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한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 교재에서 <서양 밖에서의 철학적 종합> 장을 공부할 차례였는데요. 사실 책은 한줄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분량 자체도 적지만 내용도 별달리 없어서 오늘 공부는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철학사 강의> 중 송명이학에 해당하는 3개의 강의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text도 없고 기본지식도 없이 오로지 강의에만 의존하여 걱정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서 기본 개념을 찾아가며 짜집기한 내용이 맞는지도 모르겠고요. 잘은 모르지만 유학의 문장들은 사람에 따라 해석도 다양한 것 같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자체가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논어 위정편에 마침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다... 정도로 해석했는데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앎의 시작임을 깨우치는 글이 아닐까 합니다.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 'uknown unknown' 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반성이 됩니다. 이점 인지하시고, 다음에 성리학을 공부할 때 오늘 우리의 눈먼 공부가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송나라 때 지배계급은 사대부입니다. 지주전호제를 경제적 토대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계층이 사대부입니다. 하지만 송의 수도가 금에 의해 함락당하고 남송시대가 이어지면서 사대부들은 과거 대신 향리 공간의 자치를 꿈꿉니다. 어수선한 시대에 황제 일원적 통치가 불가능해진 틈을 타 사대부들이 지역사회를 직접 통치하려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향리공간의 거점으로 서원을 세우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합니다. 조선시대 사림들의 향촌자치의 연원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 성리학입니다. 성리학은 일반적으로 한당 시대의 유학과는 달리 매우 철학적·사색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송도학 운동은 향촌자치라는 매우 분명한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송시대부터 발달한 道學 즉 性理學을 집대성한 인물이 남송의 주희입니다. 주희가 사대부의 필독서로 정립한 四書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입니다. 주희 이전에는 유교 경전을 대표한 것이 五經입니다. 주희는 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서 두 편을 따로 떼어 독립시키고 논어와 맹자를 더하여 사서라 불렀습니다. 예기의 42편이 대학, 31편이 중용입니다. <대학>은 '수양론과 정치론을 아우르는 교설'로 조선시대 왕들의 교과서로도 불렸습니다. <중용>은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한 책입니다. 우리는 <대학>과 <중용>에서 대표적인 문장을 보면서 성리학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았습니다.

 

<大學>의 구조는 삼강령 팔조목입니다. 삼강령 팔조목은 '학문의 大要' 입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큰 학문을 하는 길로 삼강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안의 밝은 덕을 닦고, 백성과 친해지고, 지극한 선에 이른다, 입니다.  주희는 원문의 親民을 新民으로 바꾸어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나를 닦는 것은 백성을 잘 통치하기 위해서입니다. 유학이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修己治人인 것입니다. 나를 닦은 후에 타인을 다스려야 합니다. 팔조목은 修己治人을 위한 구체적인 교육방법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고 뜻을 성실히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修己에 해당합니다. 사회적 자기를 닦고 일가를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治人의 방법입니다. <대학>이 조선에서 제왕학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일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학문의 목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中庸>이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책이리라는 짐작을 하게 해줍니다.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한 문장은 天命之謂性 입니다. 직역하면 천명을 성이라 일컫는다, 일까요? 天命이 그대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오면 性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분은 天이 download 된 것이 性이라고 설명하셨는데요. 天은 하늘의 이치(理)입니다. 天理 즉 우주의 근본원리가 그대로 사람에게 들어 온 것이 性,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天과 人이 공유하는 것이 理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곧 理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性卽理가 도출됩니다. 학교에서는 성리학을 간단히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배웁니다. 천명지위성에 따르면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이 다르지 않습니다. 둘다 참다운 이치를 품고 있습니다.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기를 잘 수양하면 참다운 이치를 발현할 수 있습니다. 본성에 내재된 참다운 이치를 발현하여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주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278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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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스콜라철학과 후기 스콜라철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유대교의 지파로 시작한 그리스도교가 보편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노력의 정점이 스콜라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의 완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이성 즉 로고스는 신의 본성이기도하고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장1절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고 합니다. 이것에 의하면 신은 로고스입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 역시 로고스를 본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을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로 쓰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공통 성질입니다. 인간은 로고스 즉 이성을 사용하여 신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이 이성을 통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14세기, 후기 스콜라철학의 시대에는 로고스로 연결된 신과 인간의 결합이 점차 분리됩니다.  후기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윌리엄 오컴은 이성은 인간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인간의 특성이지 신의 특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은 전능하기에 어떤 법에도 심지어 이성의 법에도 종속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오컴에게 신의 본질은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전능함입니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던 로고스가 신과 단절됨으로써 인간 정신 또한 신과 분리됩니다. 인간 정신은 신으로부터 소외되어 혼자서 우주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신이 이성이 아니라면 인간 이성은 신과 연관될 수 없다. 중세 말에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중대한 이론적 주제가 아니게 되고, 이로써 인간은 신으로부터 분리된다. 이성은 다시 자신에게 적합한 대상들, 즉 자신이 그 안에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영역들에 관여한다. 이러한 대상들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 자신이다. 둘째, 당시 놀라운 질서가 발견되고 있었던 세계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232~3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 이성은 인간 이성이 알 수 있는 대상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과 자연(세계)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전이 예고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컴은 근대 과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후기 스콜라철학에서 신앙은 의지주의를 강조합니다. 신앙은 따져묻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이성적 사유를 폐기하고, 즉 토미즘을 반대하고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는 종교개혁기의 루터에게 이어집니다. 

 

스콜라철학에서 후기 스콜라철학까지의 이런 변화의 바탕에는 중세철학 내내 이어진 세 가지 주제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천지창조와 보편개념 그리고 로고스입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보편개념 논쟁입니다. 보편개념 실재론과 보편개념 명칭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습니다. 스콜라철학의 전성기에는 보편개념 실재론이 후기 스콜라철학 시기에는 보편개념 명칭론이 우세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온건한) 보편개념 실재론자이고 윌리엄 오컴은 보편개념 실재론을 폐기하고 보편개념 명칭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보편개념 명칭론은 수학을 도구로 자연을 탐구하는 근대과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오캄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연에서 보편자들의 현존을 전적으로 부정했다. 보편자들은 오로지 정신의 창조물이자 마음의 창조물이다. 용어들은 말소리들이다. 이 용어들은 사물들을 위한 기호들일 뿐이며, 사물들의 다수성에 대한 정신적 대체물이다. 용어들은 관습들이 아니라 자연의 기호들이다. 사물들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을 통해 이해되며, 이러한 개념들은 보편적이다. 한 개별자를 알기 위해 우리는 보편자, 즉 이데아에 대한 앎에 의지해야 한다. 오캄의 입장에서 보편자들을 단지 기호들로만 이해한다면, 앎은 상징적인 것이 된다. 오캄은 위대한 포기를 고안한 사람이다. 즉 인간은 사물들의 소유를 포기하고 사물들의 상징들과만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이로써 상징들의 사용에 기반을 둔 수학적 지식이 가능해지고 유명론 학파들, 특히 파리의 유명론 학파로부터 유래한 근대의 자연 과학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중세의 자연학은 운동과 원인들 자체를 이해하고자 했으나 근대의 자연과학은 운동과 원인들에 관한 수학적 상징들에 만족한다. 갈릴레오에 의하면, 자연의 책은 수학적 기호들로 쓰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동 중의 변화량을 측정하는 자연과학을 갖게 될 뿐,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228~9 

 

 

다음주는 송명이학 즉 성리학에 관해 공부합니다.

책에는 별 내용이 없으니 강의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모든 철학>  p 274~8 

 

<2012 강유원의 서양 철학사> 파일 26~28 

  파일 26 : 송명이학의 성립배경

  파일 27 : 주희와 사서

  파일 28 : 조선 성리학 

  강의 필사본 사이트 링크하니 참고하십시오.

http://sootax.co.kr/category/%EA%B0%95%EC%9D%98%EB%85%B8%ED%8A%B8/%EC%84%9C%EC%96%91%EC%B2%A0%ED%95%99%EC%82%AC%20%7C%202012%E5%B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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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4-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철학 책이라서.,....
 

오늘 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꼬미님이 정식으로 가입하셨고요.

코스모스님은 탈퇴하셨습니다.

정원은 열다섯 명입니다.

 

오늘은 중세 교부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역작 『고백록』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에 의하면 『고백록』은, "'하느님의 참된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목적을 전제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였음을 회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서술한 책" 입니다.

 

학문적으로 풀지 않아도  『고백록』은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고전입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내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의 힘뿐 아니라 문장 자체의 힘도 탁월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신을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하여 읽는다면 그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느님의 참된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in te 상태입니다. 그러나 dilectio, 하느님의 사랑을 자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하느님의 사랑 밖으로 나갑니다. "이처럼 영혼이 당신을 떠나 돌아서서(abs te) 당신 밖에서(extra te)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할 때 곧 외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당신께로 돌아서기까지는 (ad te)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이 파토스(pathos) 즉 겪음 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을 뒤로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 하고, 수사학과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합니다. 이 과정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버려진 시간, 단순한 외도가 아닙니다. 이 겪음이 없었다면 회심(metanoia)도 없었고, 신의 진정한 사랑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in te → abs te → extra te → ad te → metanoia → in te  의 과정입니다. 결과만 보면 in te → in te 일 뿐입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in te 와 마지막의  in te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의  in te에서 인간이 느끼는 사랑은 즉자적인 dilectio이지만, 신을 떠나 긴 겪음 이후에 돌아와 깨달은 사랑은 자각적인 dilectio 입니다. 인간은 자각을 통해서만 참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자각이란 '자신의 삶을 회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분열해야 합니다. 겪음을 행한 즉자적인 나와, 즉자적인 나를 바라보는 대자적인 나로 분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self - reflection, 자기 반성을 통해 삶의 각 국면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가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반성은 반성문 한장을 쓰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각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나를 혹은 주변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기 싫은 자신의 얼굴을 여전히 등 뒤에 놓아두고 살고 있습니다.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책을 읽고, 철학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주는 스콜라 철학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258 ~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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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초기 기독교를 공부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헬레니즘적 기독교로 이행되는 과정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민족의 종교로 시작된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로, 이후에는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파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닙니다. 신과 유대 민족 간의 계율을 핵심으로하는 교리는 다른민족들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유대민족의 특수성을 극복하여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이 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사랑의 공동체로 확립함으로써 민족에 관계없이 누구나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은 희랍어와 희랍어에 내재된 희랍사상을 기독교와 융합시킴으로써 기독교를 보편화한 철학자들에 대해 공부하였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공용어는 희랍어입니다. 기독교를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로 쓰인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형식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언어에는 고유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사유체계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어에 내재된 사유 체계를 희랍어 사유 체계로 옮기는 과정은 두 사유 쳬계의 융합인 동시에 충돌입니다. 히브리의 사유는 신앙을 우선으로 합니다. 희랍의 사유는 이성 중심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을 이성으로 정당화해야 할 기독교의 역사적 과제가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신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반대로  희랍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이성의 설명 없이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필론과 플로티노스는 이 두 사유체계를 융합시키려 한 대표적 철학자들입니다.

 

 

'그리스의 유대인_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20경 ~ AD40)'은 성서 해석에 그리스 사상을 도입한 최초의 유대 사상가들 중 하나였습니다. 필론은 유대 사상을 희랍 용어로 체계화하고 이성적인 논증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플로티노스(204 ~ 270)는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융합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이론을 유출설이라고 합니다.

 

"그는 플라톤의 선의 형상을 일종의 인격으로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선을 그리스도교적인 신으로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선이란 최고의 정신으로서 이 세계를 창조한 분할 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이 최고정신은 지성으로서 스스로를 관조하며, 창조는 그의 사유로부터 넘쳐 흘러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창조란 신의 사유로부터 유출되는 것이거나 유래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실재계와 현상계라는 두 세계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현상계를 실재계의 그림자, 모방 등등으로 설명했지만 두 세계의 관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부족합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두 세계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유출설로 설명하였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실재계를 일자(최고정신)와 정신으로 나누고 정신과 물질의 중간에 '영혼'을 도입하였습니다. 일자(최고정신) → 정신 →영혼 → 물질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존재의 대연쇄'라고 합니다.

 

플로티노스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은 정신과 물질을 이어주는 양성적인 것, 제3의 것입니다. 영혼은 정신의 속성과 물질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세계를 연결 할 수 있습니다. 일자(최고정신)에서 넘쳐 흐른 정신이 영혼의 매개로 물질에 이릅니다. 영혼의 궁극적 목적은 일자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ecstasy, 무아의 경지, 황홀경 입니다. 백과 사전적 의미의 ecstasy는 "신비주의의 최고 목표를 가리키는 용어. (그리스어로 '자기 바깥에 서 있음' 또는 '자기를 초월함'이라는 뜻의 ekstasis에서 유래)" 라고 되어 있습니다.  괴테의 유언인 "좀 더 빛을..."은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빛의 원천인 태양은 신을 상징합니다. 괴테는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죽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은 희랍정신이 유대-기독교 사상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희랍정신은 無를 사유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습니다.  無를 사유하지 못하는 희랍정신이 無없이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 유출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자(최고정신)는 기독교의 신과 등치될 수 있고, 일자가 유출된 것으로서의 물질은 신이 창조한 세계와 같습니다. 유출설에 의하면 창조는 無가 아니라 일자 즉 신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플로티노스는 희랍 사유 체계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도입하였습니다.

 

  

 

다음주는 쉽니다.

다다음주 4월 첫째 주에는 중세 기독교의 핵심을 공부합니다.

 

< 세상의 모든 철학 >

  p 225 ~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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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은 서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들을 공부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서양 일신교의 선구적 형태입니다. 일신교를 대표하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세 종교 모두 예루살렘을 구심점으로 하고 있고, 아브라함을 공통된 선조로 주장합니다. 이 종교들의 신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신입니다.  유일하고도 사랑에 차 있는 동일한 창조주 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내 하나의 교파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적 그리스도교를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로 전환시킨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유대 율법을 대신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인간에게 은총을 내리고, 인간은 성자를 통해 성부를 믿습니다. 성령은 은총과 믿음, 신과 인간, 성부와 성자를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힘입니다. 성령은 사랑으로 표상됩니다. 즉 믿음과 구원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삼위일체설과 사랑의 공동체를 기독교의 중심 개념으로 확립하였습니다.

 

"이 결정이 함축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교를 지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유대 율법을 대신하여 종교적 삶의 기초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바울로에 따르면, 새로운 신앙은 전통적 유대교의 계율적인 규정들에 의해 인도되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인도되어야 하는 신앙이었다. 이러한 점이 또한 개종을 촉진하였는데, 이는 유대교의 일부 교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분리주의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개종을 촉진하는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경향은 복음전도라고 불렸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 종교의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두드러진 특징으로 남아 있다." <세상의 모든 철학>

 

강유원 선생님은 철학강의를 통해 기독교의 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실천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급진적 실천 사상이다."

 

사랑의 실천은 인격적 절대자의 강력한 명령을 개개인이 받아들임으로 시작됩니다.  율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라 신의 명령을 내면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의 내면성은 바울에서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로 이어져서 종교 개혁 당시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성서"라는 구호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신의 명령은 공동체 즉 사회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실천의 핵심은 궁핍한 이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은 고귀하므로 궁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바울은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공동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사제의 임무는 마땅히 궁핍한 집단을 돌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집사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여 사제에게 알리는 임무를 띄었습니다.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2코린토서 9장 7절에는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전하는 에반게리움 (복음) 입니다. 궁핍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루카 4장 8절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똑같이 고귀합니다. 인것은 기독교가 평등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형제 자매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를 통해 균형을 이룬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저는 기독교도가 아닙니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경도 한번 완독한 적이 없지만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기독교가 초기 기독교의 정신, 바울의 사상으로 돌아간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공부한 우리 회원들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음주는 필론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207 ~ 211

 p 223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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