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상식에 기대어 보자면 진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화에 있어서 유전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스탠퍼드대 생명공학 교수인 폴. R 에얼릭이다. 그는 이미 전작, '인간의 본성들'에서 유전자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도 진화가 이루어짐을 밝힌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로이 나온 같은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는 아내와 같이 저술한 이 '진화의 종말'도 요지는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개체가 환경과 상호작용 하면서 진화한다는 이른바 '공진화'에 대해서는 그 뒷받침 되는 증거가 최신 연구 결과까지 포함하여 전작보다 더 넓어졌고 다루는 세계 역시도 '생태계' 전체로 더 확장되었으며 단순히 '환경의 영향 역시 크다'라는 식의 현상의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인식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생태계 전체의 파국적 위기 앞에서 어떻게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나아갈 것인가 까지 말하고 있어 한 마디로 폴 R 에얼릭이 지금까지 해 온 작업의 이른바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제목인 '진화의 종말'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으로 여기에서의 '종말'이란 내 생각이지만 헤겔이 말했던 그런 '종말'인 듯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역사가 최종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말인 것이다. 원제는 'THE DOMINANT ANIMAL'이다. 즉 '인간'에 이르러 진화는 하나의 극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이것은 그리 낙관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에얼릭이 굳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이 단순히 헤겔식으로 하나의 완성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에게 진화의 극점이자 지구의 '지배자'로서의 지위에 걸맞는 생태계 전체의 보호를 위하여 져야할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진화의 종말'이 쓰여진 진짜 이유는 점점 심화되는 위기로 빠져드는 생태계 전체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인류의 관심과 책임을 고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책 전체의 내용은 바로 그와 같은 의도에 맞게 철저히 이루어져 있다. 초반에는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통하여 진화라는 것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전작에서 했던 것과 같이 진화라는 것이 오로지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유전율이란 개념을 드는데 유전율이란 유전으로 결정되는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머리가 나쁜 부모에게 머리가 나쁜 자식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자식의 형질은 부모가 물려주는 유전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일란성 쌍둥이'이다.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일란성 쌍둥이는 전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에얼릭은 반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유전율을 너무 낮게 잡았기 때문이라고. 유전율을 낮게 잡았다는 것은 관찰 대상의 환경을 단순화하고 오로지 나타난 형질만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에얼릭은 유전율을 높게 잡았을 경우 그러니까 그 쌍둥이들이 살아온 모든 과정을 세세히 밝히고 그 와중에 점차적으로 형성되어온 모습들을 두루 살핀다면 유전자 말고도 거기엔 환경의 영향마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작용했음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제 높은 유전율을 적용한 경우 지금은 '일란성 쌍둥이'에게 있어 상이한 차이는 환경의 요인 역시 작용함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게 에얼릭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지만 자주 잊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날 때 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이란 한자의 뜻 그대로 사람이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꾸준한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렇게 환경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중반에 가서는 우리 인간의 지배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앞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얼마나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보았다. 때문에 마치 너무나 정교하게 쌓여있어 그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빼내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블록들 처럼 인간의 개입이 자칫 잘못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잘못 건드린다면 어떤 파국적 결과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생각부터 앞서게 된다. 바로 그 생각 그대로 에얼릭은 인간의 저마다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또는 보호의 명목으로 자연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특히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험 '바이오스피어 2'가 그렇다. '바이오 스피어 2'란 '바이오 스피어 1'인 지구의 생태 환경을 그대로 인공적으로 복제한 실험을 말한다. 모든 과학자들이 실제 생태계 환경을 정확히 복사하여 인공적인 생태계를 복제하였지만 그래서 그것 역시 지구 생태계 처럼 완벽하게 흘러갈 줄 알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결국 '바이오스피어 2'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실험의 실패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제아무리 예측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자연이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전체는 그러한 인간의 예측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의 운명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하니 인간이 보잘 것 없는 계산과 기술로 오만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얕은 계산과 오만함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 가장 우리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예가 각 나라들이 저마다 닥친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부터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들을 수입해 오는 사례이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에서 들여온 황소개구리가 우리 고유의 생태계를 모조리 망쳐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게 비단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얼릭은 호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받았던 엄청난 피해들을 보여준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자연의 가장 작은 부분 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실패가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얼릭은 그 이유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생태계'라는 것은 아주 미시적은 부분, 즉 '마이크로 코스모스'라고 불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부분 조차도 서로가 아주 밀접하게 엮이어진 거대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때문에 어느 하나에 개입하면 당연히 되먹임(피드백)이 일어나며 그것이 너무나 촘촘히 엮어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일인지라 그 어떤 변수가 작용하여 그 어떤 결과가 불러올지 예측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와도 같다. 미국 LA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중국에 폭우를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로를 통해 그 모든 결과가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환경은 거대하다' '진화의 종말' 후반은 마치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다. 인간의 의식과 역사 조차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될 만큼 중요한 환경.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작고 쉽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에얼릭은 그러한 우리의 교만과 호기를 통렬하게 비웃는다. 자연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조차도 긴밀하게 엮이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캐시미어에 대한 호감이 중국의 황사를 증가시키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사람들 마저 기관지염으로 빠뜨리는 것 만큼이나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 조차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전혀 모르는 지경인데도 우리는 그 '되먹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목전의 이익만을 집착한 채 무분별하게 환경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을 중요하게 생각함은 무조건 삽질 부터 할 것이 아니라 그 삽질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충분히 따져보고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말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 자체가 그러하니까, 즉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많은 상호작용을 단순화하고 관련된 것만 보아서는 다가올 결과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인간의 지엽적인 눈으로 보자면 자연은 늘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위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어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얼릭이 더 선호하는 건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면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의 얼룩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종점이 아니며 비록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서 느낄 수도 없는 느린 속도라 해도 스스로 치유해나가고 있는 하나의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에얼릭은 우리의 조급증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분히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손을 대어 인간의 의지와 기술을 들이민다면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그저 학대에 지나지 않을 것임이, 읽고 난 지금엔 그렇게 생각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통념이라는 것이 또 얼마나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지 똑똑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에얼릭의 논지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그동안의 통념이 다만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질책하는 것이라 아프게 다가온다. 그 통념으로 인해, 우리가 알았든 알지못했든 그동안 지구는 우리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구까지는 생각할 것 없이 지금 우리의 국토 또한 그러한 것이다. 강의 물줄기를 함부로 바꾸고 인위적으로 막고 돈을 위해 강바닥을 사정없이 파내는 등 정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펀치를 사정없이 자연에다 날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개발이라는 것이 불러오는 것은 오로지 생태계 전체의 파국 밖에는 없다는 에얼릭의 호소가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겸손과 배려가 타인에게 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임을 다시한 번 깨닫는다. 그것이 에얼릭이 원제에다 정말 전하려고 했었던 진심, 그러니까 지배자로서 인간이 생태계에 대해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 걸맞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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