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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이과 출신인 나는 과학 네 과목을 모두 배웠다.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 가장 점수가 안 나왔던 것은 지구과학이었고, 전혀 이해를 못하는데도 희한하게 점수만은 만점이 나오던 것이 물리였다. 물리는 문제는 어렵고, 답은 쉬운 그런 과목이었다. 아마도 그 젊은 여선생님은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것보다는 답을 찾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대 중반의 대학은 학문보다 운동이 더 중요했던 시기였지만, 내게 학문은 운동만큼이나 충격적이기도 했다. 1학년 교양 수학 시간에 나는 처음 알았다. 내 머리는 소위 학문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교수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문제도 전혀 손 댈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장 좋아했던 과목 ‘수학’은 넘사벽이 되었지만, 사실 내가 절대 넘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물리였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나는 천체물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공부는 얼마나 행복할까, 천체물리학과라는 말만 들어도 부러웠다. 다행히 내 머리의 한계를 잘 알게 된 이후라, 그걸 해보겠다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멀지만 그 빛만큼은 마음속에 반짝였다.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가 신간 평가단 리뷰 도서에 선정된 것을 보고 기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되었다. 읽기에는 너무 좋겠지만, 리뷰를 쓰기에는 결코 만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상 도착한 책은 걱정에 무게를 더했다. 하드커버에 500쪽이 넘는 분량, 물리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고생이 많겠다는, 주제 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주 내내 『시간 연대기』에 매달렸다. 3월이 되면서 이것저것 일들이 시작되고, 그만큼 절대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책 자체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아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서, 두 세 시간 꼼짝하지 않아도 힘겹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예전에 시간에 관한 책을 두 세권 읽기는 했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도 읽었고,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시간 어쩌고 하는 책도 읽었다. 그 책들은 그다지 쉽지도 않고, 물리학적 지식을 꽤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 책들에 비하면 『시간 연대기』는 차라리 반은 인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하다. 물리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호기심으로 몇 장 넘겼다가, 빨려들듯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저자 프랭크가 시간을 푸는 방법에 있다.

 

“이 책은 시간, 즉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다룬다. p12”

 

물리학이 다루는 ‘시간’은 거의 우주의 시간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왜 화살처럼 방향을 갖고 있나 등의 너무 자명해 보이는 개념부터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빅뱅, 팽창하는 우주 등등이다. 그런데 『시간 연대기』의 저자 프랭크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우주의 시간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시간과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서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주론과 우주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 인간의 시간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이다. p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뉴턴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산업혁명이다.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 별들의 움직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했고, 뉴턴 역학은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줄지어 출근 도장을 찍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은 행성들이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에 따라 시계처럼 궤도 운동을 하는 우주를 반영했다.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짝을 이루며 서로를 변화시켜왔다.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언제나 긴밀하게 서로 얽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15”

 

그러므로 『시간 연대기』는 물리학이자 동시에 역사학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인간의 역사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SNS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체험은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왔다. 구석기 시대에는 그 누구도 秒 혹은 分 심지어 時라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다. 1300년대 초, 유럽의 여러 도시에 시계탑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時라는 시간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계는 중세 수도원의 규칙적인 성무일과라는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들 덕분에 … 모든 인간의 정신에 시계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박자가 공통으로 생겨났다고 누군가 말을 한다고 해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p123” 규칙이 별 의미가 없던 일반인의 생활에도 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간이 질서정연한 생활의 배경이 되었다. 추상적인 시간은 생활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15세기 말 무렵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다. 지역주민들은 커다란 시계 종소리와 시침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p128” 시계에 의한 삶의 변화는 뒤이어 혁명적 우주론의 등장을 촉발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의 등장은 우리를 다시 우주의 시간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면 수 천 년, 길게는 수 만년에 걸쳐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얽혀 변화되어 온 시간이란 놈, 시간이란 개념은 이제 완성 되었는가? 우리는 시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얻었는가? 저자 애덤 프랭크가 『시간 연대기』를 쓴 이유는 그 답이 ‘아니오!'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과학상식에 의하면 시간은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첨단의 우주론은 이렇게 말한다. “빅뱅이론의 시대는 지나갔고, 우리는 아직 무엇이 빅뱅이론을 대체하게 될지 모른다. p13” 137억년 동안의 우주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이제 더 이상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 아닐 수도 있다. “시간과 우주는 한 가지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초라는 개념을 버리고 연구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p26”

 

빅뱅이론의 위기는 ‘특이점’에 있다. 물리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 바로 특이점이다. 빅뱅 이후 137억년의 진화 과정은 모두 그럴 듯하다. 과학자들이 찾아놓은 증거들도 강력하다. 그런데 도대체 빅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누가, 왜, 어떻게 불꽃을 당겼는가? 빅뱅이론에서 우주와 시간은 아무런 설명 없이 시작되었다.

 

“빅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p366” 21세기와 함께 과학자들은 태초의 순간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고차원의 주기적 우주론과 다중우주론이 대표적이다. 이 이론들은 시작도 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접혀진 7차원, 막으로 된 우주, 영원한 인플레이션, 무수한 주머니 우주들에 대한 극한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관한 물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빅뱅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가 아니라, 이전 혹은 이후라는 말 자체다. 물리학과 우주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시간’이다. 단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지금’들만 존재할 뿐 연속성을 가진 시간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나게 하는 ‘시계의 불확정성’ 이론도 있다. 어떤 시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주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계가 불확정적이란 것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구체적인 물리법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각 우주마다 한가운데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전에는 어느 법칙이 어느 특정한 우주에서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p449”

 

빅뱅이전에 대한 급진적 사고들은 저것이 과연 과학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공상과학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빅뱅이론의 대안들은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극한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 사고의 결과일 뿐 물리적 증거를 획득하지 못했다. 어쩌면 인간의 물질문화가 획기적 혁명을 거듭한 끝에 접혀진 7차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10차원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주와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혁명적 변화를 겪을 것이다. 시간이 벤자민 버튼에게서처럼 거꾸로 갈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여러 개의 우주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흥미로운 상상에 그칠 수도 있다.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도 수없이 일어났던 것처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물질적 개입이 이뤄지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시간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p472" 그러나 그 시간 역시 어쩌면 ‘시계의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지 우리가 믿게 된 혹은 선택하게 된 하나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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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비슷한 느낌. 죽은 남편을 두고 바람 핀 일을 제일 먼저 다그치고 싶었을까? 함께 살기 위해 묻은 일을.. 한 두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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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택배 문자가 와 있다. 2월 신간 평가단 책이 올 모양이다. 날도 짧고 설도 있었고, 일할 시간이 넉넉치 않았을 것이다. 알라딘 담당자가 두어번 양해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2월 책을 보기도 전에 3월 책을 고르게 되었다.

 

 

 

한병철의 《심리정치》 다. 책 소개를 보기전에 일단 보관함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한병철의 생각을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의 주요한 면을 압축된 문장으로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그 압축된 문장이란 것이 사실 만만하지는 않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구겨(?) 넣어져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주목신간으로 선택한 것은 유명세가 있으니 일단 많은 분들이 추천할 것 같고, 둘째는 문지가 책 지원을 잘 해줄 것 같고(근거는 없다;;), 셋째 책이 작고 얇을테니 분량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투명사회》와는 달리 '정치'를 콕 찍어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것도 '심리 정치' 라니, 흥미가 더 인다.

 

 

<마르크스 vs 이진경, 세기를 잇는 철학의 대결 > 이라는 문구가 턱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진경이다. 동구권 몰락 이후의 서구 좌파 사상을 이진경만큼 대중적으로 그리고 선구적으로 소개한 사람이 있나 싶다. 물론 들뢰즈주의자로 정평이 나있고, 들뢰즈의 유목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진경의 책은 늘 읽을만 했다. 이 책은 10년 전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예전 책이 경제적 관점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 책은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마르크스, 현대로 소환한 마르크스 철학의 의미, 뭐 그런 내용으로 보인다. 읽기에도 더 쉽고 재미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푸는 형태는 초창기의 《굴뚝 청소부》와 더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 

 

 

 

 저자 맹정현은 언젠가 하이킥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지붕킥에서 정보석의 친구로 나왔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다. 그가 운영하는 <정신분석클리닉 혜윰>의 간판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더랬다. 그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신분석가 과정을 열어 전문가 양성도 했는데,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파리 8대학, 7대학에서 석사, 박사를 했고, 라캉의 《세미나 11》을 공동 번역하고, 브루스 핑크의 책도 번역하고, 직접 몇 권의 정신분석 책을 썼다.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에 관한한, 매우 활동적이고 신뢰할만한 우리나라의 정신분석가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이 읽기에 책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애도와 멜랑꼴리>는 프로이트의 논문이라고 한다. 애도와 우울에 관한 각종 이야기들이 아마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지 싶다. 나도 가끔 애도와 우울의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이 책은 프로이트에서 시작해 라캉을 거쳐, 우울에 관한 주체의 여러가지 태도, 가령 신경증적 우울증과 정신병적 우울증 등에 관한 이야기로 뻗어 나간다. (고 한다.)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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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며, 이런 문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놓여 있음 -내 생각으로는- 을 보여준다. 그 전체 의미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thinking)에 한계를 긋는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사고(thoughts)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이 한계의 양면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한계는 언어 내에서만 그어질 수 있고, 한계의 바깥쪽에 있는 것은 그저 무의미(nonsense)하다. p29」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 서문에 쓴 말이다. 이 유명한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서문과 마지막에 두 번 등장한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다. 입 닥쳐? 싸가지 없게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의 입을 봉함으로써,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자신의 입도 닫았다. ≪논리-철학 논고≫가 철학에 대한 최종 결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한 6년 후에야 그는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철학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철학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가?

 

「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견해가 명제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철학자들이 던진 물음 그 자체가 바로 그런 오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철학적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물음에 답하려는 유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물음을 던지려는 유혹 자체가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혼돈에서 발생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생각될 수 없는 것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질 것이며, 전통적으로 구상되어온 철학 전체는 그 선의 바깥쪽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거대한 일반화’ 는 오류가 아니라 무의미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p32」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는 윤리학, 미학, 종교, 삶의 의미, 논리학과 철학이 있다. 이것들은 “정말로 표현 불가능한 것” 이다. 표현 불가능하다고 해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모든 분야에는 진리가 있다. 다만 이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 질 수만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자, 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을 당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을 제외하면 논리적 명제에 관한 모든 사항이 그저 주석에 불과합니다. 주요 요점은 명제로, 즉 언어로 무엇이 표현될 수 없고 보여 질 수만 있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생각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동일하며, 저는 이것이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p35」

 

비트겐슈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이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 또는 철학과 아무 관계없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뭔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 그에게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 사람에게는 불만을 안겨주겠지만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한수 가르친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그것만이 엄밀하게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p44」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따라서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인가? 그 역시 이발사의 역설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제도 무의미하다고 단언했다.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의 역할을 한다. 나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은 자신이 그것들을 딛고 올라서서 넘어가기 위해 그것들을 -계단으로- 사용한 뒤에는 그것들이 무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말하자면 다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명제를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는 세계를 정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p34」

 

모순을 피해가는 훌륭한 답변으로도 보이지만, 궁색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무의미한 것을 바탕으로 무의미를 제거해야 하다니...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와는 별개로, 비록 그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보면 모든 논리가 그렇다. 수학의 공리처럼 무조건 전제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논리에도 법은 법이다의 막다른 지점이 있다.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사다리를 던져버린다 해도, 그것이 논리 체계의 불완전성을 은폐하지는 못한다. 구멍 없는 체계는 없다. 그 구멍이야 말로 체계의 주춧돌이 놓이는 자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고, 뒤적인 책이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2장이다. 시인인지, 사진작가인지, 여행전문가인지, 아니면 이 모두를 다 합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병률의 책에는 셋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 생각났다. 시인으로서의 이병률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말하려 애쓰고, 여행전문가로서의 이병률은 어떤 것도 명료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진이 그의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정말로 시와 같은 형태로만 씌어져야 한다. p46”고 쓴 적이 있다. 시를 철학처럼 쓰려고 하는 것은 어떨까? 비트겐슈타인은 울트란의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 라는 시를 이렇게 평하며, 찬미했다. “거의 다른 모든 시들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애쓴다. 여기서는 그런 노력이 시도 되지 않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과업을 달성하고 있다. p43” "정말로 굉장하다. (…) 왜 그런지, 이유는 이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야만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진 것 속에 -말로 할 수 없이- 담겨 있게 될 것이다! p44“ 이병률의 시는 혹은 산문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함으로써, 그의 사진이 보여줄 더 많은 것을 상실한다.

 

재미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 된지 90년이 지났음에도,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논리학자에게는 너무 신비적이고, 신비가에게는 너무 기술적이고, 철학자에게는 너무 시적이며, 시인에게는 너무 철학적 p50” 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페이지는 모두,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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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리딩 - 생각을 키우는 힘
하시모토 다케시 지음, 장민주 옮김 / 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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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연히 득템한 트렁크를 끌고 살인(?)의 흔적을 질질 흘리며 도망(?) 다니는 100세 노인은 정말 유쾌했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고서야 100세 노인이 그렇게 기운넘치리라 믿기는 힘들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노인이 있다.  『슬로리딩』을 쓴 일본의 하시모토 다케시다.

 

2011년 백수(통상 99세에 치른다) 파티에 '순백색 슈트에 빨간 장미 코르사쥬' 를 달고 등장한 하시모토 할아버지의 첫 번째 목표는 120세 대환력까지 사는 것이다. 대환력에는 '붉은 정장에 흰 장미 코르사쥬'를 달고 나갈 계획도 세워 놓았다. 하시모토는 50년 동안 '나다'라는 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100세를 눈앞에 둔 2011년, 27년 만에 다시 나다교의 교단에 섰다. 100세 할아버지가 교재를 들고 다시 학생들 앞에 선 것이다. 그 수업은 어땠을까?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시모토 할아버지가 유명해 진 것은 그의 독특한 수업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상황에서 국어 교사인 하시모토는 과감히 교과서를 버리고 <은수저>라는 얇은 문고판 소설로 교재를 대신한다. 나다교의 특징은 한번 교과를 맡은 교사는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전학년을 지도하는데, 하시모토 교사는 3년 동안 《은수저》 한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카 간스케의 소설인 《은수저》. 이 200쪽짜리 얇은 문고판을 3년에 걸쳐 읽어 가는 사이 실로 다양한 공부를 했습니다. 국어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연날리기 장면이 나오면 밖으로 나가 직접 연을 날리고, 막과자가 등장하면 교실에서 실제로 먹어 보는 겁니다. p44」 

 

《은수저》 한권으로 단어 공부, 문장 공부는 물론 책 속에 나오는 것들을 일일이 찾고 연구하고 실습까지 하면서 3년을 읽었다. 당시에도 기발한 수업이었지만 그렇다고 '슬로 리딩'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평생 남을 수 있는 독서 중심의 수업을 하기 위해 시도한 것인데, 아이들의 호응과 교육 효과가 매우 좋았다.

 

하시모토 교사의 수업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이 수업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었다.  책과 방송을 통해 이 수업법은 '슬로 리딩'으로 소개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00세가 된 2012년, 하시모토 다케시는 자신의 《은수저》 수업법을 『슬로리딩』이란 책으로 직접 소개했다. 얇은 책이라 금방 후루룩 읽을 수 있는데, 《은수저》 수업이라는 독특한 수업법을 빼고는 평이한 교육 지침 혹은 교육 경험담이 쓰여있다. 어쨌든간에 100세 노인이 교단에 다시 서고, 책을 쓰고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작년에 동네 꼬마 세명이랑 동화책 몇권을 읽었다. 처음 계획은 겨울 방학 동안 『어린왕자』를 천천히 읽는 것이었다. 이 책처럼 나도 나름대로 슬로리딩 비슷한 것을 생각했던 셈이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어린왕자』 속에는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너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별' 하나만 가지고도, '사막과 우물' 하나만 가지고도, '길들이기' 하나만으로도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에도 사막에도 여우에도 장미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세번 만에   『어린왕자』를 마쳤다. 나는 다만 아이들이 상상력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슬로리딩』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준비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하시모토 교사는 《은수저》 수업을 위해 1년 넘게 준비를 했다.  <은수저 연구 노트>를 만들어 매 시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어떤 공부와 어떤 놀이를 해야 하는지 꼼꼼이 계획했다. 나는 그저 말로 떼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 책  『슬로리딩』에는 그렇게 자세한 수업법은 없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은수저》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 아마 그  <은수저 연구 노트>를 보게 되면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차피 직접 해보는 것일 테다. 하시모토 다케시 역시 자신의 수업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틀을 깨고 상상의 힘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이 책의 가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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