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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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는 올 해 나를 세번 놀래켰다. 처음은 물론 기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날'과 '물의 잠 재의 꿈'이 나란히 출간된 일. 두 작품은 연속으로 읽어야 그 주제가 완전히 살아날 수 있기에 더욱 그랬고 두 번째는 '은하영웅전설'로 유명한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지금까지 내내 그저 이름만 알려지고 있었던 걸작, '일곱도시 이야기'가 예고없이 불현듯 출간되었던 일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로 유명한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 이전의 히트 시리즈인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역시나 예고도 없이 이렇게 소개된 일이다. 설마 아리마사의 가장 대표적 시리즈라 할 수 있는 '신주쿠 상어' 시리즈도 이제 겨우 한 편이 소개되었을 뿐인데 그 이전의 작품이 이렇게 국내에 발간될 수 있으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출간되는 데 있어 그 격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신주쿠 상어'가 90년대의 아리마사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아르바이트 탐정'시리즈는 그야말로 80년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시리즈이니까 말이다.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이렇게 모두 6권까지 발간되었다. 이 중 마지막에 있는 '돌아온 아르바이트 탐정'은 2004년에, 그러니까 다섯번째 작품으로 부터 수십년이 흐른 뒤에 아리마사가 그 시리즈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의 팬들을 위해 로버트태권V를 다시 상영했던 것 처럼 다시금 오랜만에 그 시리즈로 돌아가 쓴 작품으로 그 간만의 귀환이 바로 2005년, 위성방송 WOW에 의해 바로 드라마로 제작 방영(감독이 무려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막스의 산'의 최양일이다. 거기다 아버지 '사에키' 역엔 시이나 깃페이가 맡았다.) 될 만큼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일본 내에서 인기를 구가했던 작품이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그 시리즈 중 세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이키 료. 그는 고등학생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데 이 아버지가 그런데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현재 직업은 백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이름 없는 사립탐정인데 전력이 예사롭지 않다. 일단 료 자신이 소개하는 아버지의 전력은 이렇다. 

  무역상사 직원부터 시작해서, 오일 비즈니스 맨, 르포 라이터, 에이전트를 거쳐 결국에는 비밀 첩보원에 이르렀다.(p.11) 

  그렇다. 그는 예전에 007과도 같은 스파이였고 현재도 명색은 사립탐정이지만 국가가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일들을 맡아서 하고 있다. 류는 가끔 아르바이트 삼아 그런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류는 마치 배트맨을 돕는 '로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료도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만은 아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어릴 때 부터 스파이로서 주입식 영재교육이라도 받았는지 총기를 다루는 솜씨나 추적하고 잠입하며 적들과 대치 상황에서의 현장 운영 능력이나 그 밖의 모든 면에 있어서 전직이자 현직 스파이인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류도 이제는 고3. 아무리 평범하지 않는 고등학생이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슬슬 대입 수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아... 일상이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스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영영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하지만 그는 정작 한 번에 대학에 붙기를 바라는 '합격염원소원파'와 어차피 이번에는 안될 거 내년을 바라고 그냥 놀자는 '재수학원준비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는 그냥 막연한 걱정만 안고 있는 주변인으로 지낸다. 이런 류의 모습이 당당한 경찰 엘리트 관료이지만 경찰과 범죄자 집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혼자 '독고다이'로  움직였던 '신주쿠 상어'의 사에지마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보인다. 어쩌면 사에지마 캐릭터 자체가 바로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로 부터 형성되었을 지 모르겠다. 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료의 아버지 사이키 료스케가 마치 사에지마가 훗날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된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신주쿠 상어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주인공 사에지마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다는 재미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러다 류는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 낸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삼아 국가적 사무를 비밀리에 처리하고 있는 자신이니만큼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시마즈에게 그간의 정을 빌미로 그의 힘으로 뒷구멍으로 동경대에 입학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마즈라면 그게 전혀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기회를 엿보는데 마침 그 기회가 온다. 시마즈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미묘한 관계 때문에 섣불리 국가가 나서서 경호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 어디쯤에 있다는 가상의 국가 라일의 왕위 계승이 가장 유력시 되어 현재 암살 위험이 다분한 왕녀 '미오'의 비밀스러운 경호를 의뢰해 온 것이다. 류는 동경대 뒷구멍 입학을 위해 아버지를 부추겨 흔쾌히 수락한다. 물론 그 댓가는 시마즈에게 비밀로 하고... 

 

  드디어 왕녀 미오가 일본에 오고 류는 아이돌 저리가라는 미모에 첫사랑에 빠져든 소년 같은 심정을 느낀다. 하지만 현격한 신분 차이 그리고 동경대 입학을 위해 경호에 전념해야 하는 그로서는 그 마음을 내내 억누르지만 감정이란 늘 그렇듯이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이어서 어느새 도도한 감정의 물결은 류를 사랑의 파라다이스로 데려가버린다. 그 와중에도 독침, 총격, 폭탄 등 방법도 다양하게 헐리우드 액션 영화 저리가라는 무지막지한 암살 시도는 계속되고 미오는 점점 위기에 몰리게 된다.  

  공주와의 사랑,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기사, 스파이 그리고 바이크... 이렇게 소설에서 주욱 드러나는 내용과 소재들은 가만히 보면 마치 소년의 로망을 그대로 리스트화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소년의 로망을 극한까지 담은 소설이다. 어쩌면 신주쿠 상어가 경찰 오타쿠로서의 아리마사를 그대로 드러냈듯이 이 작품은 소년 시절의 아리마사가 바라마지 않았던 꿈을 그대로 담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게 꼭 아리마사만의 꿈일까?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 보았던 꿈이 아닐까?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잡게되면 끝까지 내리 읽게 되는 것이. 그것이 꼭 전개가 빨라서도, 스케일이 커서도 그리고 내내 쉴새 없이 액션 장면들이 쏟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년시절에 누구나 꿈꾸었을 그런 모습을 비록 대리만족이나마 실컷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 탐정의 세계는 신주쿠 상어의 세계와는 너무 대조적인지라 흥미를 끈다. 어쩌다 아리마사는 80년대의 아르바이트 탐정이 보여주는 소년의 낭만 가득한 세계에서 90년대의 신주쿠 상어가 보여주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비정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것일까? 그의 작품을 관심있게 보아왔었다면 당연히 이러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놀라운 속도로 경제적 성장과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의 80년대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으나 그 거품이 서서히 꺼져들기 시작하던 90년대는 지옥의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한 시대에 감겨드는 대기의 변화가 작품 세계마저도 극단적인 변화를 낳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리마사가 늘 그랬듯이 오락적인 면에선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과장된 설정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류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에지마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아버지도 꽤 흥미롭다. 킬러들과의 대결도 흥미진진하고 역시나 총기 매니아 아리마사 답게 리얼한 총기들의 묘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소년 시절의 꿈을 그대로 형상화해 놓은 듯한 연속되는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피어가는 류와 미오의 사랑 얘기 역시 머리속으로는 뻔한 결말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계속 읽게 만든다.(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 드라마일 수록 우리의 관심사가 오로지 언제 소망이 충족되는 것인지, 그 시점의 도래에만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설정이 아무리 진부하더라도 소망의 대리만족 욕망이 너무나 강렬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진부하면 진부할수록 더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익숙한 설정은 그에 대해 생각할 필요없이 오로지 소망 충족 과정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어쩌면 드라마 뿐만 아니라 소설의 속도 역시 그것과 관계있을지 모른다.)  다시 한 번 분명코 말하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그냥 끝까지 달려가게 된다. 그러니 가급적 시간적 여유가 좀 있으실 때 읽으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아무튼 아리마사다운 작품이다. 팬이시라면 필독!  

 뱀다리 - 그런데 료는 과연 소원대로 동경대의 뒷구멍으로 갈 수 있었을까?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서 우리는 그 결말을 알 수 있다. 동경대는 커녕 오히려 유급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역시나 일상은 만만치 않다. 그것이 아무리 한 나라의 비밀경찰마저 갖고 노는 뛰어난 스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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