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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김선희 지음, 송진욱 그림 / 풀빛 / 2011년 5월
평점 :
영화와 광고...
시각이 특히나 패권적 감각이 된 현대에 와서 이 두 매체는 점점 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대중적 호응을 받았던 영화와 자본주의의 총아라 불리는 광고인지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매체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광고가 단지 보여지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저변에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그들의 욕망을 의도하는 쪽으로 충동질하고 또한 원하는 쪽으로 생각들을 통제한다고 말이다. 보통 이러한 시각들을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시각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는 셈이다. 영화와 광고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영화와 광고를 비롯하여 문화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다. 정확히는 스튜어트 홀에 의해 주도된 '문화 연구'가 활발하게 됨으로써였다. '문화 연구'는 문화가 있는 그대로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 생산에 있어서 부터 그 이면에 만든자의 의도와 목적이 개입되는 수단적 매커니즘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란 어디까지나 특정한 의도에 따라 특정한 효과를 노려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비관적으로 나아가면 문화란 통제된 대중을 생산하여 특정 체제의 사회가 지속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는 것이다. 특히 존 버거의 경우 'WAYS OF SEEING'을 통해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광고 사진에서 조차 에어브러쉬 기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충동질하고 특정한 생각들을 옹호하게끔 만드는 메세지가 감춰져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존 버거의 고발은 컬트 감독 존 카펜터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 역시 영화 'THEY LIVE'에서 존 버거의 논의 그대로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미디어에 의도적으로 숨겨진 메세지가 있음을 SF적(그러니까 특별한 선글래스를 쓰면 감춰진 메세지가 보인다는 식으로)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하지만 문화연구의 시각들이 비단 비관적인 전망만을 생산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논의를 통해 더욱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려 했던 것은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되도록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함으로써 문화를 생산하는 자들의 논리에 어리석게 이용되지 않게끔 하려 함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언어로 말하면 문화 생산의 저의에 깔린 '꼼수'를 밝혀 그 문화적 전략에 '쫄지 않고' 제대로 가지고 놀며 판단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문화연구'는 대중들에게 카펜터 영화에 나오는 그런 선글래스를 주려 한 것이다.(카펜터의 선글래스는 일종의 후설이 말하는 모든 판단 중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의 리셋(RESET)를 의미하는 '에포크'를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어느정도 진실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진실에의 자각은 단절로 부터 오니까 말이다.)
과연 문화가 그렇다는 게 사실일까?
너무 치우친 생각이 아닐까?
혹시라도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카펜터의 그 선글래스로 바로 이 책 김선희 작가의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을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영화와 광고에 대해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책이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이 이전에도 비슷한 시각의 책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감히 추천하는 까닭은 첫째 굉장히 쉽다는 점이다. 어떤 저작들은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좋은 얘기들을 하는데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김선희의 책은 그러한 거리감이 없다. 그는 이론틀 마저도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으며 그나마 논의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언급으로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을 때 들 수 있는 선입견, 그러니까 너무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둘째는 동시대성이다. 여기서 동시대성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얼마전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광고가 주 논의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문화연구'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시간'이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 나오면 거기서 논의되는 영화나 광고들이 하도 오래되어 이미 잊혀지거나 해서 사람들에게 얼른 다가오지 못하여 이해의 거리를 더욱 넓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 연구' 또한 시의적절하게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는데 김선희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감상했던 것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 하다.
셋째는 선명한 주제와 정연한 논의 구조이다. 책이 쉽고 따끈따끈한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 쉽게 가질 수 있는 약점은 너무 쉬운 것과 시의적절성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논의적 구조를 망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희의 이 책은 그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 그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방법론을 밝혀 놓는다. 그녀는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푸네스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두더지의 방법이다.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푸네스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처럼 영화와 광고를 다루는 데 있어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놓치지 않고 말하기 위해 그 푸네스의 방법을 쓸 것이라 한다. 그리고 두더지의 방법은 두더지란 원래 앞이 보이지 않아 정해진 길이 아니라 무작정 자신만의 길을 파헤쳐 가는데 그처럼 자신도 위로 부터 주어진 의미와 이론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길로 해석을 밀고나가 그 자체로서 저항의 길을 만들어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즉 이것은 대상과 해석에 따른 각각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있어서는 푸네스를 해석에 있어서는 두더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그 둘이 모여 이루는 것은 결국 지배적 주류가 보도록 허용하는 것에 맞서 그것을 전복하고 그와 독립되고 자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선명한 주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책 전체에 걸쳐 이러한 주제의식이 과연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선명한 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다. 이 책은 크게 네 개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발전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듯 하다. 그러니까 첫번째, '복제되는 현대 신화들'에서는 헤겔의 첫번째 단계인 '개인'에 대응해 영화나 광고를 통해 특히나 강요 혹은 이식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이 횡단되고 있는 '개인'을 그리고 두번째 '문화거울로 바라보기'에서는 헤겔의 두번째 단계인 '가족'에 그대로 대응해 현대의 신자유주의가 문화적 매체를 통해 가족의 위상을 어떻게 의도에 따라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탐색한다. 그리고 세번째 '공존을 위한 숙제들'에서는 그 논의를 이제 '사회적' 차원으로 넓히고 마지막 네번째 '지구 단위로 생각하기'에서는 근대와 생태환경 자체를 그 기반으로 삼는다. 이렇게 김선희의 논의는 헤겔의 정신의 발전 단계를 따라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시대와 지구 전체로 포커스를 넓혀가며 그 각각에서 문화 매체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앞에서도 말했듯 쉽게 독자들이 다가오게 하면서도 천명했던 푸네스의 방법을 잊지 않으며 각 단락 마다 선명한 주제 의식 마저 포기하지 않기에 개인과 시대, 지구 전체로 시야로 넓혀가면서도 자신만의 저항의 길마저 내내 이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논리를 자기의 말로 무장할 수 있게 되며 보다 더 커다란 시각 위에서 주입되거나 유포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마저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이렇게 하면서도 이런 내 말이 더 어렵게 여겨질 만큼 끝까지 쉽고 편하게 독자들을 데려간다는 점이다.
알고 있듯이 현실은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말은 현실은 그저 순수한 현실이 아니라 사람을 언제든 홀리려고 드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전략과 전술이 횡행하는 중첩된 장(FIELD)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쉽게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란 말도 있듯이 어느샌가 그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의 모든 신체와 감각 기관마저 그 얼기설기 엮어진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경마장의 말처럼 한쪽만 보도록 색안경이 자기도 모르게 씌워졌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조정된 신경조직으로 진실을 감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내 감각이 착란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가 온전한 주체가 되도록 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거울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그 거울에 비친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보고 온전한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당신 역시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그 진실한 위치를 알고싶어졌다면 이 책이 그 거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선글래스를 쓰는 것 만큼이나 손쉽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로 기꺼이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