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CD를 정리하다가 언젠가 '재고정리'(?) 뭐 이런 거 할 때 구입한 뒤 쳐박아뒀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발견했다. 목차를 훑어보다 눈에 익숙한 '하바네라'가 들어왔다. 익숙한 이유는 순전히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카르멘』 - 그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내가 EBS 『주말의 명화』를 가끔씩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보는 이유는 언젠가 보긴 봤었지만 자꾸만 잊혀져 가는 영화들을, 그리고 감독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주 상영작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
'카르멘'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 원작 소설이나 이를 바탕으로 작곡한 비제의 오페라를 본 사람들은 또 드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물론 읽거나 본 적이 없다. 오페라야 뭐 내 수준에 언감생심이겠지만, 원작 소설 역시 몇 번인가 읽어볼 생각은 했었지만, 결국 손이 가지 않았다. 읽지도 않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그 내용을 너무 뻔히 알고 있다는 선입견도 작용했고, 걸작이라고 선전되는 외국의 번역체 소설을 읽어서 감흥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개인적인 경험 역시 한 몫 했으리라.
영화로 나온 『카르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대여섯 편은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과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카르멘』일 것이다(우연인지도 몰라도 둘 다 1983년에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르의 『카르멘』을 더 흥미롭게 봤었지만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카르멘』은 플라멩고 춤 하나만으로도 꼭 한번은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카르멘'과 '플라멩고'의 결합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찾아본 사우라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많진 않은데, 『사냥』, 『사촌 안젤리카』, 『질주』, 『까마귀 기르기』, 그리고 『카르멘』.
카르멘에 스페인의 전통춤 플라멩고를 결합시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철저하게 스페인의 전통과 역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우라 감독의 초기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사냥』(1965)은 토끼사냥에 몰입하는 무리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프랑코 정권하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우라 감독의 스페인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이슈는 『사촌 안젤리카』(1974)에서도 계속되는데, 폭압적인 정치상황(=프랑코 독재정권시절하의 스페인에 대한 은유)을 겪어낸 한 남자의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이렇게 자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성을 쌓은, 이 스페인의 국민감독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996년작 『까마귀 기르기』. 이 작품에서도 프랑코 독재정권이 스페인 사회에 미친 영향을 한 평범한 가족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자이크처럼 맞물린 흥미로운 구성을 통해 과거(프랑코 독재정권하 스페인)를 오늘의 스페인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결정판은 『질주』라 할 수 있다. 사우라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고집스러울 만큼 '과거'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질주』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 한 가지. 독재정권이 끝나면 당장 평화와 자유가 오는 것일까?, 라는 것.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벌이는 은행강도 사건을 소재로 삼아, 사우라 감독은 프랑코 정권 '이후' 80년대 스페인 사회가 체험한 무기력과 좌절감을 그려낸다. 원제인 '빨리빨리(Deprisa, Deprisa)'가 말하는 역설은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은유한다고 한다. 1981년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황금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우라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은유'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래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는 힘든 '필모그라피'를 지닌 감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카르멘』은 이런 걱정을 붙들어매도 괜찮을 흥미로운 작품이다.
『카르멘』은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의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써,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고의 마술적인 안무와 열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카르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보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흡인력 있는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플라멩고 춤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는 안무가와 카르멘역을 맡은 댄서가 극의 내용과 똑같은 형식의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이야기를 무용극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더 덧붙일래야 덧붙일 건덕지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헷갈리는 지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자소설'의 형식처럼 극의 내용과 영화적 현실이 혼동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바로 이 지점, 곧 플라멩고의 영혼을 울리는 진실성과 비제의 오페라가 갖는 허구성과의 대립에서 생겨나는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는 미묘한 움직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영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플라멩고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멩고가 무엇인지, 춤 같은 것에 관심없는 사람은 볼 필요도 없는 영화가 아니냐고? 천만에. 극단적인 플라멩고 혐오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플라멩고와 이를 절묘하게 포착해낸 사우라 감독의 뛰어난 카메라워크 그리고 두 주인공의 연기에 몰입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복잡한 구성과 화려하면서도 대담한 영상으로 스페인의 어두웠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작품들을 주로 만들어온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플라멩고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카르멘』. 그 사랑과 영혼의 춤이 시작되는 무대 위로 한 번 떠나보시길...
2004 0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