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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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죽는다. 그에겐 미모에다 능력까지 겸비한 아내가 있다. 남자의 사인은 비소에 의한 중독사. 한 마디로 독살. 그는 그 날 자신의 사촌과 저녁을 먹었고 밤에는 지금은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전날 먹은 비소로 인해 죽었다. 수사가 벌여졌지만 그가 그 날 어디서 어떻게 비소를 먹었는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비소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녀가 남편에게 비소를 먹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녀가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기에 그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중 유일하게 비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검찰은 그녀를 남편 살인죄로 기소한다. 그렇게 열 두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그녀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이 열리게 되고 바로 그 법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판사석 위에는 선홍색 장미가 놓여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핏방울 튄 듯이 보였다.(p.7)

 이 소설의 주제마저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문장과 더불어... 

 이것이 1930년에 도로시 세이어스가 발표한 이 소설 '맹독(STRONG POISON)'을 이끌어가는 주가 되는 사건의 개요이다. 그러니까 세이어스의 대표적 캐릭터,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 인 것이다. 과연 피해자는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나 말이다. 안 그래도 미스터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그토록 수사를 집중했지만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인 만큼 그 사실 만으로도 윔지의 가슴은 벌렁거릴 판이지만 하지만 다른 쪽에서 그의 가슴을 더더욱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살인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 있는 여인, 헤리엇 베인이다. '사랑이란 그 찾아옴이 예측불가능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한 이도 있다지만 정말 사랑은 그러한 것인지? 피터 윔지는 전혀 예기치 않게도 법정에 선 그녀를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묘약은 장님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는 말 처럼 그렇게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버린 윔지는 덮어놓고 그녀의 결백을 믿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명탐정적 재능을 발휘하여 오로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입증하려 한다. 호사가적 취미의 미스터리 풀이가 이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이 된 것이다.  

 소설 '맹독'은 마트에서 흔히 보는 '1+1'에 또 하나를 더 '+1'한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를 가지고 세가지 측면에서 즐길 수 있다. 한 파인트에 세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맛을 가지는 아이스크림을 섞어 담아 떠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소설 '맹독'을 즐기는 코스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A 코스... 

  그 첫째는 순수한 미스터리로 즐기는 코스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판사의 말을 통하여 사건의 전모를 세세하게 밝혀가며 정리해 준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밝혀진 피해자의 그 날 하루 경로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그가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피터 윔지에게 이것은 '나인 테일러스' 못지 않는 난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것을 다음 재판이 열리게 될 때까지 남겨진 시간인 '한 달'안에 풀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존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일생동안 유일하게 느꼈던 운명적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의도 결의도 그 어느 윔지의 시리즈 보다 불타오르고 굳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윔지를 몰아붙일 정도로 난제이지만 세이어스는 G.K 체스터튼이 주도한 추리 클럽의 창립 맴버 답게 아무리 난제라고 하여도 아무런 반칙 없이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이끌어 나간다. 단서는 빈틈없이 주어지며 그 모든 건 논리적으로 잘 따지기만 하면 하나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절박한 윔지를 도와 난제를 해결하는 순수 미스터리적 즐거움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B 코스... 

  미스터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하나의 로맨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운명적 사랑을 느낀 한 남자의 절절한 애정 고백기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귀족(아시다시피 그는 공작 가문 출신이다.)적 매너를 유지하며 매사에 강한 자존심과 쿨한 면모를 보여주던 윔지가 이 소설에서 만큼은 쉽사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해리엇 베인 때문에 전전긍긍해 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오로지 애정만을 애걸복걸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참으로 귀엽지 않을 수 없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이든 이미 한 번 결혼한 몸에다 살인 누명까지 쓰고 있는 그래서 열악하고 편견 마저 얻기 쉬운 사회적 신분에 처해 있는 그녀의 처지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투우장의 숫소 처럼 사랑만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은 윔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한 남자의 순정이 담긴 로맨스로 즐길 수도 있다. 

 

 C 코스... 

  사실은 이 코스가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하려는 핵심이 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런 면에서 이 작가를 그저 미스터리 작가로만 묶어두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느끼게 만든다. 때로 어떤 면에서는 순문학 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바로 이 '맹독'의 C 코스가 그런 경우이다. 이 소설은 2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잉여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잉여 여성'이란 영국 사회에서 1차 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남성의 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소설에서도 이 '잉여 여성'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다. 

 강철금고 안에 있는 개인 기록을 보았다면 이 여자들이 모두 세간에서는 냉혹하게도 '잉여'라고 표현하는 계층의 여성들임을 알았으리라 (P.81) 

  당시만 해도 영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길이란 오로지 결혼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이렇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잉여 여성이란 그 뜻에 내재된 '쓸모없는 여성'이란 의미 그대로 경멸적 시선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도로시 세이어스의 '맹독'은 그렇게 경멸당하고 천대받았던 여성들을 위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남성 보다 더 유용한 존재들이다.'라고 외치면서 떨치고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맹독'은 페미니즘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C 코스는 바로 이러한 페미니즘적 독해이다. 이렇게 읽으면 무엇보다 판사의 기다란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첫 부분이 아주 흥미롭게 된다. 

 

  왜 도로시 세이어스는 아무리 사건 정황을 정리해준다고 하지만 오로지 혼자 떠들기만 하는 기나긴 판사의 독백으로 시작한 것일까? 여기서 앞서 인용했던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이유를 짐작하는데 정말 중요해진다. 판사석 위에 놓여진 선홍색 장미. 판사의 검은색 법복과 선명히 대비되는 붉은 핏방울. 바로 이 이미지 자체가 판사의 검은 법복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남성 사회로 부터 경멸당하고 상처를 입은 붉은 핏방울의 여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 기나긴 판사의 독백은 사실 여성의 틈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그 자체로 단일하고도 굳건한 독재적 남성 사회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성의 법정 안에서 유일한 여성인 해리엇 베인은 살인죄라는 낙인을 받아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이어스는 소설의 초반 여성 앞에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남성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차례로 허물어 감으로써 오히려 남성 보다 여성이 더 유용하며 그렇게 대등한 존재임을 결국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언제나 윔지가 아니라 여성들인 것이다.(스포일러상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라 순문학적 작가로서의 세이어스가 빛을 발하는 곳은 유령과 대화하는 '강신회' 장면이다. 세이어스는 그 강신회 장면을 초반의 혼자 떠드는 판사 장면과 일부러 극명하게 대비되도록 연출한다. 왜냐하면 강신회 장면이 결정적으로 판사가 단죄한 유죄를 정면으로 반박가능한 증거를 가지도록 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강신회 장면은 오로지 여성으로 이루어지며 윔지가 시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여성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다 말을 하는 사람의 수도 판사의 하나에서 강신회의 다수로 차이나게 하여 홀로 독재적인 남성성과 대화 가능한 다수성의 여성성을 대조시킨다. 세이어스가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판사의 독백 장면과 강신회 장면을 연출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여성들이 남성들 만큼 유용하며 대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판사는 진실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지만 강신회는 그 진실을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보아도 진실을 찾고 드러내는 쪽은 언제나 여성들이다. 이렇게 '맹독'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적 소설이며 이렇게 C 코스의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면 더더욱 세이어스가 소설 자체에 공들인 세부와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 작품으로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다면 독자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로시 세이어스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세가지 코스에서 당신은 어떤 코스를 더 사랑하게 될까 지금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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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윔지 시리즈 앞권들도 읽어보셨나요? 좋은가요?
제가 '증인이 너무 많다'를 계속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거든요.
오호라,,, 윔지 경이 헤리엇에게 애걸복걸한다는 부분만으로도 홀딱 넘어가겠는걸요.
흠, 저는 B 코스 도전하게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시 다아시 경과 착각했어요. 시험 일정 끝나면, 읽어봐야겠어요. 아니다,
중간 중간 머리를 쉬어 주어야 공부도 되니까,, 변명을 중얼중얼중얼...... 헤헤.

ICE-9 2011-10-19 01:12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께서 댓글을! 일부러 이렇게 달아주셨는데 이제야 확인하게 되다니 흑 ㅠ ㅠ 앞으론 서재에 더더욱 자주 들어와야겠어요.
마녀고양이님께서 B코스를 좋아하신다면 '증인이 너무 많다'도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윔지의 여동생 메리와 윔지의 절친 파커 경감의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을 보실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결말은 '맹독'에서 이루어지죠. 시험 준비중이시군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