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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D를 정리하다가 언젠가 '재고정리'(?) 뭐 이런 거 할 때 구입한 뒤 쳐박아뒀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발견했다. 목차를 훑어보다 눈에 익숙한 '하바네라'가 들어왔다. 익숙한 이유는 순전히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카르멘』 - 그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내가 EBS 『주말의 명화』를 가끔씩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보는 이유는 언젠가 보긴 봤었지만 자꾸만 잊혀져 가는 영화들을, 그리고 감독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주 상영작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카르멘'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 원작 소설이나 이를 바탕으로 작곡한 비제의 오페라를 본 사람들은 또 드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물론 읽거나 본 적이 없다. 오페라야 뭐 내 수준에 언감생심이겠지만, 원작 소설 역시 몇 번인가 읽어볼 생각은 했었지만, 결국 손이 가지 않았다. 읽지도 않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그 내용을 너무 뻔히 알고 있다는 선입견도 작용했고, 걸작이라고 선전되는 외국의 번역체 소설을 읽어서 감흥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개인적인 경험 역시 한 몫 했으리라.

영화로 나온 『카르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대여섯 편은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과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카르멘』일 것이다(우연인지도 몰라도 둘 다 1983년에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르의 『카르멘』을 더 흥미롭게 봤었지만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은 플라멩고 춤 하나만으로도 꼭 한번은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카르멘'과 '플라멩고'의 결합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찾아본 사우라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많진 않은데, 『사냥』, 『사촌 안젤리카』,  『질주』,  『까마귀 기르기』, 그리고 『카르멘』.

카르멘에 스페인의 전통춤 플라멩고를 결합시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철저하게 스페인의 전통과 역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우라 감독의 초기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사냥』(1965)은 토끼사냥에 몰입하는 무리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프랑코 정권하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우라 감독의 스페인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이슈는 『사촌 안젤리카』(1974)에서도 계속되는데, 폭압적인 정치상황(=프랑코 독재정권시절하의 스페인에 대한 은유)을 겪어낸 한 남자의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이렇게 자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성을 쌓은, 이 스페인의 국민감독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996년작 『까마귀 기르기』. 이 작품에서도 프랑코 독재정권이 스페인 사회에 미친 영향을 한 평범한 가족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자이크처럼 맞물린 흥미로운 구성을 통해 과거(프랑코 독재정권하 스페인)를 오늘의 스페인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결정판은 『질주』라 할 수 있다.  사우라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고집스러울 만큼 '과거'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질주』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 한 가지. 독재정권이 끝나면 당장 평화와 자유가 오는 것일까?, 라는 것.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벌이는 은행강도 사건을 소재로 삼아, 사우라 감독은 프랑코 정권 '이후' 80년대 스페인 사회가 체험한 무기력과 좌절감을 그려낸다. 원제인 '빨리빨리(Deprisa, Deprisa)'가 말하는 역설은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은유한다고 한다. 1981년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황금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은유'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래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는 힘든 '필모그라피'를 지닌 감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카르멘』은 이런 걱정을 붙들어매도 괜찮을 흥미로운 작품이다.

『카르멘』은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의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써,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고의 마술적인 안무와 열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카르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보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흡인력 있는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플라멩고 춤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는 안무가와 카르멘역을 맡은 댄서가 극의 내용과 똑같은 형식의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이야기를 무용극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더 덧붙일래야 덧붙일 건덕지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헷갈리는 지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자소설'의 형식처럼 극의 내용과 영화적 현실이 혼동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바로 이 지점, 곧 플라멩고의 영혼을 울리는 진실성과 비제의 오페라가 갖는 허구성과의 대립에서 생겨나는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는 미묘한 움직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영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플라멩고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멩고가 무엇인지, 춤 같은 것에 관심없는 사람은 볼 필요도 없는 영화가 아니냐고? 천만에. 극단적인 플라멩고 혐오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플라멩고와 이를 절묘하게 포착해낸 사우라 감독의 뛰어난 카메라워크 그리고 두 주인공의 연기에 몰입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복잡한 구성과 화려하면서도 대담한 영상으로 스페인의 어두웠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작품들을 주로 만들어온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플라멩고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카르멘』. 그 사랑과 영혼의 춤이 시작되는 무대 위로 한 번 떠나보시길...

2004 01 07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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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음악영화 ‘원스’ 10만 관객 돌파
 <한겨레> 2007 10 31


» 원스
아일랜드 인디 음악영화 '원스'가 전국 1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원스'의 수입배급사 영화사 진진은 "지난 28일을 기준으로 총 관객수가 10만7천499명에 이르러 10만 관객 고지를 넘어섰다"며 "국내 개봉 인디영화 중 최고 기록"이라고 31일 밝혔다. 9월20일 개봉 당시 10개 상영관에서 시작해 현재 15개 상영관으로 늘어났다.

이 정도 스크린 규모에서 10만 명이 넘었다는 것은 상업영화로는 최소한 500만 고지를 넘긴 것과 비슷하다. 인디영화의 경우 전국 1만 관객만 돌파하면 흥행 성공작으로 여긴다.

영화의 인기와 함께 'Falling slowly' 'If you want me' 등이 실린 O.S.T도 1만 장 이상 팔렸다.

'원스'는 아일랜드 인디밴드 더 프레임즈의 리더인 글렌 한사드와 체코 출신 뮤지션 마르게타 이글로바의 뛰어난 음악성과 함께 담백한 연기가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영화.

존 카니 감독은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깔끔하게 그려냈다.

(서울=연합뉴스)


내오랜꿈 ---------------------------------------------------------------

"<원스> 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란 참으로 단순해 보인다. 적절한 대목에 제대로 연주를 하면 된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 집중하거나 그들의 표정에 집중하거나, 적재적소에서 자리를 잡기만 하면 화음은 완성된다. 다양한 악기나 번쩍이는 조명 또는 환호하는 군중이 없어도 말이다. 또한 좋은 노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의미에 앞서 정서를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원스>가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기 할리우드의 로맨티시즘을 부활시킨 느낌을 주는 것도 결말의 유사함만은 아닐 것이다. 로맨티시즘은 음악처럼 은근히 스며들어야 신파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원스>는 그런 점에서 올 가을 필요충분한 영화다."(남동철, <씨네21> 2007 10 12)

지난 9월 중순(추석전으로 기억한다)에 개봉한 <원스>가 입소문을 타고 장기상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개봉하기 전 시사회를 통해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렇게 흥행에 성공(?)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리라. 사실 영화 한 편을 두고 영화잡지, 평론가, 관객들 모두 거의 만장일치로 환호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깐느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들 조차 관객, 평론가 어느 한쪽의 구성원 일부에게는 외면 내지 혹평을 받게 되는 게 다반사 아니던가.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공통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처럼 단관개봉했다가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업고 수백여 개의 스크린으로 확대 상영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리는 걸 보면. 하긴,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받은 작품 치고 나쁜 평가 받은 영화는 아마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래 인용하는 글은 조선희씨의 <원스>에 대한 리뷰다. 비교적 영화의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는 리뷰니까 영화 못 보신 분들도 한번쯤 읽고 영화를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곡은 O.S.T.에 실린 "Falling Slowly"이다. 나머지 곡들도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Once OST 中 "Falling Slowly"
 
Once OST 中 " Say it to Me Now"
 
Once OST 中 "Once"
  
Once OST 中 "If You Want Me"
  
Once OST 中 "All the Way Down"
 
Once OST 中 "When Your Mind's Made Up"
 
Once OST 中 "Fallen From the Sky"
 
Once OST 中 "The Hill"
 
Once OST 中 "L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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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유혹(La Grande Seduction)

출처 : www.jinbonuri.com 2007-09-01





삶은 여전히 힘들고 별반 나아진 것 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노라!"는 대선주자들의 외침은 무척이나 공허하게 흐른다. 무관심과 냉소로 점철된,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떠해야 하고, 우리의 참여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 <대단한 유혹>은 이 물음에 하나의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영화의 배경은 캐나다의 조용한 한 어촌마을이다. 우리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이는 사회복지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그들'. 무려 8년을 아무 일도 하지 못한('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채 실업수당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조건'을 만들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인다. 그 '진지한 투쟁'이 영 생뚱맞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 눈에 그들의 모습은 멋적은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휴먼코미디 영화를 볼 때처럼.

영화 속의 '무료한 현실탈피과정'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늘 여유있는 삶을 꿈꾼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가끔씩 낚시를 즐기며 저녁에는 선술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술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 비록 모두들 꽉 짜여진 틀 속에 갇힌 삶을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한번씩 그러한 삶을 꿈꾸곤 한다.

우리가 꿈꾸는 그런 삶을, 영화속 어촌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거부하면서 '인간'이라는 화두에 얼마만큼 진지할 수 있는가를 이미지화 한다.

'놀라운 일'이라고는 찾기 힘든,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무기력한 나날을 살아가는 <세인트 마리>라는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피동적인 복지' 대신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고자 애쓰는 그들의 진정성을 발견하는 과정은 차분하면서도 커다란 울림을 던져준다. 무료한 일상을 탈피하려는 시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웃들과의 따뜻한 공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여기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두가지 정 반대의 사건이 오버랩되었다.



하나는 일본의 한 시골마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불로장생수 사건. 이른바 '늙지 않는 성분이 포함되었다는 샘'을 홍보도구로 이용하여 관광지로 유명해지지만 결국 마을 사람 전체의 조작극이었다는 것이 들통이 나서 도덕적 비판을 받았던 사건이지만 그후 세월이 흘러 그 마을이 실제 장수마을임이 밝혀져서 더 유명해졌다는 일화다. 또 하나는 얼마 전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전남 신안의 한 작은 섬에 끌려가 40여 년 동안이나 '잃어버린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사내'의 엽기적인 사건이다.

하나는 조작극을 벌였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지듯 그 과정의 시도와는 별개로 그러한 조작극을 벌여야 했던 현실탈피의 과정이 이해되어지는, '장수마을'임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연출이 해프닝에 그치면서 외려 '이해 할 수 있음'의 기억들을 전달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엽기적인 사건은 이웃들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인해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과정 속에 담긴, 추한 이웃들의 비인간적 이미지가 몹시도 불편한 기억으로 남는다.

영화는 몇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삶의 과정은 피동적이고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복지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의 댓가라는 것. 또 하나는 산업화의 과정 속에 내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다 중요한 가치', 곧 함께 하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 내가 이겨야 하는 경쟁상대라는 걸,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겨야 하는 '적자생존'을 가르치는 교육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잃게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의사를 속이기 위해 급조된 마을의 '크리켓 경기장면'은 희극적 요소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요소를 동시에 담고 있지만, 함께 사는 이들이 힘을 합쳐 이루려는 눈물겨운 투쟁의 과정 속에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순수성을 발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누군가를 속이려 했던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고, 그것이 속임을 당하던 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애'라는 것이 확인되고 속이는 과정을 담당했던 이들에게 진정성이 있었기에 마을사람들은 용서를 받는다.

일상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일상을 보면서 사람들에 따라서는 영화를 그저 '비현실적인 영화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거나 작위적인 일상에서 잠시 머리를 쉬게 하는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반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좋다. 비현실적인 일상의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어디 세상에 '착한' 사람들만 살고 있겠는가. 그러나 8년을 노동하지 못해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현실'은 비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다. 어쨌든 이 영화는 논픽션이니까.

하루 빨리 이런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진보누리>에 실린 글인데, 원글은 앞뒤 문맥과 글 전개가 영 어색하기에 가져오면서 글 내용과 문맥을 대폭 손질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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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혹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감싸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우리까지 덩달아 빨라야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면 마치 세상의 낙오자라도 된 듯한 기분인지 그저 그 스피드에 자신을 내맡기기 바쁘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영화도 우리의 시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양 '너희가 스피드를 믿느뇨'란 식의 영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대개 한 편의 버라이어티쇼를 보는 듯한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한 볼거리의 향연을 관객은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 관객은 그 볼거리 밖의 공간, 이를테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거나 그것과 관계하는 사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 예컨대 『터미네이터』, 『트루라이즈』, 『다이하드』 같은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스모크』는 참 '지리멸렬한' 영화일 수 있다. 이른바 영화적 '볼거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일 수도 있는 것.

대신 『스모크』는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길거리를 거닐며 쇼윈도나 여타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도 조금 전에 본 것이 뒷머리를 잡아당기면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보아도, 혹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도 되는 것처럼...

『스모크』는 이렇게 다중적인 시점을 택하면서 관객에게 프레임, 곧 영화적 공간의 앞과 뒤 그리고 위아래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원형적 과정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유하게끔 자극하는 그런 영화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스모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소비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게끔 유도한다. 이제 우리는 이 속에서 무엇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생산하기 위해선 먼저 재료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프롤로그


1990년, 뉴욕 브룩클린의 여름. 3번가의 모퉁이에 위치한 담배 가게. 14년간 이곳에서 담배를 팔아온 '오기'(하비 케이틀)와 소설가인 그의 단골 손님 '폴'(윌리엄 허트)을 축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허풍쟁이 소년 '라시드'(해롤드 페리누), 음주 운전으로 아내를 죽인후 평생 그 죄책감에 쫓겨다니는 라시드의 생부 '사일러스'(포레스트 휘태커), 옛 애인을 찾아와 애원을 하는 외눈여인 '루비'(스톡커드 캐닝), 세상의 밑바닥까지 타락한 루비의 딸 '펠리시티'(애슐리 쥬드)…. 이들은 폴과 오기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각자의 혹은 서로의 삶을 엮어나간다. 퍼즐의 한 부분을 조각조각 맞춰가듯이 이들의 이야기는 전개되며, 이렇듯 각각의 귀퉁이를 맞춰나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것은 '인생'이다.

폴과 오기


한때는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임신한 아내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손에서 펜을 놓은 폴. 자신의 담배가게에서 한심한 동네 한량들이랑 수다나 떨며 살고 있는 오기. 그 두 사람은 가게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지만 어느 날 그들은 친구가 된다. 14년 동안 한결같이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3번가 풍경을 찍어왔던 오기는 폴에게 그 앨범을 보여 준다.

“모두 같은 사진이군.”
“같아 보이지만 천천히 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네. 밝고 어두운 아침… 여름과 가을 햇살… 아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낯선 이도 있어. 낯선 이가 어느덧 이웃이 되기도 하지.

폴과 라시드


마치 꿈 속에서 사는 양 허풍을 떠는 흑인 청년 라시드는 폴을 사고의 위험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폴의 집에서 며칠 묶었다가 길을 떠난다…. 얼마후 라시드의 이모가 찾아온다.

“맨하탄의 부촌에 사는 부모한테 간다던데요.”
“완전히 혼자 소설을 썼군! 그애 이름은 토마스 제퍼슨 콜이고, 우린 빈민가에 살고 있죠. 그애 엄마는 죽었고, 생부란 작자는 지난 12년간 소식조차 없어요. 얼마전 누가 그 애비를 교외 주유소에서 봤다길래…”

라시드와 사일러스


생부를 찾아간 라시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생부의 허름한 주유소에서 일하며 그와 얘기를 나눈다. 한쪽 팔을 잃은 사일러스는 12년전 무모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살고 있다.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12년전 받은 벌이야. 신이 말씀하셨지. '네 여인은 데려가겠다. 하지만 네 놈은 살려주지. 때론 사는 게 더 큰 고통이니까.' 난 이 팔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못된 놈이었는가를 생각하지.”

루비와 오기


어느 날 오기의 담배 가게에 외눈의 여인이 찾아온다. 언뜻 보기에도 살아온 인생이 그리 평탄치 않은 모습이다. 그녀는 18년전 오기를 배신하고 떠난 루비였다.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설마 돈 얘긴 아니겠지.”
“우리 딸을 위한 거예요.”
“당신 딸이지 우리 딸은 아닐 걸.”

느닷없이 나타나 딸이 있었다는 루비의 말을 오기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임신 4개월에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도…

에필로그


과거에 얽혀진 혹은 현재에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이제 한데 어울어져 멋진 인생의 단편을 만든다. 앞으로 그들의 인생 퍼즐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뒤로 미룬 채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그리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선율의 음악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단순한 소비행위가 아니어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스모크』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담배가게 주인 오기 렌, 작가인 폴 벤자민, 벤자민을 구해주는 흑인소년 라시드, 애꾸눈 루비, 루비의 딸이자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가는 펠리시티. 이들을 한데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웨인 왕의 전작들, 곧 『딤섬』이나 『조이 럭 클럽』을 상기한다면 아무래도 그것은 '가족'(가족주의가 아닌!)의 형상이 아닐까?

영화의 겉면은 분명 거대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배여 있는 쓸쓸함과 그 쓸쓸함의 동명이인인 인간주의적 따스함에의 그리움 등으로 부드럽게 감싸여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거대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고독, 소외 등을 화두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 같다. 분명 영화는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에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소외에 관한 텍스트로 읽힐 여지를 주고 있긴하다. 하지만 『스모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상투적 텍스트 읽기가 아닐까?

등장 인물 모두가 한두 개씩 안고 있는 상처나 결핍은 대개 가족의 불안정성이나 부재에 기인한다. 또 그 상처나 결핍의 해결책은 라시드와 그의 생부 사일러스의 화해, 영화 마지막 부분의 흑백 시퀀스 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가족의 복구이다. 그렇다면 작가 웨인 왕이 생각하는 현대의 가족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웨인 왕의 전작인 『조이 럭 클럽』에서 어느 정도 그 윤곽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이 럭 클럽』의 가족은 너무나 '복고적'이다. 예컨대 『조이 럭 클럽』에서는 가족의 존재 및 정체성의 기원을 핏줄 이데올로기에 두고, 그 핏줄이데올로기를 가족공동체의 근경으로 삼고 있다. 반면에 『스모크』에서는 그러한 핏줄 이데올로기를 덜 부각시킨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관계를 생각한다면, 핏줄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이란 게 도대체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스모크』에서는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담배가게 주인인 오기 렌과 펠리시티의 관계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루비와의 관계 회복에 있어 '펠리시티가 그의 딸이냐 아니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석한다면 현대인의 새로운 유대나 결연의 방식과 붕괴된 전통적 가족공동체와의 비교대목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웨인 왕이 현대의 가족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랄'을 제시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그가 일상의 편린들로 직조하듯 짜낸 따듯한 질감의 해피엔딩은 지나치게 인정적이고 위안적인 것 같다.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영화는 분명 관객들에게 가족의 문제를 새로이 되씹어 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기는 하되 작가의 시선은 결국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마지막 흑백 시퀀스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따듯한 시선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스모크』의 감동적인 장면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부분에는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노래가 흐른다. 끈끈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You are innocent when you dream" 이라는 노래가 그것인데,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탐 웨이츠'다. 70년대 초반부터 포크송으로 시작하여 전위적인 팝과 락을 구사하며 극작가,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한 그는 영화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영화 음악도 작곡하고 영화에도 직접 출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멋진 모습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 짐 자무쉬 감독의 단편인 『커피와 시가렛』 등에서 볼 수 있다.



1987. Frank's wild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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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오래전에 본 영화라서 기억도 안나는구만요. 기억나는 거라고는 하비 케이틀의 그 시니컬한 표정밖에.... 근데 그때는 저 영화를 이해하기에 내가 너무 어렸던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지금 보면 좀 달라보일까요?

내오랜꿈 2007-09-18 16:53   좋아요 0 | URL
나도 이걸 쓴 게 94년인지 95년지 헷갈린다. 당시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혼자서 2회 연속 봤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글쎄, 무엇을 얼마 만큼 어떻게 달리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의 연륜이 쌓여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맞는 거 같아...
 

 
아련한 옛 추억의 그림자, <광식이 동생 광태>
 
 
"인연이라는 것은 운명의 실수나 장난 따위도 포함하는 것 같아요."
 
 
 
지난 토요일 오후, 혼자서 영화를 봤다. 제목만 가지고는 광식이 핵심인물인지 광태가 핵심인물인지를 알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하고 이미 다 자라버린 남자들의 ‘성장영화(?)’ 같기도 한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영화의 내용은 스토리 라인이 단단하지만 특별하게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단순하다. 1부 ‘광식’, 2부 ‘광태’, 3부 ‘광식이 동생 광태’로 이어지는 3장 형식을 통해 광식, 광태 형제의 사례를 각각 제시하고 3장에서 감독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는 식이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속시원한 고백 한 번 못해보고 7년째 탐색만 하고 있는 광식. 나이는 형보다 7살이나 어리지만 만난 여자의 수는 형보다 70배는 많은 동생 광태. 그는 365일 작업 중이며 가슴은 윗주머니에 넣어두고 몸만 주기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 이 이상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광식이 동생 광태>는 여기에 영화를 보는 사람 나름의 슬픈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덧붙여진다. 영화가 그저 보여지는 대로 읽히는 텍스트가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살을 붙이고 감정을 이입시키는 작용을 하게 만드는 쌍방향 통신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누구나 한 가지씩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희미한 옛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영화라 할 수 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하나하나 엮어나가는 광식의 에피소드들이 주는 아련함, 생각없이 쿨한 척 여자의 몸만 생각하는 광태의 에피소드들. 과연 그것들이 날실과 씨실로 엮어져 우리에게 보여지는 삶의 모습은 우리 자신과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를까?

궁금하다면 가까운 영화관을 찾을 일이다.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추억의 가요들을 듣는 즐거움 또한 만만찮다. 다만, 영화 막바지 윤경의 결혼식 장면에서 광식이 무반주로 부르는 <세월이 가면>은 너무나 처연하기에 가슴 한 구석이 쏴하기는 하지만….

2005 12 13


<세월이 가면> - 김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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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영화 좋아합니다. 그냥 로맨틱 코미디로 치부하기엔 생각할 꺼리가 좀 있죠. 둘의 너무나도 차이나는 작업방식도 그렇고. 아니 한 명은 작업도 못하죠.

내오랜꿈 2007-09-17 23:1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충분히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영화죠.

개봉 당시 주위의 아는 부부들에게 괜찮은 영화라며 보라고 권했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무슨 애들 장난치는 영화냐"며, "니가 무슨 20대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더랬습니다..-.-

마늘빵 2007-09-18 09:3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아 이거 심오한 영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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