행락객들은 딱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원 관리국의 행정도 어쩜 그렇게 우리와 비슷하게 엉망진창인지, 누가 뭐래도 미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또 다른 증거 같기도 하다. 물론 주미 한국대사가 칼침을 당하면 미국인들도 석고대죄에 부채춤과 북소리로 용서를 구할지는 의문이다.

 

『나를 부르는 숲』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브라이슨과 카츠가 대충대충 트레일을 건너뛰는, 슬렁슬렁 정신이다. 끔찍한 스모키에서 내려온 그들은 택시를 타고 남부를 떠나 단박에 버지니아까지 가버린다. 스루 하이커가 되기로 한 결심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운동화 신은 할머니가, 우드로라는 이름의 인간 비치볼이, 그리고 3천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캐터딘까지 종주에 성공했는데 내가 그 욕구를 포기한 기분이 어땠을까 -사실, 괜찮았다. 나는 여전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단지 그 전부를 걷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카츠와 나는 벌써 50만 발자국을 찍었다. 그리고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어떤지 알기 위해 앞으로 450만 발자국을 더 찍어야 한다는 건 필수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p182”

 

어쩌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필수적’에 강박 되어 있다. 산에 가면 ‘필수적으로’ 정상에 올라야 하고, 일단 결심하면 ‘필수적으로’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한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게으르고 나약한 인간이 된다. 대학에 가려면 SKY를 가야하고, 수술을 하려면 최고의 명의를 찾아야 하고, 밥을 먹어도 맛집을 검색해야 하고, 빵을 하나 사도 전국 3대 빵집 앞에 2시간의 줄을 서야 한다. ‘필수적으로’ 최고를 찾는 정신이 우리의 삶을 무한경쟁으로 내몬다.

 

브라이슨은 일 때문에 한 달간 등산을 중지하고, 8월에 카츠와 다시 만나 메인 주의 트레일 구간을 함께 걷기로 했다. 그때 카츠는 브라이슨이 올 때 까지 혼자 전 구간 종주를 잠깐 계획한다.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난 감사하게 생각해. p254”

 

“그가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우리는 에미캘롤라를 떠난 이후 800킬로미터, 125만 발자국을 걸어왔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충분한 근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등산가다. 우리는 숲에서 똥을 누었고 곰들과 함께 잤다. 우리는 산사람이 되었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p254”

 

브라이슨과 카츠를 가짜 산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8월에 다시 만난 이들은 카츠가 길을 잃고 헤맨 후 결국 트레일을 포기한다. 카츠가 묻는다. “그래, 트레일을 포기해서 기분이 언짢니? p411”

 

“확실치가 않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대해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되었고,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되었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 했고, 다시는 봉우리를 안 보았으면 싶기도 했다. 트레일에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 항상 그랬다. p411”

 

그냥 산행을 할 때도 그렇다. 한때는 매주 한 번씩 번질나게 북한산에 올랐다. 바위를 엉금엉금 기며 내가 여기를 왜 또 왔나 후회하지만, 내려와 매표소가 눈앞에 보이면 벌써 다음 주에는 어느 코스를 오를까 궁리하곤 했다. 그래서 산은 삶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브라이슨의 묘사는 삶에 대한 은유기도 하다.

 

끝내 마운트 캐더딘을 아쉬워하는 브라이슨에게 카츠는 말한다. “다른 산은 봤잖아, 브라이슨. 너는 얼마나 많은 산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p412”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산들에 올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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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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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TV <비정상회담>의 번외 편으로 보이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는 첫 방문지로 장위안의 고향인 중국 안산을 찾아갔다. 경유지인 리장에서 똘똘이 타일러와 사교왕 줄리안은 나시족의 동파문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즉석에서 간단한 ‘동파문’ 필담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정도면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동파문은 현재도 쓰이고 있는 나시족 고유의 상형문자라는데, 한자와는 기원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한자도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시작했다. 한문 시간에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한자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로,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였다.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가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한자는 점차 추상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갔다. 만약 한자 역시 동파문자처럼 상형에만 머물렀다면, 한자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까? 그 대신 공자도 맹자도 없었을지는 모르겠다.

 

대만 최고의 문화 비평가라는 탕누어가 쓴 『한자의 탄생』은 탄생, 즉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맨 처음 만나는 것은 물론 동파문자와 비슷해 보이는 상형문자들이다.

 

침상 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양, 夢, 꿈 몽의 갑골문자다. 너무 귀엽고, 가만 들여다보면 夢과 닮아 있다. 탕누어는 이렇게 갑골문자에서 시작해 현재의 한자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한다. 물론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한자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변천의 일반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갑골문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듯 보이는 저자는 현대 중국의 문자 간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간화란 저자의 말을 빌면 이렇다.

 

  

 

「온갖 두려움에 휩싸여 촌음을 다투는 신경질적인 혁명 정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은 문자사용에 있어서도 시간을 절약하고 빨리 손에 익히는 방법을 고안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전면적인 문자 간화를 실행했다. 그다지 쓰기 편치 않은 ‘진塵’자도 간화의 철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1,000여년이 넘도록 운 좋게 살아남은 이 사슴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멸종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신 아주 간단한 회의자인 ‘진’(자판을 찾을 수 없어 그냥 한글로 ;;) 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아주 작은 먼지 알갱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p269」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진’ 자는 사슴 세 마리가 뛰어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한문이라고 배운 ‘진(먼지)’이며 중국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진’자다. 세 번째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소화된 ‘진’ 자다. 사슴 세 마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가는 아름다운 글자는 무미건조하게 되어 버렸다.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물론 간화된 문자는 원형을 간직한 갑골문이나 초기 형상이 상당히 보존된 복잡한 한자에 비하면 의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기호화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의 간화라는 것이 단지 ‘빠르게 쓰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루쉰의 《아Q정전》의 마지막에는 글자를 모르는 아Q가 사인 대신 붓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장면이 있다. 그 동그라미마저 삐뚤삐뚤해 아Q는 몹시 신경을 쓰지만, 정작 자신이 동그라미 한 그 문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한자는 무척 어려운 글자다. 한자는 우리나라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판 외국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매우, 매우 어렵다. 나만 그런가? 세종대왕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다고 했지만, 단지 말과 문자가 다를 뿐 아니라 한자는 글자 자체가 몹시 어렵다. 한글 창제 당시만 해도, 한글은 똑똑한 사람은 한나절이면 배우고, 바보라도 열흘이면 깨친다고 했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쓰지 못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한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열흘 만에 다 배울 수는 없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이 만든 간화도 원래 한자만큼 어려운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탕누어는 간화에 대해서 획수를 줄여 빨리 쓰게 만든 글자라는 식으로 말한 걸까? 간화는 전혀 알지 못하므로 무어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획수가 줄어들면 당연히 배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지 않을까?

 

탕누어가 간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공산당에 대한 반감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표음문자 보다 표의문자를 우위에 놓는 듯한 인상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책의 번역어로는 ‘병음문자’ 라고 하는데, 소리를 모방하는 영어 같은 문자 체계는 상형의 한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부호화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중국 문자는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실상의 세계에 명맥을 유지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 p39” 다. 그 결과 역사의 맥이 끊긴 후에 발견된 병음문자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은 채 사장되었지만, 갑골문자는 문자 안에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1000만년 쯤 후에 우연히 영어와 한자가 동시에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어는 의미 파악이 불가능해 버려지겠지만, 한자는 똑똑한 후대인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어,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언어는 후세에 대한 전달력이 아니라 당장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탕누어는 ‘어린 백성’ 을 위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많은 민족들이 직관적인 상형을 버리고 병음을 채택한 것은 세종대왕과 같은 마음에서가 아닐까? 문자 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은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지점이 있지만 , 그냥저냥 읽기에 나쁘지는 않은 책이다. 인문학적 비평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저자는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비롯해 라이프니츠와 비트겐슈타인에 벤야민까지 다양한 지성을 끌어 모은다. 아주 깊이가 있거나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분부분 흥미로운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이런 묘사는 재미있다.

 

「파리의 한가한 구경꾼들에게 백화점이나 쇼윈도 같은 구경을 위한 회랑 공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갑골문의 대로 양쪽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식과 기능, 의미가 각기 다른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점유하는 땅이 비교적 크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그 권력을 행사하는 궁궐도 있었고, 제사를 위한 묘당도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주택 사이로 높이 솟은 호화 주택도 있었다. p170~1」

 

궁궐 宮, 묘당 享, 호화주택을 의미했던 京 혹은 高는 어느 것일까? 갑골문의 거리를 천천히 걸며 노니는 것, 그것이 『한자의 탄생』이 주는 참 재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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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서회가 드디어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가입제이긴 하지만 그동안 밴드로만 소통한 것에 비하면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발제와 후기도 공유하고, 온라인 회원도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독서회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다음주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다. 한달여 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기는 한데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책은 진짜 별로인데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하면, 별로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잘 쓴 책인데도 오히려 생각의 물꼬를 터주지 못할 때도 있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읽었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보통은 모두들 할법한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쓰면서도 재미가 없는 글을 누군가가 읽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카페도 만들고, 신입회원도 들어오고, 독서회 회의실도 넓어지고, 여러가지 변화로 시작한 올해 독서회, 초기라 그런지 좀 더 마음이 쓰인다. 토론할 내용을 생각하다보니,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토론을 위해 몇자 적어 놓으려고 한다. 『속죄』의 발제자가 카페 게시판에 제시한 토론 주제는 이것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브리오니가 자신이 창조한 소설을 통해 속죄한 행위는 자신을 위한 변명일까 아니면 가장 의미있는 속죄일까?"

 

나도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것이 속죄야 ? 변명이야?  속죄라기에는 용서를 구할 당사자들은 죽어버렸고, 브리오니는 소설가로 명예를 얻고 존경받으며 오래오래 살고 있다.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 살다 누명도 벗지 못하고 죽었다. 브리오니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출판을 결심한 그 소설은 속죄가 아니라 속죄의 이름을 빈 자기 정화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언 매큐언이 굳이 에필로그 성격의 그 마지막 장, <1999년 런던> 을 덧붙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마지막 장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브리오니가 용서를 빌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마지막 장은 필요하다. 3부까지의 내용이 브리오니의 속죄라는 것을 독자가 알아야 하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속죄』는 그냥 매끈하게 쓰인 또 하나의 소설일뿐일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에필로그는 단순히 지금까지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발화행위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게 속죄야 ?변명이야? 진짜 속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언 매큐언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브리오니의 속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속죄라고 믿는 것, 그것이 과연 속죄일까, 속죄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언 매큐언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독자 스스로 이런 질문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상대를 위해, 상대에게 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들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것들은 아닐까..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화자, 열두살 진희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고, '바라보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그녀의 눈은  MRI 수준이어서 그 눈을 통과한 타자는 투명하게 속속들이 까밝혀진다. 그녀의 눈은 오해나 무지를 모른다. 어떤 타자도 어떤 행동도 불투명함 속에 가려지지 않는다. 계몽(enlightenment)의 소녀라 할만하다.  『속죄』의 브리오니도 자신의 눈을 확신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오해했다. 타자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불투명하다. 포스트모던적이라 해야 할까?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두 소녀는 사실 소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진희와 같은 눈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가진 눈은 브리오니의 눈과 같다. 타자는 투명하지 않다. 어떨때는 더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이웃이지만, 한순간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두 얼굴의 타자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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