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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 차베스의 상상력, 21세기 혁명의 방식 새사연 신서 2
김병권. 손우정. 안태환. 여경훈. 이상동. 정희용. 한우림 지음 / 시대의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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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미풍처럼 스며들고, 개혁은 폭풍처럼 몰아친다." 

언뜻 생각해보면 '혁명'과 '개혁'의 위치가 뒤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를 읽어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손석춘은 이 책의 발간사에서 이렇게 말하며 글을 시작한다.

"혁명의 시대. 누군가 지금을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핀잔받기 십상이다. 혁명의 꿈은 어느새 덧없는 열망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 그러나 냉철히 톺아볼 일이다. 과연 그 시기(=1980년대-인용자)가 혁명의 시대였을까.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개혁의 시대였다."

그러면서 1980년대의 몇 가지 정황을 이야기하며, 먹물들 사이에 혁명의 담론만 넘쳐났지 노동자 농민에게는 기실 아무런 준비없이 부닥친 자연발생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도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면 맞는 말일 것이다.

문제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문제에 주목하자고 한다. 양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한미FTA 체결로 벼랑 끝으로 몰리는 농민, 악화되는 부익부빈익빈, 부시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드리운 전쟁의 먹구름을 보라고 한다. 일흔을 앞둔 소작 농민과 40대 중반 비정규직 노동자가 백주대낮에 경찰이 휘두른 폭력에 맞아 숨지는 시대, 네오콘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평택 대추리 주민의 삶을 앗아가는 시대가 지금 여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런데도 왜 혁명의 노래가 들려오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1980년대의 논리가 민중의 삶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시대에,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이렇게 무르익어 가는 시대에,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사회의 꿈이 영글어가는 시대에...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혁명이 필요한 시대라며 혁명을 준비하자고 한다. 언뜻 보면 이 무슨 철 지난 유행가도 아니고 생뚱맞은 소리인가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문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이다.

"오해없기 바란다. 무장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다. 시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무장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 선거 혁명의 시대다.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 혁명이 옳은 노선이다. 비단 브라질의 룰라가 보기는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보라. 미국과 맞서 꿋꿋하게 베네수엘라 경제를 혁명적으로 재건하고 있다. 선거를 통한 혁명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차베스의 실험은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시각차가 존재할 것이다. 과연 '선거혁명'이 유일하게 옳은 노선인지, '선거혁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2002년에도 '얼빠진' 인간들, 노무현 당선을 일러 '선거혁명'이라고 하던 얼빠진 인간들이 어디 한 둘 이었던가? 아마도 2007년 12월에도 '선거혁명'의 구호가 난무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며...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는 베네수엘라 혁명의 전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분석하고 있다. 먼저 배네수엘라 혁명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1980년대 외환위기로 거슬러 올라가 신자유주의 10년의 폐해 속에서 싹튼 민중의 저항에서 그 싹을 찾아낸다. 또한 차베스가 우발적 쿠데타의 실패 이후 10년이 지나 합법적 선거에 참여하여 승리하는 배경에는 40년 동안 정당정치를 통해 안정화된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적 정치지형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선거를 통한 합법적 집권 이후 반혁명 세력에 맞서 진정한 '민중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제헌의회', '볼리바리안 헌법' 등이 차베스 집권 이후 행해진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면, 2002년 4월 반혁명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차베스를 군기지에 감금했을 때 보여준 민중들의 '응징'은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과정은 감동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의렴풋이 기억하는 2002년 그 봄의 며칠 동안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들려왔던 뉴스의 세세한 내막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자칫 1973년 칠레 아옌데 정부의 재판이 된 채 잊혀진 혁명이 될 수도 있었던 과정을 헤쳐나오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용기는 부러움 그 자체다. 차베스가 집권 이후 3년 동안 인민들에게 준 것을 인민들은 잊지 않고 3일 만에 차베스에게 보답해준 것이었다. 이것은 베네수엘라 선거혁명의 핵심을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선거때만 되면 '주둥이'로만 '선거혁명'을 외치는 것이 얼마나 허왕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의 10년을 거치면서 내용  없는, 알맹이 없는 '개혁'의 허황됨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용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용 이전에 그 내용을 담보하는 '이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거창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이념이 아니라 모든 정책의 기초가 되고 그 정책이 지향하는 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드러나는 이념적 지향 같은 것.

이외에도 진정한 참여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볼리바리안 클럽'의 형성과 활동, 공동경영 제도와 협동조합의 확산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정착되는 과정, 미국의 대외정책에 맞서는 대안적 중남미 지역네트워크 건설 등을 8편의 글들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차베스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주목은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브라질의 룰라 당선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우리 나라 진보세력도 주목하고 연대를 표방했지만, 이상하게도 베네수엘라 만큼은 우리의 관심에서 비켜 서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다행스러운지는 몰라도 작년부터인가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차베스 혁명에 대해서 주목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란 자가 자신을 지지해준 정파의 비위를 맞추느라 '혁명열사릉 참배' 같은 소리나  하고, 무슨 2단계니 3단계니 하는 통일방안을 연출하느라 카메라 앞에서 폼이나 잡고 있는 현실에서는. 언제나 정신 차릴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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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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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2,3권을 처음 읽었던 때가 아마도 1986~87년 쯤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아직 완간이 되지 않고 1부, 2부... 이런 식으로 발간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거의 20년이 지난 셈이다. 당시에 사 모았던 책들을 가지고 91년 쯤인가 다시 한 번 읽고서는 책장에 보관하다가 조카가 군대 있을 때 읽을 거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보내주었다 조카 내무반의 책이 되어버렸다. 다시 가져 오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즘 젊은이들에게 '강제로' 태백산맥을 읽히게 하고 있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으로 잊고 지냈다.

그 뒤 직장을 여수로 옮기고 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여러 가지 시간때우기용 책을 읽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소설책이 그 첫번째 목록을 차지하게 된다. <도꾸가와 이에야스>, <혼불>, <삼국지>(황석영 번역본)을 새로 읽게 되었고, <아리랑>, <프로메테우스>, <고요한 돈강> 등도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속 한구석에 허전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태백산맥>의 부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허기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하소설들을 읽다 보니 다시 한 번 <태백산맥>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그렇게 해서 <태백산맥> 전집을 다시 사게 되었다. 나 혼자 읽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태백산맥>을 읽은 친구가 거의 없는 회사 직원들의 빈약한 책읽기를 채워주고픈 욕심이 더 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직원들이 대부분 20대 후반 30대 초반이고,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자랐고, 대부분 고등학교만 나오다 보니 <태백산맥>이란 소설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는 친구도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기하기조차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15년 만에 다시 읽게 된 <태백산맥>. 그 내용이야 새삼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리오. 이 책의 발매 자체를 용공으로 몰아가던 20년 전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지금이야 대명천지지만, 다시 접하게 된 <태백산맥>으로 인해 드는 궁금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 가장 첫번째는 이 책이 수능시험이나 논술을 위한 고등학생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는데, 작금의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단순히 논술에 도움되기에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과연 지금의 젊은 친구들이 그 시대의 치열한 삶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선생들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이전에 <태백산맥을> 읽었던 사람이든 새로 접하는 사람이든 한번쯤은 고민해보라고 권하게 싶은 게 있다면, <태백산맥>이라는 시대의 삶이나 지금의 삶이나 여전히 고달프고 아프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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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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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는 소신껏 행동했으며 내 자신의 이념에 충실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체게바라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체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흔히 쓰는 표현으로 질풍노도와 같았던 80년대적 꿈과 이상이 쓰러진 자리에는 아픈 회한과 눈물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눈물과 회한조차 돈이 된다면, 춤추는 자본의 기획으로 포섭되어 최신 유행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난무하던 지난 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체게바라일 것이다. 그의 사망 30주기를 추모하는 물결로 시작한 흐름은 그의 피가 묻힌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시신이 누워 있는 쿠바에서, 그의 죽음을 사주했던 미국에서, 심지어 생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90%는 넘을 대한민국에서조차도 하나의 '유행'이었다. 대학가에 휘날리는 짙은 수염의 체의 초상화, 체의 얼굴이 붉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그 티셔츠의 뒷면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Revolution Forever!"

헉! 내가 그걸 보고 들었던 첫 느낌의 표현이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그 문구가 놀라운 게 아니라 혁명조차 돈이 된다면 '상품'으로 팔아먹는, 영악한 자본의 속성이 새삼스러워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포스트모던' 세태를 새삼 나무란들 무엇하랴. 이기와 물질에 찌든 현대인에게 어쩌면 그런 '변덕'조차 고마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더 이상 시대의 유행은 아니겠으나, 그 혁명이 해결하려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그 모든 현실이 있는 한….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도 이젠 마냥 목놓아 괴로와하기보다는 적당히 영합할 줄 아는 '솔로몬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든, 그 꿈과 이상의 복원을 기원한다. 그 꿈, 체게바라가 안데스 산맥에서 고립돼 죽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게릴라 대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불가능한 꿈. 물론 이건 결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었다. 이걸 그는 쿠바혁명을 통해, 소수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려 그 꿈을 실현시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혁명후 그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혁명후 쿠바사회 건설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고, 뛰어난 언변을 활용해 외교관으로 나서서 전 아메리카 대륙에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역설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혁명 실현을 위해 피델(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 남기고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스며든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압제에 맞서 싸우는 볼리비아 민중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런 체게바라였기에 당시 미국정부는 그가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게릴라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의 제거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가 10월의 안데스 산맥에서 볼리비아 정규군에게 생포되고도 18시간만에 사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판이니 뭐니 하는 과정을 거치다간 전세계적으로 일어날 구명운동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이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체게바라를 생각하면 난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루이 알뛰세와 레지 드브레.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야 익히 들어 봤을 테고... 사제지간인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도 체게바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스며든다.

전유럽을 강타했던 68년 5월 혁명의 진행 속에서 '멍청한' 각국의 사회당,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 학생들이 주도하는 사회혁명의 열기를 승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혁명의 열기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혁명지도부로부터 배척당하는 웃기지 못할 사태로까지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이 68년 5월 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남는 중대한 이유가 된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알뛰세의 말만은 경청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 알뛰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레지 드브레. 알뛰세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던 그는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서 있을 곳도 그곳이다'라는 듯 만류하는 알뛰세를 뒤로 하고선 체를 따라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뛰어든다. '파리고등사범'의 촉망받는 철학자에서 게릴라 전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알뛰세는 드브레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투쟁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있지. 하지만 (...)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요한 것일세. (...) 투쟁에서 면제된 이 시간은 결국 투쟁 자체 속에서 시간을 절약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네."
(L. 알뛰세, 「레지 드브레에게 보내는 1967년 3월 1일자 편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론연구에 전념하는 게 싸우는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 '니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를 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난 이런 레지 드브레에게서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까지 찾아가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드브레는 생포되고 난 뒤 국제적인 청원운동으로 다시 프랑스에 살아 돌아와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이미지론'에 몰입하면서 현실운동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지난 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인 좌파의 죠스팽 대신 우파의 시라크 지지선언을 해 그의 전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체게바라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리비아의 산 속에서 체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레지 드브레, 마지막 10여 명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다 체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레지 드브레. 그는 과연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렇게 '체게바라' 라는 이름은 60년대 유럽 젊은 지성들의 이정표이자 마음 속에 진 빚으로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체 역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선택받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뛰어난 게릴라 전략전술가로서, 뛰어난 혁명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한 인텔리 출신이었기에... 그들이 머리 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것을 체게바라는 몸으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진정 60년대는 체게바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손에 다시금 '체게바라 평전'이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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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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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당수의 경제 브레인으로 참여한 이력이 있는, 정통 학자 출신과는 약간 상이한 길을 걸었던 사람. 유목주의 운운하는 형태로 들려오는 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들, <인간적인 길>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들은 어느 정도 접하고 있었기에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도 없으면서 내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나에게 마르크스 평전이란 게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20년도 더 지난 시절에 이미 마르크스 원전을 읽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평전 한 두개쯤은 이미 오래 전에 섭렵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나에게 그리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건 아니다. 그러기에 한 달에 한번 꼴로 방문하는 대형서점 안에서 잠시 짬을 내어 머리말과 제일 마지막 7장을 읽고 접었었다. 그리곤 별다른 생각없이 지났는데,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서 손석춘 칼럼을 읽고 기절할 뻔 했다.

손석춘씨는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아탈리와  KBS의 ‘TV, 책을 말하다’에서 그의 유토피아 저서 <인간적인 길>을 두고 대담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손석춘씨와 자크 아탈리 간에 논쟁이 오간 모양인데, 그 전말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잠시 그 문제의 문구를 인용해보자.

하지만 저는 대담의 끝자락에서 결국 아탈리와 얼굴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인간적인 길>에서 “핵무기를 통한 (전쟁)억제력”을 강조하고 있기에 북핵문제를 물었습니다. 아탈리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정당하게 갖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북핵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그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면 어렵지 않게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물었습니다.

  “아탈리 박사의 저서들을 읽으며 프랑스에서만 살아온 지식인 일반이 지니는 한계를 느꼈는데 오늘 대담을 통해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핵을 가질 정당성이 있는 나라 가 따로 있고 없는 나라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나, 북쪽 정권을 붕괴시키는 게 당위라는 생각이 그것인데요.  그런 논리와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는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 국가들이 지닌 핵무기는 정당하다면서 사뭇 결연히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정권을 붕괴시킬 권리는 그 나라의 국민에게만 있다는 손 박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어 저에게 반문하더군요.

  “히틀러를 보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히틀러를 패배시키지 말아야 했나요?”

  황당했지만 되물었지요.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히틀러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한 전범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미국은 침략 당하지 않았지만 참전했습니다.”

방송 녹화 중이었고 사회자의 만류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습니다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아탈리는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문제에 미국과 프랑스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한다”고 말을 흐렸을 뿐입니다.

(<인터넷 한겨레 www.hani.co.kr> 2006년 11월 6일자 "필진 네트워크"에서 인용)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 그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책일 것이다.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변화된 현실에서 조금은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려 했다는 의도를 제7장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그의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긋남이 아닌가?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석학? 그놈의 '석학'이란 게 뭔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이 손석춘 칼럼을 읽은 뒤에는 나에게 대체로 우호적인 감정으로 남아 있던 아탈리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야만 했다. 이럴 땐 내가 경제학 전공자라는 게 후회스럽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탈리라는 이름에 연연해 책을 집어들고 읽지도 않았을 것이고, 세계적 석학 운운하며 그가 한국에 왔다고 호들갑 떠는 언론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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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셸 푸코 - 하
디디에 에리봉 지음 / 시각과언어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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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
'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요가 명상가로서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철학자로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푸코는 보지 못하고, <성의 역사>의 푸코만 떼어내 윤리적 인문학자로서의 푸코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학자로서의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도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무정부주의자를 발견하고, 어떤 이는 위장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발견하며, 또 다른 이는 노골적인 반(反)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부르주아지가 마르크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이것은 <말과 사물>에 대한 사르트르의 몰이해에 근거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또 사르트르와는 다른 차원에서 데리다와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지적 논쟁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푸코는 드골주의의 선전자이자이자 동시에 교활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푸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03 차재업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죽음(1984년)은 보수 부르조아 언론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가십거리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재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명을 두고서 말이다. 분명 우리는 학자로서의 푸코를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는 평생을 '마이너리티'를 위한 저항의 현장에서 보낸 실천가이기도 하다. 곧 푸코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어떤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핍박 받는 곳에 늘 저항적 태도로 일관했던 '투사'였던 것이다..

'저기 푸코가 있다.'

기자 출신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런 푸코의 삶을 치밀한 자료를 토대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실제로 에리봉은 푸코가 죽기 5년 전부터 푸코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삶을 기록해왔던 터이기도 했다). "저기 푸코가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푸코는 68년 5월 혁명 이후 84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스페인, 폴란드는 물론 브라질이나 이란 등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민자 운동, 감옥정보그룹, 사형제도 폐지, 동성애 권리 투쟁 등 그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연구하던 근대권력의 폭력성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과 사물>을 펴낸 뒤 맑시즘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사르트르와 실천의 현장에서 모든 종류의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하는 장면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논쟁은 논쟁이고 실천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8~90년대 대한민국의 소위 운동권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다.
ⓒ2003 차재업

현대 유럽 지성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천재철학자 푸코와 이민자, 죄수, 동성애자 등의 온갖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투사 푸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런 푸코의 이론적, 실천적 이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광기의 역사>에서 <감시와 처벌>에 이르는 동안 푸코가 파헤치고 있는 '근대'라는, 우리가 흔히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 근대사회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주류사회의 통제 메카니즘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2003 차재업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이성의 성립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의 폭력이 수반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이었다.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2003 차재업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미셀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 곧 몇 백년 전의 역사자료에서 보여지는 것을 질료로 삼아 눈 앞의 현실문제에 연결하는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가 왜 '감옥반대운동'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등 당시 주류 좌파세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적 실천들에 깊숙히 개입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2003 차재업
어쨌던 푸코의 세계는 온갖 해석을 허용하되 어떤 하나의 해석적 틀도 거부하는 '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엄밀히 말해 '푸코의 세계'가 아니라 '푸코들의 세계'다. 예컨대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가 통용되는 방식인 <들뢰즈의 푸코>처럼(지난 번에 소개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 <미셸푸코>는 이러한 투사로서의 푸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의 '예술작품' 같은 푸코의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달리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필체로 또 하나의 푸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 번쯤 빠져들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세계이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上 下), 박정자 역, 시각과언어(1995)

위 사진들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http://deer.sangmyung.ac.kr/~cjpark/)에서 양해를 구하고 인용한 것들입니다. 박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푸코-데리다' 논쟁 등 푸코와 사르트르에 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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