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비밀과 거짓말’

  

  이것은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할런 코벤의 작품 세계를 정의 내려 주는 말도 또 없을 듯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 ‘아들의 방(Hold Tight)'의 1장엔 바로 그러한 할런 코벤이 주조하는 작품 세계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그 세계에서 영위되는 일상이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언제 어느 때 허물어져 버릴지 모를 허약한 일상이며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히 그 일상이 외부의 공격에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노출되어 있더라도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으면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가오는 자가 나의 적인지 이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오는 자의 그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과연 예수의 말대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웃은 칸트적 의미의 ’사물‘이다. 그 사물은 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로 내 존재를 한계 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내게 포섭될 수 없는 내 인지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긴다. 즉 그 사물은 내게 일종의 상처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타인은 그런 존재다. 칸트의 사물이고 프로이드의 트라우마다. 사르트르에게는 내 실존을 위협하는 방해꾼이었다. 코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코벤에게 있어서 ’이웃‘ 또한 전적으로 포용할 수만은 없는 어떤 음험한 것으로 남는다.

 

   더구나 코벤에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로 돌변함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이러한 돌변 또한 그 내부에 불안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타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은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예측 불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의 진심을 위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타인의 비밀이 우리의 거짓말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과 ’위장‘은 타인의 속마음을 내 속마음처럼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하물며 자신이 낳고 키워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코벤에게 있어 이웃이 더욱 음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비밀을 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비밀을 더욱 알 수 없게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코벤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거짓말 즉 ’위장‘이라는 전략을 자주 쓰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내시가 살해한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체를 전혀 다른 존재로 위장하거나 그가 하지 않았던 비행의 흔적을 거짓으로 꾸며놓는 것이다. 이 내시의 위장은 내시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클럽 재규어‘(즉 내시가 절대적 외부적 존재로서의 이웃을 개인화한 상징이라면 클럽 재규어는 그것을 사회화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역시도 똑같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코벤은 작품에다 적극적으로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우리가 가진 이웃을 음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확실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의 전략은 사실 또 어떻게 보면 의심의 증거만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인식을 하고 생각을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라는 자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 타자들의 행위 때문에 나만의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다. 비밀만이 아니라 여기에 거짓말이 더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관계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놀랍게도 코벤 역시 정확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소설 자체에서 드러난다. 게임 이론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수인의 딜레마(prisoner s dilemma)를 만든 학자인 ’내쉬‘와 이 소설의 범죄자이자 가장 거짓말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자인 ’내시‘가 그 이름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에서...
 

 

 

 

 

  그렇게 코벤은 제안한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고. 그것이 어쩌면 이 불안으로 점철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 게임으로 바라볼 경우 게임의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권력 효과가 미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2장에서 티아와 마이크 부부는 아들의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깐다. 아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감행한다. 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불행을 불러온다. 이런 전개를 통하여 코벤은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였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그렇게 ‘지배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설에서 마이크는 아들 애덤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자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즉 티아와 마이크는 아들을 오로지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사물‘로 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코벤은 이러한 아들을 나와 동등한 그리고 대등한 참가자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게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 앞서도 말했듯 티아와 마이크가 궁극적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된 것은 지켜야 할 것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 남용을 정당화했다. 해서 가져온 것은 가족 전체가 극심한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 뿐이었다. 하마터면 자녀들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이로써 코벤은 지켜져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또한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즉 게임에는 각 참가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 말고 또 하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지려면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은 오로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보장받는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승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화목과 합의를 목적으로 했던 게임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참가자든 게임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그것은 자신이 승리할 경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을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도 나와 동등한 존재이며 똑같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규칙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 이것이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으로써의 ’관용‘의 중요성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나 마이크의 이웃인 ’로리안‘이나 내시를 추적하는 ’뮤즈‘의 에피소드가 그렇고 결국은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매리언‘의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즉, 할런 코벤의 이번 소설 ’아들의 방‘은 코벤이 독자에게 건네는 하나의 진지한 제안이다. 비밀과 거짓말로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제안 말이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는!  앞에서 보듯 그것은 하물며 전적인 애정을 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원제인 ‘Hold Tight’도 주제(주제에는 오히려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방’은 절대적으로 타자가 자리 잡은 공간 자체를 상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코벤이 제안하는 일종의 태도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 자체가 어쩐지 비관적 전망 끝에 나온 자포자기식의 체념적 진술로도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편으로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관적 시선을 던지는 소설이며 그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궤도 위의 롤러코스터처럼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체념이 짙게 깔린 소설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여기의 ‘Hold Tight’는 사실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Show Must Go On’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처럼 붙은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Hold Tight’는 꽤나 반어적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들었지만 주인공 티아와 마이크 부부가 아들의 비밀을 캐기 위해 아들의 컴퓨터에 해킹 시스템을 깔아놓는 것이 특히 그렇다. 여기서 보여준 부모의 사랑으로 위장된 집착 역시 ‘Hold Tight’ 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아들의 방’ 이라는 이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소리들 또한 소설의 후반까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 이어질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기 별개의 궤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코벤은 제목이든 문장이든 구성이든 자신이 이 소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한 번 코벤이 제안하는 이 진지한 게임에 한 번 참여해 보는 것은? 특히나 당신이 만일 솔로라면 이 게임을 끝냈을 때 지금 당신의 처지를 그지없이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솔로들의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경전이 될 수도 있다. 코벤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의 다른 하나는 분명 이러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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