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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건국가의 미학
[김우창칼럼]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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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발주의<90년대 이후 개발주의>가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
조명래 교수 ‘개발주의와 민주주의 9 계간 ‘비평’에 게재

강성만 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2 19


» 새만금 방조제 연결 공사 현장. 보전과 개발이 팽팽히 맞섰던 새만금 간척 사업은 결국 개발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개발주의 세력과 담론의 확산 과정은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려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 사진
 
‘토건국가’라는 개념이 한국에 알려진 게 1990년대 중반이다. 일본 현대사 전문가인 개번 맥코맥이 그의 저서 <허울뿐인 풍요>에서 “일본은 막강한 토건세력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정치가 썩고 경제가 투기화하며 국토와 환경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면서 이런 국가 유형을 토건국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유형을 일본 건설성이 공사를 발주하고 시공사는 공사비 일부를 정치인과 관료에게 상납하고 정치인은 이러한 거래를 지원하는 유착·가격 조작·뇌물 제공의 사슬구조로 정식화했다. 이 먹이사슬을 이루는 세력은 ‘토건 마피아’라 일컬었다.

시장경쟁에 의한 개발, 외견상 민주주의 절차 밟지만
실행과정서 시민 배제 관료·전문가 중심 독단적 추진
계층간 혜택·환경 불평등 불러…생태사회로 전환 필요


이 모델은 이 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학자들은 1990년대 들어 우리 사회가 이전의 개발국가에서 토건국가로 변모하는 징후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국내총생산의 지출에서 건설 투자 비중은 1980년대 13∼18%에서 1990년대 21∼24%로 늘어났다. 국민총생산의 지출에서 건설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가 된다. 특히 현 정부가 국정 최우선 과제로 국토균형발전을 내세우면서 건설교통부와 관련 국가기관들의 위상과 권한이 강화된 것도 이런 판단의 설득력을 높였다. 건교부와 산하의 개발공사들은 자신의 생존논리를 위해 끊임없이 건설 사업을 기획·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건 마피아’란 소리를 듣기도 하는 이들의 영향력 확대 과정에는 부패와 국토 환경 파괴의 문제도 줄기차게 따라 붙었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 및 지역계획 전공)는 계간 <비평> 겨울호에 실은 글 ‘개발주의와 민주주의’에서 개발주의 세력과 담론의 확산 과정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려 있는지를 살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의 개발주의를 이전과 구분해 신개발주의라 했다. 이전에는 권위주의 정부의 일방적인 기획과 지시에 따라 개발이 이뤄졌으나 이제 개발 사업은 외견상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주도의 발전 전략에서 개방화와 탈규제, 시장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념이 주도하는 개발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조 교수는 여기서 의문을 나타냈다. 신개발주의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추진과정에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과를 보면 태반이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 보전주의에 대한 개발주의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는 거시 사회적 차원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축되었다고 하더라도 미시 사회적 차원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예컨대 국책사업인 공공개발 프로젝트들은 타당성 검토, 합리적 계획, 의견수렴, 영향평가 등 절차를 거치지만 이 과정은 대개 ‘형식적 요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토목적 전문성을 이유로 일반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채 관료와 전문가 중심으로 꾸려진다는 지적이다.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의 교란과 왜곡의 배경에는 언론과 학계 등 여론주도층이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개발담론의 득세와 ‘불완전한 지방자치제도’가 자리하고 있다고 조 교수는 분석했다. 즉 지역 주민들도 개발담론에 부추겨진 기대와 환상에 사로잡혀 개발의 정당화에 쉽게 동화되면서 기술전문가가 사업을 독단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또 지역의 유력 상공인들이 지역 언론을 장악하고 각종 지역모임과 기구에서 지역 여론을 호도하면서 개발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기 힘들다고 했다.

신개발주의는 사회 여러 부문들 사이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키워 절차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실질적 민주주의의 퇴행으로까지 연결된다고 그는 봤다. 그는 “오늘날의 신개발주의는 철저한 시장경쟁주의 원칙과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개발의 혜택이 계층차별적으로 분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본과 시장논리를 띠는 공간환경으로의 개발은 생활세계의 오염과 파괴를 넘어, 계층 간 환경불평등까지 초래해 사회적 약자나 환경약자들의 삶의 지속가능성을 이중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아울러 ‘공동체적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주민들이 그들의 삶터인 공간환경에서 더 이상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한다고도 했다. 지방자치란 제도에도, 온전한 자치의 구현이 힘들다는 지적이다

조 교수는 “개발의 비민주적 권력화는 근대화 과정에서 개방적으로 토의하고 구현할 수 있는 연성적 가치, 민주적 가치, 다양성의 가치, 일상적 가치 등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태 사회로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통합하는 녹색 교육 △녹색사회협약의 추진 △녹색세력의 정치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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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지상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앞으로 몇 년 동안 애꿎은 땅덩어리가 얼마나 더 고생해야 할까.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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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2-2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 참 더러운 밤이죠?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말예요.

내오랜꿈 2007-12-20 02:35   좋아요 0 | URL
지난 여름의 끝무렵에 와인을 좀 담갔지. 12월 초에 1차 숙성을 마치고 2차 숙성중이네요. 조금 전에 그 와인 중에 한 병을 따서 홀짝거리고 있다. 자화자찬이지만, 수준급 와인이 된 것 같다..^^

뭐, 난 기분 덤덤하다. 이명박 되나, 정동영이 되나 정책적 차이가 있겠어? 오늘 밤에 기분 좋아서 술 마시는 사람과 기분 더러워서 술 마시는 사람이 뒤바뀌는 정도의 차이 아닐까? 음... 자신이 진보의 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는 좀 이로울 것 같네.

민노당의 실패가-이미 예견된 실패였지만- 지랄 같지만... 고민된다. 그래도 엔엘 애들 끌어안고 저걸 계속 끌고 가자는 데 동참해야 할지, 깨고 나가 새로운 모색을 하자는데 동참해야 할지...

다음에 와인 한 병 갖다 줄께.....
 

"당신이 사는 곳도 태안반도처럼 될 수 있다"
홍성태의 '세상 읽기' <17>'위험사회' 대한민국

홍성태/상지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2월 11일



» 아름다운 경관과 국내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으로 유명한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변에서 8일 뿔논병아리 한 마리가 유조선에서 쏟아져 나와 해안까지 밀려온 기름을 뒤집어쓴 채 숨져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 <한겨레신문>(2007 12 10)에서 인용

  지난 여름에 태안반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아내가 오래 전부터 태안을 가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다가 결국 못 가고 말았다. 얼마 뒤 가로림만을 막고 조력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긴장하고 분노했다. 조력발전을 명분으로 가로림만을 방조제로 막아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발업자들과 지주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겠지만 가로림만은 크게 훼손되고 말 것이다. 가로림만 조력발전계획은 시화호 조력발전계획, 강화도 조력발전계획 등과 함께 반드시 막아야 할 신개발주의의 개발계획이다. 자연과 문화를 내세우며 자연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한 개발주의이다. 복원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한 '청계천 복원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태안 오염 재해 지역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태안반도를 덮쳤다. 2007년 12월 7일 아침 7시 15분에 인천대교 공사에 사용되고는 거제로 이끌려가던 거대한 크레인이 유조선을 들이받아 유조선에 구멍이 나서 무려 1만500kl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든 것이다. 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나흘째인 12월 10일 밤 현재, 태안반도의 바다 8000여ha가 기름으로 뒤덮였고, 양식장이 밀집한 가로림만도 위험하다고 한다.
  
  8000ha는 무려 8000만㎡이고, 평수로는 무려 2420만 평이다. 여의도의 27배를 넘는 넓이의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기름으로 뒤덮이는 순간, 생명의 바다는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만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기름에 뒤덮여 고통스럽게 허덕이다가 죽는다.
  
  1990년 8월에 발발한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유정들을 파괴했고, 이 때문에 많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 많은 생명체들이 죽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름에 뒤덮여 허덕이며 죽어가던 가마우지의 모습은 걸프전의 끔찍한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태안반도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나먼 아라비아해에서 벌어졌던 무서운 일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대참사가 2차 오염, 3차 오염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뿌린 유화제도 바다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름오염은 곧 유화제 오염으로 이어진다. 유화제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다를 깊이 죽인다. 기름과 유화제는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면서 공기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이미 태안반도 일대의 공기는 크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는 자연을 파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 속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아예 '위험사회'라고 부른다. 실로 우리는 편리하고 풍족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위험사회'는 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 같은 '위험사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잘 드러났듯이 아주 심한 위험사회에 속한다. 극히 위험한 과학기술을 관리하는 사회체계가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을 가중시키는 부패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위험대책을 수립했다.
  
» 아름다운 모래 언덕에 소나무가 자라는 특별한 풍광으로 유명한 충남 태안군 신두리 해수욕장에서 10일 오전 불가사리가 검은 기름에 덮여 죽어가고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정부의 정책이 크게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흔히 '인재'로 표현되는 '위험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부실한 사회체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이제까지 제시된 주민의 증언이나 수사내용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주민들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대형선박들을 무단정박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인재'라고 주장했다.
  
  사고 지점에 가장 인접해 큰 피해를 입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은 피해가 확산된 것이 어설픈 대처에 따른 '인재'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배의 주차장과 같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유조선과 화물선을 정박해 이 곳을 지나는 배들과 충돌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사고 지점은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고시한 표박지와 3마일 떨어진 지역으로 기름유출 대재앙을 불러온 주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태안군 어선 조합원인 이모(60)씨는 "태안화력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유조선 등이 이번 사고 지점에서 며칠 머물렀다"며 "표박지로 고시한 곳이 아닌 곳에 며칠 동안 정박해 있어 단속을 건의해도 대산해수청은 이를 외면해왔다"고 말했다.('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들', <국민일보>, 2007년 12월 10일)

  
  또한 대산해양수산청과 크레인의 예인선 사이에 규정대로 소통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양자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했는가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고를 막아야 할 당사자들이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사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밝혀지겠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엉터리 같은 것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해경 조사에서 대산해양수산청 관계자들은 "예인선이 호출에 응답하지 않았고, 크레인을 실은 부선과 예인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진 상황도 전혀 보고 받지 못했다"며 예인선 측에 책임을 미뤘다. 이에 대해 예인선 관계자들은 "관제실에서 VHF 16번으로 호출해야 하는데 12번으로 호출하는 바람에 교신이 안됐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들은 항상 VHF 통신 16번 채널을 켜놓고 항만 당국의 비상호출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의혹이 쏠리는 부분은 휴대폰 통화 이후다. 관제실과 예인선 선장간 통화가 있은 뒤 1시간 정도면 예인선이 유조선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만약 이미 예인선과 부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관제실과의 통화 때 이를 보고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충돌 때까지 와이어가 끊어졌다는 보고는 관제실에 접수되지 않았다.
  
  대산해양수산청도 안이한 대처로 의혹을 사고 있다. 항로 이탈과 충돌 위험을 인지한 뒤 예인선을 VHF로 두 차례나 호출하고, 휴대폰으로 경고까지 했지만 이후로는 충돌 시까지 별다른 확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크레인은 대산해양수산청의 경고에도 불구, 항로를 크게 벗어나 유조선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관제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죽음의 바다' 책임회피만 둥둥', <한국일보>, 2007년 12월 9일)

  
  삼풍백화점은 왜 붕괴했는가? 붕괴를 막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절차가 있었으나 부패로 말미암아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사고에서도 제도와 절차가 멀쩡히 있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패 때문인지, 단순한 태만 때문인지, 혹은 그저 실수였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기구를 설립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추구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츤은 <정신의 생태학>에서 오늘날 겸손은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의 요청이라고 지적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연구한 미국의 조직사회학자 찰스 페로우는 조직적 복잡성 때문에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완전히 안전하게 관리할 방도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연구의 성과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나흘째인 10일 오후 충남 태안 앞바다 양식장이 기름띠에 둘러싸여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한겨레신문>(2007 12 11)에서 인용

태안반도의 대참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확연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구 자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 이러한 위험을 결코 안전하게 관리할 수 없는 현대 사회체계의 위험에 전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핵발전정책의 중단, 대형 송전선로 건설의 중단, 그리고 '경부운하' 구상의 폐기 등은 그 구체적 과제의 예이다.
  
  낙동강과 한강에서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미 1991년 봄에 낙동강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한 달 새 두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위험사회 한국은 파멸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무조건 경제, 무조건 성장이 아니다. 파멸을 향해 치달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과제이다.



서해안 초대형 환경 재앙 예고

태안 앞바다 최악 기름유출
국립공원 바다생태계 장기 영향 불가피
검은머리물떼새 등 천연기념물 보호 위기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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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잊혀진 국도를 위하여
[길위에서]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의 여행길4

노동효 / 자유기고가
출처 : <컬쳐뉴스> 2007년 11월 24일



나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국도 위를 지나고 있었다. 소양호를 끼고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길이 모롱이를 만날 때마다 넉넉한 여백을 안고 있는 동양화 화첩의 새 폭(幅)을 넘겼다. 서울(양구)방향 이정표가 新46번 국도 위로 옮겨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까닭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추곡~웅진 간 舊46번 국도.

내가 로드 페르몬에 중독된 후천성 샛길 증후군(Acquired Byroad Syndrome) 환자가 아니었더라면 늙은 어부 한 명 눈에 띄지 않는, 소양호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없었으리라. 은둔하는 절경의 겨드랑이에서 새어 나오던 체취(Road Pheromone)를 맡던 순간 핸들을 급히 샛길로 꺽지 않았더라면, 올림픽 구호마냥 ‘보다 더 빨리! – Citius!’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는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한번쯤은 일탈해보지 않겠니? 하고 킬킬거리던 샛길의 웃음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나는 이 지면을 빌려 <길 위에서>란 여행기를 기고해왔는데, 누적된 졸고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 글이 여행기로써 갖추어야 할 격식과 양식을 그다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가는 길'은 이러저러하고, 그곳엔 이런 ‘음식점’이 있고, 저런 ‘휴게소’가 있어서 식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식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버린 데에는, 필자의 글에 혹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여행지를 안내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길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데 있으며, 한편 은둔하는 절경이 이런 저런 경로로 알려지고 나면 소수나마 '깊은 맛'을 오감으로 느끼고 돌아가던 장소가 다수가 몰려들면서 '얕은 맛' 조차 못 느끼고 돌아서는 장소로 변해버리는 까닭이다. 소문은 언제나 사람들만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포크레인과 유흥업소와 놀이공원을 함께 데리고 오므로.

그러나, 이번 글에서 나는 여행기로써 양식과 격식을 갖춰 ‘가는 길’을 아주 소상히 안내하고, '휴게소’와 ‘음식점’에 대해서도 아주 소상히 밝힐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건 안내문이자 초대장 같은 것인데, 일단 그날 아침에 만난 야릇한 고양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요기(Yogi) 같은 길고양이 한 마리

낯선 곳에서 잠을 잘 때면, 이 나이에도 종종 몽정을 하는 나는 그날 아침, 다행이구나! 하고 마른 팬티를 아쉽게(?) 느끼며 침낭 속에서 빠져 나왔다. 밤새 그 누구도 <광치자연휴양림>에 무단잠입한 우리들을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어제 무단잠입하는 모습을 목격한 관리인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길만 남아있었다. 물론 광치령을 내 늙은 로시난테를 타고 넘어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날 아침 혼자 햇살에 훤히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S라인의 고갯길 깊숙이 들어가 본 결과 조심해서 지난다 하더라도 무리일 듯 했다.억지로 넘다간 나뭇가지에 옆구리가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는 정도에서 끝날 게 아니라, 내 늙은 로시난테의 배가 갈라지겠구나!

차로 다시 돌아온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한 모금 물을 들이켰다. 첩첩산중 논밭도, 축사도 없는 물길을 따라 내려온 청정수는 웬만한 약수 저리가라! 하고 목젖을 타고 내려갔다. 찌르르 퍼지는 청량감. 산은 깊고, 물은 깨끗하니 얼씨구나 좋을시고! 나는 되(지)도 않는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서 불러댔다. 그 남자 작사, 그 여자.....없다. 차문을 열고 침낭을 개는 사이 L형도 부시시 이불을 털며 일어났다.

어,벌써 해 떴네? 사람들 눈 뜨기 전에 나가야 할 텐데. 무단잠입은 좋았는데,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할 일이 자못 염려스런 아침 인사를 하며, L형은 이불 개고, 트렁크 열고, 이불을 쑤셔 넣고, 보조석에 앉았다. 지금이 딱 좋을 시간이에요.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을 시간이니, 우리가 지나가도 모를 겁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 평일이고 보면 손님도 없고, 지나가 봐야 무단잠입한 우리 차량밖에 없을 그런 판이었다. 하하하, 믿어보세요. 관리소에서 지키고 있으면 어쩔 거야? 이미 볼 것 다 보고, 잘 것 다 잤겠다....웃는 얼굴에 침 뱉기야 하겠어요? 하하하

그러나 웃을 일도, 침 뱉을 사람도 없었다.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아 TV 보고 있을, 딱 그 시간이었으니까. 거 봐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기분 좋게 <광치자연휴양림>을 빠져 나오는데, 어 저 녀석은 뭐야, 밤새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지난밤 마주쳤던 고양이 한 마리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요기(Yogi)처럼. 옆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다. 올 녀석들이 오는 걸 보았고, 갈 녀석들이 가는 걸 지금 보고 있다는 식으로. 묘(妙)한 고양이(猫)였다. 내 너를 잊지 않으마!

추월차선도 갓길도 없는 왕복 2차선

강원도 양구에 들어서자 등굣길에 오른 학생들 버스정류장 앞에서 종종거리고, 갈 길 바쁜 차량들 쌩쌩 달려와 꽁무니에 바싹 달라붙곤 했다. 육중한 덩치의 대형트럭들 빵빵 뒤에서 컬렉션을 울려대기도 하고, 출근길이 급한 차량들 깜박깜박 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시속 60Km가 규정속도인 도로였지만 시속60km를 유지하며 달리는 차량은 내 늙은 로시난테 밖에 없었다. 그래, 다들 바쁘니까. 왕복 2차선이고, 추월차선이 있지도 않고, 비켜설 갓길이 따로 있지도 않으니까. 나는 뒤 차량이 재촉하는 데로 가속페달을 밟다가 비켜설 약간의 공간이라도 있으면 비켜서곤 했다. 끼익

- 왜? 무슨 일이냐?
- 아, 그냥...뒤에 붙은 차량이 바쁜가 봐요.


나는 이제 전통한옥을 짓는 목수이자, 산악인이 된 L이 회사에 사직서를 쓰기 얼마 전에 겪었다던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꼭 그 한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퇴사를 결정하는 데 밀알이 되었던. 월요일 아침 L은 여느 날처럼 출근 버스를 탔다. 여느 날처럼 샐러리맨과 샐러리우먼과 학생들과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가득한 차 안이었다. 버스는 40분 후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문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 한 분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아주머니를 향해 짜증과 역정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아주머니를 '확' 밀치고 버스에서 내렸고, 헐레벌떡 달려가 간신히 출근카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때,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모멸감이 양심을 찔렀다. 5분쯤 늦고, 10분쯤 늦으면 어떻다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내가 어머니보다 연세가 많으신 그 분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단 말인가, 대체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건가?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舊46번 국도

양구 방향에서 내려오던 31번 국도는 46번 국도를 만났고, 물가에 접하는가 싶더니 사명산(1,198m) 아래를 관통하는 웅진터널로 이어졌다. 그리고 웅진터널을 지나자마자 곧 바로 연결되는 수인터널. 웅진터널과 수인터널 사이 500미터. 오른쪽으로 난 샛길에서 로드 페르몬이 훅하고 끼쳤다. 나는 직감적으로 핸들을 꺾어버렸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벗어났다는 신호를 띄워 보냈다. 나는 커브를 주욱 그으며 내려가다 되돌아나가는 길을 그냥 지나쳤다. 다시 네비게이션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름도 떠오르지 있는 않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상야릇한 길이었다. 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데, 지나는 차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2006년 추곡~수인, 수인~웅진 간 터널이 공식적으로 개통되면서 新46번 국도가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GPS가 알려주는 데로 길을 오가는 사이 舊46번 국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길이 되었다. 게다가 舊46번 국도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터널 속으로 5킬로미터 남짓 통과할 수 있는 직선거리를 S자 곡선을 그으며 에둘러 20킬로미터를 갈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더 빨리'출근하고, '보다 더 빨리'일하고, '보다 더 빨리'살아가야 하니까. Citius! Citius! Citius!

길이 잊혀지면서 그 길 위의 관광안내소도 잊혀졌다. <양구군관광안내소>앞 넓디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외장을 한 건물은 대형음식점까지 2층에 이고 번듯하게 서 있었지만, 인적 없는 건물의 3분의 1은 이미 담쟁이와 수풀로 뒤덮인 상태였다. 오고 가는 손님이 없으니, 사고 팔 물건도 없고, 안내하고 안내 받을 사람도 없다. 콘크리트와 벽돌과 간판으로 이루어진 인공구조물은 있는데 인류는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데니 보일의 [28일 후]의 세계로 뚝 떨어진 기분이잖아. 여기 아무도 없어요? Hello, Is anybody there?...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길은 굽이를 지날 때마다 낯선 풍경을 아흔 아홉 첩 병풍마냥 펼쳐놓았다. 호수는 고요했고, 길가의 담쟁이들은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고, 철제 가로대는 이미 풀들로 뒤덮여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만이 하얗게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을 뿐, 내버려두자 자연은 스스로 자연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최악이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차선이며, 자연을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인간으로부터 잊혀진 탓에 스스로 치유기간을 갖고 있는 자연을 지나며 우리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기도 했고, 드러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차도 한가운데에 엎드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는 건 정말 최상의 행복이었다.

두팔 벌려 돌, 비, 꽃 그리고 사람을 안아요.

-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나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씌어져 있습디까?


책장을 덮고, 다시 차에 올라 화폭을 넘기며 길을 가노라니 왼쪽으로 너른 마당이 있는 간이휴게소가 나왔다. 간판은 돈까스용 포크와 나이프 그림이 음식점 로고인양 박혀 있고, '추곡광'에 이은 글씨는 지읒과 이응이 반만 보일 정도로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광으로 시작되는 단어로 ‘광장’ 말고는 이렇다 하게 떠올릴 단어가 없는 나로서는 지읒과 이응이 장字에서 떨어져 나온 자음들이라고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추곡광장휴게소.

휴게소 음식점 유리창에 지워지지 않은 글씨들을 살펴보니 한때는 감자가루수제비, 제육복음, 된장찌개, 심지어 양념숯불구이까지 팔던 곳이었던 모양인데, 이제는 주인도 객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L형과 나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위엔 버려두고 간 식기와 주방기구들이, 작은 방 한 칸에는 오래된 이불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미 길도, 길 위의 휴게소도 깡그리 잊은 듯 했다. 달팽이관처럼 생긴 철제 회전계단을 밟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터널에서 빠져 나오는 新46번 국도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느리게 가고 싶으면 느리게, 빨리 가고 싶으면 빠르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던 그 길 위에서 도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정체된 88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내부순환로, 외곽순환도로……출근길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고, 앞차는 가지 않고, 뒤차는 빵빵대는 길에서 매일매일을 시달리는 사람들,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빠져 나와 여기서 하루쯤 쉬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땅에서 걷고, 달리고, 사는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아흔 아홉 첩 소양강 진경산수화를 감상하는 동안 차 한대 보지 못했구나. 내리막이 시작되며 新46번 국도와 만나는 출구 앞에 <추곡약수터> 이정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엔딩이로구나! 그때, 차량 한대가 좌회전을 하며 舊46번 국도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도대체 이 시간에 우리 말고 또 누가? 빈 택시였다. 운전기사는 차창 밖으로 날개 마냥 팔꿈치를 내밀고 있었고, 느릿느릿 슬로우 화면처럼 다가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택시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두 글자를 읽었는데 그러고 나자 마치 누군가가 만든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편영화의 제목인 양, 두 글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휴 무(쉴 休, 힘쓸 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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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생명의 섬을 걷다
언니들과 함께한 ‘게으른’ 산책… 개발 열풍에 뒤척이는 ‘시시한 풍경’의 애틋함이여

▣ 강화 = 글 김소희 기자 / 사진·정수산 기자
출처 : <한겨레21> 제685호 / 2007년11월15일


강화도는 에로틱하다. 결코 나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곳곳에서 방문객을 조바심나게 만든다. 저 산자락을 돌아볼 수 있다면, 저 너머에 들어가볼 수 있다면…. 교교함은 섬 북단 철책이 둘러쳐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이곳을 살짝이라도 들춰볼 기회를 얻은 이들은 강화도와 혼연한 한 몸이 될 날을 꿈꾼다.

△ 늦가을 강화도는 아늑한 유년의 기억을 떠올려준다. 봉천산 아래에서 창후리 포구까지 들녘 수로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 바다에 닿는다.

한국적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

강화도는 여성적이다. 쏟아지는 햇볕과 날 서지 않은 바람이 섬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들녘은 만추에 빛난다. 아무도 배제하거나 밀어내지 않지만, 누구도 쉽게 파악하거나 귀속할 수 없다. 국내 4대 강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이 트여 있는 한강 하구는 뭇 생명들의 젖줄이다. 섬 북단을 휘돌아 내리며 펄에 몸을 댄 것들을 먹이고 키운다.

강화도는 역설적이다. 군사적 대치가 섬의 평화를 지켰다. 생태와 자연과 토착민의 살림은 쇳스러운 무기들이 결집된 휴전선 끝자락에서 오히려 편안했다. 강화도의 길은 그래서 밟는 길이 아니라 스며드는 길이다. 서울의 지척인데도 수도권에서 시작해 전국을 뒤흔든 개발 광풍은 아직 48번 국도를 휩쓸지는 않았다.

“자 이번에는 랩송을 시작합니다.”

11월3일 오전 11시, 봉천산 꼭대기. 일군의 여성들이 흔들흔들 몸을 놀린다. 산불 감시초소 옆에 써붙여진 시구가 랩 버전으로 바뀐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요~요.” 북쪽의 송악산, 광덕산, 물가 마을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북녘 땅이 훤히 내다뵈는 봉우리에서 춤을 추는 이들은 이날 아침 강화군 하점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인 ‘강화 번개’ 참석자들이다. 수년째 강화도 구석구석을 ‘걸어온’ 이유명호 한의사를 중심으로, 오한숙희 여성학자, 서명숙 (사)제주올레 대표,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정정엽 화가 등이 눈에 띈다.

△ 봉천산 중턱에서 바라본 강화도 일대.

산 아래에서 봉우리까지는 불과 1.2km이다. 운동화 신고 편안하게 산보 삼아 들기에 맞춤하다. 틈나는 대로 쉬고 놀며 올라도 40분이면 족하다. 15분 남짓 올랐을까. 시야가 탁 트이며 섬과 일대가 한 품에 안긴다. 단정하게 구획된 들녘에는 수로가 흐르고, 석모도·교동도 너머 서쪽 바다까지 너르게 펼쳐진다. 늦가을 햇살에 천지가 반짝인다. 봉천대는 예부터 서민들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관이 마니산에서 천제를 지냈다면 민은 봉천산에서 하늘을 모셨다.

제주도에서 걷는 길을 만들고 있는 서명숙 대표는 “제주의 풍광이 드라마틱하고 이국적이라면, 강화도는 유년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적인 것들의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이라며 “풍경에도 음악과 같은 장르가 있다면 강화도는 편안함과 아늑함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야, 갯벌, 수로 같은 ‘시시한 풍경’은 현대문명이 굉음을 내며 작살낸 것들이기에 더 애틋하다.

수로를 따라 걸어 바다에 닿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 달리다 보면 어느 틈엔가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춘다. 지도에도 길이 없다. 철조망이 삼엄하게 쳐져 있다. 해안에서 꽤 떨어진 봉천산 역시 북쪽 봉우리는 일반인 출입 금지이다. 방문객이 오를 수 있는 곳은 남쪽 봉우리의 서남쪽 능선뿐이다.

고려 고종이 학생들을 모아 공부시켰다는 월곶리 연미정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속해 있다. 연미정 절벽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화강)으로 흐른다.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군부대 허가 없이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북쪽으로 적북돈대, 의두돈대를 거쳐 불장돈대를 꼭짓점으로 돌아 서쪽 구등곶돈대, 인화돈대를 지나 창후리 무태돈대에 이르기까지 철조망이 계속된다. 길은 강에서 멀었다 가까웠다 한다. 허가 없이는 강과 땅이 만나는 경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흐르는 물길이 휴전선이다.

△ 강화도 북단을 돌아 서쪽 인화리에 이르면 48번 국도의 끝자락이다.

강화도 최북단 마을 철산리에서 북쪽 개풍군까지는 지척이다. 가까운 곳은 물폭이 불과 1.7km이다. 두 해 전 빈 페트병 다섯 개를 묶고 헤엄쳐 넘어온 용감무쌍한 ‘귀순 동포’도 있었다. 물길을 잘 만났기에 무사했지, 잘못 탔다면 강화도를 코앞에 두고 백령도쯤 떠내려갔을 것이다.

언니들과 나들이에 나서면 두 가지가 좋다. 첫째, 허덕대며 쫓지 않아도 된다.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말)가 될 수 있다. 앞사람 발자국만 따라 ‘고지를 정복’하는 식의 등산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쉬고 노는 입산이다. 봉천산은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과 노인들도 쉬엄쉬엄 오를 수 있으니, 정복욕 강한 이들은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 입만 가도 된다. 찐 고구마, 김밥, 떡, 오이, 과일, 각종 차… 이날 등장한 먹을거리만도 셀 수가 없다. 야채수프까지 보온병에 한가득 담겨왔다.

봉천대에서 몸을 풀고 내려오는 길, 석탑을 만난다. 봉은사지 5층 석탑이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의 국가 사찰로 고종 19년(1232)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 강화도는 39년간 고려의 왕도였다. 외침과 부침의 역사가 곳곳에 스며 있다.

석탑 주변은 수십 명이 앉아 수건돌리기를 해도 좋을 만큼 그늘이 넉넉하다. 풀밭도 폭신하다. 두어 시간 등산을 마치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내처 바다까지 걸을 이들은 이곳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는다. 하점초등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 들판으로 내리면, 그때부터 ‘걸어서 바다까지’이다. 수로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 바다에 닿는다.

강화도를 걷는 묘미는 섬 북단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해안 철책길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성묘 등을 이유로 외지인이 오기는 하지만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현지인들뿐이다. 외지인은 신분증을 맡기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앞서 10월7일 현지인과 함께 찾은 강화 북단은 천혜의 ‘생태적 요충지’였다. 부지런한 개리 몇 마리가 벌써 겨울을 나러 왔다. 먹이를 잔뜩 잡아먹었는지, 뒤뚱대며 기분 좋게 ‘과악, 과악’ 놀고 있었다. 인적이 닿지 않은 광활한 습지가 모두 이들의 놀이터다.

△ 10월7일 강화도 북단의 철책 너머로 겨울 철새 개리들이 노닐고 있다.

강화 북단은 남북의 화해 국면에서도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다. 오랜 대치에 따른 긴장이 아니다. 지금의 것은 개발과 보존이 맞선 팽팽한 긴장이다. 남북 정상이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담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 합의하기 전부터 온갖 장밋빛 개발 구상들이 쏟아져나왔다. 10·4 공동선언은 이들 구상에 날개를 단 셈이 됐다.

계획이 현실 된다면 ‘한심해’ ‘열바다’

한 대형 건설회사는 영종도부터 강화도를 거쳐 개성까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59.9km의 고속도로를 놓을 계획을 짜고 있다. 인천시는 강화 본섬과 석모도·교동도를 잇는 제방을 쌓고 조력발전시설을 두겠다고 나섰고, 환경부는 영종도 북단에서 강화 남단 일대를 매립해 해상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 대선 주자는 이곳에 아예 여의도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인공섬을 짓겠다고도 공약했다.

이곳을 찾기 바로 전날, 한강 하구에 쌓인 모래라면 앞으로 20년은 채취해도 넉넉하다는 뉴스가 각종 언론에 쏟아져나왔다. 동행한 고은광순 한의사는 개풍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 자리로 꼽힌 철산리의 한 지점에서 “지금 나오는 계획이 현실이 된다면 저 바다는 ‘한심해(海)’, 혹은 ‘열바다’로 길이길이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뭇 생명들이 다 죽어나갈지 모른다는 우려이다. 실제 김포 쪽 한강 하구가 개발되면서 머나먼 강화 남단 동막의 개펄까지 점점 딱딱해지는 것으로 관찰됐다. 물 흐름이 급격히 바뀌어 먼 바다로 떠나가야 할 퇴적물들이 쌓인 결과로 추정된다. 조류 전문가들은 강화도 개발로 새들이 번식처를 위협받으면 일부 종은 급격히 멸종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들이 즐겨찾는 강화도는 마니산, 전등사, 동막 해변 등이 위치한 섬의 남단이다. 섬의 생태도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얘기다. 섬 북단은 체계적으로 조사를 한 적조차 없다. 날아다니는 새들의 개체 수 정도만 파악됐다. “거기 들어가면 지뢰에 다 죽을 텐데 누가 함부로 들어가느냐”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 봉천산 봉우리에서 한눈에 내다뵈는 북녘땅. 가운데 뾰족한 산이 송악산이다.

환경·생태주의자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개발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최소한 이곳의 생태 환경이 어떤지, 어떤 생물종이 서식하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하고, 정부와 지자체와 개발업자들은 남북이 공생할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환경·생태적 가치를 유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고속도로를 놓겠다는 건설업체 담당자는 “사과에 머리카락 굵기의 바늘을 찌르는 정도일 뿐”이라고 도로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했다. ‘개발’과 ‘보전’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란 남북 통일보다 요원한 것일까.

강화도가 그저 좋아 12년 전 가족과 함께 들어왔다는 김순래(50) 강화고 교사는 “남북의 화해와 번영을 위해 물길은 풀되, 막개발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가령 교동도는 북쪽 바다가 군사경계지역이라, 강화 본섬을 오갈 때 물때를 잘못 맞추면 15분이면 되는 뱃길이 남쪽으로 빙 돌아 한 시간 넘게 걸린다. 김 교사는 “풀어야 할 것은 이런 소모적인 일들”이라며 “개발 소식에 들썩이는 사람들은 땅을 소유한 이들이고, 절반 이상은 외지인들”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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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은 이유

강화도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탓에 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다고 입을 모은다. 강화도의 자연을 지켜준 ‘생태 보호선’이었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그대로 두고 그 옆으로 평화 순례길을 만들자는 얘기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유명호 한의사는 “분단의 역사, 개발과 생태의 긴장, 미래의 평화까지 고루 체험할 학습장”으로서의 ‘걷는 길’을 제안한다. 돈을 아무리 들여도 이만한 천연 학습장은 절대 만들기 어렵다는 새로운 ‘개발’ 논리이기도 하다.


봉천산에 안겼다가 걸어서 바다까지
강화도를 사랑하는 언니들의 강추 코스 1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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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두루미는 잠을 설친다

한강 하구 깃대종 삼총사 개리, 재두루미, 저어새… 일산대교 등 건설 뒤 찾아드는 수 줄어

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생물종을 ‘깃대종’이라고 한다.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 가늠할 중요한 잣대라는 뜻이다. 펄 속에 머리를 파묻고 먹이를 찾는 개리, 유려한 맵시를 뽐내는 재두루미, 주걱 같은 부리를 휘휘 저어 먹이를 얻기에 이름이 붙여진 저어새는 한강 하구의 깃대종 삼총사이다. 넓은 습지와 농경지, 다양한 식물과 저서생물, 어패류 등을 고루 갖춘 한강 하구는 새들의 안식처이다. 그중 철조망으로 막혀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강화 북단은 새들의 낙원이다.


△ <철새지킴이 노빈손, 한강에 가다> 뜨인돌출판사 제공


거위의 조상인 개리는 전세계 5만 마리 정도 생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과 동북아로 나뉘어 월동하는데, 동북아에서는 우리나라, 그중 한강 하구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10·11월에 머물다가 한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2·3월에 다시 나타나 먹이를 얻은 뒤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개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매자기 같은 기수식물의 알뿌리를 먹고 산다. 최근 들어 급격히 개체수가 줄고 있다.

역시 겨울 철새인 재두루미도 매자기 알뿌리를 파먹는데, 개리가 완전 초식성이라면 재두루미는 잡식성이다. 일반적으로 두루미는 낟알을 먹지만, 강화도를 찾는 재두루미는 펄에서 갯지렁이와 게도 잡아먹는다. 일산대교와 이산포 나들목 등이 건설되면서 이산포와 장항습지를 잠자리로 하던 재두루미가 잠을 설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들이 다니고 불빛이 밝고 소음이 많아지면서다. 먹이가 많아도 잠자리가 뒤숭숭하면 월동지를 바꾸게 마련이다. 1970년대 2천 마리 넘게 우리나라를 찾았으나 지금은 500~800마리 정도를 꼽는다.

저어새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환경부도 멸종위기 야생종으로 분류했다. 지구상에 1천~1500 마리 생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일하게 동북아에서만 서식하고 여름철 우리나라에서 번식한다. 한강 하구의 유도와 강화도 일대 섬과 무인도에서 새끼를 친다. 바위에다 둥지를 틀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낚시꾼을 극도로 경계한다.

*도움말: 윤상훈 녹색연합 국장



붉은발말똥게를 아시나요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61년 만에 발견… 대형 공사는 서식에 치명적 영향


△ (사진/ 백용해 제굥)
강화 북단은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의 서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곳이다. 붉은발말똥게는 1941년 일본 연구자의 보고 이래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지난 2002년 한강 하구에서 61년 만에 처음 발견된 종이다. 서식 조건이 까다로운 이들은 해수와 담수가 만나 어우러지는 강 하구에서도 해수의 영향이 가장 높게 미치는 지역에서만 산다. 하지만 바다 가까이 염도가 높은 곳에서는 살지 않고, 참게처럼 완전 담수에서도 살지 않는다. 한강 하구는 서해에서 유일하게 이들의 서식 조건을 갖췄다.

붉은발말똥게의 주 서식처는 장항습지와 곡릉천 하구로 강화 북단과는 거리가 있지만, 강화 본섬과 석모도, 교동도를 이어 조력발전을 하거나 연륙교 등을 건설하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게는 어미 배 속에서 일정 시간 인큐베이팅된 다음 세상에 나오는데, 처음에는 몸뚱이에 눈과 꼬리만 달린 모양새다. 언뜻 보면 장구벌레와 비슷하다. 이들은 꼬리를 흔들며 조류가 흐르는 대로 멀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자란다. 수면에 둥둥 떠다니며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다가, 어미처럼 10개의 다리가 생겨난 다음에야 땅을 붙잡고 몸을 댄다. 강화 일대가 개발되면 한강 하구 물의 흐름이 크게 바뀌어, 서식 환경이 뒤죽박죽된다. 특히 대형 공사가 진행되면 물속 부유물이 많아져 먹이량과 활동량에 치명적인 역향을 끼친다.

도움말: 백용해 녹색습지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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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달콤함 ‘한 사람의 혁명’으로 거부하라
 출처 : <한겨레신문> 2007 11 02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계절별로 농촌생활을 묘사한 중세의 달력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18세기 달력 그림 가운데 10월에 포도주를 담그는 모습.(왼쪽) 호이나키(오른쪽)는 인류 미래의 희망을 근대 산업문명 이전의 자급적 소농경제에서 찾았다. 녹색평론사 제공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지음·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1만3000원

진보가 이룩한 억압적 시스템 비판
단순 거부 아닌 ‘나’의 대항 방법 모색하며
‘인간다운 삶’ 회복 위한 적극적 저항 주장


우리는 길을 제대로 들어선 걸까? 진보와 발전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할까?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 애먼 헤나시는 1917년 그의 나이 24살 때 징병을 거부하다 체포돼 2년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서 금요일마다 썩은 생선이 나오자 비폭력 저항을 조직했다. 누군가가 예산을 착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싸움은 성공적이었으나 헤나시는 폭동을 꾀했다는 이유로 징벌 먹방에 여덟 달이나 갇혔다. 거기서 허용된 유일한 책 〈성경〉을 읽으며 그는 기독교 아나키스트가 됐다. 정치·사회적 부패가 너무 뿌리깊은 미국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면 엘리트 교체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진정한 혁명이라니? 헤나시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다.” 바로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이었다. 헤나시는 일용노동자로 살면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군비경쟁에 항의하는 등 ‘만악의 근원’인 국가에 대한 저항을 실천에 옮겼고 1970년 사형 반대 단식투쟁과 피켓시위를 하다 쓰러져 죽을 때까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부랑자와 건달들을 돌봤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에서 지은이 리 호이나키는 헤나시를 ‘거룩한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 바보들이 있기에 세상은 이나마라도 유지되고 있고, 그들 덕에 우리가 세계의 정체, 그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게 호이나키의 생각이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그는 실천에 옮겼다. “한 사람의 혁명”이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정복하고 착취하라”는 선동에 국민 다수가 “매수당한” 조국 미국의 부도덕성과 근대 산업문명 자체에 일찍부터 회의를 품었던 그는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7년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가 됐을 때 바로 가족과 상의해 일리노이주 남부 두메산골로 농사를 지으러 다시 떠나버렸다. 그에게 근대세계는 ‘진보’할수록 빈곤과 전쟁이 창궐하고 물질적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할수록 인간이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들의 노예가 돼버리는 역설적인 세상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아니오’ 쪽을 택했다. 떠나려면 고액봉급자가 누릴 수 있는 근대문명의 달콤한 혜택과 특권들을 다 버려야 한다.

미국이 바그다드를 공습한 날 독일에 있던 그는 “석유전쟁을 중단하라!”고 외치는 반전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어쩐지 공허했다. “일반적으로 시위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참가자들 사이에 일시적인 고양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비주의와 시장경제, 말하자면 세상 전체를 옭아매고 있는 근대경제시스템, 근대문명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그것을 주도해온 미국의 전쟁행위에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나는 오늘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문제도, 미국 정치엘리트들의 부패도, 외국 지도자들의 무기력도, 경제를 위한 에너지원의 통제에 관한 문제도 아니라는 걸 느낀다. 문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산업·기술 사회는 하나의 인공적인 우주를 창조해내기 위하여 지구와 그 생물들을 착취한다는 기본원칙에 근거해 있다. 만약 내가 오늘의 경제와 국가와 그 기관들에서 드러나는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파괴성을 받아들이고 즐긴다면 나는 ‘창조의 세계’, 진정한 세계로부터 절연돼 있는 것이다.”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그가 일리노이 오지로 들어간 것은 근대산업문명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 소극적인 차원은 아니었다. 산업화한 미국 농업도 이윤을 좇아 기계와 화학물질을 대량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기업농, ‘과학영농’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땅을 죽이고 자연을 죽임으로써 농사의 토대를 죽이고 있다고 호이나키는 비판한다. 소규모 자급농, 곧 독립 자영농만이 자연을 살리고 인간의 영성, 삶의 기쁨과 의미를 되찾아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오지행은 인간과 자연 본연의 모습,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도전의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호이나키는 날카로운 근대 비판 사상가요 교육혁명가였던 이반 일리치의 절친한 벗이자 동지였다. 옮긴이 김종철 전 영남대 교수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일리치의 근본사상을 한 개인의 자전적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낸 뛰어난 이야기체의 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들이야말로 〈녹색평론〉이 추구해온 가치의 구현자들이 아닌가. 3년 전 김 전 교수도 “오늘날 가장 특권적인 직업”인 대학교수 자리를 버렸는데, 그때 호이나키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도 ‘한 사람의 혁명’을 생각했을까.


[책과 삶]이 땅에 뿌리내린 지식인이 되기 위하여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녹색평론사

‘좋은 삶’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그 답은 간단히 말해 땅과 사람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진리 아니겠느냐고도 하겠고, 지금 같은 세상에 참 한가한 얘기한다는 사람도 있겠다. 저자 리 호이나키(79)는 제도 학문적 차원에서 UCLA 정치학 박사다. 또한 그는 미국의 ‘농부’이자 ‘지식인’이다.

이야기는 저자가 42살이던 1970년 로스앤젤레스의 서늘한 대학 강의실에서 박사학위 논문자격시험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지막 문제를 풀던 중 저자는 창 밖으로 흥분한 학생 무리가 무서운 추격자를 피하려는 듯 건물 옆으로 급히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서운 추격자는 최루탄 가스와 곤봉을 손에 든 전경들이었다. 그때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저자는 40줄에 대학교수로서의 새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시험지를 응시했다. 마지막 문제를 풀 수 없었다. “우리 정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미지의 민족에 대해 가하고 있는 야만적인 공격을 내가 계속 못 본 체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랜 방황 끝에 자신을 위해 구축했던 안락한 세계가 그날 아침 그렇게 무너졌다. 진정 ‘애국심’이 강했던 그는 미국의 불의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 몇해 후 그는 미국 일리노이에 학생들과 함께 커리큘럼을 짜는 실험대학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는다. “뿌리 뽑힌 지식인이야말로 근대의 저주 중 하나라고 확신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접어뒀던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고, 결국 정년보장 교수가 됐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가 그 실험대학마저도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수들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전문직업인이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외한들에게 어떠한 종류이든 통제를 받아야” 하고 “교수들은 어떤 활동이라도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궁리해야 한다”고 믿는 그로서는 교수들이 노조를 만드는 그 모습에서 큰 회의를 느꼈다. 이제 그가 갈 곳은 농촌이었다.

지식인이 정의(正義)에 이르는 길은 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삶을 이해할 때라야 가능하다. 그림은 농산물을 수확하는 중세 유럽인들의 모습을 담은 달력 그림. ‘7월’을 뜻하는 ‘Julius’가 적혀 있다.
농촌에서 살기로 하자 비로소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무엇이 내가 사랑하는 이 땅(미국)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 정부와 대학, 기업은 과학과 효율, 합리라는 이름으로 과연 무슨 짓을 해왔는지. “농부를 산업노동자로 탈바꿈시키도록 고안된, 모두 폭력성에 가득찬 정치적·과학적·상업적 프로그램은 대부분 자료상으로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통계와 도표가 아니라 실제로 영향을 받은 땅과 사람들을 보면, 그 성공의 비용이 어떤 것인가. 편견없이 볼 때, 거기에는 산업적 효율성과 경제적 경쟁 논리가 잔인하게 강제된 현실이 드러난다.” 그가 땅으로 갔을 때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삶의 한 방식’으로써의 농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농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삶’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비자 또는 관광객이라는 경제 인간으로밖에 살 수 없는 것인가. 저자라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땅과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가 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거룩한 바보’들에서 희망을 찾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쓰고, 대학 강단에도 다시 섰다. 어느 한순간도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성찰을 멈추지 않는 저자는 모든 지식인이, 모든 현대인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뿌리 내린’ 지식인인가, ‘뿌리 뽑힌’ 지식인인가 스스로 묻게 한다.

리 호이나키
이 책에는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정년을 앞두고 대학을 뛰쳐나와 서울에 터잡고 주말마다 지방 강연을 다니며 농민들에게 “제발 자녀들 꼬임에 빠져 땅을 팔지 마십시오”라는 복음을 전도하고 다니는 옮긴이(김종철)의 삶이 그대로 투영돼 있지 않나 한다. 옮긴이는 6년에 걸쳐 이 책을 번역했다. 다른 시급한 일-가령 한·미 FTA-에 그때그때 대응하기도 해야했기에 이 책의 번역이 예정보다 오래 걸렸지만, 지난 6년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 책이 한시도 떠나질 않았단다. 1만3000원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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