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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삶’에서 길어올린 ‘변혁의 꿈’
12세기 성화에서 21세기 현대화까지 150장 도판으로 한눈에
격변의 역사 속 삶 담아내고 바꾸려는 반체제적 특성 돋보여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 러시아 이동파 대가 일리야 레핀(1844~1930)의 기념비적 작품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1873). 레핀은 ‘지혜롭고 강인한 민중의 현자’(왼쪽 두번째), ‘누적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네번째),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린 소년’(여섯번째)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러시아 민중의 모습을 담았다.

〈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지음/민음in·2만2000원


오랜 세월 ‘철의 장막’에 갇혔던 러시아 미술의 놀랍도록 풍요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년 전 이맘때 나온 미술평론가 이주헌씨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낯선 세계의 장대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미술 연구자 이진숙씨가 쓴 〈러시아 미술사〉는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특별한 예술 정신 깊숙한 곳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책이다. 이주헌씨의 책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관을 여행하는 사람의 눈길로 첫 경험의 설렘을 생생하게 전해준다면, 이진숙씨의 책은 12세기 이콘화(성화)에서부터 21세기 현대화까지 두루 아우르며 러시아 미술의 역사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게 해준다.

동시에 이 책은 150장에 이르는 도판을 활용해 각 시대 화가들이 창조한 작품의 풍성하고도 독창적인 세계에 독자를 마주 세운다. 지은이의 문학적 필치는 그 화가들이 품었던 열정을 끄집어내 그 열정의 빛깔과 강도를 생기 있게 묘사한다. 애초 독문학을 공부했던 지은이는 러시아 여행 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 작품들에 ‘충격’을 받아, 평생의 업을 등지고 러시아 미술을 새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나에게는 신천지가 열렸고, 인생이 바뀌었다.”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강렬한 힘, 러시아 미술 작품들이 뿜어내는 그 힘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은이는 민속학자 니콜라이 르보프의 말을 빌려, 러시아 문화의 핵심을 ‘격렬한 삶’이라고 요약한다. ‘격렬한 삶’은 그대로 러시아 미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러시아 미술은 고통·분노·열정·희구와 같은 ‘격렬한 삶’이 일렁이는 바다다. 삶이야말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이고 목표다. 러시아 화가들의 열망은 삶과 예술의 일치,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한 삶의 구현에 있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러시아 미술의 출발점을 이룬 것은 이콘화였다. “이콘화가 없는 러시아는 상상할 수 없다. 강력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과 늦은 근대화로 러시아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오랫동안 이콘화의 전통이 유지됐다.” 수도승으로서 성화를 그렸던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15세기 러시아 이콘화의 정점을 보여준 사람이다.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걸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절실하게 그려냈듯이, 루블료프는 러시아 민중의 절절한 소망을 종교화로 형상화함으로써 ‘러시아적 회화’의 한 고원을 이루었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러시아 미술은 결정적 방향 전환을 이룬다. 급진적 서구화를 밀어붙였던 이 냉혹한 차르는 이콘화 중심의 러시아 미술 세계를 일변시켰다. 서유럽의 화가들을 초빙하는가 하면 유망한 젊은 화가들을 서유럽으로 유학시킴으로써 러시아에 처음으로 ‘근대적 화가’가 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표트르 대제 이후 프랑스식 궁정문화가 번창하고 로코코풍의 미술양식이 퍼졌다.

» 〈러시아 미술사〉
그러나 이런 껍데기만의 근대화는 러시아 민중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젊은 귀족들이 참여한 이 반란을 통해 러시아 특유의 반체제적 지식인, 곧 인텔리겐치아가 탄생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1923년까지 존속한 이동파는 세계 미술운동사에 유례없는 실험이자 성과였다. “이동파는 정치적·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동파가 활동을 시작한 1870년대에 서유럽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서는 인상파가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다. 많은 러시아 화가들이 파리 유학을 다녀왔지만, 이들은 인상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의 묘사’가 아니라 ‘민중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동파의 초기 양식은 아직 회화의 기술적 측면에서 완벽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이동파 운동의 지도자 이반 크람스코이는 인상파와 이동파를 이렇게 선명하게 대비했다. “그들(프랑스 인상파)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우리(러시아 이동파)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이 난점을 해결한 사람이 일리야 레핀이었다. 레핀은 1873년 작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로 러시아 이동파의 창조성을 극점으로 끌어올렸다. 레핀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 대작에서 회화의 형식을 일신시킴과 동시에 민중의 강인한 삶을 극적으로 구현했다. 레핀의 풍속화에는 러시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꿈이 내장돼 있었다.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 정신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통해 20세기로 이어졌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구성주의는 그 정신의 혁명성이 최고의 형태로 드러난 운동이다. 이 전위 운동들은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형식 실험 속에 러시아 혁명의 이념을 담았다. 지은이는 이들의 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미친 듯한 창조의 열정은 1917년의 혁명 분위기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솟구쳤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보다 더 강력하고 뜨겁게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고 동시에 갱신하려는 열정은 세계 미술사 어디에도 없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
고골·톨스토이 등 유명작가와 작품에서 큰 영향 받아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

“19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들이다. 러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의 삶 자체였다.” 러시아 미술의 이런 특성은 문학에 빚진 바 컸다. 19세기 러시아 문화를 이끈 것은 문학이었다고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는 말한다.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그림 가운데)·톨스토이(오른쪽)·투르게네프·오스트롭스키 등 위대한 작가들이 러시아 지성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도 급진적인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미술은 문학으로부터 ‘이야기 특성’만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미술은 문학과 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작가와 작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런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그림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다. 20년 세월을 바쳐 1858년에 완성한 이 대작에 이바노프는 작가 고골의 얼굴을 새겼다. 희곡 〈검찰관〉(1836)에서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했던 고골은 이후 점차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현실에서도 예술 속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고골리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데, 이바노프는 자신의 그림에서 고골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

이동파를 이끌었던 이반 크람스코이(왼쪽)는 체르니??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삶의 모델로 삼았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크람스코이는 이 반란에 가담한 13명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묘사된 혁명가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이동파의 모태가 됐음은 물론이다.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에 감명받아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닮은 〈미지의 여인〉을 그렸다.

이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1888)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는 죄수 호송열차에 탄 정치범과 그 고난의 길에 동행한 가족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젊은 죄수의 아기가 호송열차의 창살 밖으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준다. 모이를 먹는 비둘기를 보여 잠시 기쁨의 미소를 짓는 죄수와 아내와 아이는 성가족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성취했듯 그들은 어디에서나 삶을,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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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문학, "삶은 놀이다"
『팔방놀이 (Rayuela)』, 게으름과 엉뚱함의 찬미

안태환 / 부산외대 이베로아메리카 연구소 연구원
출처 : <레디앙> 2007-12-28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남미의 대표적 현대소설로 콜롬비아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남미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꼬르따사르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팔방놀이 (Rayuela)』가 있다. 팔방놀이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골목길에서 놀던 사방치기를 의미한다.

1963년에 쓰여진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에게 기존의 관습적, 수동적 태도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비주류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숫자가 적힌 장(chapter)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페이지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기존 관습대로라면 물론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인 56장에서 끝날 것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73-2-1-116-3-84장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장을 달리하는 순서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 마음대로 읽으라고도 한다. 실제로 각 장마다 에세이 같기도 하고 앞의 에피소드와 다른 것이 전개되어서 독립적으로 읽는 데 아무 부담이 없다.

주인공인 올리베이라가 하는 일도 정상이 아니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끈과 색실을 가지고 놀면서 불에 태운다거나 또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놓는 일을 하는 등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만족해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트레블러는 불면증 환자다. 밤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서성댄다. 우리는 낮에 일을 한다. 그러나 이들 등장인물들은 낮에 잠을 잔다. 그리고 달을 해로 착각하기도 하고 늘 마테차를 마신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극우 파시즘 사회에서는 쓰레기로 취급되어 극도로 탄압받거나 경멸받을 것이다.

책 읽는 순서는 마음대로!

더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는 수많은 비주류적 지식인들이 언급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들의 텍스트와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독자에게 같이 여행할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소피스트를 비롯하여 비 주류적 재즈 음악가와 평론가,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대표적인 시들이 아무 언급이 없이 직접 인용되고 있다.

기존의 문학이 가지는 권위 있는 틀과 규범을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담론 형식이 획일적인 틀을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빠져 있는 사회의 특징은 '소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소비만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게 만든다는 점에서 획일화의 효과를 지닌다. 다시 말해 다양성을 거부하고 체제에 순응하면서 안심하도록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는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가수가 값비싼 디너 콘서트 대신 대중을 위해 무료 콘서트를 기획한다고 해도 시장( 마켓 )과 언론이 이를 반기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최고 덕목은 개인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엄숙한 근면과 성공에 있다. 일탈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덕목이 특히 강조되는 영역은 기업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런 덕목의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는 방랑자들이 나온다. 무엇인가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고 생각만 하는 것을 아주 중요시한다.

주인공인 올리베이라의 생각을 한번 엿들어 보자.

“바지 호주머니에서 보푸라기, 시계, 신문 쪼가리, 가장자리가 해진 아스피린 등 무엇이든지 나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다가 끄트머리에 죽은 쥐가 나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 흐름을 집어낸다면 1910~20년대 유럽에서 앙드레 브레통이 주도한 초현실주의와 맥락이 통한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를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운동이었다. 중남미에서도 모더니즘 시 운동과 현대 소설은 초현실주의적 형식 파괴의 흐름을 보여주며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중남미 예술에서 전통적 가치관의 거부는 ‘유럽적’ 인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뒤섞인 그들 스스로의 문화를 긍정하는 힘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중남미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은 중남미 현대소설의 작가들로 하여금 1960년대에 폭발적으로 ‘붐 소설’을 만들어 내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붐이란 중남미 현대 소설이 유럽에서 지식인들과 독자들에게 엄청난 붐을 불러온 것을 가리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은 놀이다’라며 합리적 계산과 기존 질서에의 순응을 거부하는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새삼 놀이의 가치관이 주목되는 이유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 서로 함께하는 연대의 정신과 진정성에 연결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놀이’는 단순한 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의 디딤돌을 의미한다. 우리가 팔방놀이를 할 때 돌을 발로 치면서 한 칸에서 다른 칸으로 도약을 한다. 놀이 속에서 무언가를 꿈꾸게 된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올리베이라는 빵을 칼로 자르면서 빵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일상생활의 삶 안에서 너무나 당연시 하는 일에 대해 민감하게 회의하는 데서부터 소비주의적 문화를 거부함을 알 수 있다.

‘소비주의’ 문화가 끼치는 해악 중의 하나는 일상생활의 섬세한 삶의 기쁨과 슬픔을 개개인이 조용히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데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를 뭔가 붕 떠있게 만든다.

그리고 소비주의 문화는 대중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목청 높여 엄숙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위의 소설 『팔방놀이 (Rayuela)』의 장점이다.

에두아르도 라모스-이스끼에르도가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은 그냥 자연스럽게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하늘 또는 중심으로의 영성적 길, 다리, 여행”이 되고 있다.

중남미 좌파의 에너지는 영성

필자는 최근 중남미에서의 좌파 부상이 보여주는 에너지의 밑바닥에는 이런 쉽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영성적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사회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비전 제시의 절박함을 누구나 강조하고 있지만, 단순한 정책들의 나열에 그쳐서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의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한 수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본다.

독자들 중에서 혹자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탐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절한 무한경쟁의 정글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어린아이 장난이니 영성이니 하늘이니 하는 이야기는 공허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글의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강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해도 약자로서는 공허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어진 판 자체를 비웃고 전혀 다른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급진적인 가치관 또는 철학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콜롬비아 작가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훌리오 꼬르타사르가 이야기한 ‘남성적 독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역사와 사회의 주어진 흐름 앞에 순응하지 말 것을 강조한 데서 주로 그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훌리오 꼬르타사르는 이런 ‘남성적 독자’의 반대지점에 ‘수동적이고 편안해 하고 관습에 물들은 독자’를 ‘여성적 독자’라고 불렀다. 여성적 독자는 “그래 이 소설의 끝에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나”만 관심 있어 한다. 마치 일반 소비 대중이 어느 물건의 가격이 결국 얼마냐 하는 태도와 일치한다.

이 소설이 만들어졌던 60년대는 세계적으로 대중이 기존 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비틀즈, 중남미 붐 소설, 히피들, 존 에프 케네디, 밥 딜런, 혁명에 대한 환상’ 등등. 그러나 80년대를 시작으로 이런 저항과 반란의 문화는 서서히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져 갔다.

한가지 예를 들고 싶은 게 있다. 소비주의 문화가 왕성한 어느 나라의 민속공예품을 보면 정교한 반면 왠지 기계로 찍어댄 듯한 느낌으로 토속적인 느낌이 거의 없다. 반면에 가난한 남미의 공예품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손으로 일일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에 친근감이 든다. 그리고 어떤 공예품은 소위 투입된 노동가치에 비해 터무니 없이 값이 싼 경우도 많다.

필자는 가끔, 70년대에 많이 나왔던 유럽의 실존주의적 흐름의 영화가 생각난다. 어느 대기업체의 간부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겉으로 보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갑자기 별 이유도 없이 가출을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방랑의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 고통도 당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던 이미지가 그립다.

무엇보다 획일적 삶의 방식을 깨트릴 수 있는 철학과 감수성과 전략이 중요하다. 우리보다 훨씬 진보적 사회 즉 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한 유럽과, 유럽보다는 훨씬 가난하지만 또한 인간적 사회를 만들려는 비전과 정책을 실천하고 있는 남미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속물됨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기업가와 스타 연예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성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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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트남 어제와 내일 ‘담담한 공감’
‘트랜스팝: 한국 베트남 리믹스’ 전

임종업 선임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2월 20일


» 리호앙라이 <자화상 이야기>
 
한국계·베트남계 미국인 공동 기획
작가 16명 역사상처·문화결합 표현
“과거 매듭짓기보다 미래 여는 시도”


에스비에스의 주말드라마 <황금신부>가 인기다. 라이따이한, 곧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난 소녀가 생부를 찾으려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드라마다. 종전 34년 만에 비로소 공중파를 타는 베트남 관련 텔레비전 드라마지만 참혹한 전쟁은 ‘그림자의 그림자’로만 비칠 뿐이다.

그동안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이 애정드라마로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은 한국의 참전으로 인한 두 나라 사이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 송상회<푸른 회담>
 
아르코미술관(02-7604-598)에서 열리는 ‘트랜스팝:한국 베트남 리믹스’ 전시회는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상처와 대중문화의 결합이 보여주는 초국적 현상을 미술의 관점에서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민영순, 비에트 레 등 두 큐레이터가 함께 기획해 한국, 베트남, 미국 출신 작가 16명(팀)의 작품을 내걸고 내년 2월말까지 전시한다. 양국 간의 미묘한 주제로써 열리는 본격적인 대형 전시회로는 처음이다.

기획자 민영순, 비에트 레는 미 캘리포니아 소재의 유니버시티 오프 캘리포니아 어바인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사이. 민씨는 7살 때 이민으로, 레는 4살 때 보트피플로 미국에 건너가 살게 되었다. 태생적으로 민족 이산(디아스포라)에 관심을 두던 터. 몇해 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점심을 함께 들면서 ‘트랜스팝’ 전시를 기획하기로 뜻을 모았다. 뿌리는 다른 나라지만 일찍 자기 나라를 떠난 탓에 민감한 주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처지다.

두 나라의 애증관계는 전시장 입구에 ‘연대기’로 요약돼 있다. 외세에 의한 전쟁과 분단 등 약소국의 아픔을 공유하던 두 나라는 1962년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공감이 깨졌다. 1973년 종전까지 한국군 32만여명이 참전해 5000여명이 죽었다. 한국은 피값으로 경제발전의 토대를 굳혔고, 초토화한 통일 베트남은 1986년에야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과 더불어 개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양국은 악연 30년 만인 1992년 수교했다. 1997년 텔레비전 드라마가 수출되기 시작하고 1998년 인기배우 장동건이 하노이를, 2004년 베트남의 팝스타 마이 탬이 서울을 방문한다. 양국 간 혼인도 늘어 2006년에만 1만 명이 넘는 베트남 여성이 한국 남성과 결혼했다.

» 농부와 헬리콥터
 
기획자들이 고민 끝에 선별한 작품들은 대부분 에둘러 말하는 방식. 가장 직접적인 유순미의 <씻김굿>조차 양국의 다큐영상과, 한국군이 휩쓸고 간 중부 베트남 주민한테서 딴 인터뷰를 병치하는 정도. “꿈속에서 귀신을 본다”는 울먹임이 가장 충격적이다. 딘 큐 레는 <농부와 헬리콥터>에서 손수 만든 농업용 헬기를 국가에 강탈당한 농부의 하소연과 과거 전투헬기의 영상과 굉음을 병치한다. 이용백의 꽃으로 위장한 <앤젤 솔저>(비디오)에서는 전쟁을 상기하기가 쉽지 않다.

기획자 민씨는 “베트남 전쟁 자체나 역사적 의혹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30여년이 흘렀거니와 예술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양국의 폭력적인 역사, 민족의 이산 등 상처가 대중문화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다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한다.

되레 담담한 이야기에 깊은 울림이 있다. 깨진 소주병 조각으로 만든 팝송악보, 소화제 알약으로 만든 시와 유행가 가사(배영환), 해체를 앞둔 재개발아파트 앞의 10대들(박진영), 전투기가 끄는 수레, 판잣집을 이어낸 고층아파트(응엔 만 흥), 아무리 씻어도 거무튀튀한 탄광부(트렌정). 이들 작품은 전쟁 또는 군사정권 뒤꼍에서 두 나라 민중이 박탈감을 공유했음을 증언한다.

세대를 건넌 상흔은 ‘기억놀이’로 침잠하기도 한다.

1960년대 선전영화에서 1초간에 지나간 24컷을 뽑아내고(린+람), 침침한 술집에서 찍힌 자기사진에서 토굴 속의 여인을 연상하고(리호앙라이), 벌거벗은 네이팜탄 소년소녀 사진을 조각내거나(최민화), 육영수 피격사건을 재연해 반복한다거나(송상희), 여러 경치와 광경을 몽타주한다거나(오용석) 등이다.

전시는 아시아 문화가 국경을 넘어 뒤섞이면서 아시아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장 표나는 것은 티파니정의 작품들. 한국무대에 선 베트남 가수, 베트남 의상을 입은 일본인, 도쿄와 서울지하철이 겹쳐진 호찌민 도시계획도 등이 그것이다.

“멀리서 보면 독자적인 덩치를 형성해가는 아시아권의 움직임이 뚜렷이 보인다. 이번 전시는 과거에 대한 매듭이라기보다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시도라고 봐 달라.” 기획자의 당부다. 하여튼 이번 전시는 참전군인들의 공격을 당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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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과 함께 한 혁명전야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러시아 근현대 미술 ‘정수’를 만나다


임종업 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2 06


» 야코비의 <유형수들의 휴식>,
 

19세기말~20세기초 러시아 대표작 ‘한눈에’
사회변혁 꿈꾸며 민중 삶으로 뛰어든 화가들
‘리얼리즘’ 성찬에 칸딘스키 추상 4점은 ‘덤’


아이바조프스키, 보그다노프-벨스키, 바스네초프, 먀소예도프, 페로프, 수리코프, 크람스코이, 레핀….

금시초문이라고 부끄러워 말라. 아직 우리가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스키’ ‘프’자 돌림이니 물론 러시아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인들과 비슷하게 러시아 제정 말기 혁명전야를 살았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유학파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반면 러시아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미술인들이 배운 것이라야 유럽 야수파, 인상파에 국한됐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 이후도 마찬가지. 냉전시대를 건너 한국을 찾아온 한-러 수교 5돌 기념전은 칸딘스키, 말레비치처럼 서유럽 미술사에 편입된 아방가르드 유파가 주인공이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02-525-3321)에서 내년 2월27일까지 열리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은 딱하게도 칸딘스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를 훑는 91점의 끄트머리에 달랑(?) 넉 점만을 소개하고 있는데도…. 이해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미술은 칸딘스키 외에는 전인미답이기 때문.

» 위 왼쪽은 칸딘스키의 <블루 크레스트>, 오른쪽은 보그다노프-벨스키의 <암산>, 아래는 킵셴코의 <농가의 깃털 작업장>.
 

이 전시회는 사회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간 화가들의 세계를 들춰봄으로써 러시아 혁명전야를 통째 복원해 볼 수 있으며, 한때 ‘브나로드’(인민 속으로)를 외치며 농촌으로 스며들었던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마음 풍경을 엿볼 기회다.

전시의 중심은 1870년 먀소예도프, 페로프, 사브라소프, 크람스코이 등이 세운 ‘이동예술전협회’ 회원들. 졸업작품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시로는 반역적인 주장과 함께 왕립 페테르부르크미술아카데미를 자퇴한 이들은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취지로 이동예술전협회를 결성해 전국을 누비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정부 후원 없이 오랫동안 큰 큐모로 존속하며 인민들과 교감했다. 1880년 레핀, 수리코프 등 2세대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인상파의 빛과 색, 외광의 눈부심을 수용하면서 미술계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구호는 미술판 브나로드인 “미술을 인민에게”.

이들이 즐겨 그린 소재는 혁명전야의 실상.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유형지에서 갓 돌아온 언니와 겁을 먹고 경계하는 동생들의 눈초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 먀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는 허름한 농민들이 의회 담벼락에 기대 허기를 끄는 반면 실내에서는 지주들이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을 즐기는 순간을 잡아 지방자치회가 허울임을 폭로한다. ‘유형수들의 휴식’(야코비), ‘익사한 여인’(페로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레핀), ‘임시숙소’(마코프스키), ‘노부모의 상경’(레베데프), ‘농가의 깃털 작업장’(키브셴코), ‘암산’(보그다노프-벨스키), ‘방앗간 주인’(크람스코이) 등도 가슴을 울린다.

또 다른 중심은 기업인 후원자. 91점 가운데 41점은 국립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온 것으로,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을 세운 부유한 상공인이자 미술애호가인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콜렉션이다. 크레티야코프는 “돈을 벌게 해준 사회에 유용한 시설을 남겨 환원하고 싶다”며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는 구두쇠였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아무리 비싸도 돈주머니를 털었다. 평소 누구한테나 콜렉션을 무료로 개방했던 그는 죽기 6년 전 40년동안 수집한 3천여점의 작품을 모스크바시에 기증하고 큐레이터를 겸직했다.

또다른 후원자는 철도왕 마몬토프(1841-1918).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1870년 모스크바 근교 자작나무 숲에 자리한 아브람체보 영지를 구입해 예술가 마을을 만들었다. 이 공동체에서 레핀, 바스네초프, 수리코프, 세로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마몬토프의 조카 ‘타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레핀)이 그 증거. 아내를 관장으로 앉히고 생색을 내는 우리나라 기업인들과 대비된다.

이밖에 작가 마이코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의 초상은 당대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잘 보여주며, 풍속화, 풍경화에서는 작가들의 조국애가 흠씬 묻어난다. 리얼리즘 회화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작품은 오히려 덤처럼 느껴진다.

부나비처럼 유행을 따라다니는 한국 미술판에 ‘러시아 거장전’은 신선한 충격이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주목거리.


칸딘스키가 다시 왔다..12년만의 러시아 거장전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출처 : <헤럴드경제> 2007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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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보러 갔다가 ‘19세기 러시아’에 빠지다

임영주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11

>> 접힌 부분 펼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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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이름] 짚신나물
[풀꽃이름]

임소영 /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4


» 짚신나물
 

얼마 전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와 짚신 사진을 소개했다. 1586년 지금의 안동 지역에 살던 아이밴 과부가 자기 머리카락과 삼 줄기를 한데 삼은 신발을 편지와 함께 남편 무덤에 묻었는데, 1998년 택지를 개발하면서 발견된 것을 소개한 기사다. 쉽게 마음을 바꾸는 요즘 사람들에게 보여준 영원한 사랑의 진실이다.

풀꽃이름 중에 ‘짚신나물’이 있다. 꽃받침에 있는 갈고리 같은 가시털이 물체에 잘 들러붙어서 생긴 이름인데, 신기하게도 사람 다니는 길가나 풀숲 쪽으로 많이 난다고 한다. 곧 짚신이나 버선에 잘 달라붙고, 어린 순을 익혀 무쳐 먹기에 ‘나물’이 붙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넓적한 잎 모양도 짚신과 닮았다. 또한 사람과 짐승에 붙어서 번식하는 것도 특별하다. 꽃말이 ‘임 따라 천릿길’이라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같은 모양이지만 볏짚으로 삼은 신발은 ‘짚신’이고, 삼·모시 등으로 삼은 신발은 ‘미투리’라고 하니까, ‘원이 엄마의 미투리’가 정확한 표현이다. 큰 은혜(사랑)를 갚는 데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바친다’는 옛말의 정확한 물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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