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쉬고, 아홉명이 모였습니다.

 

지난 회 데카르트에 이어

오늘은 <17세기 관념론> 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서는

<17세기 관념론> 항목 아래

데카르트와 프랑스의 데카르트주의자,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에서는

<자연적 필연성의 영역>에서 확실성을 추구한 철학을

근대철학의 Part 1 로 분류하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뉴턴을 포함하였습니다.

 

분류가 어찌되었건 17세기 근대 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Cartesian mind를 토대로 삼은 17세기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단독 실체로서의 신과 신의 변형태로서의 자연을 역설하였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눈 사유와 연장은 신의 두 가지 속성에 불과할 뿐이고,

이 세계의 개별 사물들(자연)은 모두 신의 다양한 양태들입니다. 인간 역시 신의 변형태입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 실체 = 신 = 자연 " 의 공식이 성립합니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무한자와 유한자의 무차별적 통일로서의 동일철학"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용어로는 범신론입니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그의 대표작인 『에티카』 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입니다. 윤리학에서 증명한 것이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 즉 형이상학이고, 그 방법론은 기하학입니다. 하나의 책에 형이상학과 윤리학 그리고 방법론이 모두 포함된 역작이라고 합니다. 

 

사실 기하학으로 어떻게 무한자와 유한자가 통일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원작을 읽어보아도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핵심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곧 형이상학이라는 것입니다. 

 

희랍철학의 전통에서 윤리학의 목표는 행복, Eudaimonia 입니다. 행복은 '잘 사는 것' 입니다. 'well(잘)' 에는 기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좋은 바이올린은 음을 잘 냅니다. 좋은 커피는 향과 맛을 잘 냅니다. 좋은 사람은?  이성을 잘 사용합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바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 앎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언어를 사용하고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탁월함을 앎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자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 또한 인간의 본질을 사유 즉 정신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스피노자 역시 서양사상의 지적 전통 아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주장한 것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입니다. 지적 직관에 의해 유한자인 인간은 무한자인 신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지적 직관이란 신적인 입장으로 올라서서 즉 신의 위치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플라톤의 '갑자기'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스를 통해 제1 원리를 알수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생각납니다. 무한자에 대한 앎은 이렇게 늘 직관을 통해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요? 

 

스피노자가 지적 직관으로 알아낸 것은 신적인 필연성입니다. 그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때의 신은 필연성을 따르는 신입니다. 17세기 근대과학이 발견한 자연적 필연성이 곧 신의 필연성인 것입니다. 자연법칙에 반하는 기적을 마구 일으키는 전능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법칙을 따르는 지혜로서의 신입니다.

 

이 세계가 신적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질서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불확실성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이런 복종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뉴턴에서 그 정점에 이르른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인과법칙에 맞물린 질서정연한 세계, 완벽한 체계에서

인간은 단지 노예이거나 기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근대 형이상학을 전복하려 했던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1900년 니체의 죽음과 함께 근대 철학도 끝이난다고 합니다.

 

 

다음주는 영국의 근대철학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407 ~ 427

 

<2012 서양 철학사 강의>

34강 로크 (1시 25분 경 ~)

36강 흄 (1시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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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 보니 늘 세계사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정작 오늘이 제주 4.3 항쟁 기념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네요.

어제,오늘 제주 곳곳에서 제사를 모신 집이 많았겠습니다.

7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진상규명을 제대로 못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아홉명이 함께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의  <인문 고전 강의> 책과 강의 파일을 각자 공부하고 모였습니다.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에 대해서는

지난 주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를 읽으며 공부해 두어서

오늘은 쉽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Cogito ergo sum'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그대로 직역하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유가 원인이고 존재가 결과처럼 인식이 되는데요.

cogito 명제의 의미는

'나의 본질은 사유하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은 정신에 달려있다'로 이해하면

훨씬 명확해집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res cogitans (사유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cogito 명제를 기화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

나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철학적 질문은 답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오늘 또다시 느꼈지만,

철학의 힘은 답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 자체에 있다고 알고 있기에

오늘은 물음을 시작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음 회차의 책은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입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 관념론 철학자를 공부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스타디 회원 과반 이상이

다음주와 다다음주에 걸쳐 다른 일정이 잡혀서

부득이 17회차는 3주 후인 4월 24일(월)에 있을 예정입니다.  

다른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다음 회차 내용> 

 

책 :  P 369 ~ 404

 

강의 : 2012 서양철학사 파일 35강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 읽어보기를 권유하신

<다시 쓰는 근대 세계사 이야기> 는 현재 절판입니다.

이 책의 2nd edition이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 제목은 <The Origins of the Modern World> 입니다.

두 주간의 공백이 생겼으니 ^^,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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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쁜 봄날씨입니다.

일기예보에서 먼지로 뒤덮인 북경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사나 싶지만,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먼지 바람을 뚫고 열 한명이 모였습니다. ^^

교육 가신 고구마님도 담주에는 꼭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시작하기도 전에 책읽기가 어려웠다고 말씀들 하셨습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근대 관념론이 쉬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사는

돌아서면 뭘 읽었는지, 뭘 이야기했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에 뭔지 '뿌듯함' 같은 것이 남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머리를 훌훌 털고도 남아 있는 것이 혹시 있다면, 오늘은 무엇이었나요?

 

'Cogito' 명제는 데카르트 사상의 집약체이니 그 의미는 날라갔어도 이 단어는 남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cogito란 사유 즉  정신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 의해 획득된 것입니다. 나의 본질은 사유하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은 바로 정신에 달려있습니다. 만약 정신이 나갔다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res cogitans(사유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저지른 범죄를 정신이 또록또록할 때 저지른 범죄보다 가볍게 취급하는 우리 사법제도의 근저에 바로 데카르트의 인간 개념이 깔려있습니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는 그가 그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 대해 그의 책임을 묻기가 힘듭니다. 그가 아닌 무엇이 저지른 것이지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들어 왔을 때에야 즉 사유할 수 있을 때에야 그는 책임과 의무를 진 그 자신,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완전히 분리하였습니다.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신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써니님이  목 윗부분을 통째로 이식한 사람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카르트는 쉽게 대답할 것입니다. 목 윗부분의 주인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답할까요?

 

관념론은 도식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현존을 규정한다는 생각입니다.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 이와 반대로 관념론은 자아가 그 자체(cogito)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앎을 가지지 않는다는 신념이며, 내가 사물들을 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욕구하는 동안에만 사물들을 알고 있다는 신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가 사물들을 다루고 목격하고 있을 때에만 그것들을 안다는 것이다. 사물들이 나와 분리되어 있을 때 나는 사물들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사물들이 현전하지 않으면 그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들은 나에게 현존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잠정적으로 나의 관념들이며, 그것들에 대응하는 실재는 관념적 실재다. 사물들의 존재는 자아에 기반하고 자아가 만든 관념들을 닮는다. 이것이 관념론이다.  p367"

 

나 자신 즉 cogito가 없으면 사물도 세계도 없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개인으로서의 나입니다. cogito는 근대 주체주의(주관주의)와 개인주의의 길을 열어줍니다. 데카르트가 최초의 근대인으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엄밀한 사유 방법이 까다로와서 그렇지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유가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근대적 사유의 틀 안에 놓여있습니다.

 

 

다음주에 한번 더 데카르트를 합니다.

교재는 <인문고전강의> 입니다.

오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충분히 나누지 못한 이야기, 

다음주에는 조금 여유를 갖고 토론해 보기를 바랍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도 인문고전강의가 훨씬 쉽고

역사적 배경을 많이 설명해 주시니 꼭 듣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책 : 인간 주체의 허약한 확실성 - 방법서설

        p 321 ~ 366 

 

 강의 : 090709-000 ~ 0907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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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에 황사마저 낀듯 전형적인 나쁜 봄날입니다....만,

저희는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

열 명이 모였고요.

<인문고전강의> 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하였습니다.

 

 『군주론』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학 교과서"라고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목적은 이탈리아의 통일입니다.

군주론』을 발표한 16C 초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 뿐 아니라 에스파냐도 중앙집권화의 길을 걷고 있던 시대입니다. 더구나 에스파냐는 신항로 개척을 성공하여 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때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도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여 신생 통일국가를 세우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군주론』은 어떻게하면 그런 군주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는 면에서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 강유원은 총 네 강에 걸쳐 『군주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제목은 '군주의 역량', '행동하는 삶', '무장한 예언자의 무력과 설득력', '군주를 몰락시키는 미움과 경멸'입니다.

 

첫 두 강에는 세계사 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의 상황 및 근대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로는 모든 사상이 근저에 놓인 기술, 경제, 사회, 정치와 밀접히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라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 이후의 그 '자연상태' 위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혼재하여 경쟁을 벌이던 시대입니다. 패배하여 역사에서 사라진 것들도 있고 승리하여 근대라는 새로운 체계의 초석이 된 것들도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세속 국가'라는 개념은 승리하여 지금까지 거의 모든 국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일부 신정국가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군주론』의 본론은 뒷 두 강에서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새로운 군주의 역량입니다. 새로운 군주의 표상은  '무장한 예언가  armed prophet'

입니다. 무력과 설득력을 적절히 사용하여 인민을 휘어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군주의 역량 즉 비루트(virtú) 입니다. 무력에만 의존하면 두려움을 넘어 미움을 사게 되고, 뒷받침 하는 힘없이 설득에만 의존하면 무기력하게 인식되어 경멸을 당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경멸보다 미움이 더 위험하다고 보았습니다. 

 

군주가 인민에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산과 명예입니다. 군주론을 통틀어 가장 가슴에 꽂히는 문장은 이것일 것입니다. 선뜻 인정하기가 무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의 재산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명예 즉 자존심 역시 사람의 감정에 치명적인 상처를 줍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성적 판단을 하려고 해도 감정이 상한 상대에 대해서는 어쩔수 없는 미움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스타디 마지막에 역대 대통령을 두고 미움과 경멸 중 무엇이 더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를 얘기해 보았습니다. 미움과 경멸은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무능한 대통령이었는지 힘에만 의존한 독재자였는지를 재미삼아? 교훈삼아? 나누어 보았습니다. 특히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치러낸 우리들로서는 박근혜의 실패에서 분명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에 앞서 우리 국민의 뼈아픈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비선 정치, 깜깜이 정치라고 불리는 박근혜는 분명 '설득력'이 전무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국정원, 검찰, 경찰 등 사정기관을 이용하여 물리력만 강제했던 박근혜는 결국 돌이킬수 없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박근혜에게는 어쩌면 근대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주로 성장했던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라 전근대의 여왕처럼 군림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근대국가가 어떤 사유의 틀 위에 서 있는지를 몰랐다는 것이 그녀의 비극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에게  『군주론』을 권한다면 잔인한 짓이 될까요? 쓸데없는 짓이 될까요?

 

 

그건그렇고,

저희가 『인문고전강의』를 읽으면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고전을 함께 읽기는 어렵습니다. 고전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간상 힘들기도 합니다. 그나마 몇몇의 고전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시도해 볼만합니다. 그 중 한권이  『군주론』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예전에 두 번 읽었는데요. (저는 펭귄판으로 읽었습니다.)  내용을 잘 모르고 읽어서 정말이지 감흥이 없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 말씀마따나 맥락없이 읽으면 양아치 책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름 고전의 품격을 기대했다가 이런 얍삽한 책이 있나 했었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읽기 안내를 받았으니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주는 다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로 들어갑니다.

본격적인 근대사상의 출발점인 "데카르트"를 공부합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347 ~ 368

 

<2012 서양철학사> 강의

파일 33강

파일 34강

 

시간이 있으신 분은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한 아래 강의를 참고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좀 길고 약간 어렵기는 하지만 귀에 들어오는대로 들어두어도 좋습니다.

 

<2015 서양근대 사상> 1강 ~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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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에 13번째 철학 스타디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3'을 신성시한다는데, 오늘 3이 여러번 들어갔네요.

하지만 오늘은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던 중세 사회가 무너지고

그 '자연상태' 위에 새로운 체계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사상들이 경쟁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무조건

고대 희랍세계로의 복귀, 인문주의 따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인문주의 사상은 하나의 흐름일 뿐이고

오히려 더욱 강력했던 흐름은 근대 자연과학으로 이어지는 자연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는 결국 인문주의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진리를 담지하는 시대가 되므로써 자연학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자연학은 중세철학에 대립하여 불쑥 등장한 학문이 아닙니다.  13~14 세기에 보편개념 명칭론(유명론)을 주장했던 프렌체스코 학파에 의해 싹이 텄고,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 완성(?)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를 시작으로 16세기와 17세기를 잇는 케플러와 갈릴레이, 마지막으로 17세기 뉴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결정론이라고 불립니다. F=ma 라는 단순한 방정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이론상으로는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측이 가능한 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정확한 예측을 못하는 이유는 방정식에 대입할 초기값을 무한대에 가깝도록 정확하게 입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능력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것을 세계사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 이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방정식 안에서 법칙대로 진행되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만큼 어렵다는 양자역학에 의하면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고전역학의 세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 자체가 관측대상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관측에 의해서 정확한 데이타를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비유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아이의  키는 잴 수 있지만(고전역학), 몸부림을 치며 누웠다 앉았다 굴렀다 하는 아이의 키를 잴 수는 없습니다(양자역학). 아니 아이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아이의 키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튼 양자역학에 대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입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정확히 측정되지 않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통해서는 단지 확률을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철학사를 하다가 물리학으로 넘어간 분위기인데요. 철학과 수학 그리고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로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각각 별개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철학이 자연학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플라톤은 수학을 못하는 자는 아카데미아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했다는데, 오늘날에는 수학을 못하면 물리학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물리학의 언어가 수학이기 때문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수학자이기도 했고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그리고 자유의지 등에 관해서는 EBS 프로그램 <통찰>에서 좋은 강의를 발견했습니다 45강부터 48강까지인데요. 특히 45강과 46강을 들어보면 17세기 고전역학과  현대 양자역학에 대한 기본 개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것은 자연학이 아니라 쿠자누스의 '실존적 절망' 입니다.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고도 쿠자누스는 무한자를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신성을 간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절망적 열망 때문이니까요.  강유원 선생님은 이 인간 정신의 신성함을, 읽지 않으면서도 자꾸 사모으는 책에 비유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다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책들이 나올때 마다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산다는 행위 자체를 멈출 때 나는 오로지 물질적으로, 동물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월요일마다 모여서 이 난해한 책을 뒤적이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출 때, 나는 오로지 재산, 물적 소유에 의해 평가받는 물화된 인간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말입니다. 신이 될 수 는 없지만 신성함만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될 때 비로소 교양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열 한명이 모였습니다.

 

 

 다음주는 『인문고전강의』 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공부하겠습니다.

 책 : p261 ~ 318

 

 강의 파일 : 090604-000  ~  09062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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