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인종주의
홍세화칼럼

홍세화 기획위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 홍세화 기획위원
학업 성적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을 낳는 것을 ‘지적 인종주의’라면서 강하게 비판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인종주의자들이 인종에 따른 차별을 당연히 여기듯이, 우리는 학교 성적이 사회적 차별을 가져오는 것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내면화된 ‘지적 인종주의’는 미성년자들에게 ‘너는 1등급’이고 ‘너는 9등급’이라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도 마다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야만의 교육은 야만의 사회를 낳는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쌍둥이 자매 여고생이 나란히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일단짜리 기삿거리도 되기 어렵다. 불감증도 이미 중증에 이른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부모가 가진 재산과 비례한다는 뉴스도 이젠 놀랍지 않다. 철저히 서열화된 대학 졸업장의 효용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전적으로 부모 능력에 따른다. 주택 보유 능력처럼 교육자본도 부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 자식은 부모 재산이 가진 힘에 민감히 반응하도록 일찍부터 학습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자식과 부모 사이의 생명에 관한 그 무궁한 의미와 찬가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져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며 인간과 자연을 알아가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쳐 나가는 관계는 돈의 위력 앞에서 왜곡되었고, 일그러진 교육제도가 주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한낱 초라한 시 구절에 불과한 것이 돼 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오로지 등급과 등수를 매기는 데서만 의미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가령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80/100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점수가 몇 등이고 몇 등급인가만 중요하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교육이 교육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교 교실과 학원 강의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 영역도 지극히 좁다. 주어진 영역, 닫힌 영역에서 등수와 등급 경쟁을 하기에 끊임없이 선행 학습, 반복 학습을 거듭하면서 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는 배경이다.

더욱이 인문사회과학은 본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학문임에도 등급과 등수를 매겨야 하므로 학습 내용은 단답형, 객관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문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게 하지 않는 대신,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만 묻고 그 결과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인간을 이해하는 눈이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지배와 그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된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반노동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로 등급, 등수를 매기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학력 차별과 지적 인종주의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누군가 지적했듯이, 주어진 사회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보다도 훨씬 넓고 다양하다. 등급제 문제로 말이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절망과 체념을 내던지는 일이다. 대학 평준화에 대한 적극적 상상력은 지적 인종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학부모가 알아야 할 것 - 교고등급제에 대한 논란

홍세화 기획위원
출처 : <한겨레신문> 2004년 09월 25일


고교등급제에 대한 분노의 심정을 담은 한 학부모의 글을 읽었다. 서울 강남권 바깥에 산다는 그는 능력만 된다면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 자신 교육이민을 강요받은 처지가 됐었고 그래서 지금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을 수 만은 없었다. 세살과 여섯 살이었던 두 자식이 무상교육제도의 혜택을 받아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고마웠던 일은 아이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도 불평등을 겪지 않아 기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에게 불평등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다. 더욱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는 것은 민주주의사회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보편 원칙이다. 그것이 버젓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부유층 자식들이 서울대를 점령하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울대의 문은 치솟는 사교육비와 족집게 과외비를 충당할 수 있는 부유층에게 넓게 열려 있다. 이에 뒤질세라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이 집안 출신배경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있음이 의혹의 수준을 넘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 땅의 교육계 귀족들은 사회구성원들을 입시지옥의 질곡에 집어넣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강남의 부유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학생과 학부모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있다.

오늘날 경제적 자본과 부는 재산뿐만 아니라 교육자본까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 부, 권력, 명예가 사회귀족의 독점물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그런 용들조차 개천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채 사회귀족의 권위를 즐기며 교육을 통한 계층순환을 도모하지 않는다. 빈익빈부익부는 더욱 심화되고 열악한 사회안전망 아래 사회상태는 더욱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어린 사회구성원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언뜻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경쟁은 이미 누구에게나 열려있지 않다. 부유층 자식들이 승자의 모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치열한 경쟁과정은 계층의 고착화와 대물림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거짓 속임수에 가깝다. 동시에 경쟁에서 승리한 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교육과정 자체가 이미 인권침해 과정이니만큼 인권을 침해하는 지배까지 받아들이도록 하며, 학교에서 강조되는 질서의식과 더불어 ‘경쟁에서 이긴 자의 질서에 승복하라’는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속하도록 한다. 사회귀족의 대물림 지배가 사회구성원의 비판과 견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사회귀족은 비용을 투자했고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보상인양 인식한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찾기 어렵고, 비판과 견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오만과 뻔뻔함을 내면화한다. 귀족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능력도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머리 좋다는 학생들을 긁어모은 위에 특별법으로 특혜를 받은 서울대의 국제경쟁력이 세계 150위권 밖에서 맴돌고 있는 실정은 대부분의 사회귀족들이 자랑하는 학벌이라는 교육자본이 국내경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보잘것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의식도 없는 사회귀족들의 대물림 지배구조. 그러나 이 땅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모두 내 자식만의 계층상승만을 도모한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 구조를 불평 속에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마치 로또복권 횡재의 기대와 상상 속에서 오늘의 잘못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의 자식이 스카이(S.K.Y)대학을 통해 사회귀족의 반열에 입문할 가능성은 학부모가 로또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이 땅의 학부모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노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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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이 없는 학문에 자꾸만 답을 하라하니... -_-

내오랜꿈 2007-12-12 17:28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 옮겨 놓고 나니 옛날에 비슷한 주제로 홍세화 선생이 썼던 글이 생각나서 찾고 있는 사이에 아프님이 들리셨군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다른 것은 뭐 현재의 여당이나 정책이란 게 '그나물에 그밥'이라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 교육정책 만큼은 조금 걱정됩니다.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몇십년 뒤에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교육인데, 지금도 엉망인 것을 더 엉망으로 만들테니 말입니다.

우일신 2007-12-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의 돈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구까지야 뭐라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희와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문제를 삼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돈과 권력 뿐 아니라 부모들의 욕심과 세계관까지 고스란히 세습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세태는 정말 안타깝죠. 정년퇴임을 앞둔 김수행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즘 서울대 학생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잘 모른다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덕에 소외된 이웃들과 부딪힐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는 것이겠죠. 내오랜꿈님이 말씀하신 대로 결국 교육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요....

내오랜꿈 2007-12-13 00:1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부모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자식에게 '세습'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한테 대선에서 누구 지지할 거냐,고 물어보면 아버지가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대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