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문학 고전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쉽게도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파일을 구하지 못했지만,

회원님들의 손빠른 검색과 정보력으로 이것 저것 참고할만 한 것을 찾아 내고 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중에는 2013년에 한 <인문 고전 강의>에 동일한 내용이 일부 있어서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도서관에 사정이 있어서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함께 하기로 한 열 한 명 중 아홉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첫 고전은 <길가메쉬 서사시> 입니다.

길가메쉬는 BC 2812년에 수메르 지역의 도시국가 중 하나인 우르크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으로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역,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위치하였습니다. 수메르에는 12개의 도시국가들이 있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점토판에 씌어져 전해오는데, 여러 판본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토판본은 BC 21C의 것으로, 그후 천년 가까이 이야기가 덧붙여져 변형되어왔고, BC 13C에 산 레케 운니니가 정형화한 토판본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입니다. BC29C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야만인 혹은 원시인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고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우리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상 서사시를 읽고나면, 사실은 서사시에 대한 설명을 읽은 것이지만,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만큼 완성된 형식과 은유적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있습니다. 읽고 있노라면 인간의 사유란 것이 길가메쉬 이후 진전되기는 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완역본이 얼마나 긴지는 모르겠는데, 언젠가 꼭 읽어 볼 책으로 간직해 두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길가메쉬는 자신과 꼭같은 능력을 지닌 엔키두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둘은 신의 숲을 지키는 훔바바를 죽이고, 이쉬타르 여신의 청혼을 거절하고, 신들이 형벌로 내려보낸 황소까지 죽여버리는 오만함을 자행합니다. 분노한 신들은 길가메쉬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기 위해 분신과 같은 엔키두를 죽입니다. 엔키두의 죽음을 본 길가메쉬는 죽음과 영생에 관해 진지하게 고뇌하며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떠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신들의 파라다이스에서 영생을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 여정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을 필멸로 운명지었다는 충고를 하지만, 길가메쉬는 끝내 영생을 얻으러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갑니다. 우트나피쉬팀은 그에게 가시덤불을 선물하는데, 이 식물의 이름은 'How-the-Old-Man-Once-Again-Becomes-a-Young-Man' 입니다. 이 가시덤불에 찔리면 다시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덤불을 뱀이 가져가 버리고 길가메쉬는 빈손으로 우르크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위대한 도시를 세웁니다.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여인숙 주인 씨두리, 뱃사공 우르샤나비, 그리고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반복해서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길가메쉬는 그가 했던 위대한 행위를 나열합니다. 그런데 이 구도 여행의 조력자들은 길가메쉬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당신이 길가메쉬라면, 산지기를 죽인자라면, 삼목산 숲속에 살던 훔바바를 없앤 자라면, 산길에 있던 사자를 죽여버린 자라면, 하늘에서 온 황소와도 맞붙어 그를 처치해버린 자라면, 참으로 그렇다면 당신 뺨이 수척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당신 표정이 쓸쓸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당신 마음이 비참하고 당신 얼굴이 여윈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당신 마음 깊은 곳에 그런 비애가 서린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먼 길을 오랫동안 여행한 사람처럼 추위와 더위에 얼굴을 그을린 까닭을 말하세요! .... 대초원을 방황하는 진의를 말해보세요!"

 

" Who are you? "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길가메쉬처럼 답합니다. 명함을 들이 밀거나 이력서를 읊습니다.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성공적인 일, 번듯한 이름을 나 자신의 본질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가메쉬에게 되풀이 제기된 질문은 그런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 진정한 본질입니다. 야망을 성취한 이후에도 쓸쓸해 방황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4천 년에서 5천 년도 더 이전에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묻기를 주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유는 과연 오 천년의 세월 동안 성숙해지기는 한 것일까요?

 

길가메쉬는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고 돌아와 유한자로서의 영생의 방법을 터득합니다. 불멸의 도시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길가메쉬의 여정, 겪음(Pathos)은 깨달음을 얻고 공적인 업적으로 귀결됩니다.  이 겪음은 천방지축이던 길가메쉬가 성숙한 영웅이 되는 도야의 과정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길가메쉬는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불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저자 강유원이 해석한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가 헤겔 전공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길가메쉬의 겪음(Erfahrung)의 과정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며, 즉자적 자기(an sich)에서 즉자-대자적 자기(an und Für sich)로 전환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필멸의 길가메쉬는 긴 여정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유한자의 굴레를 벗지 못한 필멸의 길가메쉬로 동일하지만, 자기를 반성적으로 성찰한 길가메쉬는 불멸의 도시를 세워 그 기둥에 이름을 남기고 오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멸의 이름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

 

 

 

 

다음주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입니다. 강의 파일도 있고요. 『인문 고전 강의』 에서 했던 <일리아스>와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책의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강의도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마님이 올려주신 <플라톤 아카데미> 강의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EBS <통찰> 에도 일리아스와 함께 오딧세이아 강의가 있습니다. 각 강의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입니다.

 

<문학 고전 강의 > p 71 ~ 122

<2013 인문 고전 강의 파일 > 2강 ~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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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를 끝으로 '처음 철학' season1을 마칩니다. 

우리가 '감히' 철학을 할 수 있을까, 우려 끝에 시작한 공부인데

중단없이 마지막까지 오게되어 아주 아주 기쁩니다.

함께 해주신 회원님들 덕분입니다.

 

교재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를 읽고,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 철학사 강의> 녹음 파일을 함께 들었습니다.

딱딱한 철학 공부에 지칠까 싶어서

<인문 고전 강의>도 사이 사이 함께 읽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인문 고전 강의> 녹음 파일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인문 고전 강의> 중 '거대한 전환'을 공부하였습니다.

폴라니는 근대국가의 파멸을 분석하고 있지만,

오늘도 우리는 근대국가의 틀 안에서 살고 있고,

상품이 되어서는 안될 노동, 토지, 화폐를 최고의 상품으로 거래하며

이윤을 목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최종근거는 여전히 돈입니다.

 

폴라니가 던지는 질문,

강유원 선생님이 <인문 고전 강의>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우리 삶의 최종 근거를 계속해서 이익으로 삼아도 되는가 입니다.

우리 삶이 돈이 아니라 다른 근거 위에 올려질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열 한명이 참석한 스타디가 끝나고 책걸이 종파티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후식까지 먹고 난 뒤 벌어진 이야기 파티에서 우리의 주제는 다시 돈으로 돌아갔습니다.

아파트 값으로 화제가 집중되었고 우리는 웃으며 한탄했습니다.

6개월 공부 끝에도 여전히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돈이라고 말입니다.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끊임없는 반성 없이는 관습에 반하여 사고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매일 매일을 돈에 매여 살아도 우리가 매주 모여서 무한자와와 앎, 명예와 공동체의 운명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삶을 반성해 보기 위함입니다.

그 반성이 당장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만이 또한 우리가 돈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막간 공부로

  <문학 고전 강의> 를 읽기로 하였습니다.

  8월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읽을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주는 <길가메쉬 서사시> 입니다. 

p 16 ~ 69  

 

참고 자료로는 EBS 교양 프로그램인 '통찰' 중 길가메쉬 서사시 강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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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철학>을 끝으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를 마쳤습니다. <현대 철학> 부분은 다음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솔직히 자신도 없고, 철학사 책마다 평가도 달라서 지금 우리 수준에서 하기에는 이른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세기는 실증주의가 풍미한 시대였습니다. 프랑스 실증주의의 선구자 콩트와 영국의 공리주의를 알아보았고요.  생철학으로 분류된 키르케고르와 니체를 살펴보았습니다. 둘 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요. 키르키고르는 실존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영국의 공리주의는 『인문 고전 강의 』에서 조금 더 심도있게 공부하였습니다.  벤덤의 <파놉티콘>을 공리주의 텍스트로 살펴보았는데요. 공리주의는 이기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윤리학이기도 했습니다. 공리주의 역시 고대 희랍처럼 '좋음'을 추구합니다. 다만 좋음을 '유용하고 쾌락을 주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익 즉 유용성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말이 길어질 듯 한데, 시간이 ㅎㅎ

 

다음주는  『인문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입니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입니다.

<논어>는 생략합니다. 동양철학은 다음 기회에 도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p 505 ~ 523

 

  강의 파일 : 20091022 ~ 200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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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는 낭만주의 시대의 사상을 다루었고요.

<인문 고전 강의>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를 하였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에서 특기할 사상가로는 마르크스와 쇼펜하우어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쇼펜하우어는 그렇다고 쳐도

마르크스를 정말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갑니다. 

우리도 자연 간략히 이름 정도만 짚었습니다. ;;

 

쇼펜하우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은 칸트와 불교입니다.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상된 세계라는 인식은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이어 받은 것이고요. 의지로서의 세계는 칸트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자유 의지'를 연상하면 안됩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입니다.  '세계의 모든 객체는 존재하려는 열망 또는 의지로서 자신을 표명한다.' 라고 했는데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는 곧 무한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무한한 욕망은 당연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삶은 고통입니다. 고통의 원인인 생에의 의지는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는 악입니다.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생에의 의지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구원으로서의 예술과 윤리적 구원으로서의 열반을 제시하였습니다. 예술은 순간적 구원이니 영원한 구원은 불교식 해탈 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많은 독자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본인은 헤겔을 죽음으로 몰고간 전염병에도 살아남아 일흔이 넘어서야 죽었습니다만.

 

 

다음주도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와 <인문고전강의>를 함께 읽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19세기 철학 : p553 ~ 596

 

<인문 고전 강의>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 p469 ~ 503

강의 파일 : 20092008 ~ 20091015 (총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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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정점, 헤겔을 공부했습니다.

헤겔은 공부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워낙 난해함으로 유명한지라

한 발짝 더 내딛기도 쉽지 않아서

진짜 진짜 개략적인 부분만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두 주에 걸쳐 했지만, 헤겔은 한 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는

변증법과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정신현상학』을 중심으로

헤겔 철학을 살짝 엿보았습니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헤겔 철학은 모른다해도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변증법, 그리고 변증법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정반합의 도식,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헤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에 대해 바이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이란 용어 자체는 매우 암시적이다. 헤겔 철학의 어떠한 측면도 그 보다 더 많이 해석되지 않았으며 그보다 더 논쟁적이지 않았다. p212」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전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피히테와 셸링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그 후 잘못되게도 헤겔에게 확대 적용되었다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피히테나 셸링에서의 그 어느 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p214」

 

강유원 선생님도 여러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정반합의 오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오해 자체가 중대하다기 보다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헤겔에 관한 유일한 지식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헤겔이 아닌 것을 헤겔로 아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헤겔의 변증법은 무엇일까요?

바이저도 많은 해석과 그 해석들에 대한 그만큼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하니,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Erfahrung (겪음, 경험), 모순, Aufheben(지양), 생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변증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경험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겪음의 과정을 통해 시초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이 귀결에 이르러 드러나게 됩니다. 바이저를 한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용어 '경험'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결과에 도달하는(er-fahren) 여행 또는 모험(fahren)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따라서 '경험'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여행의 성과'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에 의해 수행된 여행은 의식 자신의 변증법의 여행이며, 이 변증법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은 의식의 경험이다. p225」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모순의 긍정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비법(?)은 간단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 세상의 모든 사태는 바라보는 측면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지젝과 같은 철학자는 '시차적 관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루빈의 꽃병'이라고 불리는 그림입니다. 얼굴로도 꽃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꽃병이든지 얼굴이든지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그림에는 모순된 두 형태가 공존하지만 우리는 늘 한쪽만 선택하여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늘 꽃병으로만 이 그림을 보던 우리가 어느 순간 그림에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림이 세계의 구조라면?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얼굴로 보는 것과 꽃병으로 보는 것은 단지 우리 주관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관점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지젝이 변증법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 대략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은 관점의 변화를 부정의 부정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요. ;;  물론 강유원 선생님이 '모순의 긍정'을 지젝처럼 설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개념에 대해 철학자들이 해석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것 같으니까요.

 

헤겔의 형이상학은 사변철학이라고 합니다.

사변철학을 강유원 선생님은이렇게 정의하셨네요.

 

"절대적 반성을 통하여, 유한자를 계기로 삼아 정립되는 무한자를 인식한다." 혹은 "무한자는 유한자에 선행하는 내재적, 논리적 목적이지만, 역사적으로 전개된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유한자가 알게 되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다."

 

헤겔철학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은 이렇게 성취됩니다. 무한자는 인격신이라기 보다는 '내재적 목적'이고 헤겔의 용어 중 '정신', '개념 Begriff' 가 동일한 의미입니다. 희랍철학에서는 플라톤의 형상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목적은 유한자에 앞서 주어지지만, 이 목적의 실현은 반드시 유한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한자는 유한자보다 선행하지만 유한자 없이는 정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한자는 내재적 목적을 뚜렷이 알지 못합니다.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즉 겪음(경험)을 통해 내재한 목적이 드러난 이후에야 회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철학자들 같이 절대지에 도달한 유한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한자를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 유한자 즉 주체라고 합니다.

 

『정신현상학』은 초보적 의식을 가진 유한자가 인식의아리스토 긴 겪음을 통해 절대지를 획득하고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는 과정을 서술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부분 『정신현상학』을 읽어야 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읽다'는 행위가 어쩌면 넘사벽인지도 모릅니다. 읽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어야 하는데, 난해하기로 이름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도전해 보았는데 '읽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는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무턱대고 읽었기 때문에 결국은 책장을 끝까지 넘긴다는 오기로 읽었을 뿐입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읽고나면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가 되면 무한자면 입장에 올라설 수 있는 걸까요?

 

 

다음주입니다.

2012 서양철학사 강의는 더 이상 없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534 ~ 549

 

<인문 고전 강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 베버 p443 ~ 466

강의 파일 : 090924 ~ 091001 (총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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