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레즈 서클 1
로버트 러들럼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먼저, 한 장의 사진 부터...


  

  이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척 알아보았다면 단연 당신도 영화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비디오 드롬'으로 대표되는 신체와 기계를 서로 교합하여 기괴하고 낯설은 컬트 무비로 관객을 당황시켰던 대표적인 감독인 데이빗 크로넨버그 다. 크로넨버그 뒤의 사진은 그의 영화 '스캐너스'에서 유명한 사람의 머리가 폭발하는 장면. 듣기엔 수박을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서 권총으로 쏘아 만든 장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로 나왔는데 원본 상영시간보다 딱 1초가 적다. 바로 이 장면 하나만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1. 그렇게 시작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야기로 부터 ...

  

 

    하지만 늘 신체를 가지고 변형하고 무언가 다른 것과 접속

  시키려 했던 그의 컬트적 경향은 2002년 Patrick McGrath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스파이더'로 인해 결정적으로 변화한

  다. 바로 그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주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시각적 충격이나 기괴한 주제 의식 그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고전적  영화 문법에만 충실하여 영화

  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 정신분열자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이 영화의

  원작은 대부분이 분열자의 혼란스러운 독백으로 되어 있는지

  라 영화화 불가능이라는 판정까지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크

  로넨버그는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그것도 전혀

  크로넨버그적이지 않은 '정통' 기법만 사용하여 만듦으로써

  놀라운 비평적 성공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의는 그렇게 형식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하나의 전 환점이라 할 수 있는데, 즉 그전까지의 크로넨버그 영화들이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언제나 외부적인 것과 접합하여 왔다면 '스파이더' 부터는 바로 그 접합이 인간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로만 향하던 감독의 시선이 '스파이더'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그 내부로 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크로넨버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만하다. '내부에서의 접합'의 중심엔 언제나 단순히 말한다면 '정체성의 혼란' 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부터 이식되어진 외부의 '의식'이 있고 그 의식 아래에서 본래의 나를 이루며 존재하는 내부적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크로넨버그는 정체성을 바로 이러한 내 것이 아닌 '외부에서 이식된 자아'와 '본래적 내 자아'가 서로 교섭하거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일종의 산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파이더'에서 구현되어 뒤이은 '폭력의 역사(과거를 감추고 평범한 보통 남자가 되어버린 전직 킬러)'나 '이스턴 프라미스(러시아 마피아로 신분을 숨기고 숨어든 위장 경찰)'로 조금씩 변형되어 내내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이 전회 이후의 영화들 대부분이 크로넨버그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성취 역시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당연히 크로넨버그의 차기작은 모든 영화팬들에게 있어 대단한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2009년 그는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어지는 폭력 3부작을 완결하지 않고 느닷없이 (우리에겐 '본'시리즈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을 감독한다고 하여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원작 그대로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마타레즈 서클'이라는 국가를 초월한 전세계적 거대한 범죄 음모 집단에 맞서, 가장 능력있는 스파이였으나 그들의 음모로 이제는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쫒기게 된, 거기다 서로가 뼛 속 깊이 증오하던 원수이기도 했던, 미국의 스파이와 소련의 스파이가 함께 협력해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감독이 크로넨버그일 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 역시 미국 스파이 역할을 톰 크루즈가 그리고 소련 스파이 역할을 덴젤 워싱턴이 맡는다고 알려져서 더욱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크로넨버그는 영화로 만드려는 원작을 까다롭기로 고르기로 유명한데(원래 이 영화는 2011년 개봉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크로넨버그가 나와 있는 시나리오를 직접 손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어째서, 크로넨버그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될, 이 작품에 끌렸던 것일까?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드디어, '마타레즈 서클'이 노블마인에 의해 국내에 발간되어 크로넨버그가 왜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2. 다음엔 '마타레즈 서클'의 이야기...

 

      첫 걸음은 러들럼의 전 세대... 이언 플레밍와 존 르 카레로 부터... 

 

   주된 줄거리는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적 흐름에 대해서 마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 의심이 들 정도로 길게 얘기한 것은 그 짧은 줄거리 만으로도 왜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소설은 하나의 결말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는 소설인지라 줄거리를 자칫 상세하게 했다간 뒤에 읽는 이의 재미를 빼앗을 우려가 다분하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타레즈 서클'의 정체와 그 맴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미스터리적 측면까지 가지고 있어 그 위험이 배가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줄거리를 짧게 말하고 그 관련 배경 사항을 길게 말함으로써 '유추'라는 방법으로 암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되도록 침묵하고 이 작품이 가진 주제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읽고나니 왜 크로넨버그가 폭력 3부작을 마무리 하지 않고 곧장 (물론 여기엔 어폐가 있다. 사실 크로넨버그는 이 사이에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올해 개봉한 'A Dangerous Method'라고 프로이드와 융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스파이더' 이후로 내내 지속해왔던 것이 크로넨버그 식의 '정신분석'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마타레즈 서클'이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와 사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국가가 강요한 정체성으로서의 '외부적 자아'와 본디 부터 있었던 '내부적 자아'와의 대립, '폭력의 역사'에서 에드 해리스가 암시했던 조직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러시아 마피아와도 같이 그러한 외부적 자아를 강요하는 존재로서의 단일한 세계 역시 이 소설에서 '마타레즈 서클'로 등장한다. 거기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일원이 되려면 문신이 중요했듯이 여기서도 마타레즈 서클 일원임을 확인 하는 유일한 방법 역시 문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공통적인 모습들이 데이빗 크로넨버그로 하여금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게 만든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에 대한 것이므로 이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얘기는 그만하고 러들럼이 '마타레즈 서클'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인지 얘기하도록 하자.

 

  그걸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파이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품 둘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언 플레밍의 007 이고 다른 하나는 존 르 카레의 대표작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이다. 

 

 

  

 

 

 

 

 

 

 

 

 

 

 

 

 

 

 

 

 

 

   같은 스파이 소설이지만 이 둘은 정말 다르다.

 

   그건 단적으로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제임스 본드는 조국의 헌신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정확한 기계 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임무의 성공을 위해 나아간다. 때문에 그는 자신만만하며 늘 유머를 잊지 않을 만큼 낙천적이고 임무중 로맨스를 불태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하지만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는 정확히 제임스 본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맡고 있는 임무에 대해 신뢰하지 않으며 늘 의심과 번민 속에서 가까스로 임무를 해 나간다. 그는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자신이 한낱 보잘것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또한 윤리 따위는 얼마든지 헌신짝 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곳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에게 있어 의심과 남을 속임은 오직 임무 수행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스마일리에게 있어서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무기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적의 총구 앞에 섰을 때도 유머를 잃지 않지만 스마일리는 보이지 않는 총구를 더 두려워하여 필사적이다. 따라서 007의 분위기는 넘쳐나는 활극마저 가미되어 밝지만 스마일리의 분위기는 우울하고 어둡다. 그가 늘 이루어야 하는 임무 보다 임무를 위해 전혀 다른 자신이 되어 남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햐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번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은 여지없이 다른데 과연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다만 작가 개인적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흔히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게 소설 역시 사회 혹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그렇게 달랐던 것은 바로 그들을 낳았던 시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두 인물은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50년대에 태어났다. 그야말로 냉전이 극한을 향해 치닫던 시대였다. 헐리우드 영화들은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나 괴물로 형상하고 있었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미국에게 이종의 존재들이었고 그래서 타협이 불가능한 오로지 절멸만이 전부인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적인 분명한 이상 아군도 스스로를 회의하지 않았다. 반면 스마일리는 60년대의 산물이다. 냉전으로 떠받치던 사회에 점점 의심을 보내는 시선과 목소리가 많아졌고 아버지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자식 세대가 늘어났다. 반항과 자유를 외치는 록이 전성기를 구가했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위해 '히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가 이런 경향을 흡수해서 나타났고 사람들은 정상성을 전복하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으로 차츰 무장해갔다. 그렇게 세계를 회의함으로써 오히려 내부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스마일리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즉 이렇게 달라져 버린 시대의 프레임이 같은 스파이라 하더라도 각각 다르게 빚어내었던 것이다. 스마일리에게 와서 스파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이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것인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보다 더 높은 상위의 원칙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마일리는 애국심이 아니라 바로 그 상위의 원칙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그 원칙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즉 그렇게 존 르 카레에게 와서 이언 플레밍에 의해 단절되었던 '나와 너'는 보편적 인간애로 인해 묶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이제 로버트 러들럼 으로 ...

 

   러들럼 역시 존 르 카레의 계승자다. 그의 대표작인 '본 시리즈'를 떠올리기만 해도 될 것이다. 러들럼의 스파이들 역시 조국에 대한 신뢰로 완전무장하고 있지 못하다. 만일 그들이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뇌에 의해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면 커다란 개인적 원한이 있다거나... '마타레즈 서클'의 두 주인공 미국 스파이 스코필드와 소련 스파이 탈레니예코프 처럼 말이다. 스코필드와 탈레니예코프가 서로의 나라에서 가장 최고의 스파이가 된 것은 모두 개인적 원한을 남김없이 갚으려 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탈레니예코프는 미국에 의해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위해 스파이가 되어 미국과 싸웠고 스코필드는 탈레니예코프가 복수를 위해 죽여버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원한을 앙갚음 하기 위해 최고의 스파이가 되었다. 그들의 동기 어디에도 007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가 속한 국가나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모두 철저히 개인적 동기 뿐이었다. 여기에서 러들럼은 존 르 카레와 이어진다. 그 역시 거대 이념이 아니라 스파이로서의 한 개인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러들럼이 주로 활동했던 70년대는 또 존 르 카레의 60년대와 같지 않았다. 70년대는 다시금 점증하는 '보수'로 인해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가 다스베이더였던 것 처럼 그 빌어먹을 저주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으며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했고 더구나 그 피를 물려준 다스베이더에 의해 그들은 오로지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베트남으로 끌려가 그 피를 다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이 아니라 오로지 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죽었고 그 죽음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올리버 스톤이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에서 산더미 처럼 썋여진 병사의 시체들을 보여주며 물었던 '그 죽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대답과도 같았던 차기작 '7월 4일생' 처럼...) 러들럼은 바로 그 시대에 있었다. 이념의 깃발은 이미 오래전에 퇴색했지만 여전히 그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우롱하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가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던 것이다.

 

 

  러들럼에게 있어 70년대란 바로 그런 시대였다. 이념은 사라지고 오로지 음모만이 가득한 시대. 베트남 전쟁은 러들럼에게 그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개인 자신이 의심하고 번민 하더라도 개인을 초월하고 국가마저 능가하는 거대 세력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마타레즈 서클'의 전작인 77년작 'The Chancellor  Manuscript'이다.(이 작품 역시 마크 포스터 감독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 FBI 국장 재임 당시 최고의 권력자중 하나로 온갖 개인의 비밀을 다 캐내고 그것을 이용했던 에드가 후버가 사실은 자연사가 아니라 그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 한 어떤 비밀 세력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는음모론이 주된 줄거리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대필작가 챈슬러가 주인공인데 그는 어느날 정체불명의 인물로 부터 후버 전기를 쓸 것은 의뢰받고 그가 건네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기를 써 나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챈슬러가 써 나가는 내용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즉 그는 그를 넘어선 거대한 음모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러들럼은 '베트남 전쟁'을 비유하는 것이다. 자신은 몰랐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네준 정보를 그대로 받아 씀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대로 현실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했듯이 그와 똑같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초월한 누군가의 의지를 그냥 자신의 의지로 알고 참여했던 전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바라본 70년대는 비밀과 음모와 점철된 시대였고 베트남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개인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들럼은 거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러들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백이야 어쨌든 그의 소설들은 모두 그러한 세상과 겨루려는 가운데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마타레즈 서클'이 아닌가 한다. 특히나 후반에서 보여주는 더 할 나위없이 통쾌한 응징은 (당신이 정말 지금의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 마지막 상황의 통쾌한 응징이 그야말로 좋은 치유가 되어주리라 생각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 지 정말 기대가 된다. 아주 느린 왈츠적 움직임으로 형상화하지 않을까 생각되긴 하지만...) 이러한 러들럼의 세상에 대한 전투적 의지가 얼마나 결연한지 잘 드러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러들럼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을 때 그의 고독과 고뇌에 공감하면서도 반복해서 더불어 있기가 힘든 것은 그의 실존적 고독이 가져다 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가 한 작품의 결말에 묘사했던 그대로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채 서치라이트에 갇혀 속절없이 총살당하고야 마는 그런 무력감이 너무도 커서 그 세상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무의식중에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르 카레가 그렸던 세상이나 러들럼이 그렸던 세상이나 그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아 보이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더더욱. 아무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해도 때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위적 환상이라 해도 승리의 기억 역시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비록 대리만족이나 상상의 충족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는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겐 이언 플레밍도 존 르 카레도 그리고 로버트 러들럼도 다 필요하다. 이언 플레밍은 세상을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고 존 르 카레는 좀 더 진중해질 것을 요구한다. 삶은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으로 넘쳐나니 그것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은 다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떤 때, 문득 승리의 기억이 필요할 때 러들럼을 벗하면, 그렇게 '마타레즈 서클'을 벗하면 좋을 것이다. 다행히 몰입도가 상당해서 들이는 시간 마저 오래걸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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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베트남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봅니다,
아니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007의 매력적인 모습은, 참 교묘한 위장이죠?
어릴 때 받은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스파이라 하면 매력적인 모습이 우선 떠오르잖아요... 실제로는, 정말 실존적 무력함을 그대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말이죠.
그건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 같은 미드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법의학자나 프로파일러에 대해서 정말 멋진 환상을 심어주고 있죠. 하지만 무감각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참 멋진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

ICE-9 2011-12-13 12:33   좋아요 0 | URL
앗! 들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저도 법의학자와 프로파일러들에 대해서 마녀고양이님과 생각이 비슷합니다. 과연 저들은 어떻게 그들의 일상을 견뎌나가고 있을까? 아무튼 보통사람들이 바라보는 듯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작품엔 물론 엽기적인 세상에 대한 실존적 무력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콘웰은 현명하게도 그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생존하는 방식의 힘겨움을 통해 드러내죠. 하지만 그렇게 보편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어도 그 따가운 개별적인 통증 역시 그대로 느껴지게 해서 어느순간 스카페타의 피로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거든요. 히어로란 능력이 아니라 그 버텨냄에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곤 하는 스릴러죠.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신념을 잃지않고 질기게 버텨내는 것. 챈들러가 그토록 강조하는 `스스로의 무장상태` 저는 러들럼에게서 그런 걸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12-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대 작품으로 냉전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미국의 스파이를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그린 것으로 그레이엄 그린 <조용한 미국인>이 있더군요.아는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러들럼이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다가 요즘 뜸했던 것 같았습니다만...

ICE-9 2011-12-11 23:31   좋아요 0 | URL
저는 `조용한 미국인`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았는데 정말 좋더군요. 말씀하신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이 글에선 가장 대조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고르다보니 그린 보다 르 카레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 영화로 본 3부작이 잇달아 개봉됨으로써 다시금 러들럼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게된 것 같아요. 게다가 헐리우드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고 아마도 러들럼이 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번 작품을 읽다보니 들더군요. 방문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2-14 15:58   좋아요 0 | URL
저도 르 카레 좋아해요.그리고 에릭 엠블러. 고전적인 스파이물의 거장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