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쉬고 다시 시작한 첫 주에

<문학 고전 강의> 마지막 스타디를 하였습니다.

열 명이 모였고요.

 

방학 기간 중 그동안 공부한 고전을 한권씩 읽기로 했는데요.

각자 읽은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방학 전에 끝내지 못했던 <팡세> , <파우스트> , <모비 딕> 도 마저 공부하였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역사 고전 강의>를 공부합니다.

회원도 조금 늘어날 것 같고요.

우리 팀은 한국사, 세계사, 서양철학사에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와 <문학 고전 강의> 까지 모두 공부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말까지 약 14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역사 고전 강의> 가 끝나면 내년부터는 철학사를 다시 한번 공부하려고 합니다. 

 

다음주 진도입니다.

 

 

   1강 ~ 2강  : p 29 ~ 44

   강의 파일 : 20110211 ~ 20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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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공부하고, 막간에 잠시 틈을 내어 

강유원의  <문학 고전 강의>를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이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맥베스와 오셀로를 공부하였습니다. 

<문학 고전 강의>를 다 읽지 못했지만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는 터라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우리 스타디도 방학입니다. 

남은 팡세와 파우스트 그리고 모비딕은 8월 마지막 주에 한꺼번에 

공부하려고 합니다. 

 

방학 동안 과제를 정했습니다.

<문학 고전 강의>가 다루고 있는 고전들 중 

한 권씩만 골라서 완역본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타디 중에는 마음이 있어도 늘 시간에 쫓겨 제대로 읽지를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8월 마지막 주에 <문학 고전 강의> 마지막 스타디를 합니다.

그 때 각자 읽어온 것을 5분 ~ 10분 동안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9월부터는 <역사 고전 강의>를 시작합니다. 

기존 멤버에 새로운 멤버가 합류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은 한국사에 이어 세계사까지 공부하신 분들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그리고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역사 고전 강의> 는 약 12 ~ 16 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2011년도에 강유원 선생님이 강의하신 파일도 있으니 함께 들으며

우리의 세계사 지식을 조금 더 깊이있게 만들어 봅시다. ^^

 

오늘은 일곱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럼 한 달 동안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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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성서의 <욥기>를 공부하였습니다.

아홉 명이 참석하였고요.

진행은 고구마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보다 비신자가 많아서,

먼저 구약에 씌어진 유대인들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주간 많은 부담을 안고 준비하셨다는데요.

저희는 덕분에 누가 누구를 낳고...의 그 한없어 보이는 가계의 연쇄에

발목잡히지 않고 유대의 역사를 개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욥기>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매우 조심스러운 텍스트라고 합니다.

잘못 해석하면 이단에 빠질 수도 있고,

특히 비신자들은 납득하기 매우 곤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유원 선생님이 『문학 고전 강의』에서 굳이

이 난해한 <욥기>를 선택한 것은 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철학 혹은 역사 철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학 고전 강의』는 강의 녹취 파일이 없어서 (혹은 못 구해서) 매우 아쉽습니다.

책은 날 것 그대로의 강의에 비해 많이 순화되고 정제되었을 것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압축해 놓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텍스트화하기에 산만하거나 부담이 있는 내용들은 생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처럼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은 실리지 않는 내용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간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100강 정도 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욥기>에 대한 고구마님의 결론은 기독교의 정통 해석일 것입니다.

'한낱 인간이 신의 섭리 혹은 신의 뜻을 따져 묻지 말고 무조건 신을 찬양하고 복종하라, 그렇게 하면 두 배로 돌아갈 것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저로서는 이 결론이 뜬금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심오한 해석이 있었을 이 텍스트에 대해 지금 여기서 비신자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뜬금없을 것이기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글로 옮기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욥기>는 철학이 그렇듯 

해답을 제시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질문을 제기하는 텍스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욥기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교에 등장한 텍스트라고 합니다.

헬레니즘, 즉 고대 희랍의 정신은 이성적입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와 응보를 따져묻는 정신입니다.

사탄도 욥의 세 친구들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욥을 바라봅니다. 

욥 자신도 고난의 극한에서 야훼께 따져 묻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에 악이 만연한 이유까지 따져 묻습니다.

이유없이 고통 당하는 과부와 고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잘먹고 잘사는 악인들이 하느님이 만든 세상에 가득한 이유를 묻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고 공동체의 고난에 공감각하는 각성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훼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묻는 욥에게 야훼는 전능한 신의 위력을 늘어놓으며 윽박지릅니다.

욥은 야훼의 전능함을 인정하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인간의 머리로 따지려 했음을 뉘우칩니다.

이렇게 <욥기>는 해피앤딩이지만, <욥기>에서 야훼는 끝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악으로 가득한지, 욥이 왜 그렇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욥과는 달리 그 고통 끝에도 끝내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많은 것인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의 마지막은 대반전처럼 느껴집니다.

야훼는 욥이 아니라, 욥의 불경을 나무라고 욥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라고 충고한 세 친구들에게 오히려 벌을 내립니다.

세 친구들은 독실한 신자처럼 보이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야훼를 인과응보의 한계 안에서 바라보았다고 해도

욥 역시 똑같은 관점으로 신을 원망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신에게 논리를 요구한 것은 세 친구나 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는 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야훼가 말한 욥의 솔직함은 무엇일까요?

야훼가 진정 바란 것은 욥처럼 따져 묻는 것이었을까요?

고구마님도, 강유원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세 친구를 벌하고 오히려 옵에게 보상을 내린 야훼의 뜻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것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야훼에게는 지극히 불리한,

혹은 유대인에게는 지극히 불경한,

이 텍스트가 구약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무엇보다 많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주는 셰익스피어입니다.

<맥베스>와 <오델로>를 함께 보겠습니다.

 

제26강 ~ 31강 : p245 ~ 314

<2013 인문고전강의> 파일 중 맥베스와 오델로 총 다섯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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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16강부터 25강까지 총 열강이나 했는데요.

희랍 비극의 3대 시인의 작품을 하나씩 보았습니다. 

아홉명이 참석했습니다.

 

희랍 비극은 희랍 서사시 이후에 출현한 문예 양식입니다.

BC 5C 특히 아테나이의 황금기에 희랍 비극 역시 절정에 이릅니다.

서사시가 영웅의 명예를 주로 다루었다면,

희랍 비극은 인간의 운명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인과관계를 따져 물으며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해보려 합니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희랍의 정신이 그대로 비극에 담겨있습니다.

합리적 정신이야말로 희랍 비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랍 비극에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비극적 상황'이라고 부르는 이율배반입니다.

주인공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율배반의 처지에 사로잡힙니다.

아가멤논의 아들인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일 수도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거나 어머니의 아들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동시에 어머니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천륜을 어긴 패륜아가 됩니다.

 

희랍 서사시의 형식은 ' in medias res' 즉 사건의 한 가운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희랍 비극은 서사시보다 훨씬 더 직접적입니다. 별다른 도입부 없이 사건은 정점에서 곧바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훨씬 더 처절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습니다. 근친상간은 물론이고 삼촌이 조카를, 아들이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이 죽음은 복수를 부르고 복수는 또 복수를 낳습니다. 도대체 이 비극적 상황은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 걸까요? 

 

희랍 비극의 3대 작가들이 비극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이 결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의 문제는 신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아폴론 신이 정해놓았지만, 오이디푸스는 '손수'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신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결말은 뜬금없습니다. 격정의 분출 끝에 메데이아는 용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가버립니다. 이런 전개를 두고 deus ex machina가 사용되었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기계로부터 나온 신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작가의 비극이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는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주는 앞으로 돌아가서 구약성서의 <욥기> 입니다.

먼저 성서의 <욥기>를 직접 읽어 보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 성서 < 욥기> : 11강 ~ 15강

                          p 125 ~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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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함께 배웠습니다.

아쉽게도 완역본을 읽지는 못했지만,

강유원 선생님의 해석과 더불어

EBS <통찰>과 <플라톤 아카데미 강의> 등을 참고하여 

어릴 때 읽었던 오뒷세우스의 모험들을 조각조각 떠올려 가며 공부하였습니다.

 

 『오뒷세이아』라는 하나의 책을 두고

세 가지 강의에서 선생님들은 제 각각의 관점으로 이 여정을 풀이하여 주었습니다.

완역본을 스스로 읽기까지 우리 자신의 관점을 세울 수는 없지만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의 후일담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 ,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0년 여정을 다룬  『오뒷세이아』,

결국 트로이 목마라는 꾀를 내어 트로이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끈

오뒷세우스는 20년만에 고난 끝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타케로의 귀향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고향에 도착한 오뒷세우는

아들과의 만남, 부인 페넬로페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정신적 귀향에 성공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homophrosynè 즉 같은 마음을 귀향의 완결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끝이 없고, 귀향은 잠시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길 위에, 고난의 여정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이 '증오받는 자', '고통을 겪는 사람', '비탄에 빠진 사람'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인가 봅니다. 

오뒷세우스의 일생이 곧 인간 일반의 일생이라고 볼 수 있을테니까요. 

 

<통찰> 에서는  『오뒷세이아』를 인간 찬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오뒷세우스는 영생으로 유혹하는 칼륍소도, 동화같은 나라의 행복한 삶을 보증하는 나우시카도 마다하고 고난이 가득한 고향 이타케의 페넬로페를 찾아 돌아옵니다. 

오뒷세우스는 신도 신과 같은 영웅의 삶도 인간의 삶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라도 인간의 삶을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름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일리아스』의 영웅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비굴합니다.

하지만 이미 신의 시대도 영웅의 시대도 지나고 이제 인간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시대에 인간은 인간답게 고난을 겪고 참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고

열 한명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다음주는 희랍 비극을 공부합니다.

3대 희랍 비극 시인으로 알려진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한꺼번에 봅니다.

이들 세 시인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작품 속에서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제 16강  ~  제 25강  (p171~243)

 

 강유원 선생님 강의 파일로는

<2013 인문 고전 강의> 중 '오디푸스왕',

<라디오 인문학> 중 '오디푸스왕' 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왕'은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완역본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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