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중세, 민초의 삶을 더듬다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 파워 | 이산

서양 중세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교수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쓴 ‘중세의 사람들(Medieval People)’은 평범한 6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중세 사람의 다채로운 삶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겁고 어두운 중세의 종교적 분위기 대신 민초들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6명은 샤를 마뉴 치세 하의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 상인 겸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수녀원장 마담 에글렌타인, 파리의 중간 계급 가정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15세기 지정 거래소의 양모무역 상인인 토머스 벳슨, 헨리 7세 시대 에식스의 모직물 업자인 토머스 페이콕 등이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에는 마르코 폴로처럼 매우 유명한 사람도 있고, 마담 에글렌타인처럼 수녀원장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중세시대에 살던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중세 사회를 떠받치고 변화를 주도해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라는 말로 단순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층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이 ‘민중사’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등장 인물들의 사회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다.

아일린 파워는 자신이 여성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인공 6명을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설정했다. 저자는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그들의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최근 역사 연구에서 여성사를 제외하면 여성을 남성과 같은 비중으로 다룬 역사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그것도 중세사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여성의 삶과 일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업으로 평가될 만하다.

‘중세의 사람들’은 여느 중세 관련 서적처럼 성직자, 영주, 기사의 신앙이나 무용담을 다루는 게 아니다.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저자는 “사회사는 정치사에 비해 저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독자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간혹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면서도 “개인 위주의 서술 방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재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개론적 지식 이상의 것을 얻으면서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원저의 초판은 1924년 나왔으나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다. 김우영 옮김. 1만5000원

〈설원태 선임기자 solwt@kyunghyan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는 일도 없는데, 늘 바쁘게 산다. 그러다 어디 야외라도 나가 탁 트인 정경을 보기라도 하면,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야 되는데 말이야', 라며 읊조리기 일쑤다. 언젠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펼쳐 들었다가 얼마 못가 접고 만 기억이 있는데, 오늘 <대학신문>을 뒤지다 이동진씨의 에세이를 보게 되었다. 나도 마음 한구석엔 늘 <스모크>의 오기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같은, 느림의 여유를 실천하고 싶은데, 언제나 망상으로 그치고 만다.

아래는 시간에 대한 이동진의 글과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정선태의 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느림'을 주제로 한 책은 정말 많이도 나온 것 같다. 쿤데라의 <느림>이 유행한 지가 아주 오래 전 같이 아득하다. (그런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읽기 힘들었나 보다. 4권까지 나와 있는데, 1권과 4권의 판매지수 차이가 200:1이다..-.-)


경쟁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

시간』 , 칼하인츠 A.가이슬러 지음┃박계수 옮김┃석필┃1만 2천원SPAN>


독서 에세이 - 이동진 / 대학신문 2007년 09월 15일 (토)

 


예전에 독자가 직접 우편으로 보내온 긴 편지 속 한 구절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 좋은데, 당신의 글은 왜 그렇게 슬프고 비관적이냐”는 말이었다. 글쎄. 물론 그것은 나의 타고난 본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시간에 대한 태도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과거밖에 없다. 시간이란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될 때는 항상 과거라는 형식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각하기에 너무 짧은 현재는 찰나로 경험되는 순간 과거의 영겁 속으로 사라져버리며, 미래는 파편 같은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을 맺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 현재라는 시간의 파편이 지니는 현기증 나는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현재를) 사는 법’이라니. 칼하인츠 가이슬러의 『시간』은, 이를테면 시간이 우리 곁을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 속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책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저자의 시간관에 온전히 동의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의외로 깊이와 재미가 대단해 점차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이 책의 내용은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기보다는 어떻게 시간 속을 통과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경시론(經時論)에 가깝다. 일종의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리듬’과 ‘느림’으로부터 ‘기다림’ ‘휴가’ ‘걷는 시간’까지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에 대한 동서고금의 갖가지 레퍼런스를 붙여가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서술해나간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인용사례들과 지은이 자신의 시간관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럽게 리듬을 이루며 한데 엮였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차용되는 인용구들을 읽는 재미도 상당한데, 토마스 만의 『마의 산』부터 괴테의 여행기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헝가리의 우화와 오스트리아의 격언,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가사에까지 이르는 구절들은 그 인용의 적절함과 내용의 풍부한 함의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이슬러는 심지어 하나의 장을 시(詩)로 맺는 서정성도 보여준다. 다음 문장은 이 책이 어떤 스타일의 책인지를 그대로 요약한다. “시간이라는 기차에서,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앉아서 성급한 진보에 몸을 내맡긴 많은 사람들은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바람이 얼굴에 심하게 부딪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창문을 연 채 갈 수가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고교 시절 접했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란 책 내용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러시아의 한 과학자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는 최대한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분 단위로 시간표를 짜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책은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시간을 절약하며 자신을 채찍질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과학자가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순진하게도, 당시의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박약한 의지를 한탄하며 열등감만 한껏 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가이슬러의 ‘시간’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돈이다”처럼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자책하게 만드는 ‘나쁜 금언’들의 위력을 저주하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피터 드러커의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같은 발언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같은 책이니까. 시간은 다뤄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형서점에 가보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선 시(時)테크를 제대로 해야 뒤쳐지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수많은 허접스런 처세서적들 중에서, 의외로 ‘느림의 철학’을 말하는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한때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베스트셀러 『느리게 산다는 것』이란 책부터, 『느림의 지혜』, 『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같은 책, 독일 작가 나돌니의 80년대 히트작 『느림』까지 정말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런 책들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우리가 아찔한 속도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책인 『느리게 산다는 것』이 정말 슬렁슬렁 프랑스적으로 진행되는(저자도 필시 게으름뱅이임에 틀림없는, 동어반복적이라서 심하게 말하면 한 챕터만 읽어도 되는) 전형적 에세이 형식인 데 비해, 독일 책인 『시간』은 독일인이 지은 책답게 무척 조직적이고 체계적인(그래서 적어두고 싶은 구절도 많고, 다 읽고 나서도 괜히 뭔가 많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저작이라는 점이다. 난 『느리게 산다는 것』은 중간쯤까지 보다가 책을 던져버렸지만, 『시간』은 단시간에 완독했다. 그렇다면 사실 나는 ‘느림의 철학’에 동조하는 척하면서도, 독서에 있어서, 나아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여전히 조바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정선태,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강희안, 「高士觀水圖」


풀과 나무가 드리워진 절벽 아래, 바위 위에 엎드린 채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한가롭다거나 여유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은, 차라리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모습. 그는 어디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한바탕 집중호우가 지나가고 난 오후, 다리를 꼬고 누워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저토록 ‘무심하게’ 무엇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또는 무엇이 그 한없는 게으름을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자본의 충직한 노예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맑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였다. 그런데 그 아픈 충고를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가슴에 품은 휴대폰이 더욱 강렬하게 구속해 주기를 초조하게 바라지는 않았던가. 지독한 매저키스트! 그런 마당에 「고사관수도」라니.

한치의 에누리 없이 분절된 시간과 세밀하게 구획된 공간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모세혈관은 싱싱한 피로 숨쉬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폐로 정확하게 환산되는 시간의 채찍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그리고 느릿느릿 사는 것이야말로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명을 다시금 약동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런데 게으름과 느림은 이 현란한 자본의 제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격언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피에를 쌍소는 힘주어 말한다. 게으름과 느림은 이 황금의 성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대담한 도발이다.

하기야 러셀이 게으름을 드높이 찬양한 적이 있고, 밀란 쿤데라가 『느림』의 복권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이들에 비해 느림에 대한 쌍소의 견해는 훨씬 구체적이다.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기,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져보기, 꿈꾸기, 진득하니 기다리기, 낡은 시간 떠올리기, 술 한 잔의 지혜….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의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빈 칸을 채우면서 본다면 그다지 가벼운 것만도 아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은 생명의 왕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군이자 독재자이다. 또는 삶의 또 다른 일부인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바보거나 천치다. 최고의 스피드야말로 최상의 미덕이라는 음험한 자본의 논리, 그 가증할 수사 전략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보그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말초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삶이 원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전략의 이면을 투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필요한 무기가 느림이다. 물론 느림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느림과 빠름의 역동적 교직, 그리하여 드러나는 삶의 무늬, 이를 두고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상투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느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철학을 내면화함으로써 삶의 견인력을 확보할 것, ‘빨리빨리’라는 자본의 주문을 끊어버릴 것, 그리하여 황폐해진 나의 삶을 복원할 것!”

느림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조건이자 우리의 삶을 노예화하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거점이다. 곧 거부를 통해 해방을 꿈꾸는 사람은 느리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쌍소의 말이다. 나른한 몽상과 한가로운 산책은 상상력을 뿜어내는 셈이다. 그 샘물을 길어올려 들이킬 때 속도에 지친 우리의 생명은 다시금 약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고사관수도」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서 출렁이는 생명의 ‘힘’을 호흡할 일이다.

목차

001. 머리말...9
제1장..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19
1.. 한가로이 거닐기...41
2.. 듣기...53
3.. 고급스러운 권태...65
4.. 꿈꾸기...77
5.. 기다리기...85
6.. 내 마음의 시골 고향...97
7.. 글쓰기...107
8.. 포도주 한 잔의 지혜...117
9.. 모데라토 칸타빌레...129
제2장..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139
제3장..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139
1.. 문화적 흥분...163
2.. 뒤늦은 도시 계획을 위해...179
3.. 분주하지 말기...201
4..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211
5.. 하루의 탄생...2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사실 이런 류의 역사관련 책읽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학 논쟁 만큼 민족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학문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런 민족주의적 색채에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책들을 의외로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나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책들은 전부 다 있는 것 같다. 이 무슨 이율배반(?). 이 책도 자꾸만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아래 소개글에서 언급한, "민중사학의 입장에 선다면 말갈족이 다수였던 발해사는 만주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관점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책@세상. 깊이읽기]역사는 어떻게 씌어야 하는가
출처:인터넷경향신문 / 입력: 2007년 09월 14일 14:47:15
▲ 동아시아 역사분쟁
송기호|솔

유고슬라비아의 참혹한 내전이 끝난 후, 발칸 각국의 역사가들은 국사 교과서가 전쟁의 한 원인임을 지적했다.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 나라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결국에는 인종청소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알바니아를 막론하고 전전의 ‘국사 교과서’를 쓴 역사가들과 열정적으로 그것을 가르친 역사 교사들은 ‘민족의 전범(典範)’을 만들었지만, ‘내전의 전범(戰犯)’이기도 했다. 그리스를 포함해서 발칸 각국의 역사가들이 교과서 위원회를 만들어 발칸의 공동 역사 교과서 편찬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번민과 고통, 정신적 공황이 어떠했을까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역사가 홉스봄의 지적은 굳이 새로울 것도 없다. 멀리는 지난 20세기, 가까이는 일본의 ‘새역사교과서’ 이후 21세기의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군 역사 논쟁의 관찰자들에게 역사학의 핵 폭발적 갈등의 잠재력은 이미 입증된 바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역사논쟁의 뇌관을 제거해 역사가들이 부추기는 핵폭발의 재앙을 방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1세기 이상의 시간을 거치면서 한없이 복잡하고 형편 없이 얽혀 있는 폭탄의 회로를 분석해서 뇌관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폭을 감수하는 용기와 감정의 인내, 전문가적인 지식과 식견이 요구되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성실한 텍스트 읽기와 치밀한 분석이다. 발해사 전공자로서 중국과 일본, 한국과 러시아의 문헌자료들을 섭렵한 그의 전문가적 지식이 주장의 신뢰도를 높인다. 서로 충돌하는 주장들을 각 장의 뒤에 자료로 배치해,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편집자로서의 배려도 이 책의 미덕이다.

역사가로서의 저자의 미덕은 특히 역사해석에서 민족적 감정을 절제하려는 노력에서 잘 드러난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발해사’ 전공 교수인 저자의 입에서 “발해사는 한국사에 속할 수도 있고, 만주의 역사에도 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듣는 것은 신선하다. 민중사학이 고대사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면서도, 만약 민중사학의 입장에 선다면 말갈족이 다수였던 발해사는 만주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대목은 저자의 학문적 정직성을 잘 드러내준다. 학문적 정직성은 연구자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직한 추론의 결과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식 권력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왜(倭)가 고대 한반도에서 활동했고 고대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거냐는 엉뚱한 비난을 감내하겠다는 용기의 표현이다.

동아시아 역사논쟁은 ‘사실’과 ‘거짓’의 진실게임을 넘어 ‘해석’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사실’이 ‘해석’을 낳는 게 아니라, ‘해석’이 ‘사실’을 낳는 것이다. 몽골인의 영웅 칭기즈칸이 중국인이 되고, 고구려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 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가 되는 것도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규정하는 국민국가의 현상학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현상학이 동아시아 각국의 ‘국사’ 체계를 뒷받침하는 한, ‘사실’ 규명이 동아시아 역사분쟁을 해결하는 열쇠는 될 수 없다.

중국의 동북 공정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비판이 실증적 논박에 치우쳐있는 것은 이 점에서 아쉽다. 돋보이는 해박한 지식과 학문적 정직성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역사분쟁의 인식체계라 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민족과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오늘날 국민국가로 발전해 온 ‘역사의 흐름과 계승’을 추적하는 작업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구심도 있다. 국민국가를 ‘기원적 현재’로 설정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의 사유방식이 특히 결론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민족주의=좌파’ 대 ‘탈민족주의=우파’라는 저자의 이분법도 너무 순진하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사의 동시 해체를 이상론으로 차치하고 국민국가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간다면, 역사는 다시 현실을 정당화하는 순응주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인과적 설명 방식이나 통사적 역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확신은 지나치게 단단하다. 역사적 구성주의의 인식론은, 흔히 오해하듯이, 경험과학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실증으로 포장된 모든 ‘사실’을 해체하는 ‘급진적 경험론’이다. 역사적 구성주의를 전략적으로 전유하기에는 저자의 인식론이 너무 본질주의적이다.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리’도 권력과 기술과 지식의 접합 속에서 변화하는 전략 개념이라면?

〈임지현|한양대교수·사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