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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회 회원의 열살짜리 아이와 몇 달째 동화책을 읽고 있다. 이 엄마에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대출을 부탁했는데, 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 모두를 넘어가게 했다. 지난 달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그녀의 딸과 함께 읽었는데, 내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부탁하자, 오~ 앨리스 시리즈를 전부 하려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 잠깐 이상하긴 했다고. 이 앨리스가 그 앨리스? 모두 허리를 젖히며 깔깔거렸다.
나도 깔깔거렸는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보니, 앨리스 시리즈 라고 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시리즈라고 혼자 써야 하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 구보씨가 있지 않은가. 박태원의 구보씨, 최인훈의 구보씨, 주인석의 구보씨. 그 이후로 또 다른 구보씨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주인석의 구보씨가 살던 90년대 이후로 나는 우리나라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세계적인 소설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니 요즘 문지와 창비 같은 '문학동네'를 주름잡는 소설가들은 알지 못한다. 김영하를 소설보다는 조영일과의 논쟁을 통해 알게 되었을 정도다. '문지'라고 써놓고 보니, 문지 4金 중 김치수 선생이 몇 일 전 돌아가셨다. 4金인 김현, 김치수, 김연주, 김병익은 문지 창간 주역들이다. 주인석의 구보씨는 문지 사무실 한켠에서, 바둑을 두는 이 김씨들 옆에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제일 먼저 작고한 김현의 마지막 일기인『행복한 책읽기』에는 김치수와 등산을 가던 이야기도 나온다. 내게 한국의 문학동네는 이런 이름들로 떠오른다. 그러니 황정은이라는 이름은 듣도보도 못했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추천한 회원의 말처럼,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무엇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참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읽을만 하다. 다만 내가 살아온 그만큼 보았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는 무수한 앨리시어들이 혹은 앨리스들이 있었다. 쉽게 익숙해지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둔감해져서 다 비슷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소년은 아니지만, 영화 <똥파리>의 양익준이 생각났다. 상훈(양익준 역)은 친아버지를 사정없이 패버리는데, 앨리시어는 차마 그러지 못했는지 친구의 아버지를 패버린다. 그리고 부랑아로 세상을 떠돈다. 상훈처럼 독하기는 어렵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흥미로웠던 것은 내용이 아니라 서술의 시점이다. 전문용어로는 무어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서술의 시점이 마구 뒤바뀐다. 처음엔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시점의 혼란 때문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 …… …… …… …… ……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첫 문장은 익숙하다. 1인칭 화자의 시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부터 뭔가 이상하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이는 것은 앨리시어인가? 그런데 몇 문장이 지나면 갑자기 '앨리시어'가 3인칭 주어로 등장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인가? 그런데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적' 시점이 왜 추측을 하지? '길을 건널 것이다.' 혹은 '체취를 맡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전지적 시점인가? 전문가가 아니니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다. 3인칭이긴 한데 전지적 시점은 아니고, 뭐 인간적 시점인가? 3인칭 관찰자적 시점 같은거. 그런데 관찰자가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고 단정 할 수 있나? 혹은 '불쾌해지는 것이다.'는? 3인칭 심리학적 관찰자 시점인가? 이런 것도 있나?
이런 복잡한 것들을 따질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뒤섞음과 혼란이 어떤 효과를 주는가 이다. 작가가 막 썼을 리는 없고 도대체 왜 이렇게 쓴 걸까? 물론 그 의도까지 알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독자니까. 다만 그래서 내가 어떻게 느꼈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뒤섞인 시점이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다. 이 낯선 시점때문에 이 전형적인 이야기가 새롭게 읽히고 있나?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도 않다. 나의 느낌도 왔다갔다 하는구나..
왔다갔다...라고 하고 보니, 더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갑자기, '나는'이 등장한다. 이 책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가 아닌가 싶다. 뚫어지게 찾아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나'는 책 첫머리의 앨리시어를 가리키는 '내 이름은 앨리시어' 의 그 '나'가 아니다. 앨리시어와 고미와 동생을 지켜보는 제 3의 '나'다. 심지어 이 '나'는 앨리시어를 놓치고 혼자 남겨지기 까지 한다. 나는 전지적 관점도 관찰자적 관점도 잃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하나, 시제도 바뀐다. 대부분의 시제는 현재다. 깨닫는다, 바라본다, 좆같다, 삼킨다 등등. 그런데 "그 밤에 고모리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로 시작하는 일련의 서술은 과거시제다. 말하자면 '왔다갔다' 하기가 이 책의 주 형식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어서, 새로운 포장이라도 입히려고 한 걸까?
마지막에 또 한번의 혼란이 있다.
오래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커다란 나무와 앨리스 소년에 관해서.
앨리스 소년은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라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 새끼가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 아닐까?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앨리시어는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엔 당연히 앨리스 소년이 앨리시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앨리스 소년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상황 끝, 오케이?' 하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앨리시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3인칭 관찰자, 그리고 문득 '나는'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 '나'가 모두 앨리시어라는 말인가? 앨리시어가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런 질문들은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황정은 작가가 직접 나온다. 나는 앞부분에서 살짝, 이 작가의 매력적인 목소리만 듣고 책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는 어떤 평문도 어떤 이야기도 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 걸레질을 하며, 아마도 나는 오늘 밤의 이 어지러움을 깨끗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될런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