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김선희 지음, 송진욱 그림 / 풀빛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와 광고...

 

  시각이 특히나 패권적 감각이 된 현대에 와서 이 두 매체는 점점 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대중적 호응을 받았던 영화와 자본주의의 총아라 불리는 광고인지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매체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광고가 단지 보여지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저변에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그들의 욕망을 의도하는 쪽으로 충동질하고 또한 원하는 쪽으로 생각들을 통제한다고 말이다. 보통 이러한 시각들을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시각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는 셈이다. 영화와 광고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영화와 광고를 비롯하여 문화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다. 정확히는 스튜어트 홀에 의해 주도된 '문화 연구'가 활발하게 됨으로써였다. '문화 연구'는 문화가 있는 그대로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 생산에 있어서 부터 그 이면에 만든자의 의도와 목적이 개입되는 수단적 매커니즘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란 어디까지나 특정한 의도에 따라 특정한 효과를 노려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비관적으로 나아가면 문화란 통제된 대중을 생산하여 특정 체제의 사회가 지속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는 것이다. 특히 존 버거의 경우 'WAYS OF SEEING'을 통해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광고 사진에서 조차 에어브러쉬 기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충동질하고 특정한 생각들을 옹호하게끔 만드는 메세지가 감춰져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존 버거의 고발은 컬트 감독 존 카펜터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 역시 영화 'THEY LIVE'에서 존 버거의 논의 그대로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미디어에 의도적으로 숨겨진 메세지가 있음을 SF적(그러니까 특별한 선글래스를 쓰면 감춰진 메세지가 보인다는 식으로)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하지만 문화연구의 시각들이 비단 비관적인 전망만을 생산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논의를 통해 더욱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려 했던 것은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되도록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함으로써 문화를 생산하는 자들의 논리에 어리석게 이용되지 않게끔 하려 함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언어로 말하면 문화 생산의 저의에 깔린 '꼼수'를 밝혀 그 문화적 전략에 '쫄지 않고'  제대로 가지고 놀며 판단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문화연구'는 대중들에게 카펜터 영화에 나오는 그런 선글래스를 주려 한 것이다.(카펜터의 선글래스는 일종의 후설이 말하는 모든 판단 중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의 리셋(RESET)를 의미하는 '에포크'를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어느정도 진실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진실에의 자각은 단절로 부터 오니까 말이다.)

 

  과연 문화가 그렇다는 게 사실일까?

  너무 치우친 생각이 아닐까?

  혹시라도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카펜터의 그 선글래스로 바로 이 책 김선희 작가의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을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영화와 광고에 대해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책이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이 이전에도 비슷한 시각의 책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감히 추천하는 까닭은 첫째 굉장히 쉽다는 점이다. 어떤 저작들은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좋은 얘기들을 하는데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김선희의 책은 그러한 거리감이 없다. 그는 이론틀 마저도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으며 그나마 논의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언급으로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을 때 들 수 있는 선입견, 그러니까 너무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둘째는 동시대성이다. 여기서 동시대성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얼마전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광고가 주 논의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문화연구'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시간'이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 나오면 거기서 논의되는 영화나 광고들이 하도 오래되어 이미 잊혀지거나 해서 사람들에게 얼른 다가오지 못하여 이해의 거리를 더욱 넓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 연구' 또한 시의적절하게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는데 김선희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감상했던 것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 하다.

 

 셋째는 선명한 주제와 정연한 논의 구조이다. 책이 쉽고 따끈따끈한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 쉽게 가질 수 있는 약점은 너무 쉬운 것과 시의적절성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논의적 구조를 망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희의 이 책은 그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 그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방법론을 밝혀 놓는다. 그녀는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푸네스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두더지의 방법이다.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푸네스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처럼 영화와 광고를 다루는 데 있어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놓치지 않고 말하기 위해 그 푸네스의 방법을 쓸 것이라 한다. 그리고 두더지의 방법은 두더지란 원래 앞이 보이지 않아 정해진 길이 아니라 무작정 자신만의 길을 파헤쳐 가는데 그처럼 자신도 위로 부터 주어진 의미와 이론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길로 해석을 밀고나가 그 자체로서 저항의 길을 만들어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즉 이것은 대상과 해석에 따른 각각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있어서는 푸네스를 해석에 있어서는 두더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그 둘이 모여 이루는 것은 결국 지배적 주류가 보도록 허용하는 것에 맞서 그것을 전복하고 그와 독립되고 자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선명한 주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책 전체에 걸쳐 이러한 주제의식이 과연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선명한 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다. 이 책은 크게 네 개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발전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듯 하다. 그러니까 첫번째, '복제되는 현대 신화들'에서는 헤겔의 첫번째 단계인 '개인'에 대응해 영화나 광고를 통해 특히나 강요 혹은 이식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이 횡단되고 있는 '개인'을 그리고 두번째 '문화거울로 바라보기'에서는 헤겔의 두번째 단계인 '가족'에 그대로 대응해 현대의 신자유주의가 문화적 매체를 통해 가족의 위상을 어떻게 의도에 따라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탐색한다. 그리고 세번째 '공존을 위한 숙제들'에서는 그 논의를 이제 '사회적' 차원으로 넓히고 마지막 네번째 '지구 단위로 생각하기'에서는 근대와 생태환경 자체를 그 기반으로 삼는다. 이렇게 김선희의 논의는 헤겔의 정신의 발전 단계를 따라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시대와 지구 전체로 포커스를 넓혀가며 그 각각에서 문화 매체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앞에서도 말했듯 쉽게 독자들이 다가오게 하면서도 천명했던 푸네스의 방법을 잊지 않으며 각 단락 마다 선명한 주제 의식 마저 포기하지 않기에 개인과 시대, 지구 전체로 시야로 넓혀가면서도 자신만의 저항의 길마저 내내 이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논리를 자기의 말로 무장할 수 있게 되며 보다 더 커다란 시각 위에서 주입되거나 유포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마저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이렇게 하면서도 이런 내 말이 더 어렵게 여겨질 만큼 끝까지 쉽고 편하게 독자들을 데려간다는 점이다.

 

  알고 있듯이 현실은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말은 현실은 그저 순수한 현실이 아니라 사람을 언제든 홀리려고 드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전략과 전술이 횡행하는 중첩된 장(FIELD)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쉽게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란 말도 있듯이 어느샌가 그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의 모든 신체와 감각 기관마저 그 얼기설기 엮어진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경마장의 말처럼 한쪽만 보도록 색안경이 자기도 모르게 씌워졌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조정된 신경조직으로 진실을 감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내 감각이 착란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가 온전한 주체가 되도록 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거울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그 거울에 비친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보고 온전한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당신 역시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그 진실한 위치를 알고싶어졌다면 이 책이 그 거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선글래스를 쓰는 것 만큼이나 손쉽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로 기꺼이 추천드린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2-2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 역시 제가 관심있던 주제네요.
항상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TV를 보면서 광고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말이죠.
최근 광고의 대부분이 통신 관련이란거 아시죠?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맞는 모양인데,
대체 최근 한 집당 한달 통신 지출 비용을 보면 확실히 수긍이 가더군요. ^^

ICE-9 2011-12-25 20:55   좋아요 0 | URL
확실히 광고의 대부분을 슬쩍 살펴만봐도 통신가 광고가 대부분이더군요. 마케팅에 그리 많은 비용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통신사가 과한 비용을 소비자에게 부담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특히나 우리나라의 기형적 과점구조가 소비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떠넘기는 걸 가능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런 구조와 행태를 잘 인지하지 못하죠. 그게 아마도 광고와 영화, 언론을 비롯한 미디어들이 거기에 대해 보지 못하도록 프레임을 사람들에게 씌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진정한 권력은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게 아니라 존재하는데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만드는데 있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고 못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지 새삼 의심하게 만들더군요. 그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맥거핀 2011-12-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보니 책에 흥미가 생기네요. 쉽고 시의적절한 책이라는 데에 크게 위안을 가지고, 보관함에 소중하게 넣어둡니다.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ICE-9 2011-12-25 20:5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또 들려주시고 이렇게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피친구 2012-01-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희씨가 어떤 책을 쓰셨는지 궁금해서 들어왔는데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잘 써주셔서 작가의 책을 구입하는데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어요. 솔직하고 대단히 성의있는 글이라 저도모르게 댓글을 남깁니다.

ICE-9 2012-01-20 19:12   좋아요 0 | URL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좋은 말씀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선희씨의 이번 책은 저 역시 꽤 만족했던 책이었는데 소피친구님도 마음에 드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혹시 또 보실지 모르겠지만, 설 연휴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압니다.

 저는 지금 당신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로 분한 장국영이 장만옥을 붙잡아 억지로 '1분'이란 시간을 함께 했던 것처럼 저 역시 활자로 당신의 시간을 이렇게 붙들어 매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뭔가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도록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재주가 비천한지라 그만한 자신은 없네요.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가급적 많이 붙잡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책 이야기입니다.

 '대성당'이라는 단편집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신이 내 과거의 시간에 참여하고 있듯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그런 예술이란 것들 모두가 그렇게 타인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란 생각이 행여 드시지는 않는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대성당'을 읽고 유독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는 모두 열 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당신이 레이먼드 카버의 개인사를 아신다면 아마 당신 역시도 저와 똑같은 느낌이 드시지 않을까 싶지만, 그 모두가 쉰 해에 걸친 카버 인생의 어느 한 단면들을 그대로 도려내어 담아낸 것만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쉼 없이 흐르는 삶의 시간에서 카메라 렌즈로 어느 하나를 건져내어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도록 앨범에 붙여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딱 그러네요.

  '대성당'이란 제목의 카버 개인의 사진 앨범을 뒤적이고 있는 기분. 사진은 그렇지요. 특히나 앨범의 사진은 기묘한 인력이 있지요. 흘러가는 시간에 렌즈를 갖다 대어 무턱대고 잘라 공간화 시켜 버려서 그런가, 텅 빈 우주에 문득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주위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요. 그것이 '충실한 복원'이 주는 신뢰감 때문인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문어가 여덟 개의 팔로 조여 오듯 시선을 붙드는 건 사실이지요. 그런데 무엇에 대한 복원이기에 그만한 마력이 있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래서 다시는 도래하지 못할 그 '시간'의 복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즉 우리가 그 사진을 보면서 거기 재현된 '진짜-시간(real-time)'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마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대성당'이 사진 앨범과 같다고 한 건 정말 이 단편집이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은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카버가 있었던 그리고 느꼈던 그 삶의 '진짜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단언할 수 있어요. 이 모든 단편에 실린 그 어떤 경험이든 감각이든 그것이 실제 그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무엇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을 읽고 나서였죠. 그 단편엔, '삶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있다. 하지만 삶은 또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 역시 준비하고 있다(이건 단편을 읽고 든 저의 느낌을 두 개의 문장으로 표현해 본 것입니다만...)'라는 카버의 마음을 담겨 있습니다. 이 단편에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간호를 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후회를 합니다. 혹시 자기가 없는 동안에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될까 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던 자신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까 봐. 그래서 그는 집에 있는 내내 병원에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불안해하며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도 오만가지나 되는 불행한 예상으로 받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 아버지의 얘기를 읽으면서 그건 절대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실제 카버의 경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카버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저 역시 그와 똑같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아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은 정말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이 더구나 비단 이 단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카버의 실제 체험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생각은 더 커져 갔습니다. '대성당'의 인물들은 대부분 알콜 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카버 자신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그 중독을 치료하기위해 1년 사이에 네 번이나 입원한 전력도 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이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란 단편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오기도 하지요. 또한 '대성당'의 관계들은, 주로 부부 관계를 다룹니다만, 모두 파탄 나 있거나 그 직전이거나 한없는 권태로움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저 몸만 '함께'이거나 '상실'을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카버의 부부 생활 역시 그랬죠. 오래도록 별거를 반복했고 결국 죽기 6년 전, 그의 멘토였던 존 가드너가 사망했을 때 오래도록 그의 아픔이었고 망집이었던 부인과도 역시 이혼합니다. 그 6년 전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상실을 안긴 해였습니다. '대성당'은 그 바로 다음 해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당'은 카버가 가장 힘겨운 시간에 쓰여 진 것입니다. 고통 속에 써내려 간 글쓰기 이며 앨범으로 치자면 가장 쓰라린 시간속의 자신의 모습을 모은 앨범인 것입니다. 기형도가 언젠가의 시에서 '온통 검은 페이지뿐이니 뉘라서 보아줄 것인가'라고 말했던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카버가 '대성당'의 열 두 편의 단편을 쓰며 바로 그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리얼 타임'으로 재현되는 '대성당'은 그 때 카버가 겪었던 상실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려던 노력하던 시간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아픔은 작품 도처에서 느껴집니다. 처음 '깃털들'에서부터 카버는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진실한 만남의 순간을 씁쓸히 되새기죠. 상실의 감각은 거기로부터 시작되어 '체프의 집'에서는 삶을 새로이 시작할 가능성을 가져다 준 공간의 상실로 이어지고 더 이상 가지고 살기 보다는 차라리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체념하게 되는 '보존'으로 까지 나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상실'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면 그 뒤의 얘기는 그러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카버 자신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칸막이 객실'에서 상실된 것의 집착이 다만 자신의 헛된 망집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별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상실에 대한 위안의 가능성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 뒤 '비타민'과 '대성당' 까지는 모두 그 위안과 치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카버가 보는 인생은 언제 프레온이 바닥날지 모르는 냉장고만큼(보존), 언제 차 앞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공작만큼(깃털들), 문득 합석한 손님에게서 느닷없이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는 만큼(비타민), 우연히 굴뚝 청소하러 온 여인에게 '두 다리를 달달 떨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반할만큼(내가 전화를 거는 곳)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그 끔찍한 스스로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상실을 안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생일케잌을 준비했었는데 생일날 아이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별 것은 아니지만...'의 주인공 엄마처럼. 한 마디로 예방 접종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겪는 것뿐입니다. '칸막이 객실'이나 '비타민' 혹은 '열'에서 보듯 그 상실을 상실 자체로 보듬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메우기 위하여 떠나가 버린 상대에게 매달리거나 혹은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처럼 알코올과 같은 다른 것에 의탁하여 단지 그 아픔만 넘기려 한다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더 큰 비극뿐입니다. 카버는 그 지난한 시간들을 글쓰기로 견디면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조심'까지가 거짓 치유의 시간들이었다면 그 깨달음이 비로소 피어나는 곳은 그 다음 단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서부터입니다. 거기서야 카버는 진정한 치유는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타인'으로 부터만 올 수 있다고 깨닫게 되죠. 그리고 그 진정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상실을 상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자세임도 역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열'에서 '굴레'는 바로 그러한 '변화의 받아들임'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카버는 거기서 분명 깨닫습니다. 상실은 그저 변화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며 인생에 그 어떤 굴레가 있던 그것은 이제 다르게 한 번 걸어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카버는 진정한 타인과 만나게 될 때까지 그 어떤 일시적 망각을 가져다주는 것에 기대지 않고 묵묵히 '굴레'의 베티나 '나'처럼 스스로 견뎌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성당'에 이르러 '타인과의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 것인가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 작년에 영원히 이별해 버린 자신의 멘토인 '존 가드너'에게 바치는 소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분명 거기서 주인공에게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지 경험하게 해주는 '맹인'의 존재는 '존 가드너'를 강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가 그 단편에서 그토록 인상적으로 마치 '접신'과도 같은 '타인과의 하나 됨'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존 가드너와의 체험이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아마도 카버는 스승을 추억하다 그와의 행복했던 교감을 떠올렸고 그 교감의 순간에 자신이 맛보았던 것이야 말로 자신이 정말 추구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그렇게 '고통 속에 써내려간 글쓰기'는 결국 낙관적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또한 상실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 역시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로부터도 올 수 있음을 알려 아무리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인생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자격이 있음도 깨닫게 해 주죠. 단편집의 제목이 그리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이 '대성당'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성당' 자체가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카버는 모든 고통의 여정을 끝낸 후에 대성당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맹인'을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이보게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P.348)

 

그렇습니다. 평생을 바쳐도 그 완성을 볼 수 없는 대성당처럼 인생은 불완전합니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실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침묵에서 시작해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상실에서 태어났고 상실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하니 카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상해서 말하자면, '인생이 어차피 이토록 불완전한 것이라면 상실을 스스로 변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래도 그 아픔이 너무도 커서 견딜 수 없다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라.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말고 행여 그 손이 거부당할까 두려워하지도 말고 내밀어라. 내미는 그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당신의 계산과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예측불가능성으로 풍부하다. 그러니 어느 순간 어느 모퉁이에서 문득 당신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밀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조차 아예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제가 많이 당신의 시간을 뺏었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대성당'이 무엇보다 카버 자신의 진실한 기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말 커다란 상실을 겪었고 '대성당'은 그 아픔의 와중에 쓰여 진 기록이 틀림없으니까요. 당신도 그의 일대기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작품 곳곳에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고통과 성찰의 편린들이 묻어나고 있음을 분명 느끼실 거예요. 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집이 무엇보다 진실 된 기록이라면 상실이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또한 그의 인생과 다르지 않으니 언젠가 도래할 상실의 순간을 보다 잘 이겨가기 위해서라도 한 번 시간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이렇게 부득이 당신의 시간마저 빼앗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들인 시간만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리뷰란 것도 제가 당신에게 내미는 손이 아닐까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타인에게 내미는 손이란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간으로 참여하도록 건네는 손짓일 테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듯 리뷰를 읽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면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것이겠죠. 이건 카버가 '대성당'에서 묘사했던 '타인과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맹인은 주인공의 손에다 자신의 손을 그대로 겹치면서 주인공이 본 대성당의 모습을 눈을 감고 그리도록 하죠. 그렇게 감은 눈을 통해 동일한 존재가 되어 그 겹쳐진 손을 통해 대성당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하나로 공유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에게 가져다 준 느낌은 이러합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P.353)

 

 

  뭐, 저의 리뷰가 그런 정도의 느낌까지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만 이 리뷰들로 가득한 광장 역시도 대성당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그들이 쌓아올린 수많은 돌과 나무로 이루어지듯 그렇게 수없이 내미는 손과 맞잡는 손으로 가득한 '대성당'같은 곳이 아닐까요? 돌과 돌이 서로를 지탱하고 나무와 나무가 서로를 받쳐주듯, 전세대가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후세대가 대신 이루듯 그렇게 여기도 애초부터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생들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보완해주고 세계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 지칠 때면 자주 이곳을 떠올리고 또 지금처럼 누군가 맞잡아 줄 손을 기대하며 이렇게 또 한 부분의 나를 담아 내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당신은 정말 저의 손을 아주 굳세게 잡아주신 셈이로군요. 그렇게 맞잡아 주신 손에, 시간을 들여 함께 해준 당신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함께 있어 주신 그 시간이 얼마이든 그것으로 정말 행복하다고 진정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하루키여, 하루키여...

 

 

  사랑이 언제든 상처가 되었더라도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좋았던 기억들이다.

 

  내게도 그랬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 항상 먼저 그리게 되는 것은

그 어느 여름 새벽 몰래 단 둘이 빠져나와 어떤 둔덕에 앉아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모습이다. 바로 그 때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던 그런 우리들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으로 떠오른다. 물론 그 때의 내가 어찌 뒷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하련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만 떠오른다. 정면으로 다가드는 햇살로 인해 눈부신 실루엣으로 차츰 변해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천천히 `ZOOM-IN`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그 때의 우리 모습을 내가 그런 식으로 가장 보고 싶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정겨웠던 장면을 가장 정겹게 간직하고 싶어서. 하루키를 내게 알려준 건 그녀였다. 그 여름에 나는 그녀가 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간 날 때 마다 미류나무 그늘 아래에 기대어 읽었다. 매미가 울고 길마다 피어오르는 열기의 아지랑이로 가득해 사람을 마치 문득 해변에 밀려온 표류물을 만나듯이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간간히 이마를 닦아주는 바람이 있어 좋았다. 처음으로 만나는 하루키의 문장이 그와 같았다. 당시의 문학은 무거운 것이 잔뜩 이라 주제도 문장도 범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주제도 문장도 바람처럼 가벼웠다. 나는 그저 거기에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들을 때처럼 해석하지도 말고 평가하지도 말고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온 몸과 마음을 처마에 매어달린 풍경으로 만들어 공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하루키를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작가는 그 사람과 이별하면 같이 떠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나의 하루키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시작해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개정판)`에서 끝났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연애는 풀잎의 이슬로 영그는 새벽의 우연한 입맞춤처럼 시작했다가 낙엽들만이 열심히 구보를 하는 황량한 가을의 연병장에서 끝이 났다. 그렇게 하루키를 보냈다. 철망처럼 촘촘한 나뭇가지들 너머로 저녁놀에 지워져가는 철새들의 행렬에 실어... 저 철새들이 어디에 머무를지 내가 모르듯 그렇게 하루키도 모르게 될 터였다.

 

 

  언젠가 하루키 꿈을 꾼 적이 있다. 아직은 새끼손가락만한 풋고추처럼 사랑이 풋풋할 때. 꿈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 그렇듯 유명인을 만나도 놀랍지도 않았고 처음 만나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옆집 아저씨가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 신고 찾아온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가 내게 캐치볼을 하자고 했고 난 이게 그의 소설에 나왔던 두 마리 원숭이 장면 그대로란 걸 인식했지만 다른 말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공간은 겨울날 저녁 8시처럼 이미 어둠으로 흐릿해져 있었는데도 하루키의 얼굴과 손에 든 공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마치 머리만 있는 유령처럼 웃고 있었고 손은 영화 `아담스 패밀리`에 나왔던 손처럼 제멋대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공이 날아왔다. 나는 받았고 그것을 다시 그에게로 던졌다. 머리와 손만 있는 것 같은 하루키가 그것을 받았고 다시 던지면서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이 뭔지 알아?" 굳이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아 말하지 않고 공만 받았다. 다시 그에게로 공을 던졌고 그는 "이게 커뮤니케이션이야."하며 공을 되받아 던졌다. 어둠속에 저 홀로 덩그마니 밝은 뜬 공을 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캄캄한 터널 속에서 거세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2. 당신과의 커뮤니케이션 -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천체로의 여행

 

 

 

  단 한 번 꿈에 나타났던 하루키가 왜 유독 `커뮤니케이션`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생각해보면 하루키와 나는 그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는 연애와 더불어 내게 던져진 공이었고 결별과 더불어 던져버린 공이었다. 그는 내게 자폐 속에서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세계의 비전을 던진 공으로 보여주었지만 단 한 명이 빠져나갔을 뿐인데도 속절없이 무너지고야 마는 내 세계의 허약함을 보고는 다시 던져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잊어야 했고 그에 결부된 하루키 마저 잊어야 했다. 원래 존재를 망각함은 그 잔여물까지 포함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파묻어도 기억이란 게 있는 이상 종종 불현듯 찾아든 유령처럼 소환되곤 하는 법이어서, 우린 그것을 미련이라 부른다지?, 그 후로도 오래도록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루키는 내게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래도록. 온 몸 여기저기에 껌처럼 달라붙은 미련을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렇게 늦가을 연병장에서의 흐느낌마저 파스텔 톤으로 덧칠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때라야 비로소 옛 무덤에서 유물을 발굴하듯 다시금 하루키를 손에 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하루키는 내게 초등학교 동창생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잡문집`이 나왔다. 산문 또한 오랜만인데 책으로 낼 것을 의식하지 않고 이곳저곳에 발표한 여러 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된 지층 같은 느낌의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게 좋다. 처음부터 가벼움으로 만났던 작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자신도 조금은 부담을 던 상태에서 썼는지 연말 바쁜 일정에 시달린 탓에 온 몸이 께느른한 가운데 있었는데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마치 강아지가 제발로 찾아와 뺨을 핥아주는 양 위안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하루키에겐 세 개의 자아가 있다고. 글을 쓰는 자아, 음악을 듣는 자아 그리고 번역을 하는 자아. 하루키란 존재는 그 세 개의 항성을 중심으로 도는 복잡한 천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의 작품들은 내게 여지없이 자폐의 산물로만 보였다. 그의 글 쓰는 행위 자체가 프루스트만큼이나 자폐적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딘가 심해를 천천히 헤엄쳐나가는 거대 오징어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는 압도적으로 홀로이고 세계는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양자택일의 대상이었다. 타인을 비롯한 세계를 대하는 그의 방법론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과`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일단 자기의 자아로 걸러내는 `여과`였다. 그는 내내 스스로를 구원해 줄 `양`을 찾았지만 그런 게 바깥에 있을 리 없었다. 쇼펜하우어처럼 그 외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하물며 세계조차도. 그래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그가 자폐적 자아의 내부로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세계의 끝에 도달했다. 그 끝은 자신의 자페적 자아 세계의 끝이었으며 더 이상 `홀로로는 안 된다`는 한계의 도달이었다. 말하자면 내 생각에 하루키의 작품들은 그 절망의 끝에서 시작된`타자에게 나를 내어 보임`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글쓰기를 받치고 있는 자폐적 자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음악을 듣는 자아와 번역을 하는 자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은 당연히 외래적 촉발이다. 그것은 엄습이요 투과이지 여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의지에 아랑곳없이 간섭한다. 그것은 `세계의 끝...`에서의 사이렌 소리와 같이 자폐적 세계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것 밖에도 존재들이 있음을 알려 혼란을 가져다준다. 음악의 외부의 감각이다. 너 외에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공존`에의 호소다. 잡문집에 실린 음악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는 음악을 매개로 아티스트 자체와 교류한다. 그렇게 그는 음악이라는 사실은 그 어떤 객관성도 담보할 수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음악을 서로가 완전히 똑같은 느낌으로 듣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대한 절대 해석이 불가능함을 상기한다면) 매개체를 가지고 타인과 서로의 `주관`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아는 `나를 내어 보임`에 있어 일종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자아가 상호 대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 넘어서 간다면 `번역하는 자아`가 있다. 번역이란 말 그대로 그 발화의 주체가 되는 타인을 중심 항성으로 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일이다. 그렇게 내 안 깊숙이 그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 자아 내부에 그를 담고 그의 입장에서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키의 자아는 `대화하는 자아`에서 `헤아리는 자아`로 나아간다. 하지만 헤아림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번역 또한 결국은 남의 언어에 자기의 언어를 대입하는 것이니 거기엔 자신의 판단, 경험을 비롯하여 자아가 투영된다. 즉 번역을 하는 자는 남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신마저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잡문집의 번역에 대한 하루키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렇게 상호 되먹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이해 역시 깊어진다. `잡문집` 가장 처음에 나오는, 소설가란 독자들 앞에 가능한 선택지가 많아지도록 가설을 쌓아가는 사람이며 독자는 그 앞에 소설가가 샘플처럼 놓아 둔 이야기에 호응하여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란 그의 말은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끝에서 마주한 벽에서 문득 문이 하나 생기게 되고 그것을 열어 보다 레벨이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P.115)

 

  따라서 `잡문집`에서 번역의 다음 여정이 `인물에 관하여`인 것은 당연하리라.

 

 

 

 

  내 말이 이 세 개의 자아들이 일종의 진화론적 직선 관계에 있다는 걸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아 부언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정말은 순서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순환 고리를 이룬다. 어릴 때 하던 놀이처럼 그것은 서로가 손을 맞잡고 전기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첫 시작은 물론 `음악을 듣는 자아`였을 것이다. 공존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면 남에게 내어 보일 글쓰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루키 자신도 그렇게 고백한다. 음악이 글쓰기를 낳았고 스타일 역시 그것에서 배운다고. 이렇게 음악이 하나의 촉발이라면 자폐적 세계를 구축하는 글쓰기는 대화와 번역을 통해 교환되고 숙성되어진 것들을 여과하여 감정하는 과정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굴튀김`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가리킨다. 그는 진정한 자아란 타자와의 간격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과의 거리, 사물과의 거리 바로 그 거리의 감각이 자아를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키의 글쓰기란 그 거리의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일종의 `변압기(transformer)`적 행위인 것이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P.407)

 

 

 

  이 모든 세 개의 항성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그 모든 항성이 서로가 조응하여 하나의 `소설가`라는 하루키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소설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깊어지고 넓어지는 자신의 세계에 그는 무엇을 담으려 하는가?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그 알의 편에 서겠다.(P.91)

 

조금 놀랐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 그리고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나왔던 원숭이들끼리의 공 주고받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갑니다. (P.92)

 

  그렇게 그 알이 깨지지 않도록 받아 주는 것 혹은 벽 자체를 아예 부숴버리는 것. 그래서 알이 알로써 제대로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였고 진정한 그의 커뮤니케이션이었던 것이다.

 

 

 

 

  3.  다시금 공을 주고받다.

 

 

  잡문집의 글들은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1979년에서 바로 최근인 2010년 사이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때 그 때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단일한 주제가 있을 리 없고 그 때 그 때의 하루키 인생에 따라 그에 조응하여 나온 글들이다. 더구나 거창한 주제의식 없이 쓰여 진 글이라 오히려 그의 솔직한 속내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잡문집`은, 비유하자면, 베토벤의 소나타를 닮았다. 베토벤은 소나타 32곡을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 그 소나타 하나하나는 작곡 당시의 베토벤 인생의 단면들이 담겨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들이 모인 `전곡으로서의 소나타`는 베토벤 인생 자체를 담고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인생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하루키의 이 `잡문집`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한다. 이 `잡문집`은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우주`를 가진 전체로서의 하루키를 그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 여정의 순간 순간마다 존재했었던 하루키 역시 엿보게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 하루키를 넘어 인간 하루키 마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그의 소설을 또다시 벗하게 될 때 마다 그가 제시하는 가설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이 잡문집의 글들을 빌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르자면 이 잡문집의 모든 글들은 그가 내게로 던지는 공들이 될 것이다. 혹은 그 시간의 결마다 보존하고 있었던 하루키의 알일 수도 있겠다. 그런 그의 글들을 읽으며 어느 순간 다시금 손을 내밀어 그 공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늦가을의 연병장 저물어가는 하늘 저멀리 던져버렸던 그의 공을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의 미소는 푸근했다. 늘 사오정 같다고 생각했던 용모도 여전했다. 우리는 그 때 미류나무 아래에서 소나기 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람소리를 간간히 들으며 공을 주고받던 기억을 나눴고 이제 그 추억을 다시금 재현하듯 서로 공을 주고받았다. 나는 공을 받을 때마다 맨손으로 아주 오래 주물렀다. 그가 건네는 가설을 내 틀에 맞춰 다듬듯이... 그 때는 저녁 8시의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새벽 5시의 하늘 같다. 다시 던져주기를 바라는 그의 조금은 수줍은듯한 미소를 보며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2-2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 매니아랍니다.
소설도 열심히 읽고, 산문집은 더 열심히 읽죠.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너무 좋아해요, 읽고 나면 성실히 살아야하는 느낌이 든달까.
그런데 반대로 소설을 읽고 나면 너무 나른해져 버려요.

저는 하루키의 책에 대해서 정리도 안 되고 통합도 되지 않고 있어요.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더욱 좋아하는걸까요? 인간은 모호함을 더 사랑한다 하더군요.

언젠가, 저도 이런 리뷰를 쓸 날을 기대해봅니다... ^^

ICE-9 2011-12-25 20:59   좋아요 0 | URL
호오~ 역시 마녀고양이님도 하루키 매니아셨군요.
저도 에세이를 소설 만큼이나 좋아합니다. 그의 에세이를 통해 카버를 알았고 재즈의 빅밴드 시절을 좋아하게 되었죠. 그의 글을 벗하면 뭔가 같이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한 라디오 DJ의 말을 읽었을 때 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뭔가 전하고 싶으 진심. 그런게 그의 글에 있으며 그 진심들이 작품에 따라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점점 변해간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더욱 친근한 벗처럼 여기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
마녀고양이님의 하루키에 대한 리뷰를 어서 만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상식에 기대어 보자면 진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화에 있어서 유전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스탠퍼드대 생명공학 교수인 폴. R 에얼릭이다. 그는 이미 전작, '인간의 본성들'에서 유전자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도 진화가 이루어짐을 밝힌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로이 나온 같은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는 아내와 같이 저술한 이 '진화의 종말'도 요지는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개체가 환경과 상호작용 하면서 진화한다는 이른바 '공진화'에 대해서는 그 뒷받침 되는 증거가 최신 연구 결과까지 포함하여 전작보다 더 넓어졌고 다루는 세계 역시도 '생태계' 전체로 더 확장되었으며 단순히 '환경의 영향 역시 크다'라는 식의 현상의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인식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생태계 전체의 파국적 위기 앞에서 어떻게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나아갈 것인가 까지 말하고 있어 한 마디로 폴 R 에얼릭이 지금까지 해 온 작업의 이른바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제목인 '진화의 종말'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으로 여기에서의 '종말'이란 내 생각이지만 헤겔이 말했던 그런 '종말'인 듯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역사가 최종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말인 것이다. 원제는 'THE DOMINANT ANIMAL'이다. 즉 '인간'에 이르러 진화는 하나의 극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이것은 그리 낙관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에얼릭이 굳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이 단순히 헤겔식으로 하나의 완성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에게 진화의 극점이자 지구의 '지배자'로서의 지위에 걸맞는 생태계 전체의 보호를 위하여 져야할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진화의 종말'이 쓰여진 진짜 이유는 점점 심화되는 위기로 빠져드는 생태계 전체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인류의 관심과 책임을 고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책 전체의 내용은 바로 그와 같은 의도에 맞게 철저히 이루어져 있다. 초반에는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통하여 진화라는 것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전작에서 했던 것과 같이 진화라는 것이 오로지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유전율이란 개념을 드는데 유전율이란 유전으로 결정되는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머리가 나쁜 부모에게 머리가 나쁜 자식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자식의 형질은 부모가 물려주는 유전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일란성 쌍둥이'이다.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일란성 쌍둥이는 전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에얼릭은 반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유전율을 너무 낮게 잡았기 때문이라고. 유전율을 낮게 잡았다는 것은 관찰 대상의 환경을 단순화하고 오로지 나타난 형질만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에얼릭은 유전율을 높게 잡았을 경우 그러니까 그 쌍둥이들이 살아온 모든 과정을 세세히 밝히고 그 와중에 점차적으로 형성되어온 모습들을 두루 살핀다면 유전자 말고도 거기엔 환경의 영향마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작용했음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제 높은 유전율을 적용한 경우 지금은 '일란성 쌍둥이'에게 있어 상이한 차이는 환경의 요인 역시 작용함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게 에얼릭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지만 자주 잊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날 때 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이란 한자의 뜻 그대로 사람이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꾸준한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렇게 환경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중반에 가서는 우리 인간의 지배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앞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얼마나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보았다. 때문에 마치 너무나 정교하게 쌓여있어 그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빼내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블록들 처럼 인간의 개입이 자칫 잘못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잘못 건드린다면 어떤 파국적 결과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생각부터 앞서게 된다. 바로 그 생각 그대로 에얼릭은 인간의 저마다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또는 보호의 명목으로 자연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특히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험 '바이오스피어 2'가 그렇다. '바이오 스피어 2'란 '바이오 스피어 1'인 지구의 생태 환경을 그대로 인공적으로 복제한 실험을 말한다. 모든 과학자들이 실제 생태계 환경을 정확히 복사하여 인공적인 생태계를 복제하였지만 그래서 그것 역시 지구 생태계 처럼 완벽하게 흘러갈 줄 알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결국 '바이오스피어 2'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실험의 실패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제아무리 예측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자연이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전체는 그러한 인간의 예측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의 운명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하니 인간이 보잘 것 없는 계산과 기술로 오만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얕은 계산과 오만함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 가장 우리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예가 각 나라들이 저마다 닥친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부터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들을 수입해 오는 사례이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에서 들여온 황소개구리가 우리 고유의 생태계를 모조리 망쳐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게 비단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얼릭은 호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받았던 엄청난 피해들을 보여준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자연의 가장 작은 부분 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실패가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얼릭은 그 이유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생태계'라는 것은 아주 미시적은 부분, 즉 '마이크로 코스모스'라고 불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부분 조차도 서로가 아주 밀접하게 엮이어진 거대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때문에 어느 하나에 개입하면 당연히 되먹임(피드백)이 일어나며 그것이 너무나 촘촘히 엮어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일인지라 그 어떤 변수가 작용하여 그 어떤 결과가 불러올지 예측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와도 같다. 미국 LA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중국에 폭우를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로를 통해 그 모든 결과가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환경은 거대하다' '진화의 종말' 후반은 마치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다. 인간의 의식과 역사 조차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될 만큼 중요한 환경.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작고 쉽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에얼릭은 그러한 우리의 교만과 호기를 통렬하게 비웃는다. 자연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조차도 긴밀하게 엮이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캐시미어에 대한 호감이 중국의 황사를 증가시키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사람들 마저 기관지염으로 빠뜨리는 것 만큼이나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 조차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전혀 모르는 지경인데도 우리는 그 '되먹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목전의 이익만을 집착한 채 무분별하게 환경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을 중요하게 생각함은 무조건 삽질 부터 할 것이 아니라 그 삽질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충분히 따져보고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말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 자체가 그러하니까, 즉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많은 상호작용을 단순화하고 관련된 것만 보아서는 다가올 결과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인간의 지엽적인 눈으로 보자면 자연은 늘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위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어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얼릭이 더 선호하는 건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면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의 얼룩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종점이 아니며 비록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서 느낄 수도 없는 느린 속도라 해도 스스로 치유해나가고 있는 하나의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에얼릭은 우리의 조급증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분히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손을 대어 인간의 의지와 기술을 들이민다면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그저 학대에 지나지 않을 것임이, 읽고 난 지금엔 그렇게 생각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통념이라는 것이 또 얼마나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지 똑똑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에얼릭의 논지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그동안의 통념이 다만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질책하는 것이라 아프게 다가온다. 그 통념으로 인해, 우리가 알았든 알지못했든 그동안 지구는 우리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구까지는 생각할 것 없이 지금 우리의 국토 또한 그러한 것이다. 강의 물줄기를 함부로 바꾸고 인위적으로 막고 돈을 위해 강바닥을 사정없이 파내는 등 정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펀치를 사정없이 자연에다 날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개발이라는 것이 불러오는 것은 오로지 생태계 전체의 파국 밖에는 없다는 에얼릭의 호소가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겸손과 배려가 타인에게 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임을 다시한 번 깨닫는다. 그것이 에얼릭이 원제에다 정말 전하려고 했었던 진심, 그러니까 지배자로서 인간이 생태계에 대해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 걸맞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타레즈 서클 1
로버트 러들럼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먼저, 한 장의 사진 부터...


  

  이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척 알아보았다면 단연 당신도 영화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비디오 드롬'으로 대표되는 신체와 기계를 서로 교합하여 기괴하고 낯설은 컬트 무비로 관객을 당황시켰던 대표적인 감독인 데이빗 크로넨버그 다. 크로넨버그 뒤의 사진은 그의 영화 '스캐너스'에서 유명한 사람의 머리가 폭발하는 장면. 듣기엔 수박을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서 권총으로 쏘아 만든 장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로 나왔는데 원본 상영시간보다 딱 1초가 적다. 바로 이 장면 하나만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1. 그렇게 시작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야기로 부터 ...

  

 

    하지만 늘 신체를 가지고 변형하고 무언가 다른 것과 접속

  시키려 했던 그의 컬트적 경향은 2002년 Patrick McGrath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스파이더'로 인해 결정적으로 변화한

  다. 바로 그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주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시각적 충격이나 기괴한 주제 의식 그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고전적  영화 문법에만 충실하여 영화

  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 정신분열자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이 영화의

  원작은 대부분이 분열자의 혼란스러운 독백으로 되어 있는지

  라 영화화 불가능이라는 판정까지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크

  로넨버그는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그것도 전혀

  크로넨버그적이지 않은 '정통' 기법만 사용하여 만듦으로써

  놀라운 비평적 성공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의는 그렇게 형식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하나의 전 환점이라 할 수 있는데, 즉 그전까지의 크로넨버그 영화들이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언제나 외부적인 것과 접합하여 왔다면 '스파이더' 부터는 바로 그 접합이 인간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로만 향하던 감독의 시선이 '스파이더'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그 내부로 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크로넨버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만하다. '내부에서의 접합'의 중심엔 언제나 단순히 말한다면 '정체성의 혼란' 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부터 이식되어진 외부의 '의식'이 있고 그 의식 아래에서 본래의 나를 이루며 존재하는 내부적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크로넨버그는 정체성을 바로 이러한 내 것이 아닌 '외부에서 이식된 자아'와 '본래적 내 자아'가 서로 교섭하거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일종의 산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파이더'에서 구현되어 뒤이은 '폭력의 역사(과거를 감추고 평범한 보통 남자가 되어버린 전직 킬러)'나 '이스턴 프라미스(러시아 마피아로 신분을 숨기고 숨어든 위장 경찰)'로 조금씩 변형되어 내내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이 전회 이후의 영화들 대부분이 크로넨버그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성취 역시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당연히 크로넨버그의 차기작은 모든 영화팬들에게 있어 대단한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2009년 그는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어지는 폭력 3부작을 완결하지 않고 느닷없이 (우리에겐 '본'시리즈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을 감독한다고 하여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원작 그대로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마타레즈 서클'이라는 국가를 초월한 전세계적 거대한 범죄 음모 집단에 맞서, 가장 능력있는 스파이였으나 그들의 음모로 이제는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쫒기게 된, 거기다 서로가 뼛 속 깊이 증오하던 원수이기도 했던, 미국의 스파이와 소련의 스파이가 함께 협력해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감독이 크로넨버그일 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 역시 미국 스파이 역할을 톰 크루즈가 그리고 소련 스파이 역할을 덴젤 워싱턴이 맡는다고 알려져서 더욱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크로넨버그는 영화로 만드려는 원작을 까다롭기로 고르기로 유명한데(원래 이 영화는 2011년 개봉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크로넨버그가 나와 있는 시나리오를 직접 손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어째서, 크로넨버그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될, 이 작품에 끌렸던 것일까?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드디어, '마타레즈 서클'이 노블마인에 의해 국내에 발간되어 크로넨버그가 왜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2. 다음엔 '마타레즈 서클'의 이야기...

 

      첫 걸음은 러들럼의 전 세대... 이언 플레밍와 존 르 카레로 부터... 

 

   주된 줄거리는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적 흐름에 대해서 마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 의심이 들 정도로 길게 얘기한 것은 그 짧은 줄거리 만으로도 왜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소설은 하나의 결말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는 소설인지라 줄거리를 자칫 상세하게 했다간 뒤에 읽는 이의 재미를 빼앗을 우려가 다분하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타레즈 서클'의 정체와 그 맴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미스터리적 측면까지 가지고 있어 그 위험이 배가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줄거리를 짧게 말하고 그 관련 배경 사항을 길게 말함으로써 '유추'라는 방법으로 암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되도록 침묵하고 이 작품이 가진 주제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읽고나니 왜 크로넨버그가 폭력 3부작을 마무리 하지 않고 곧장 (물론 여기엔 어폐가 있다. 사실 크로넨버그는 이 사이에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올해 개봉한 'A Dangerous Method'라고 프로이드와 융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스파이더' 이후로 내내 지속해왔던 것이 크로넨버그 식의 '정신분석'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마타레즈 서클'이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와 사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국가가 강요한 정체성으로서의 '외부적 자아'와 본디 부터 있었던 '내부적 자아'와의 대립, '폭력의 역사'에서 에드 해리스가 암시했던 조직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러시아 마피아와도 같이 그러한 외부적 자아를 강요하는 존재로서의 단일한 세계 역시 이 소설에서 '마타레즈 서클'로 등장한다. 거기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일원이 되려면 문신이 중요했듯이 여기서도 마타레즈 서클 일원임을 확인 하는 유일한 방법 역시 문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공통적인 모습들이 데이빗 크로넨버그로 하여금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게 만든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에 대한 것이므로 이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얘기는 그만하고 러들럼이 '마타레즈 서클'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인지 얘기하도록 하자.

 

  그걸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파이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품 둘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언 플레밍의 007 이고 다른 하나는 존 르 카레의 대표작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이다. 

 

 

  

 

 

 

 

 

 

 

 

 

 

 

 

 

 

 

 

 

 

   같은 스파이 소설이지만 이 둘은 정말 다르다.

 

   그건 단적으로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제임스 본드는 조국의 헌신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정확한 기계 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임무의 성공을 위해 나아간다. 때문에 그는 자신만만하며 늘 유머를 잊지 않을 만큼 낙천적이고 임무중 로맨스를 불태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하지만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는 정확히 제임스 본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맡고 있는 임무에 대해 신뢰하지 않으며 늘 의심과 번민 속에서 가까스로 임무를 해 나간다. 그는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자신이 한낱 보잘것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또한 윤리 따위는 얼마든지 헌신짝 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곳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에게 있어 의심과 남을 속임은 오직 임무 수행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스마일리에게 있어서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무기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적의 총구 앞에 섰을 때도 유머를 잃지 않지만 스마일리는 보이지 않는 총구를 더 두려워하여 필사적이다. 따라서 007의 분위기는 넘쳐나는 활극마저 가미되어 밝지만 스마일리의 분위기는 우울하고 어둡다. 그가 늘 이루어야 하는 임무 보다 임무를 위해 전혀 다른 자신이 되어 남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햐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번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은 여지없이 다른데 과연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다만 작가 개인적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흔히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게 소설 역시 사회 혹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그렇게 달랐던 것은 바로 그들을 낳았던 시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두 인물은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50년대에 태어났다. 그야말로 냉전이 극한을 향해 치닫던 시대였다. 헐리우드 영화들은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나 괴물로 형상하고 있었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미국에게 이종의 존재들이었고 그래서 타협이 불가능한 오로지 절멸만이 전부인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적인 분명한 이상 아군도 스스로를 회의하지 않았다. 반면 스마일리는 60년대의 산물이다. 냉전으로 떠받치던 사회에 점점 의심을 보내는 시선과 목소리가 많아졌고 아버지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자식 세대가 늘어났다. 반항과 자유를 외치는 록이 전성기를 구가했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위해 '히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가 이런 경향을 흡수해서 나타났고 사람들은 정상성을 전복하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으로 차츰 무장해갔다. 그렇게 세계를 회의함으로써 오히려 내부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스마일리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즉 이렇게 달라져 버린 시대의 프레임이 같은 스파이라 하더라도 각각 다르게 빚어내었던 것이다. 스마일리에게 와서 스파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이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것인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보다 더 높은 상위의 원칙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마일리는 애국심이 아니라 바로 그 상위의 원칙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그 원칙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즉 그렇게 존 르 카레에게 와서 이언 플레밍에 의해 단절되었던 '나와 너'는 보편적 인간애로 인해 묶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이제 로버트 러들럼 으로 ...

 

   러들럼 역시 존 르 카레의 계승자다. 그의 대표작인 '본 시리즈'를 떠올리기만 해도 될 것이다. 러들럼의 스파이들 역시 조국에 대한 신뢰로 완전무장하고 있지 못하다. 만일 그들이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뇌에 의해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면 커다란 개인적 원한이 있다거나... '마타레즈 서클'의 두 주인공 미국 스파이 스코필드와 소련 스파이 탈레니예코프 처럼 말이다. 스코필드와 탈레니예코프가 서로의 나라에서 가장 최고의 스파이가 된 것은 모두 개인적 원한을 남김없이 갚으려 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탈레니예코프는 미국에 의해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위해 스파이가 되어 미국과 싸웠고 스코필드는 탈레니예코프가 복수를 위해 죽여버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원한을 앙갚음 하기 위해 최고의 스파이가 되었다. 그들의 동기 어디에도 007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가 속한 국가나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모두 철저히 개인적 동기 뿐이었다. 여기에서 러들럼은 존 르 카레와 이어진다. 그 역시 거대 이념이 아니라 스파이로서의 한 개인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러들럼이 주로 활동했던 70년대는 또 존 르 카레의 60년대와 같지 않았다. 70년대는 다시금 점증하는 '보수'로 인해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가 다스베이더였던 것 처럼 그 빌어먹을 저주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으며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했고 더구나 그 피를 물려준 다스베이더에 의해 그들은 오로지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베트남으로 끌려가 그 피를 다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이 아니라 오로지 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죽었고 그 죽음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올리버 스톤이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에서 산더미 처럼 썋여진 병사의 시체들을 보여주며 물었던 '그 죽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대답과도 같았던 차기작 '7월 4일생' 처럼...) 러들럼은 바로 그 시대에 있었다. 이념의 깃발은 이미 오래전에 퇴색했지만 여전히 그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우롱하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가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던 것이다.

 

 

  러들럼에게 있어 70년대란 바로 그런 시대였다. 이념은 사라지고 오로지 음모만이 가득한 시대. 베트남 전쟁은 러들럼에게 그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개인 자신이 의심하고 번민 하더라도 개인을 초월하고 국가마저 능가하는 거대 세력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마타레즈 서클'의 전작인 77년작 'The Chancellor  Manuscript'이다.(이 작품 역시 마크 포스터 감독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 FBI 국장 재임 당시 최고의 권력자중 하나로 온갖 개인의 비밀을 다 캐내고 그것을 이용했던 에드가 후버가 사실은 자연사가 아니라 그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 한 어떤 비밀 세력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는음모론이 주된 줄거리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대필작가 챈슬러가 주인공인데 그는 어느날 정체불명의 인물로 부터 후버 전기를 쓸 것은 의뢰받고 그가 건네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기를 써 나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챈슬러가 써 나가는 내용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즉 그는 그를 넘어선 거대한 음모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러들럼은 '베트남 전쟁'을 비유하는 것이다. 자신은 몰랐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네준 정보를 그대로 받아 씀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대로 현실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했듯이 그와 똑같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초월한 누군가의 의지를 그냥 자신의 의지로 알고 참여했던 전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바라본 70년대는 비밀과 음모와 점철된 시대였고 베트남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개인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들럼은 거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러들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백이야 어쨌든 그의 소설들은 모두 그러한 세상과 겨루려는 가운데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마타레즈 서클'이 아닌가 한다. 특히나 후반에서 보여주는 더 할 나위없이 통쾌한 응징은 (당신이 정말 지금의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 마지막 상황의 통쾌한 응징이 그야말로 좋은 치유가 되어주리라 생각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 지 정말 기대가 된다. 아주 느린 왈츠적 움직임으로 형상화하지 않을까 생각되긴 하지만...) 이러한 러들럼의 세상에 대한 전투적 의지가 얼마나 결연한지 잘 드러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러들럼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을 때 그의 고독과 고뇌에 공감하면서도 반복해서 더불어 있기가 힘든 것은 그의 실존적 고독이 가져다 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가 한 작품의 결말에 묘사했던 그대로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채 서치라이트에 갇혀 속절없이 총살당하고야 마는 그런 무력감이 너무도 커서 그 세상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무의식중에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르 카레가 그렸던 세상이나 러들럼이 그렸던 세상이나 그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아 보이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더더욱. 아무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해도 때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위적 환상이라 해도 승리의 기억 역시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비록 대리만족이나 상상의 충족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는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겐 이언 플레밍도 존 르 카레도 그리고 로버트 러들럼도 다 필요하다. 이언 플레밍은 세상을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고 존 르 카레는 좀 더 진중해질 것을 요구한다. 삶은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으로 넘쳐나니 그것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은 다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떤 때, 문득 승리의 기억이 필요할 때 러들럼을 벗하면, 그렇게 '마타레즈 서클'을 벗하면 좋을 것이다. 다행히 몰입도가 상당해서 들이는 시간 마저 오래걸리지 않으니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2-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베트남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봅니다,
아니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007의 매력적인 모습은, 참 교묘한 위장이죠?
어릴 때 받은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스파이라 하면 매력적인 모습이 우선 떠오르잖아요... 실제로는, 정말 실존적 무력함을 그대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말이죠.
그건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 같은 미드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법의학자나 프로파일러에 대해서 정말 멋진 환상을 심어주고 있죠. 하지만 무감각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참 멋진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

ICE-9 2011-12-13 12:33   좋아요 0 | URL
앗! 들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저도 법의학자와 프로파일러들에 대해서 마녀고양이님과 생각이 비슷합니다. 과연 저들은 어떻게 그들의 일상을 견뎌나가고 있을까? 아무튼 보통사람들이 바라보는 듯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작품엔 물론 엽기적인 세상에 대한 실존적 무력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콘웰은 현명하게도 그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생존하는 방식의 힘겨움을 통해 드러내죠. 하지만 그렇게 보편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어도 그 따가운 개별적인 통증 역시 그대로 느껴지게 해서 어느순간 스카페타의 피로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거든요. 히어로란 능력이 아니라 그 버텨냄에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곤 하는 스릴러죠.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신념을 잃지않고 질기게 버텨내는 것. 챈들러가 그토록 강조하는 `스스로의 무장상태` 저는 러들럼에게서 그런 걸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12-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대 작품으로 냉전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미국의 스파이를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그린 것으로 그레이엄 그린 <조용한 미국인>이 있더군요.아는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러들럼이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다가 요즘 뜸했던 것 같았습니다만...

ICE-9 2011-12-11 23:31   좋아요 0 | URL
저는 `조용한 미국인`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았는데 정말 좋더군요. 말씀하신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이 글에선 가장 대조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고르다보니 그린 보다 르 카레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 영화로 본 3부작이 잇달아 개봉됨으로써 다시금 러들럼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게된 것 같아요. 게다가 헐리우드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고 아마도 러들럼이 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번 작품을 읽다보니 들더군요. 방문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2-14 15:58   좋아요 0 | URL
저도 르 카레 좋아해요.그리고 에릭 엠블러. 고전적인 스파이물의 거장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