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소를 옮겨 환하고 깨끗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모두들 엄청 맘에 들어 하시는데, 아쉽게도 정기 모임에는 휴일이네요...

열 한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마치고

 오늘은  『인문 고전 강의』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고요. 아들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편집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헌정했다는 말도 있고요.

 

완역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두껍고요. 읽기도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읽지는 못했고    『인문 고전 강의』 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부분 부분 읽었습니다. '중용'의 정확한 개념이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너무 꼼꼼해서 하악 하악 소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후대의 칸트나 헤겔에 비하면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은 두 가지입니다. 지적 탁월함과 성격적 탁월함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핵심은 지적 탁월함으로 실천적 지혜를 기르고, 성격적 탁월함으로 중용을 실천하여 훌륭한 시민이 되고 , 나아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관조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최고로 좋은 삶 즉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여기서 니코마코스는 중용이라는 성격적 탁월함에 대해 공을 많이 들이는 것 같습니다. 중용의 개념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녁에 맞추는 화살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중용은 양 극단을 배제한 적당히 중간적 위치가 아니라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는 태도입니다. 중용 즉 성격적 탁월함과 대립되는 품성 상태는 악덕인데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자람과 지나침입니다. 우리는 오늘 중용으로서의 '용기'를 예로 들어서 그 지나친 태도인 무모함과 모자란 태도인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건 지난 주에도 조금 이야기해 보았던 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 예를 들어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용기는 적당히 양심을 무마시킬 수 있는 정도의 행동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이성이 명하는대로 고귀한 것들을 위해 그것들(두려움)을 견뎌낼 것이다." 즉 용기의 목적은 고귀함입니다. 지난 주말에 끝난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은 유치원 버스의 수많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브레이크 풀린 거대한 탑차 앞을 자기의 자동차로 막고 죽습니다. 이걸 우리는 용기라고 부르나요? 무모함이라 부르나요? 어쩌면 중용이라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중용을 몸에 익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윤리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중에 '윤리학의 황금률' 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걸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걸 긍정문 형태로 바꾸면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슷합니다. 성경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윤리적 규범이 바로 이 황금률입니다. 뭐, 남을 욕하고 싶을 때 그 욕을 내가 들어도 좋은가 생각해 본다면, 남에게는 손해가 되지만 내게는 이득이 되는 일에 유혹될 때 상황을 거꾸로 놓아본다면 즉 이 황금률을 적용한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명절 휴일이고요.

8회 모임은 다다음주 2월 6일에 있습니다.

8회 공부할 내용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154~ 178

 

Ⅴ 지혜로운 인간의 이상

Ⅵ 신플라톤 주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13

파일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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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4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은 여덟명이 함께

지난주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끝날 즈음에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세 분이 합류하셔서

헤어질 때는 열 한명이 되었습니다. ^^

얼굴이라도 보여주겠다는 그 마음이 참 따뜻하고 고마웠습니다.

다음주까지 일정이 잡혀있다고 하셔서

다음주는 월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에 스타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난주에 비해 훨씬 수월했습니다.

역시 이론학, 그중에서도 형이상학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분야인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에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플라톤의 형상 실재론 (형상은 사물 밖에 존재한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내재론 (형상은 각각의 사물안에 존재한다)만은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시작을

구체적 사물을 감각하는 것에 있다고 보는 이유도

사물안에 그 본질인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과 사물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른 개념의 실재인 usia 즉 실체가 있습니다.  

usia는 '형상을 내재한 각각의 사물' 입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와 영혼 개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플라톤은 영혼을 명백히 분리시켜 영혼불멸을 강조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육체와 영혼은 usia처럼 하나로 결합된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오늘 가장 재미있었던 (?) 부분은 'logos' 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logos는 현재 말, 이성, 비율 등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미있는 말'로서의 logos란 개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의미있는 말이란 의미 규정된 말 즉 definition이 된 말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정의가 그 사물의 logos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ogos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즉 그 사물의 형상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사물은 인간의 logos를 통해 그 진리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멋진 표현이다! 고 감탄한 문장이 있습니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기에 진리의 도구다. 사물들의 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거쳐간다. 즉 인간은 사물들을 발견하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진리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물들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존재와 그 존재를 알고 표현하는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토대는 앎, 소피아, 철학이다. 철학에서 존재는 자기의 진정한 실재를 진리의 빛 속에서 획득한다. p137"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론학과 실천학 그리고 제작학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논리학은 이 모든 학문들의 도구 즉 organon이기 때문에 세 가지 분과 학문에 포함되지 않은 기초학문입니다.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학은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후 서양철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윤리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주에 공부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더 상세히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기초적인 부분만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주의 교재는 <인문 고전 강의> 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한 책이니,

강의 파일과 함께 들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인문 고전 강의>  p147 ~ 183

 

 

 

 

 

 

<인문 고전 강의> 파일 : 20090409 ~ 20090430

                                1시간짜리 강의 총 8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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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명이 함께 했습니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 첫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플라톤은 쉬웠던 거야' 라고 입을 모을만큼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그의 시대 이후 철학이 걸어갈 (혹은 걸어가고 있는) 길을 규정했다고

평가받는 아리스토텔레스인만큼

다양한 분과 학문과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이제 철학사를 읽는 초보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기초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내용 중 

오늘은 앎의 층위들과 usia(실체)에 대해 주로 공부하였습니다.  

 

 

앎의 층위들이란 우리가 사물을 이해해내는 각 단계들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 즉  usia(실체)에 대한 궁극적 앎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첫 단계로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앎에서 시작하여 기억과 경험을 거쳐 기술적 이해에 도달합니다. 더 깊은 탐구를 통해 그 사물의 원리와 원인을 논증하는 에피스테메 즉 논증적 앎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사물을 완전히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인은 또 다른 원인을 갖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데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극의 원인, 제1원인이 필요합니다. 이 제1의 원인은 논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스를 통해 직관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에피스테메와 누스가 결합된 것이 바로 소피아입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인간이 도달하기는 힘든, 엄밀히 말해서 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앎입니다. 

 

앎의 층위는 앎이란 누적적이라는 뜻입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과 경험 등을 통하지 않고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에 바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에 대해 깊이 탐색한 이유는 아마도 형상에 대해 스승 플라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플라톤은 사물은 형상(이데아)의 그림자나 모방일 뿐이며 

형상은 사물의 세계 밖에 실재하는 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른바 형상 실재론입니다. 플라톤에게 사물은 오히려 이데아에 대한 앎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겨진 듯 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견해를 거부했습니다. 사물을 사물답게 만드는 것이 형상이라면 그 형상은 사물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각을 실체 즉 우시아라는 개념을 통해 전개하였습니다. 

 

실체는 말 그대로 우리가 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각각의 구체적 사물입니다. 그런데 이 실체에는 그 사물의 형상이 온전하게 내재해 있습니다. 홍길동이라는 구체적 사물 안에는 인간의 형상이 그대로 들어있어야합니다. 홍길동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홍길동이란 사물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홍길동도 실체이고 홍길동 안에 있는 인간이란 형상도 실체입니다.  두 개의 실체가 있고 그것을 각각 제1 실체와 제2 실체라고 합니다. 구체적 사물의 측면에서 보았는가 아니면 형상의 측면에서 보았는가에 따라 제1 실체와 제2 실체를 나누었지만, 사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 분리될 수 없는 실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라고 하였습니다. 형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철학사 강의에서 우시아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

"형상을 내재한 각각의 사물"  이것을 형상 내재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스타디 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형이상학』 의 첫 문장입니다.

 :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거꾸로 말하면 앎을 추구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말?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까지 모두

앎을 인간 최고의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탁월함 즉 아레테를 '앎' 이라고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에로스의 사다리에서 이데아 그 자체의 아름다움 바로 아래 단계가 앎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앎이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앎의 결핍에 목말라하고 앎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입니다. 플라톤이 최고의 인간으로 규정한 철학자는 앎을 향해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앎은 좋음을 향한 앎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은 꼬박 세 시간 가까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허우적대었습니다. 그 중에서 무엇이 머리에 남았나 생각하다가 후기에 뜻하지 않게 너무 전문적인 (ㅋㅋㅋ;;) 내용을 너무 대담하게 적었습니다. 스타디 시작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공부는 어디 다른 곳에 가서 플라톤이 이렇다 저렇다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아주아주 초보적이고 오류투성이일 가능성이 농후한 단계라고 해놓고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블로그에 요렇게 무식이 용감함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ㅡ.ㅡ;;

 

 

흠흠...

다음주는 아리스토텔레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아마도 다음주 주제는 오늘보다 열 배는 쉽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 다음주는 <인문 고전 강의>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할 예정입니다.

다음주에는 <2012 서양철학사> 강의 파일은 따로 없고,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의는 1시간짜리 8개이므로 미리 조금 듣고 오시면 더 좋을 것도 같습니다.

다음주 철학사 내용에 윤리학이 포함되니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반 정도 들어보니 이 강의는 아주 쉽고 재미있습니다.

 

여하튼 다음주 읽어오실 분량은 아래와 같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135~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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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열 한명이 참석했고요.

 

먼저 지난주에 이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자세히 짚어 보았습니다.

플라톤의 대표 저작인 <국가>와 <향연>을 중심으로

앎과 실천의 문제,

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는 에로스의 사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다음주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겠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Ⅳ  아리스토텔레스 p110~153 

 

<강유원의 2012 서양 철학사> : file 11   

 

 

 

 

 

 

 

 

 

 

 

 

 

 

 

 

오늘 플라톤의 <향연> 중 읽어 드린 부분을 덧붙여 놓겠습니다.

첫 인용은 에로스의 탄생과 그에 따른 에로스의 타고난 본성에 관한 내용,

두 번째 인용은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쳐 준 에로스의 사다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1. 에로스의 탄생 (203b ~ 204C)

 

‘그런데 그는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나왔나요?’ 내가 말했네.

‘그건 이야기가 꽤 깁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당신에게 말해 줄게요. 아프로디테가 태어났을 때 신들이 잔치를 열었는데, 다른 신들도 있었지만 메티스(계책)의 아들 포로스(방책)도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식사를 마쳤을 때, 잔치가 벌어지면 으레 그러듯 구걸하러 페니아(곤궁)가 와서는 문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스가 넥타르에 취해 (술은 아직 없었거든요.) 제우스의 정원에 들어가서 취기에 짓눌려 잠이 들게 되었지요. 그러자 페니아가 자신의 방도 없음 때문에 포로스에게서 아이를 만들어 낼 작정을 세우고 그의 곁에 동침하여 에로스를 임신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추종자요 심복이 되었지요. 그녀의 생일날 생겨났고 게다가 본래부터 아름다운 것에 관해 사랑하는 자인데 아프로디테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답니다. 우선 그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오히려 피부가 딱딱하고 거칠며 맨발에 집도 없습니다. 늘 땅바닥에서 요도 없이 누워 있고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이 들지요.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삽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꾸밉니다. 용감하고 당차고 맹렬하며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지요. 분별을 욕망하고 그걸 얻을 기략이 풍부합니다.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며, 능란한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래 불사적이지도 가사적이지도 않습니다. 단 하루 사이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사는 때가 있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을 때가 그렇지요.) 또 죽어j가는 때가 있고, 그러다가 아버지의 본성 덕택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가 갖추고 있는 방도는 늘 조금씩 새어 나갑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예 방도가 없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고, 또 지혜와 무지의 사이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태거든요. 신들 가운데 아무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게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어느 누구라도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기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 그럼 그 지혜 사랑하는 자들이란 누굽니까?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내가 말했네.

‘이쯤 되면 적어도 이것 정도는 어린애한테조차도 분명할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자들이고, 또 그 가운데 에로스도 속한다는 것 말입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기원이 바로 이것들에게도 원인 노릇을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롭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하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그 신령의 본성입니다.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하지만 에로스가 누구인가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들로부터 추정컨대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에로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당신에게는 에로스가 아주 아름답게 보인 거라고 난 생각합니다. 사실 사랑받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며 완벽하고 복 받았다 여겨지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습을, 즉 내가 죽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2. 에로스의 사다리

 

1) 210a ~ 210e

 

이 일을 향해 올바르게 가려는 자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들을 향해 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끄는 자가 올바로 이끌 경우 그는 하나의 몸을 사랑하고 그것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어느 한 몸에 속한 아름다움이 다른 몸에 속한 아름다움과 형제지간임을 깨달아야 하며, 종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할 때,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이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파악하고 나면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이 열정을 무시하고 사소하다 여김으로써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에게는 충분하며, 이자를 사랑하고 신경 써 주며 젊은이들을 더 훌륭한 자로 만들어 줄 그런 이야기들을 산출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번에는 그가 행실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도록, 그리고 그것 자체가 온통 그것 자체와 동류라는 것을 보도록 강제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몸에 관련된 아름다움이 사소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끄는 자는 그를 행실들 다음으로 앎들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이번에는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고, 또한 이제는 아름다움 여럿을 쳐다보고 있기에, 더 이상 어리디 어린 소년이나 특정 인간이나 하나의 행실의 아름다움에 흡족하여 종처럼 하나에게 있는 아름다움에 노예 노릇 하면서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해 보세요.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정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2). 211c

 

.... 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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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디 교재에다가

강유원의 <서양 철학사> 파일까지 확보하고 나니,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

진도가 잘 안나갑니다.

 

오늘 72쪽부터 93쪽까지

즉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모두 그리고 플라톤을 반정도 읽으려고 했는데,

85쪽까지 밖에 못했습니다.

플라톤은 도입부만 보고 본론은 시작도 하지 못했네요.

강유원 선생님이 강의에서 워낙 많은 말씀을 하셔서

거기에 따라 진행하다보니

우리 스타디도 플라톤을 얼마나 오래하게 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

 

소크라테스에 관해서는

변증술과 아레테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남겨 놓은 저작물이 없고

플라톤은 대부분의 저작물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오늘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도 플라톤의 책에 나온 이런저런 내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예를 들면 변증술 이야기를 하면서

<향연>에 나오는 에로스 이야기를 미리하였습니다. 

 

플라톤은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오늘은 플라톤의 생애와 저술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 강의 파일7에서 정리해 준 

'이데아'에 대해 개략적인 개념을 살짝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열두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아리수님과 오랑쥬님 그리고 한비도 출석하여

더욱 좋은 스타디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주에 읽고 듣고 생각하고, 다음주에 논의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85~109

 

읽고 왔지만 오늘 논의하지 못한 플라톤의 이데아부터 플라톤 끝까지 입니다.

물론 다음주에 다 공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일단 읽고는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처음 읽듯 새로울 것이니 ^^ 

 

<2012 서양 철학사> 강의 파일 

 

파일 7 : 플라톤의 이데아 

파일 8 : 플라톤의 <국가>

파일 9 : 플라톤의 <향연>

파일 10 : 플라톤의 <향연> 

 

파일7은 이미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파일 8,9,10 모두 듣고 오시면 좋고요. 

안되면 파일 8을 우선으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주에 공부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 

<향연>을 같이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향연>에 대해서는 또 다른 파일도 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이 CBS 라디오에서 방송한 내용입니다.

10회나 되지만 회당 2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철학사 강의의 분량이나 라디오 방송 분량이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 강의가 훨씬 차분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일반적입니다.

 

https://itunes.apple.com/kr/podcast/gang-yuwon-ui-ladio-inmunhag/id576954501?mt=2&ign-mpt=uo%3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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