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며, 이런 문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놓여 있음 -내 생각으로는- 을 보여준다. 그 전체 의미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thinking)에 한계를 긋는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사고(thoughts)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이 한계의 양면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한계는 언어 내에서만 그어질 수 있고, 한계의 바깥쪽에 있는 것은 그저 무의미(nonsense)하다. p29」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 서문에 쓴 말이다. 이 유명한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서문과 마지막에 두 번 등장한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다. 입 닥쳐? 싸가지 없게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의 입을 봉함으로써,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자신의 입도 닫았다. ≪논리-철학 논고≫가 철학에 대한 최종 결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한 6년 후에야 그는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철학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철학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가?
「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견해가 명제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철학자들이 던진 물음 그 자체가 바로 그런 오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철학적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물음에 답하려는 유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물음을 던지려는 유혹 자체가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혼돈에서 발생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생각될 수 없는 것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질 것이며, 전통적으로 구상되어온 철학 전체는 그 선의 바깥쪽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거대한 일반화’ 는 오류가 아니라 무의미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p32」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는 윤리학, 미학, 종교, 삶의 의미, 논리학과 철학이 있다. 이것들은 “정말로 표현 불가능한 것” 이다. 표현 불가능하다고 해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모든 분야에는 진리가 있다. 다만 이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 질 수만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자, 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을 당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을 제외하면 논리적 명제에 관한 모든 사항이 그저 주석에 불과합니다. 주요 요점은 명제로, 즉 언어로 무엇이 표현될 수 없고 보여 질 수만 있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생각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동일하며, 저는 이것이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p35」
비트겐슈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이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 또는 철학과 아무 관계없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뭔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 그에게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 사람에게는 불만을 안겨주겠지만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한수 가르친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그것만이 엄밀하게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p44」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따라서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인가? 그 역시 이발사의 역설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제도 무의미하다고 단언했다.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의 역할을 한다. 나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은 자신이 그것들을 딛고 올라서서 넘어가기 위해 그것들을 -계단으로- 사용한 뒤에는 그것들이 무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말하자면 다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명제를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는 세계를 정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p34」
모순을 피해가는 훌륭한 답변으로도 보이지만, 궁색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무의미한 것을 바탕으로 무의미를 제거해야 하다니...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와는 별개로, 비록 그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보면 모든 논리가 그렇다. 수학의 공리처럼 무조건 전제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논리에도 법은 법이다의 막다른 지점이 있다.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사다리를 던져버린다 해도, 그것이 논리 체계의 불완전성을 은폐하지는 못한다. 구멍 없는 체계는 없다. 그 구멍이야 말로 체계의 주춧돌이 놓이는 자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고, 뒤적인 책이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2장이다. 시인인지, 사진작가인지, 여행전문가인지, 아니면 이 모두를 다 합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병률의 책에는 셋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 생각났다. 시인으로서의 이병률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말하려 애쓰고, 여행전문가로서의 이병률은 어떤 것도 명료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진이 그의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정말로 시와 같은 형태로만 씌어져야 한다. p46”고 쓴 적이 있다. 시를 철학처럼 쓰려고 하는 것은 어떨까? 비트겐슈타인은 울트란의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 라는 시를 이렇게 평하며, 찬미했다. “거의 다른 모든 시들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애쓴다. 여기서는 그런 노력이 시도 되지 않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과업을 달성하고 있다. p43” "정말로 굉장하다. (…) 왜 그런지, 이유는 이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야만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진 것 속에 -말로 할 수 없이- 담겨 있게 될 것이다! p44“ 이병률의 시는 혹은 산문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함으로써, 그의 사진이 보여줄 더 많은 것을 상실한다.
재미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 된지 90년이 지났음에도,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논리학자에게는 너무 신비적이고, 신비가에게는 너무 기술적이고, 철학자에게는 너무 시적이며, 시인에게는 너무 철학적 p50” 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페이지는 모두,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