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노브레인은 변했다
이명박 후보의 로고송으로 쓰인 <넌 내게 반했어>…
혈기 넘쳤던 그 밴드의 10년 전을 회상하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 출처 : <한겨레21> 제 688호 2007년 12월 06일


본격적으로 대선이 시작되면서 후보들이 로고송을 내놓았다. 물론 기존 인기곡들을 개사한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로고송들이다. 온갖 의혹에도 떨어지지 않는 철의 지지율을 과시라도 하듯, 쌍끌이 어선을 동원해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노래들은 다 갖다붙였다. 박현빈의 <오빠만 믿어>, 슈퍼주니어의 <로꾸꺼>, 올라이즈밴드의 <무릎팍 도사> 시그널, 그리고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다. 응? 노브레인?


△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로고송은 박현빈의 <오빠만 믿어>, 슈퍼주니어의 <로꾸꺼>,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 등이다. 그런데 노브레인이라고?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문민정부에 퍼붓던 욕설

한국에서 연예인은, 특히 가수들은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걸 움찔해한다. 대중의 인식이 가수가 정치에 관련되는 걸 영 마뜩잖아하는데다 줄을 잘못 섰다가 어떤 피해(요즘은 네티즌들로부터)를 입을지 몰라서다. 지난 대선 때 공개적으로 한 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에까지 참여했던 신해철도 그 뒤 꽤나 당한 모양인지 올해 새 음반을 낸 뒤 가진 인터뷰에서 아주 학을 떼는 걸 지켜봤다. 그래서 한국에서 어느 가수나 작곡가가 특정 후보에게 자신의 노래를 로고송으로 제공했다고 해서 정치적 행동으로 볼 필요는 없다. 별로 그렇게 보는 사람도 없다. 그건 그냥 거래일 뿐이다. 그래서 <오빠만 믿어> <로꾸꺼> 같은 노래가 쓰이든 말든, 사실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노브레인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는 노브레인은 <넌 내게 반했어>다. 영화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며 그 노래를 부른 노브레인은 영화의 흥행 결과 이상의 수혜를 받았다. 공중파에 진출한 건 물론이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국을 돌며 온갖 축제와 행사에 불려다녔다. ‘노브레인이 행사계를 쓸고 다닌다더라’라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다. 나는 노브레인의 10년 친구다. 친구로서 그들의 성공을 축하해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선 로고송에 노래가 쓰였으니 꽤 짭짤했겠구나, 라며 축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이명박’으로 가사가 바뀌어 흘러나오는 노브레인의 노래를 듣는 기분은 착잡하다. 이건 내가 다른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뚜렷한 지지 후보도 없거니와, 친구의 노래가 내가 싫어하는 후보의 로고송으로 사용된다 해도 받아들일 톨레랑스 정도는 갖고 있다. 친구 얘기를, 그것도 안 좋을 수도 있는 얘기를 공적인 지면에 쓰는 게 썩 내킬 리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들의 옛날 모습이 떠올라서다.

노브레인의 1999년 EP <청춘 98>은 한국 펑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 해도 좋다. 네 곡이 담겨 있는 이 음반에서 마지막에 실린 곡은 <아주 쾌활한>이란 노래다. 당시 기타리스트였던 차승우가 곡을 썼고 지금도 노래하고 있는 이성우가 가사를 썼다. 99년 발표됐지만 96년쯤 만들어진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문민정부 좆까는 소리/ 문민정부란 개소리는 개한테나 줘버려라… 씨발 청와대/ 씨발 안기부….’ 97년 발표한 위퍼와의 합동 음반에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노래가 담겨 있다. 역시 이성우가 가사를 썼다. ‘우리가 가진 건 분노와 소외감/ 질리게 들어온 강요와 설교뿐/ 잘사는 사람 계속 잘살고/ 못사는 사람 계속 못사는….’ 2001년 노브레인의 2집에서 이성우는 <투혼>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가슴속에 그려진 고통을 지워버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마음속의 투혼을 목 터질 듯 불러보리라.’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밥 말리의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라는 말을 실감하곤 했다. 동세대에 이런 이야기를 멋진 음악으로 들려줄 수 있는 친구를 두고 있다는 게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꽤 많은 소년소녀들이 그런 노브레인의 음악과 태도에 감화되어 펑크 키드의 길로 들어섰다.

나이테 없는 성장?

그때의 노브레인과 지금의 노브레인을 단순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초기의 음악적 두뇌였던 차승우가 2집을 끝으로 탈퇴한 탓이다. 그 뒤 <넌 내게 반했어>를 발표하고 성공을 거둔 뒤 가진 인터뷰에서도 노브레인은 “우리는 변했다. 예전의 노브레인과는 다르다”라고 천명하곤 했다. 인정한다.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영원한 반항아란 좀처럼 찾기 힘든 법이다. 그들도 성장했다. 사람의 성장은 나무와 같다고 생각한다. 나무를 베어보면 중심에서 주변으로 나이테가 퍼진다. 묘목 시절의 흔적을 지키며 나무는 자란다. 노브레인이 문민정부의 후예인 이명박을 지지해서 로고송을 제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거래일 뿐이니까. 다만, 10년 전부터 꽤 오랫동안 지켜오던 패악질과 혈기의 흔적이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이명박의 로고송으로 사용된 <넌 내게 반했어>를 들은 날, 친구에게 이런 심경을 토로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는 되물었다. “그래도 꼭 그래야만 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담배만 피워댔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스피커에서는 루시드 폴의 신곡 <사람이었네>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역시 옛 친구의 하나다. 이 노래에서 루시드 폴은 제3세계에 가해지는 선진국들의 착취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폭력.’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오랜꿈 -------------------------------------------------------------------------------------------

요 며칠 사이 5년마다 이사하는 '철새'들이 집을 옮기느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 같다. 뭐 그건 그네들의 직업의 '본질'이니까 그렇다 치고, 록뮤지션의 이사(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는 좀 생뚱맞다. 아래 인용해 놓은 베이시스트 정재환의 "노브레인" 탈퇴 관련 기사가 나오고, 곧바로 <넌 내게 반했어>의 이명막 후보 로고송 사용 소식이 나오자 정재환의 탈퇴가 과연 이것과 무관할까, 라는 추측들이 난무했다. 글쎄, 록이 저항정신을 잃으면 그게 록일까? 쩝, 시대가 어느 때인데 케케묵은(?) 록의 진정성이니 어쩌니 하는 사람이 있을까만.

허접한 연예인들의 이명박 지지선언은 '그래? 그건 네 자유다' 하며 별일 없는 듯 냉소하며 넘어갈 수 있는데, 시대의 불의를 이야기하고,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던 록뮤지션의 '이상한' 행보는 어딘지 '정치적 변절자'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긴 정치적 변절자를 따지자면 아무리 싫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접하게 되는 현 한나라당 대변인 박형준 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80년대 사회과학계의 이론가요, 90년대 초반 노동문제의 전문가로서 '계급적대'를 그렇게 외치던 인간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학계에도 평소에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이 어떠니 계급이 어떠니 진보가 어떠니 하면서 정작 대통령 선거때만 되면 후보단일화니 어떠니 하는 교수나 '지식인'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입으로는 '계급적대'의 해결을 외치면서 그나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진보정당조차 외면하고, 그 적대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하고 새로운 실천의 기획에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냉소와 조롱을 보낸다.

어쩌면 이건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알라딘은 어떨까? 그래도 이곳은 아니다, 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노브레인' 정재환, 11년 몸담은 팀 탈퇴

"추구하는 음악 노선이 달라…서로 인생의 길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

▣ 방송연예팀 이해리 기자
▣ 출처 : <노컷뉴스> 200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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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일전에 페이퍼로 심경을 토로한 바 있지만, 노브레인의 행보는 매우 씁쓸합니다. 정재환의 탈퇴와 로고송의 시점이 딱 들어맞는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이고. 음... 10년 지기 친구라 하는 김작가가 - 요새 이분 여기저기 활동 많이 하시던데 어떤 사람인지 궁금 - 요 정도 글을 공개적으로 썼다면, 다른 분들이야 더 말 할 필요 없겠죠. -_-

내오랜꿈 2007-12-13 23:41   좋아요 0 | URL
노브레인을 해부하는 김작가라는 사람이 심정은 정말이지 이해가 갑니다. 개인적 친분이 없는 사람의 책에 관한 서평도 공개적으로 쓸 때는 안 좋은 소리하기가 많이 망설여지거든요. 알라딘에 와서 읽지도 않은 책들에 막말을 하는 것을 보고 좀 놀라긴 했지만요...

Mephistopheles 2007-12-1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습이 포장이였고 지금의 모습이 진짜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종종합니다. 이번 대선은 여러모로 찡그리는 일들이 많이도 발생하는군요..

내오랜꿈 2007-12-14 11:1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의 음악에서 단순한 내짖음만 있었지 그 어떤 '깊이' 같은 건 느낄만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Scott 2008-03-1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읽었습니다.
96학번으로 홍대 인디씬의 시작을 보아왔던 저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특히 노브레인이 말이죠. 그래서 계속 마음속으로만 왜? 베이스까지 탈퇴할까?
라고 생각해왔죠. 그에 대한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향포럼]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연구위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2월 09일


얼마 전 영화 색, 계(Lust, Caution)를 보았다. 와호장룡, 센스앤센서빌러티, 브로큰백마운틴으로 이어지는 이안 감독의 이력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리뷰가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무삭제된 것은 정사장면만이 아니었다. 1940년대 일본 점령 하, 지독한 궁핍과 도처에서 벌어지는 살인 행위 속에서 식량을 얻기 위하여 무표정하게 줄 서있는 상하이 서민들, 그들의 모습이 무삭제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름이 불려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주인공과 조연들뿐, 그렇게 서있는 서민들은 거리나 건물처럼 하나의 배경이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던 사람들의 긴 줄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 사회 양극화 그늘의 노동자들 -

1984년 초겨울, 지금은 디지털 단지로 바뀐 구로공단의 토요일 오후 퇴근길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어린 10대, 20대의 여성 노동자들 중 일부는 대학마크가 커다랗게 찍힌 노트를 하나씩 들고 있곤 했다. 달리 보이고 싶고 다른 이름을 갖고 싶은 소박한 욕망이 대학노트를 쥔 손에 점점 더 힘을 넣을 즈음, 그들 뒤를 따라가던 한 무리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공순아, 치마에 실밥 묻었다!” 순간 대학노트를 들고 있던 여성들이 치마를 보려고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고 곧바로 터져나온 젊은 웃음이 거리를 뒤덮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쳐지나가는 배경이었을 뿐인 그들 사이에서 이름이 불려졌다. 간혹 산업역군으로 미화되곤 했지만 공장의 미싱이나 옷감처럼 간주되었던 사람들이 이름을 통해 갑자기 배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 기억 탓인지 문득 색, 계의 배경이었던 서민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간절한 충동에 극장 문을 나섰다.

2000년대, 필자의 컴퓨터와 책상 앞에는 비정규직, 간접고용노동자, 사내하청노동자, 근로빈민, 빈곤여성, 이주노동자의 통계 자료가 넘쳐난다. 비정규직 입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규모는 2006년 대비 0.4% 늘었고 그 중에서도 건설일용이나 간병인 등 일일근로, 청소경비 및 단순사무 등의 용역 및 파견근로가 현저하게 늘어 고용의 질은 개선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시간당 급여 및 월평균 급여는 지속적으로 떨어져 300인 이상 정규직 월평균 임금 294만5000원을 100으로 할 경우 100~299인 사업장의 비정규직 임금은 59.4%, 30~99인 사업장은 52.6%로 점점 줄어들다가 5인 미만 사업장의 비정규직은 28.9%인 85만원을 받는다. 월평균 급여 100만원 미만을 받는 노동자들이 200만명이 넘고 이들의 사회보험 및 기업복지 수혜율은 10% 수준이 되기도 어렵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근거자료이기도 한 통계수치 앞에서 반문한다. 혹여 필자 역시 이 사람들을 사회양극화의 배경으로만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살아있는 존재로서 확인하기 위해, 통계 수치 아래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무엇을 하였을까? 분신과 자살, 집단적 저항을 통해 스스로 이름을 드러낼 때까지, 두 눈 가득 눈물을 담고 통곡하는 모습이 간혹 언론에 비춰질 때까지 필자는 무엇을 하였던가.

- 비정규직·이주노동자 기억을 -

대통령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대선 주자의 이름만이 하루에도 수백번씩 호명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지 모른다. 그래도 부르고 기억해야할 이름이 있다. 까지만 위원장, 라쥬 부위원장 겸 서울지부장, 마숨 사무국장. 11월 말 길거리에서 체포되어 청주 출입국보호소에 갇혔다는 이주노조 임원들이다. 이랜드, 코스콤의 노동자들 이름도 애써 찾아본다. 직업으로서의 교수나 연구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나 연구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차마 대답을 못한 12월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싶은 변명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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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나어릴때'님이 포스팅하신 이주민의 날 집회 소식과 출입국관리법 개악에 관한 지적을 볼 수 있다.

이주민의 슬픈 현실, 2007 이주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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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코뮨주의 선언’ 펴내

강성만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들이 안산의 이주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구원들은 지난해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노동자 및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모임을 갖고 집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실천 활동을 펼쳐 왔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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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면 역시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봐야 한다. 궁금하신 분들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홈페이지(http://www.transs.pe.kr/)에 들러보기 바란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곡해된 프리즘으로 이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들이 펴낸 <소수성의 정치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수성의 정치'에서 '전위'를 찾아내는 무지함을 용감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의 그 어느 '연구집단'도 새만금 반대투쟁의 일환으로 삼보일배투쟁이나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집단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 역시 왜 이들의 실천적 모습이 하필 이러한 문제에 발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꼬뮨주의'를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핵심으로 참여하고 있고, <꼬뮨주의 선언>의 공저자의 한 사람인 이진경씨와의 대담이다. 상당히 오래전(2,000년)의 대담이지만, '꼬뮨주의'의 사상적 모태는 이때부터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일차적으로는 1997년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이미 그가 말하는 '꼬뮨주의'의 기본적 골격이 갖추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꼬뮨주의에 대한 단상
[인문학데이트] ⑨ 이진경

글 고명섭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0년 07월 20일


인문학 데이트 아홉 번째 초청자는 이진경(37)씨다. 이씨는 약관 25살 때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마르크스주의 원전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학생운동 조직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출감 뒤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강의와 공부를 하고 있는 그를, 같은 공간에서 강의를 한 바 있는 권보드래(31) 서울대 강사(국문학)가 만나 <수학의 몽상> 등 그의 저서들을 놓고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근대에 묶인 사람'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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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7-12-1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이진경은 현실 너머에 메달려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글을 읽을 적마다 불편했습니다. 그의 글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한다면 좋을 듯 싶은데 1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글에 달린 수많은 주석들이 글읽기를 방해하곤 합니다.

내오랜꿈 2007-12-13 00:2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런데 그의 글에 달린 수많은 주석이 달린 책이란 어떤 책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아는 한 그의 최근 주저인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은 주석이 아예 하나도 안붙어 있고, <미래의 맑스주의>(2006>는 거의 주석이 없는데요. 이 책들 말고 최근에 나온 그의 책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ntitheme 2007-12-13 00:41   좋아요 0 | URL
최근 책들 중 많이 읽진 않았지만 <미래의 맑스주의>의 경우 주석보다는 수많은 인용이 가독성을 떨어뜨리더군요. 전 인용 많은 글도 별로 안좋아하는 성격이라...

내오랜꿈 2007-12-13 00:56   좋아요 0 | URL
ㅎㅎ..
무시하고 읽으시면 될텐데...^^
그래서 요즘은 많이들 인용은 후주로 일괄 처리하잖아요(<미래의 맑스주의>도 그렇고...).

어쩌면, 인용은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번역서들의 경우는 특히나 어쩔 수 없는 것일테고요.

antitheme 2007-12-13 00:59   좋아요 0 | URL
수유+너머나 이진경의 성과들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진경의 글에서 맑스,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의 어록(?)이 사라지고 현실과 그의 육성이 담긴 글이 나와서 좀 더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듭니다. <사사방>, <현실과과학>, <노급> 등에서 보여줬던 나름의 벽과 한계를 아직은 깨뜨리지 못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학자로서 이진경보다는 그이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성과물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오랜꿈 2007-12-13 01:28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생각할 때 <현실과 과학>이나 <노급>의 그림자는 90년대 중반 이진경이 <문화과학> 그룹과 교류할 때까지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푸코, 들뢰즈를 경유하면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도 어느 정도 일차적인 단절을 겪습니다(97년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이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경계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2000년 이후 이진경에게서 알뛰세르나 발리바르의 그림자는 조금 찾기 힘들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맑스주의자에게 맑스를 버리라는 건 좀 너무 가혹한 것 같고요..^^

오히려 이진경이나 그의 동료들은 '꼬뮨주의'를 정식화하면서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같은 그들이 한때 기대었던 사람들보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용수의 <중론>이나 <벽암론> 등 불교 사상, 아날학파의 역사학 등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현재의 이진경보다 안티테마님께서 더 많은 '이진경의 옛그림자'를 짊어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바라 2007-12-13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껏해야 철굴을 통해 그의 저서를 접했을 뿐인 저는 이진경을 잘 모릅니다만 최근의 미-래의 맑스주의 같은 책을 예전에 어설프게 읽은 기억으로는 이진경씨에게 알튀세르는 거의 의미가 없는 듯 했고 들뢰즈나 네그리를 주된 전거로 삼는 듯 했습니다. 이진경씨에 대해서는 예전에 무영이란 분이 올려놓으신 글이 생각나네요.(http://blog.aladdin.co.kr/muratova/870232) 뭐 저는 한참 공부가 짧아 뭐라 가치판단은 못하겠지만; 수유너머라는 집단이 흥미롭다는 생각은 듭니다

내오랜꿈 2007-12-13 10:06   좋아요 0 | URL
네에, 이들의 코뮨주의에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아우토노미아운동'의 흔적이 많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영님의 글은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기본적인 정보에서 잘못된 게 있습니다. 이진경은 63년생이니까 <사사방>을 쓸 때는 24살인데 27살로 되어 있군요. 아마 인물정보에서 착오가 있으셨던 듯. 그리고 황우석 교수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가 정말 들뢰즈와 노자에게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고 한 대목도 너무 단순화시킨 전제를 만들어놓고 비판의 논지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코뮨주의'가 들뢰즈와 노자에게만 전적으로 기대어서 나온 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판하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제가 일별한 느낌이 그랬습니다.
 

지적 인종주의
홍세화칼럼

홍세화 기획위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 홍세화 기획위원
학업 성적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을 낳는 것을 ‘지적 인종주의’라면서 강하게 비판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인종주의자들이 인종에 따른 차별을 당연히 여기듯이, 우리는 학교 성적이 사회적 차별을 가져오는 것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내면화된 ‘지적 인종주의’는 미성년자들에게 ‘너는 1등급’이고 ‘너는 9등급’이라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도 마다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야만의 교육은 야만의 사회를 낳는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쌍둥이 자매 여고생이 나란히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일단짜리 기삿거리도 되기 어렵다. 불감증도 이미 중증에 이른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부모가 가진 재산과 비례한다는 뉴스도 이젠 놀랍지 않다. 철저히 서열화된 대학 졸업장의 효용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전적으로 부모 능력에 따른다. 주택 보유 능력처럼 교육자본도 부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 자식은 부모 재산이 가진 힘에 민감히 반응하도록 일찍부터 학습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자식과 부모 사이의 생명에 관한 그 무궁한 의미와 찬가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져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며 인간과 자연을 알아가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쳐 나가는 관계는 돈의 위력 앞에서 왜곡되었고, 일그러진 교육제도가 주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한낱 초라한 시 구절에 불과한 것이 돼 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오로지 등급과 등수를 매기는 데서만 의미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가령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80/100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점수가 몇 등이고 몇 등급인가만 중요하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교육이 교육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교 교실과 학원 강의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 영역도 지극히 좁다. 주어진 영역, 닫힌 영역에서 등수와 등급 경쟁을 하기에 끊임없이 선행 학습, 반복 학습을 거듭하면서 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는 배경이다.

더욱이 인문사회과학은 본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학문임에도 등급과 등수를 매겨야 하므로 학습 내용은 단답형, 객관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문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게 하지 않는 대신,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만 묻고 그 결과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인간을 이해하는 눈이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지배와 그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된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반노동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로 등급, 등수를 매기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학력 차별과 지적 인종주의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누군가 지적했듯이, 주어진 사회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보다도 훨씬 넓고 다양하다. 등급제 문제로 말이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절망과 체념을 내던지는 일이다. 대학 평준화에 대한 적극적 상상력은 지적 인종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학부모가 알아야 할 것 - 교고등급제에 대한 논란

홍세화 기획위원
출처 : <한겨레신문> 2004년 09월 25일


고교등급제에 대한 분노의 심정을 담은 한 학부모의 글을 읽었다. 서울 강남권 바깥에 산다는 그는 능력만 된다면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 자신 교육이민을 강요받은 처지가 됐었고 그래서 지금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을 수 만은 없었다. 세살과 여섯 살이었던 두 자식이 무상교육제도의 혜택을 받아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고마웠던 일은 아이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도 불평등을 겪지 않아 기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에게 불평등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다. 더욱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는 것은 민주주의사회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보편 원칙이다. 그것이 버젓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부유층 자식들이 서울대를 점령하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울대의 문은 치솟는 사교육비와 족집게 과외비를 충당할 수 있는 부유층에게 넓게 열려 있다. 이에 뒤질세라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이 집안 출신배경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있음이 의혹의 수준을 넘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 땅의 교육계 귀족들은 사회구성원들을 입시지옥의 질곡에 집어넣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강남의 부유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학생과 학부모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있다.

오늘날 경제적 자본과 부는 재산뿐만 아니라 교육자본까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 부, 권력, 명예가 사회귀족의 독점물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그런 용들조차 개천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채 사회귀족의 권위를 즐기며 교육을 통한 계층순환을 도모하지 않는다. 빈익빈부익부는 더욱 심화되고 열악한 사회안전망 아래 사회상태는 더욱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어린 사회구성원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언뜻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경쟁은 이미 누구에게나 열려있지 않다. 부유층 자식들이 승자의 모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치열한 경쟁과정은 계층의 고착화와 대물림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거짓 속임수에 가깝다. 동시에 경쟁에서 승리한 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교육과정 자체가 이미 인권침해 과정이니만큼 인권을 침해하는 지배까지 받아들이도록 하며, 학교에서 강조되는 질서의식과 더불어 ‘경쟁에서 이긴 자의 질서에 승복하라’는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속하도록 한다. 사회귀족의 대물림 지배가 사회구성원의 비판과 견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사회귀족은 비용을 투자했고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보상인양 인식한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찾기 어렵고, 비판과 견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오만과 뻔뻔함을 내면화한다. 귀족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능력도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머리 좋다는 학생들을 긁어모은 위에 특별법으로 특혜를 받은 서울대의 국제경쟁력이 세계 150위권 밖에서 맴돌고 있는 실정은 대부분의 사회귀족들이 자랑하는 학벌이라는 교육자본이 국내경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보잘것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의식도 없는 사회귀족들의 대물림 지배구조. 그러나 이 땅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모두 내 자식만의 계층상승만을 도모한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 구조를 불평 속에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마치 로또복권 횡재의 기대와 상상 속에서 오늘의 잘못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의 자식이 스카이(S.K.Y)대학을 통해 사회귀족의 반열에 입문할 가능성은 학부모가 로또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이 땅의 학부모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노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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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이 없는 학문에 자꾸만 답을 하라하니... -_-

내오랜꿈 2007-12-12 17:28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 옮겨 놓고 나니 옛날에 비슷한 주제로 홍세화 선생이 썼던 글이 생각나서 찾고 있는 사이에 아프님이 들리셨군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다른 것은 뭐 현재의 여당이나 정책이란 게 '그나물에 그밥'이라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 교육정책 만큼은 조금 걱정됩니다.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몇십년 뒤에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교육인데, 지금도 엉망인 것을 더 엉망으로 만들테니 말입니다.

우일신 2007-12-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의 돈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구까지야 뭐라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희와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문제를 삼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돈과 권력 뿐 아니라 부모들의 욕심과 세계관까지 고스란히 세습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세태는 정말 안타깝죠. 정년퇴임을 앞둔 김수행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즘 서울대 학생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잘 모른다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덕에 소외된 이웃들과 부딪힐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는 것이겠죠. 내오랜꿈님이 말씀하신 대로 결국 교육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요....

내오랜꿈 2007-12-13 00:1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부모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자식에게 '세습'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한테 대선에서 누구 지지할 거냐,고 물어보면 아버지가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대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
 

"당신이 사는 곳도 태안반도처럼 될 수 있다"
홍성태의 '세상 읽기' <17>'위험사회' 대한민국

홍성태/상지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2월 11일



» 아름다운 경관과 국내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으로 유명한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변에서 8일 뿔논병아리 한 마리가 유조선에서 쏟아져 나와 해안까지 밀려온 기름을 뒤집어쓴 채 숨져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 <한겨레신문>(2007 12 10)에서 인용

  지난 여름에 태안반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아내가 오래 전부터 태안을 가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다가 결국 못 가고 말았다. 얼마 뒤 가로림만을 막고 조력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긴장하고 분노했다. 조력발전을 명분으로 가로림만을 방조제로 막아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발업자들과 지주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겠지만 가로림만은 크게 훼손되고 말 것이다. 가로림만 조력발전계획은 시화호 조력발전계획, 강화도 조력발전계획 등과 함께 반드시 막아야 할 신개발주의의 개발계획이다. 자연과 문화를 내세우며 자연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한 개발주의이다. 복원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한 '청계천 복원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태안 오염 재해 지역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태안반도를 덮쳤다. 2007년 12월 7일 아침 7시 15분에 인천대교 공사에 사용되고는 거제로 이끌려가던 거대한 크레인이 유조선을 들이받아 유조선에 구멍이 나서 무려 1만500kl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든 것이다. 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나흘째인 12월 10일 밤 현재, 태안반도의 바다 8000여ha가 기름으로 뒤덮였고, 양식장이 밀집한 가로림만도 위험하다고 한다.
  
  8000ha는 무려 8000만㎡이고, 평수로는 무려 2420만 평이다. 여의도의 27배를 넘는 넓이의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기름으로 뒤덮이는 순간, 생명의 바다는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만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기름에 뒤덮여 고통스럽게 허덕이다가 죽는다.
  
  1990년 8월에 발발한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유정들을 파괴했고, 이 때문에 많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 많은 생명체들이 죽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름에 뒤덮여 허덕이며 죽어가던 가마우지의 모습은 걸프전의 끔찍한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태안반도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나먼 아라비아해에서 벌어졌던 무서운 일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대참사가 2차 오염, 3차 오염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뿌린 유화제도 바다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름오염은 곧 유화제 오염으로 이어진다. 유화제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다를 깊이 죽인다. 기름과 유화제는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면서 공기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이미 태안반도 일대의 공기는 크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는 자연을 파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 속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아예 '위험사회'라고 부른다. 실로 우리는 편리하고 풍족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위험사회'는 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 같은 '위험사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잘 드러났듯이 아주 심한 위험사회에 속한다. 극히 위험한 과학기술을 관리하는 사회체계가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을 가중시키는 부패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위험대책을 수립했다.
  
» 아름다운 모래 언덕에 소나무가 자라는 특별한 풍광으로 유명한 충남 태안군 신두리 해수욕장에서 10일 오전 불가사리가 검은 기름에 덮여 죽어가고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정부의 정책이 크게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흔히 '인재'로 표현되는 '위험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부실한 사회체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이제까지 제시된 주민의 증언이나 수사내용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주민들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대형선박들을 무단정박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인재'라고 주장했다.
  
  사고 지점에 가장 인접해 큰 피해를 입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은 피해가 확산된 것이 어설픈 대처에 따른 '인재'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배의 주차장과 같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유조선과 화물선을 정박해 이 곳을 지나는 배들과 충돌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사고 지점은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고시한 표박지와 3마일 떨어진 지역으로 기름유출 대재앙을 불러온 주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태안군 어선 조합원인 이모(60)씨는 "태안화력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유조선 등이 이번 사고 지점에서 며칠 머물렀다"며 "표박지로 고시한 곳이 아닌 곳에 며칠 동안 정박해 있어 단속을 건의해도 대산해수청은 이를 외면해왔다"고 말했다.('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들', <국민일보>, 2007년 12월 10일)

  
  또한 대산해양수산청과 크레인의 예인선 사이에 규정대로 소통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양자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했는가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고를 막아야 할 당사자들이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사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밝혀지겠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엉터리 같은 것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해경 조사에서 대산해양수산청 관계자들은 "예인선이 호출에 응답하지 않았고, 크레인을 실은 부선과 예인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진 상황도 전혀 보고 받지 못했다"며 예인선 측에 책임을 미뤘다. 이에 대해 예인선 관계자들은 "관제실에서 VHF 16번으로 호출해야 하는데 12번으로 호출하는 바람에 교신이 안됐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들은 항상 VHF 통신 16번 채널을 켜놓고 항만 당국의 비상호출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의혹이 쏠리는 부분은 휴대폰 통화 이후다. 관제실과 예인선 선장간 통화가 있은 뒤 1시간 정도면 예인선이 유조선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만약 이미 예인선과 부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관제실과의 통화 때 이를 보고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충돌 때까지 와이어가 끊어졌다는 보고는 관제실에 접수되지 않았다.
  
  대산해양수산청도 안이한 대처로 의혹을 사고 있다. 항로 이탈과 충돌 위험을 인지한 뒤 예인선을 VHF로 두 차례나 호출하고, 휴대폰으로 경고까지 했지만 이후로는 충돌 시까지 별다른 확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크레인은 대산해양수산청의 경고에도 불구, 항로를 크게 벗어나 유조선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관제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죽음의 바다' 책임회피만 둥둥', <한국일보>, 2007년 12월 9일)

  
  삼풍백화점은 왜 붕괴했는가? 붕괴를 막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절차가 있었으나 부패로 말미암아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사고에서도 제도와 절차가 멀쩡히 있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패 때문인지, 단순한 태만 때문인지, 혹은 그저 실수였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기구를 설립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추구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츤은 <정신의 생태학>에서 오늘날 겸손은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의 요청이라고 지적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연구한 미국의 조직사회학자 찰스 페로우는 조직적 복잡성 때문에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완전히 안전하게 관리할 방도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연구의 성과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나흘째인 10일 오후 충남 태안 앞바다 양식장이 기름띠에 둘러싸여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태안반도의 대참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확연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구 자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 이러한 위험을 결코 안전하게 관리할 수 없는 현대 사회체계의 위험에 전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핵발전정책의 중단, 대형 송전선로 건설의 중단, 그리고 '경부운하' 구상의 폐기 등은 그 구체적 과제의 예이다.
  
  낙동강과 한강에서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미 1991년 봄에 낙동강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한 달 새 두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위험사회 한국은 파멸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무조건 경제, 무조건 성장이 아니다. 파멸을 향해 치달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과제이다.



서해안 초대형 환경 재앙 예고

태안 앞바다 최악 기름유출
국립공원 바다생태계 장기 영향 불가피
검은머리물떼새 등 천연기념물 보호 위기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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