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유일당화가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③]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출처 : <레디앙> 2007-12-28


C.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이것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평가 항목이 남아 있다. 그것은 미래의 전망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가능성을 묻고 혹은 더 심각한 위기의 요소들을 따지는 일이다.

⑪ 민주노동당 내 세력 구도의 전망: 정파연합당의 질서를 뛰어넘는 종북유일당화가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지난 4년간 당내 선거 때마다 형식적 다수의 지위를 유지해온 종북파가 이제는 당의 모든 질서를 자신들의 뜻에 맞게 뜯어고치는 작업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그 동안은 반대파가 소수 세력으로 당 안에 공존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면, 이제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종북유일당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 북한 애국열사릉을 찾은 민주노동당 방북단 (사진=판갈이)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을 바꾸자는 당원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명과 강령 개정 일정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 진보정당 역사상 최초로, 창당 정신에 이질적인 분자들이 입당 전술을 통해 당 전체를 장악하고 당의 성격까지 바꾸는 데 성공한 사례가 될 것이다.

더욱 고약한 진실은 종북유일당화가 가능하게 된 밑바탕에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민주노동당의 근본 문제와 위기 양상들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 위의 문제들로 말미암아 더욱더 추락하고 침체할수록 종북유일당화의 실현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진다.

그것은 종북유일당화를 위해서 당의 위기를 오히려 반기는 세력이 당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관련해서 이것보다 더 처참한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민주노동당이 정말로 종북유일당화한다면 한국 사회에는 진보정치세력이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주의와 민족지상주의라는 과거의 악령에 사로잡힌 당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진보 세력은 그 정당 안에서 인질로 남거나 아니면 광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이다.

⑫ 신보수주의 정권의 등장과 관련한 전망

이제 새로운 보수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보수 정권 아래서 초기에는 진보 세력이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정권의 시장지상주의 공세 속에서 상당 기간을 방어 투쟁으로 보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 태세를 갖추고 있는가?

한편 집권 후반기부터는 대중의 좌우 양극화 상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상황에서 지구 위의 그 어떠한 우파 정권도 위기의 봉합 이상의 통치 성과를 남긴 적이 없다.

차기 정권 역시 이 냉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차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오로지 ‘고도’ 성장에 대한 환상적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차기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 역시 극적인 양상을 띠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대중이 다시 좌우 양극화하는 상황에서 그 왼쪽 지형을 누가 대변할 것인가? 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줄곧 그랬던 것처럼 자유주의 세력이 다시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진보 세력이 드디어 그 공간을 차지할 것인가? 후자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 다시 묻건대, 지금의 민주노동당으로 그게 가능할 것인가?

지금의 민주노동당보다는 훨씬 더 분명한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대중조직의 지원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이념적 응집성으로 시련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 또한 지금의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더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정치적 균열과 격변의 시기가 도래하면 기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⑬ 18대 국회와 관련한 전망

대선을 앞두고 진보대연합에 대해 갖가지 공상적인 전망들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대선 전보다는 오히려 대선과 총선 사이의 시기가 어지러운 합종 연횡의 절정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진보대연합의 기회다.

진보대연합의 첫 번째 과제는 진보정당이 대변할 진보 세력의 스펙트럼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과제는 진보의 새로운 스펙트럼 안에서 그 중심을 새롭게 잡는 것이다.

그래서 18대 국회에서는 진보정당이, 지금보다 그 중심은 더욱 명확하면서 그 스펙트럼은 더욱 넓은 진보 블록을 대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한국 사회의 요청에 부응할 진보정치세력으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라는 울타리는 마땅히 우리의 진지여야 할 영역을 정확하게 구획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과감히 그 낡은 울타리를 걷어내야 한다.

⑭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와 관련한 전망

최근 많은 경제학자들이 2010년을 전후해서 세계 경제의 침체와 재조정 국면이 닥칠 것이라 전망한다. 그 진원지는 미국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 두 나라의 경제적 상호 관계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아무튼 1997년 동아시아, 러시아, 중남미 경제 위기 이후 다시 한 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환점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국 경제와 더욱더 긴밀히 결박된 한국 경제로서는 과거보다 더욱 격렬하게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격랑에 휩쓸릴 것이다.

체제의 위기 혹은 재조정의 시기는 곧 체제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시기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환 위기 때처럼 이번에도 한국의 진보 세력이 시장지상주의의 이념 공세 앞에 허망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그때와는 달리 오히려 진보 세력이 대항 헤게모니의 지반을 확보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러한 기대와 요구에 합당한가? 반자본주의-탈자본주의의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최대 희생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 근본적 대안을 가장 구체적인 쟁점들과 연결시킬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가?

‘88만원 세대’가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의 깃발이 될 태세는 되어 있는가? 좁은 일국적 시야에 머물지 않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는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지금부터 하루빨리 이러한 능력들을 갖춰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의 형성과 축적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척결해야 한다.

⑮ 북한의 변화와 관련한 전망

   
▲ 북한 외화상점. 북한의 변화는 기정사실이다.
 
북한의 변화는 이제 기정사실이다. 다만 변화의 방향만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변화의 방향도 다음 두 가지 갈림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하나는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에 문호를 개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 체제 자체가 격변에 휩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남한의 진보 세력으로서는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첫 번째 과제이자 제 1 전제 조건이다. 북한이 점점 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에 맞는 비판이 필요하고, 북한 체제가 위기를 맞으면 또 그에 맞는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두 경우 모두 다 전제 조건은 남한의 진보파가 북한 체제의 과거에 결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박 아래에서는 북한의 변화 양상에 맞추어 남한 진보파의 올바른 입장을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진보정당운동은 북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하물며 종북주의에 발목을 잡혀서는 어떠한 희망적 전망도 있을 수 없다. 자칫하면 남한 진보운동 전체의 생존까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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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대'가 된 민주노동당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②] 평등파 역시 철저히 자기 비판해야
 
출처:<레디앙> 2007년 12월 28일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1-2. 원내 진출 이후 불거진 문제들

원내 진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민주노동당을 옥죄기 시작한 문제들도 있다. 이들 문제가 위에 지적한 민주노동당의 근본 문제들과 서로 얽히면서 당은 최악의 침체와 곤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③ 원내 정당이 되고 나서 목표 상실 상태가 됐다

민주노동당 초기의 에너지는 ‘원내 진출’이라는 간명하고 절절한 당면 목표에서 나왔다. 원외 정당을 4년 넘게 유지하고 결국에는 원외에서 원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게 만든 저력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거기에는 88년 총선부터 계속된 원내 진출 실패에 대한 설욕 의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원내에 진출하고 나자 이제는 그 정도의 뚜렷한 당면 목표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목표가 없는 조직은 활력을 잃고 결국 부패하고 만다. 그런데 원내 진출 이후의 민주노동당이 딱 이 신세였다. 물론 이러한 진공 상태에 대응하려고 ‘집권’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상태나 실력을 보면 너무나 허황한 이야기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결국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그만큼 부족했던 탓이었다. 이념, 노선 문제를 우회하고 봉합해온 결과였던 것이다.

18대 총선을 앞둔 지금, 이 목표 상실 상태는 가장 타락하고 희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든 비례대표 후보 자리를 차지해서 원내에 진출하고 보자는 흐름이 당을 지배하고 있다. 반면 지역구 출마는 다들 기피한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운동권이 국회의 얼마 안 되는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투전판과도 같은 신세다. 그러니 자민련의 좌파판이라는, ‘좌민련’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억울한 일만은 아니다.

④ 17대 국회에서 민중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17대 국회에서 대중이 진보정당에게 바란 것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의 정치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양극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 의식 획득과 조직화의 기회를 여는 일이었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한다 해도 될까 말까 한 엄청난 과제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했던가? 17대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노무현 정부의 ‘4대 개혁’을 도와주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

   
▲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의 4대 개혁에 ‘2중대’로서 ‘올인’했다. (사진=뉴시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대중에게 ‘열린우리당 2중대’, 이른바 ‘범여권’의 일부로 낙인찍혔다. 아니, 당 지도부 안에는 ‘열린우리당 2중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세력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낙인은 17대 국회 내내, 그리고 대선을 치른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통합신당의 추락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동반 추락했다.

민주노총에만 기대는 조합주의 정치에 갇혀서 제대로 시도하지 못한 일도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게 비정규직, 저소득층에게 다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방기한 것이다. 비정규직 악법을 막는 투쟁에서도 항상 민주노총과의 협의에만 무게를 두었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하려는 노력은 적었다.

17대 국회 진출 직후부터 ‘빈곤과의 전쟁’에 당력을 모으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몇몇 개인의 발상으로만 그쳤다. 그래서 급기야는 “민주노동당은 가난한 사람들의 당이 아니라 중간층(노동계급의 극히 일부나 지식인)의 당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17대 국회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환멸의 대상 안에는 민주노동당도 포함돼 있다.

⑤ 국회의원을 확보하고 나서도 진보적 대중정치의 전형을 창출하지 못했다

원내 진출의 의의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진보적 대중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구는 데 있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대중 정치인이 성장했고, 제도 정치의 ABC도 마스터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삼성 재벌과 정면 대결했고, 노동자, 농민의 문제로 국회 단상을 점거하는 낯선 광경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에 대중정치의 새로운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대신 당의 관심과 역량이 일방적으로 국회의원들에게 쏠렸다.

당직공직분리제 등의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피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들에게 마치 만능 해결사와도 같은 역할을 기대했고, 당의 정치 계획은 국회 의사 일정에 종속되었다. 민주노총 같은 대중조직 역시 국회의원을 제도 정치에 파견한 ‘협상 대표’ 쯤으로 바라보았다.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의회주의 편향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당내의 비판에도 어떤 한계가 있었다. 의회주의에 가두 투쟁을 대립시키는 식의 도식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의회주의 편향에 대한 비판이 항상 상투적인 대안의 제시로 귀결되곤 했다. 의원들이 가두 투쟁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거나 국회 안에서 상임위나 단상 점거 농성을 벌일 때 좀 더 격렬하게 해야 했다는 식의 주장이 그 전형적 사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희화화된 논의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17대 원내 활동에서 짚어야 할 핵심적인 오류와 한계는 다음의 두 가지 지점이다.

첫째, 원내 활동의 힘을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직화와 연결하지 못한 점. 민주노동당은 원내 활동과 대중투쟁의 결합을 이야기하면서 그 ‘대중투쟁’을 항상 기존 노동조합 중심으로만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와의 새로운 접촉이자 그들의 조직화였다.

어차피 17대 국회 임기는 정규직, 대기업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의 한 세대가 침체의 최저점에까지 도달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과거 민주노조운동의 아련한 추억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로운 노동자 투쟁의 주인공이 될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보다 주목했어야 했다. 국회의원들이 그 조직화의 살아 있는 계기들이 되어야 했다. 허나 그 시도조차 제대로 못했다.

둘째, 원내 활동의 힘을 지역의 새로운 운동과 연결하지 못한 점. 일단 국회에 진출하고 나자 지방 정치는 당의 주된 관심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비록 여의도의 국회에서는 한 동안 제3당이었을지 모르지만, 지역에서는 결코 한 번도 그 정도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다.

지역 당조직들이 중심이 된 학교 급식 조례 제정 운동이 일부 원내 활동과 결합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니셔티브는 당의 지역조직에서 나왔지 원내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국회의원 활동을 지방의원이나 당 지역조직 활동과 결합시켜 새로운 전국 정치의 모델을 만들려는 시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7대 국회가 거의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서야 지역의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이 그 맹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⑥ 진보적 지방 정치에 대한 비전이나 계획이 없음을 드러냈다

위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에 진보적 지방 정치의 전망과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과 직결된다. 창당 후 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지방 정치에 대한 양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 편향은 그 어느 것도 지방 정치의 독자적 의의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극히 왜곡된 시각만을 갖는다.

한 가지 편향은 지방 정치를 단순히 중앙 의회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에 지방 정치는 지역구에서 총선 표를 확보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또 하나의 편향은 당의 지역 활동을 기존의 전국적 운동의 연장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당 지역조직들이 여전히 기존 운동권 단체 활동을 반복하는 것(가두 서명 작업이나 집회 동원 등)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2006년 지방선거 결과로 심각하게 드러났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아성이라던 울산에서 그랬다.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 8년간이나 여당으로 있었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민주노동당의 이름을 내걸고 집권한 것만 4년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지방 정치의 모델을 보란 듯이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 정파 투쟁 때문에 그런 문제점들을 미연에 발견해서 시정하려는 노력조차 게을리 했다.

여기에 깔려 있는 근본 문제는 지방 정치를 중앙 정치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진보적 지방 정치의 비전도, 그 방침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 지역조직의 책임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은 중앙당에 있다. 중앙당은 울산을 지역구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선거 상의 거점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차기 선거에 해가 될 사고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다는 식으로 울산의 지방자치에 접근하거나 아니면 아예 방치해버렸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치관이 한국 정치 전반의 구태(지방이 중앙에 휩쓸려 들어가는 이른바 ‘소용돌이의 정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⑦ 당의 조직 혁신이 지체되었다

민주노동당 조직 전반을 크게 손봐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2003년부터 있었다. 2003년의 당 발전특위 보고서, 2005년 당직 선거 과정에서 나온 여러 정책들, 2006년 외부 전문가들에게 의뢰한 당 조직 컨설팅 보고서 등이 다 그런 요구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당 조직의 기본 골격에 손을 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실 진보정당운동은 자기 조직에 대해 창조적 파괴를 거듭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는 것은 그 이념과 정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혁신적인 조직 체계와 그 운영을 보여주는 것도 대중의 호응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실제 민주노동당의 역사가 이 사실을 웅변한다. 민주노동당은 한국 정치에서 최초로 진성당원제도, 당직자와 공직 후보의 민주적 선출, 당비를 통한 당 운영 등 혁신적 조직 실험을 벌여 대중의 신망을 얻었었다.

그런데 정작 원내에 진출하여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모으게 된 이후에는 이런 혁신적 실험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조직 체계에 손을 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당 내의 정파적 이해였다. 조직 체계가 당 내 권력 투쟁의 유불리와 직결되기 때문에 패권적 정파가 조직 혁신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민주노동당은 조직 체계의 측면에서도 더 이상 ‘진보’정당임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⑧ 당원들이 극히 수동화되었다

진보정당의 활력은 당원으로부터 나온다. 원내 진출 이전까지는 민주노동당도 그랬다. 하지만,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원내 진출’이라는 당면 목표를 상실(?)하자, 당원들의 활력도 크게 떨어졌다.

더구나 민주노동당이 지나치게 민주노총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의존하는 활동에 머물고 이념적 퇴행의 모습까지 보이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당원들은 당 밖의 지지 대중과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해서만 당을 접할 뿐 당의 일상 활동에 참여할 구체적인 계기들을 제공받지 못했다. 그저 당직자나 공직 후보를 뽑을 때 선거권을 행사하거나, 당비나 특별 당비 내라면 호주머니를 털 따름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나타나는 유권자의 협소한 권리나 의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의 당내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에 그나마 존재하는 직접, 참여 민주주의가 오직 투표 민주주의뿐이라는 점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는 직접, 참여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투표 민주주의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깊이 뿌리 내렸다. 대중의 참여를 항상 공직자에 대한 직접 투표권 행사로 왜소화시켜온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 안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투표 과정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든 형식적 다수의 지위를 차지하기만 하면 그 임기 동안에는 피선출자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당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는 조직적인 부정 선거 양상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우열을 논하기 힘들다. 투표 민주주의 외에 다른 직접, 참여 민주주의의 경로가 활성화되지 못하면, 이렇게 민주주의의 정반대 양상, 즉 형식적 다수결을 악용한 사실상의 소수 독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소수의 독재는 다시 당원들 사이에 실망과 좌절, 자포자기의 심정을 부추긴다. 그렇게 되면 당원들 중 일부가 개별 탈당을 통해 자신들의 불만을 ‘최종적으로’ 표출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이들이 당을 떠나면 당원들 사이에서는 수동적 분위기가 가일층 고조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소수의 독재는 더욱더 확고하게 보장된다.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2006년 말 북한 핵 사태와 이른바 일심회 사건 때부터 이러한 악순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당원 교육을 강화하고 당원 참여의 기회를 열려는 노력은 없이 재정 확보 차원에서 당원 수를 무차별로 늘리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 당원 확대는 이제 재정 사업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것은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다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고참 당원들에 대고 휘두르는 마지막 주먹질이나 마찬가지다.

⑨ 지도력 성장이 지체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지도력 결핍으로 고통받았다.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정당이라면 마땅히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대중조직 활동이나 소규모 정파 활동을 통해 성장한 간부층이 존재했을 뿐, 대중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없었다.

원내 진출 이후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대중적 정치 지도력의 빈 곳을 채울 몇몇 대중 정치인들을 갖게 됐다. 비록 지금 당장은 만족스러운 지도력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성장하리라 기대를 걸어봄직한 후보군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잠재력을 실질적인 정치 지도력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 기회는 바로 올해의 대선 후보 당내 경선이었다. 올해의 대선 후보 경선은 당의 대중 정치인들이 명실상부한 차세대 지도력으로 부상하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성장의 기회는 ‘부자연스러운’ 개입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대중이 진보정당에게 기대했던 답(그것은 정책이나 슬로건 이전에 그것을 상징하는 지도력으로 표현된다)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어쩌면 대중의 기대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배반이었을지 모른다.

⑩ 양대 진영의 투쟁과 구조적 담합 속에 당이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종북파를 중심으로 한 진영(세칭 ‘자주파’)과 그 반대파들의 진영(세칭 ‘평등파’) 사이에 대결이 계속됐다. 양대 진영 사이의 투쟁에는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첫 번째 측면은 이 투쟁에 민주노동당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일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내 투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종북파의 무능과 전횡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지금 민주노동당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결국 당내 투쟁을 더욱 격화시킨다. 당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활동이 그저 당내 파벌 싸움으로만 보이기 쉽다. 이것은 또 다른 악순환이다.

두 번째 측면은 좀 역설적이다. 그것은 투쟁의 이면에 양대 진영 사이의 구조적 담합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양대 진영은 민주노동당의 유지를 위해 서로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을 적당한 수준에서 봉합해왔다. 혹은 스스로 비판과 공격의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것을 넘어서길 꺼렸다. 그래서 뜻 있는 당원들은 종북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면 비판을 꺼리는 평등파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작년 말의 북한 핵 사태다. 평등파는 중앙위원회에서 퇴장하는 등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이것이 집요하게 계속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항의의 목소리가 조선 사회민주당의 방북 초청에 묻혀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이런 투쟁과 담합의 모순된 공존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 혁신의 모든 노력은 종북파의 완강한 방해 속에서 결국은 항상 당내 투쟁 양상으로 귀결되고 만다. 당 혁신 투쟁이 곧 정파 투쟁으로 인식되고 마는 이 악순환을 넘어설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등파 역시 그 한계가 컸다.

따라서 이른바 평등파 역시 철저히 자기 비판해야 한다. 평등파도 민주노동당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데 한 몫 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종북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에 민주노동당이라는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적 본능 때문에 비판을 자제하거나 겉핥기식 비판에 안주해왔다.

또한 원내 활동이 보인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소홀히 했다. 중앙 정치에 대한 편중과 진보적 지방 정치의 비전 결핍이라는 문제에서 평등파도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종북파의 재정적 무능이나 회계 부정에는 비록 댈 게 아니지만 평등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법인 카드의 개인적 유용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따라서 당의 환골탈태는 종북파에 대한 비판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평등파 역시 스스로를 쇄신해야 한다. (오렌지색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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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미래는 '좌민련'이다"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①] 민주노총 의존, 종북주의 청산
 
출처:<레디앙> 2007년 12월 27일 장석준 / 진보정치연구소 redian@redian.org
 
대선 직후 민주노동당 안팎에서는 현재의 민주노동당 구조를 깨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자는 주장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다. 여러 언론과 학계에서는 자주파의 낙후성으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질곡에 빠져 있다는 진단 아래 자주파와 평등파가 분당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의 논의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선 몇 달 전부터 개별 당원들의 탈당과 분당 요구가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조직적 논의는 적은 편이며, 몇몇 인사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타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동당 또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분당-창당 논의의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라도 공개적으로 점검되고 공방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레디앙>은 이런 취지에서 지금까지 나온 분당-창당론 중 가장 체계적인 글인, 진보정치연구소 장석준 상임기획위원의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를 다섯 차례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① 창당 시기부터 곪아온 문제들
② 원내 진출 이후 불거진 문제들
③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들
④ 새로운 방향, 제2창당운동에 나서자 1
⑤ 새로운 방향, 제2창당운동에 나서자 2


1. 민주노동당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평가해야 한다

원내 활동 4년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보다 득표 절대치나 득표율 모두 뒤졌다. 원내 제3당이라면서, 창당한 지 3개월 된 정당의 후보에게 한참 밀렸다. 그 후보가 얻은 지지의 상당 부분은 민주노동당 지지층이었다. 이것보다 더 참담한 결과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대선 후보 경선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고,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으로 나타난 정책 기조의 혼란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단지 대선 대응 과정만 평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결과는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제도 정치권의 일부로 활동한 17대 국회 4년의 결과와 직결된다. 그리고 17대 국회 활동은 다시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후 7년의 활동 방향과 직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지난 10여 년 역사 전반을 재평가해야만 한다.

넉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대한 대응도 이러한 재평가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총선까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이 작업을 미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총선이라는 대중의 심판을 앞두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약적으로 민주노동당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여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러한 재구성 과정 없이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책임성을 갖춘’ 정치 세력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1-1. 창당 시기부터 곪아온 문제들

우선 민주노동당의 창당 시기부터 당 안에 잠재해 있다가 이후 서서히 당의 발전을 발목 잡은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이것들이야말로 당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① 민주노총 의존 체질: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대신해왔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이 가장 먼저 뿌리 내려야 할 지반은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그 이름에서부터 ‘노동’을 표방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관임을 자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 의존으로 대신했다. 사진은 금년 1월 열렸던 양 조직 관계에 대한 토론회 (사진=진보정치)
 
한데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과의 ‘조직형식적’ 관계로 대신했다. 독자적으로 노동자 당원을 모집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민주노총 정치위원회에 그 역할을 떠맡겼다. 선거 자금 마련도 민주노총에 크게 의존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노동 정치는 당의 독자적 목표 설정이나 기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정책을 단순히 대변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기본 골격은 진보정당의 표준형, 즉 독일 사회민주당 유형에 해당한다. 당 강령에 동의하는 노동자(와 근로 대중)가 개인적으로 입당하는 체계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이념과 정책, 독자적인 노동 정치 활동의 결과로 노동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맞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러한 독자적 활동과 인정의 체계를 기피했다. 대신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이를 대신해왔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현실은 영국 노동당 유형, 즉 노동조합의 집단적 지지에 크게 의존하는 진보정당 형태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영국 노동당형 진보정당들에서 나타나는 노동조합 조합원의 집단 입당 제도는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과거 일본 사회당과 가까워지고 만다. 과거 일본 사회당은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총평, 그것도 총평의 상층 간부들에 대한 의존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일단 총평이 흔들리자 수십 년간 제2당의 지위를 점하던 당 자체가 무참히 붕괴하고 말았다.

일본 사회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 의존 체질도 당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창당 당시부터 진보정당답지 않게 이념과 노선에 대한 고민이 적었다. 당 안에서 정파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오히려 과도하게 이념에 집착하는 당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 정반대다. 당원들 사이에서 이념과 노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는 게 진짜 문제다. 그래서 과거의 낡은 이념을 고집하는 정파가 당을 지배하거나 그것이 분란의 원인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게 바깥에는 ‘이념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이미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민주노동당의 노동 정치는 드높은 전망과 넓은 시야 그리고 활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당의 노동 정치 활동을 단지 제도 정치 공간에서 민주노총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바라본다. 굳이 말한다면, ‘(노동)조합주의 정치’라 할까?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인가? 민주노총이 노동계급 전체의 대변자임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자 민주노동당 역시 그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가장 뼈아픈 것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조직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민주노동당과 이들 사이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당임을 인정받고는 있으나 여기에서 ‘노동자’란 전체 노동자의 1/10도 안 되는 조직 노동자들만을 의미한다. 그들은 대부분 정규직,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늘어만 가는 노동계급의 또 다른 부분들은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의 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독자적인 노동 정치 모델을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흔히 17대 국회에서 비정규직 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을 막는 데 실패한 책임만을 묻는데,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당은 이런 문제들, 가령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교육하고 조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원내에 진출하고 나서도 역시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으로 ‘때우려’ 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더욱 왜곡되고 심지어는 희화화되기까지 했다. 민주노동당은 세액공제제도에 따른 정치후원금 모집 사업마저도 민주노총에 기댔다. 민주노동당의 재정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당은 민주노총을 재정 사업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이쯤 되면 재정 지원과 표 동원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미국 민주당과 미국 노총(AFL-CIO) 사이의 관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② 이념적 퇴행: 스탈린주의, 스탈린주의의 한반도판, 종북주의, 민족지상주의가 당을 지배하기 시작하다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안에는 이른바 자주민주통일(‘자민통’) 경향이 존재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 기반해서 창당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민주노총 안에는 자민통 경향의 활동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바로 그 민주노총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출발한 민주노동당 안에도 자민통 경향이 존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자민통 경향이 그 동안 북한 체제에 대해 보여온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당 강령에 북 체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국가사회주의의 오류 비판, 북한이 특히 경직된 국가 사회주의 체제라는 점에 대한 지적 등)을 담았다.

하지만 자민통 경향이 점차 조직적으로 대거 입당하면서 이러한 창당 당시의 약속이 그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이후부터는 자민통 경향이 각종 당내 선거 때마다 특유의 조직력으로 다수를 점했다. 그래서 당 강령 내용을 거북해 하는 세력이 지도부 내 다수파가 되는 모순된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자민통 경향이 일단 지도부 내 다수파가 되자 이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낡고 그릇된 이념 성향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원내 진출로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시점에 당은 오히려 창당 당시에 비해 지극히 퇴행적인 이념과 노선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퇴행의 첫 번째 사례는 스탈린주의다. 스탈린주의는 20세기에 전 세계 진보 세력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던 낡은 이념 전통이다. 스탈린주의 경향은 사회주의를 일당 독재와 명령 경제와 같은 것으로 보고(민주노동당 강령은 이를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라 부른다), 당운동 안에서도 그러한 관료 독재 행태를 그대로 실천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또 단계론적 변혁론을 고수한다. 그래서 먼 미래의 단계에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단계에서는 자본가나 우파의 일부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87년 이후 한국 운동권을 지배해온 ‘비판적 지지’의 고질병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자민통 경향은 스탈린주의의 낡은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당 전체에 강요했다. 그래서 노무현의 연립정부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슴지 않고 나왔다.

당 정책위 의장이 한편으로는 그게 마치 급진성의 보증 수표라도 되는 양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간층의 이반을 낳을 수 있다며 ‘입시 폐지’에 반대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연출됐다. 또한 주요 당 기관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만으로 패권적이고 관료적인 당 운영을 일삼는 일이 어느덧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민주노동당과 민중운동 전체를 불임의 논쟁에 빠뜨린 한국진보연대 문제도 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진보연대를 만들고 그 안에 무리하게 당을 집어넣으려 한 데는 공동전선에 대한 독특한 시각이 자리한다. 모든 대중조직들을 한 울타리에 몰아넣고 그 안에 관료 체계를 만들기만 하면 민중의 단결이 이뤄진다는 발상. 한국진보연대를 추진한 당내 세력은 이러한 낡은 발상에 사회운동들을 모두 뜯어 맞추려 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쟁점들을 둘러싼 진보정당과 다양한 사회운동들 사이의 실질적 연대는 오히려 관심에서 멀어졌다. 한국진보연대의 틀에 자신을 뜯어 맞출 수 없는 사회운동들은 당과의 관계에서 항상 2차적 혹은 주변적인 위치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고약한 것은 한국의 스탈린주의가 다른 나라의 일반적 타락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스탈린주의의 보편적 형태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스탈린주의를 봉건적 잔재와 결합시킨 그 가장 퇴행적인 형태, 즉 북한판 스탈린주의(이른바 유일사상)다. 그래서 북한을 북한의 현실 그대로 ‘군사’ ‘왕조’ 집단이라고 칭하는 것이 당 안에서 징계 운운의 대상이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북한 체제와 그 선전을 맹족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주의 경향은 작년 말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동안은 자민통 경향 안에 종북주의의 유령이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있었을 뿐이다. 그게 민주노동당을 귀신 들게 만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였다. 2006년 말 북한 핵 사태와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이제까지 민주노동당이 겪은 최대, 최악의 타격이었다. 당 정책위 의장이란 사람이 자위권 차원의 핵무장은 필요하다는 망언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당의 고위 간부가 북한 정보 당국에게 당의 정보들을 넘긴 게 발각됐다.

   
▲ 시대착오적 종북주의가 민주노동당을 지배한다. 사진은 북핵 실험 직후 방북한 민주노동당 대표단과 조선사회민주당의 만찬 (사진=진보정치)
 
그런데 당의 어떠한 공식 기관을 통해서도 이런 상황을 시정하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도부 내 다수파는 이러한 작태들을 옹호하기까지 함으로써 당을 지배하는 거대한 종북주의 블록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더 이상 자민통 그룹의 어떤 편향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앞에 버티고 선 것은 종북파였다!

북한판 스탈린주의와 그 남한판인 종북주의의 저변에는 또 민족지상주의라는 위험한 흐름이 도사리고 있다. 본래 스탈린주의 안에는 국가주의의 요소가 있고, 이것은 쉽게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판 스탈린주의에서는 이게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우리민족제일주의가 그 최신판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가 담고 있는 배외주의는 파시즘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독도 사태 때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 독도에 공수부대를 파견하자는, 보수정당도 생각 못할 발상이 튀어나오거나, 당내 일각에서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돌출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정당이 되고 나서 대중이 줄곧 목격한 게 이러한 모습들이었다. 진보의 희망을 싹틔우는 것은 고사하고 상상도 못할 퇴행적 작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홍세화 선생이나 최장집 교수 같은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평가해도 할 말이 없다.

진보정당은 오로지 미래의 대안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평가받고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어떠한 억압에 직면하든, 어떠한 역경에 부딪히든 이것 하나로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이 잃어버린 게 바로 이 자부심이다. 살아서 버틸 최후의 힘, 그것을 박탈당한 신세다.

낡고 그릇된 이념들이 당을 지배하기 때문에 반대로 21세기의 새로운 진보의 흐름은 민주노동당에 함께 하는 데 높은 문턱을 절감한다. ‘입시 폐지’ 논란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전망을 구체적인 쟁점들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그 발걸음을 민주노동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민주노동당 안의 협소한 노동조합주의 정치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가장 완강한 벽은 종북파가 보여주는 국가주의, 가부장주의, 민족지상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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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몸담고 있던 정당인데, 내 기억에 요즘 같이 자신의 치부를 다 까놓고 논쟁을 한 적이 없었다. 2005년도에 새 지도부 구성을 두고 잠시 있었지만, 대중 앞에 드러내놓고 이야기 곤란한 것은 그냥 덮어두자는 분위기였다.

혼자 고고하고 고상한 사람들에게야 최근 언급되는 이야기들이, '그래 니들이 그렇지, 뭐' 하며 냉소의 대상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진흙탕 속에서 싸워 온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듯 싸잡아 '양비론'을 펼치는 부류 보다는 대가리 깨지더라도 치고받고 싸우는 게 진보의 미래를 위해 건설적이지 않을까?

'좌민련'의 구체적 의미는 이번 글에서는 나오지 않았는데, 마지막 문단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그 발걸음을 민주노동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언급에서 그 답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구 유럽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민당, 사회당 등 좌파정당들과 그 행보를 같이 한다.

본격적인 코멘트는 이 시리즈가 다 나오고 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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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7-12-2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저놈의 당명부터 바꿨으면 한다.
 

“사형제는 인권 문제…보수 정부도 집행 힘들 것”
‘실질적 사형폐지국 한국’ 안경환-공지영 대담

정리/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영상/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12-24


» 안경환(왼쪽) 국가인권위원장과 소설가 공지영씨가 지난 20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형제 폐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실질적 사형폐지국 한국’ 안경환-공지영 대담

2007년 12월30일. 사형수들은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국제앰네스티는 사형제가 존재하더라도 10년 이상 집행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한다.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게 김영삼 정부 시절인 97년 12월30일이니, 앞으로 일주일만 지나면 우리도 사형제 폐지 국가로 공인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과 사형제 문제를 다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작가 공지영씨가 지난 20일 인권위원회에서 만나 사형제 폐지의 쟁점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안경환-공지영 대담



공지영(이하 공)=보수 정권이 들어섰다. 앞으로도 사형 집행 중단이 계속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안경환(이하 안)=어떤 정부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가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시대 흐름이나 보편적 가치를 돌려놓을 수는 없다.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사형제는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 인간성의 문제,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형을 통해 사회의 정치적 변화, 인간의 근본 변화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흔한 말로 전쟁과 혁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이 유일한 정의인 시대가 있었다. 항상 사형은 전쟁이나 극단적 사회 소요 속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시대다. 앞으로도 그렇다. 시대적 흐름이 사형제 폐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돌릴 수 없다. 사형제 폐지의 길에 대해서는 장애물이 없다.

공=저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사형 집행이 많이 이뤄졌을 때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를 할 때였다. 그 다음이 현 대통령인 아들 조지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할 때였다. 둘 모두 보수성향의 대통령들이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인권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고 말씀 하셨지만, 여전히 보수 사회에서는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묵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때부터 사형 집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노무현 정부도 이를 승계했지만 이명박 당선자는 사형제 폐지와 관련해 어떤 공약을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안경환 인권위원장
국제사회 대세 역행 어려워 폐지안해 미·일 존경 못받아
인혁당 사건등 오판 난점 완전 폐지 정치적 결단해야


»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안=미국은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명할 권한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형 집행은 법무부장관에게 위임돼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론 주민이나 국민들의 생각이 어떤가에 의해 이들의 결정도 이뤄진다. 가령 국민들의 지지가 없다면 집행을 잘 안 한다. 텍사스에서 사형 집행이 많았던 것은 그곳 사람들의 정서가 그렇게 표현돼 왔기 때문이고, 텍사스는 다른 주에 비해 형벌 체계가 엄하고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법무부장관이 서명을 해도, 대통령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게 국민의 생각이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돼가는 상태에서 어떤 정부가 여기에 반대되는 일을 하겠는가. 국제사회에선 사형제에 따라 그 국가의 전체적 인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형집행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집행이 이뤄지면 인권위는 문 닫아야 한다.(웃음)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라는 것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느냐, 무겁게 여기느냐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생명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유럽의 경우 진보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형제 폐지가 늘지 않았나.

안=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사회가 만일 사형제 폐지를 진보 역사의 발전 속에 놓아두고 보수 역사의 발전에서는 정체시킨다면 우리사회 젊은 층의 보수 현상에는 장래가 없다.

공=말씀을 듣고 보니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지금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사형수를 만나고 있다. 사실은 내용적 폐지 뿐 아니라 실질적(법적) 폐지도 원하고 있다. 한 사형수의 경우 13년 동안 사형수로 남아 있다. 20대에 들어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사형만 기다리고 있다. 사형제가 내용적으로라도 폐지가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들에게 노동을 하게 해줘야 한다.

안=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수감 중인 사람은 64명이다. 사형을 집행한 최후의 예가 10년 전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법적으로 사형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주는 심리적 차이가 크다. 언젠가 우리가 분명하게 사형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민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은 사형제를 완전히 없애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저항이 있다. 따라서 완전히 폐지는 국민 전체의 찬성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공=프랑스도 과거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사형제를 폐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형제 폐지 운동에 동참하다 보면, 사형제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사형제 폐지를 국민들은 얼핏 사형수를 용서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의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고 다른 형벌은 가해진다. 그것을 마치 용서라는 가치와 혼동해서 ‘절대 저런 인간은 용서해선 안된다’는 식의 감정적인 접근이 많다. 이런 부분에 대한 홍보가 안 된 것 같다. 또 하나는 사형제가 있어야 살인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 역시 죽음의 형벌이 어느 정도 살인에 이르는 범죄를 제어할 것으로 믿었지만, 공부를 해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만약에 죽음의 형벌이 무서워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안=이미 인류는 오래전부터 사형을 인간이 가진 편견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해왔다. 사형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면, 잘못한 사람에 대해 벌을 내리느냐 마느냐는 것인데, 사형제의 난점 중 가장 큰 것은 첫째 항상 오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한번 오판이 내려지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둘째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릴 때 피해자가 벌을 내리느냐 아니면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내리느냐를 놓고 보면, 개인 대신 국가가 벌을 내리는 것으로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왔다. 그러나 국가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벌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이럴 때 피해자가 느끼는 보복의 감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문제다. 사형의 경우, 직접 피해자는 없고 가족 등 간접 피해자가 있다. 그런 경우 둘 사이 피해의 정도가 분명 다르다.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 볼 경우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통해 도덕적 성취감도 있을 것이다. 셋째는 처벌의 경우도 마지막까지 가해자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사형제가 계속 이어지기는 힘들다. 흔히 사형제가 폐지되면 사회적 위험을 얘기하지만 가해자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도 그를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공지영 작가
부시 부자 주지사때 집행최다 보수사회에 대한 두려움 커
잘 산다고 다 선진국 아냐 사형수도 노동하게 해줘야


» 작가 공지영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공=살인만큼 나쁜 죄가 어린이 성범죄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아이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똑같이 성폭력으로 응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독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으로 응징하는 것이 상당히 비현대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유영철 사건 때 첫 피해자의 가족인 고정원씨는 지금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고 있다. 오히려 유영철을 용서하면서 본인도 해방이 됐다고 한다. 문제는 사건 장소에서 경찰이 철수한 이후 하다못해 가정에서 살인이 발생했을 경우 핏자국을 닦는 것조차 국가에서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안의 부재로 인해 피해를 당했을 때 그분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나 정신적 충격에 대한 뒷받침 없이, 그저 운이 없어서 피해를 당한 것으로 방치되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도 함께 논의를 해야 한다.

안=국가가 형벌권을 가질 때는 형벌에 부수되는 사후관리도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소홀할 수 있다. 사형제를 두고 있으면 흉악 범죄가 줄어든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 영국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유형을 300가지를 뒀다. 그러나 실제로 법은 두고 있지만 집행은 그때그때 자의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사형을 면죄해 주는 방법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성직자의 면책 특권이다. 옛날엔 교회 관련 범죄가 많았다. 그래서 성직자가 마지막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자로부터 잘못을 참회한다는 고백을 듣고나면 성직자가 사형을 면죄해 줬다. 참회의 증거는 성경의 한 구절을 라틴어로 외워서 말할 수 있느냐였다. 이는 어찌보면 특권층에 대한 혜택이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사형수를 나라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의 조지아주다. 사형을 면죄해 주는 대신 몇년 동안 유형지로 보내는 것이다. 이후 미국이 독립하고 보낼 데가 없다보니 개척한 곳이 호주다. 마찬가지로 실제 사형제는 가지고 있어도 집행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점점 더 사형을 줄여나가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유형수를 줄이고 집행을 줄여나가는 게 추세다. 흔히 국제사회에선 사형폐지 국가를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미국, 일본, 싱가포르는 모두 선진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형제를 아직 두고 있다. 단순히 잘 산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지표와 인권 지표가 맞물려야 한다. 그래서 위 세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공=일본 교도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교도행정에 관해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일본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도 느꼈다.

안=그런 나라에서도 갈수록 사형 집행이 줄고 있다. 미국은 연방제이기 때문에 현재 사형제를 가진 주가 점점 줄고 있다. 텍사스주가 미국 전체 사형 집행의 절반을 차지한다. 싱가포르와 일본도 점차 줄여가는 추세다. 유럽의 경우 유럽연합 가입조건 가운데 하나가 사형제 폐지다.

공=터키가 사형제를 폐지하지 않아 유럽연합 가입이 보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인권위원회가 지난 2005년 정부에 사형제 폐지를 권고한 것도 우리사회가 국제적인 추세에 대한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의 상당 부분이 사형제 폐지를 권하고 있고, 그들이 늘 한국의 인권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게 사형제와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국가보안법이다. 사실 그런 거 없어도 우리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취임했을 때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당시 반 총장이 사담 후세인의 사형을 놓고 ‘사형은 각 나라가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가 난리가 났다. 당시 유엔의 기본 입장이 사형 폐지 권고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외교부장관까지 지낸 분이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가 인권에 대한 국제 규범을 잘 모르고 있다.

공=현재 3년째 사형수 10명을 만나오고 있다. 그 중 2명은 사형이 확정된 지금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10년 정도 이들을 격리해 놓고 종교위원들이 맡아서 사랑의 세례를 퍼붓다보니 요즘엔 그 사람들이 (바깥 사람보다) 고상해졌다. 10년 정도 사람이 죄를 지을 기회 없이 돈 때문에 세파에 시달리지도 않으니까 어떤 면에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눈빛이 더 맑다. 이런 사람들을 사형시킨다면 나로서는 너무 끔직한 일이다. 나도 처음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 갔지만, 이젠 인간이 사랑을 통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그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더욱 더 사형제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안=누구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형수가 교화돼 가는 것도 있지만, 이는 결국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성숙이기도 하다. 즉 간접 피해자인 가족 입장에서 보더라도 결국 그들에 대한 용서는 자기 성숙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사형제 폐지를 통해 스스로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 몇년 전에 캄보디아 감옥을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사형제가 없다. 사형수와 일반 죄수 사이에 표정의 차이가 있는데, 사형의 위협이 없다 보니 그곳에서 만난 죄수들의 표정은 훨씬 달랐다.

공=그런 말씀을 듣고 보니까 갑자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이 든다. 잘 사는 나라가 곧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도 되새겨 진다.

안=사형제 폐지 법안이 이미 오래 전 국회에 상정됐다. 다수가 서명을 했지만 구체적인 ‘액션’을 못 취하고 있을 뿐이다. 사형제 폐지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무엇보다 사형제 폐지 여론을 홍보하는데 공지영 작가의 역할이 컸다.

공=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 사형수를 만났다. 배우들도 사형수를 만나면서 사형제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봤다. 사형수들 역시 그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배우와 사형수 그리고 작가인 나 사이에 끝없는 교감들이 있더라. 나로서는 이런 글을 통해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문학적 평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안=어느 사회든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 본능은 복수의 본능이다. 이를 극화시킨 게 사형이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사회에서는 사형이 오히려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사회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상적 생활로 변해갈 때는 자연적으로 극적 효과가 줄어들게 돼 있다. 옛날에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한 것은 사람들이 심심하다보니 이를 통해 일종의 이벤트를 연 것과 비슷했다. 전쟁과 혁명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를 가리켜 ‘야만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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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7-12-2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이상 '야만의 시대'는 아니겠으나, '사형제 폐지'라는 인권적 가치실현에 만족하기에는 이놈의 사회가 너무 지랄 같다...

2007-12-26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석훈 교수의 논지는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신문기고글 답게(?) 조금 정치하지 못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먼저,'국민들이 이명박 한 사람이 아니라 이명박을 둘러싸고 있는 후방세력이 현 집권세력보다 믿음직하기 때문에 선택'했다는 식의 논리는 이번 선거의 의미를 너무 과도하게 일반화시킨 것 아닐까? 과연 국민들이 그것까지 생각하고 투표했을까? 이 연장선상에서 "문국현이 이명박의 경제성장률 7%보다 1%포인트 더 높은 8%를 제시하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문국현과 그를 뒷받침하는 정책 집단이 추진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오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노무현이 너무 싫어서 원숭이를 내세워도 당선되었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오히려 이번 선거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것 같다. 우석훈 교수가 맨처음 언급한대로 '노무현 정부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는 것에서 그쳐야지 더 나아가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여진다.

노무현이 싫다는 '즉자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지 성장률이 높은 문국현보다 이명박의 후방부대가 믿음직스럽다는 것까지 생각할 정도면, 역으로 이명박의 도덕적 흠결을 먼저 생각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석훈 교수의 주장까지 나아갈려면 다른 논거들을 제시하여 자기 주장의 근거를 입증한 다음에 주장해야 할 것이다.

다른 주장들은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데, 이명박 정부도 마음대로 하기는 조금 곤란하리라 본다. 대한민국의 예산이나 경제규모가 박정희 시대의 것이 아니듯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 역시 박정희 시대와 다르기에 한 사람의 '괴물'이 마음대로 주무르기에는 역시 많은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우석훈 교수가 언급하는 환경부의 건설교통부로의 통합이라든가 산업자원부 폐지 같은 것들이 과연 쉽게 될까? 너무 세분화된 정부부처를 기능별로 통합시켜 효율성을 제고시키자는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자기 밥그릇 지키는 데는 귀신 같은 관료들 아닌가.

결국 우석훈 교수의 주장대로 시민단체나 야당이 된 자유주의 정당, 비틀거리고 있는 진보정당 등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최소한 노무현 정부에서 했던 것 정도로는 충분히 견인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경제정책적 측면에서는 노무현 정부보다 더이상 나빠질 만한 것들이 남아있는가?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이란 거의 대부분 재경부 모피아들 손에 놀아난 것 아닌가. 경부운하 판다고 헛지랄 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더 나빠질 만한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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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시대' 접고 '괴물의 시대'로?
[밥&돈·22] 이명박 정부의 경제기조 전망

우석훈/성공회대
출처 : <프레시안> 2007-12-21


  이번 주 <밥&돈> 칼럼의 주제는 '대선'이다. 우석훈 박사(경제학)는 이번 칼럼에서 17대 대선 결과의 경제적 의미를 '양아치의 시대가 저물고 괴물의 시대가 왔다'는, 번뜩이지만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우 박사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건설자본으로의 집중'과 이를 축으로 한 '친(親)재벌적 규제 완화' 그리고 '금융 중심 민영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 후, 이번 대선 결과는 바로 이 같은 "건설자본 중심의 자유화(liberalization)"를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국민들 대다수가 부여해준 포괄적인 동의권과 다름없다고 해석한다.
  
  우 박사는 이대로라면 새 정부는 "국민 성공시대"는 커녕 괴물의 시대를 열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과 함께, 이를 막기 위해 이명박 당선자 스스로 '국민경제 총책'이라는 자신의 새 위치에 걸맞게 성장률뿐 아니라 성장 패턴까지 헤아리는 혜안을 발휘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는 또 새 대통령 곁에서 국민들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좋든 싫든, 이번 '선택'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자 주>
  

  국민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투표를 했다. 이 당선자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는 몇 가지 이야기들과 대선 막판까지 따라붙었던 BBK 사건을 보면서, 이 당선자가 깨끗하고 고결하다고 믿었을 국민들이 그렇게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투표 결과로 나온 국민의 뜻은 자명했다. 그만큼 '지긋지긋하게 노무현 정부가 싫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의 성격은 사회적 논쟁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황우석 사태, '디 워' 사태,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것과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번 대선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 '양아치'의 시대를 접고...
  
  우리가 지나온 지난 5년은 분명히 '양아치'의 시대였다. 노무현 정권은 자기들끼리만 밀실에 모여 중대사를 결정했고, "동지들의 등에 칼을 꼽지 말라!"면서 황우석을 띄웠고, 한미 FTA 체결을 향해 질주했고, 농업을 포기했고, 20대들에게 '비정규직의 일반화'를 안겨주었다.
  
  그 과정에는 '참여'는 고사하고 변변한 '논쟁'도 없었다. "지역감정은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우리보다 나았겠느냐" 라는 두 가지 말만 고장 난 축음기처럼 반복하는 것을 집권세력은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점잖게 이야기하면, 노무현 대통령의 5년은 -김대중 대통령의 '완화된 신자유주의'에 대비해- '강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 평가는 '김영삼 정권보다도 해놓은 게 없는 정권'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들은 "설마 IMF 경제위기를 맞았던 김영삼 정권보다도 우리가 못했을라고?" 라면서 억울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따져보면, 사람들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김영삼 시대부터 지난 15년은 한국이 '개혁'을 목표로 움직였던 기간이었다. 스스로를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표현했던 김영삼 정부는 정부를 꾸리자마자 하나회를 청산할 준비를 하고, 금융실명제의 도입을 추진했다.)
  
  물론 우리는 아직 궁극적인 답을 모른다. 다만 국민들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집단을 '양아치' 집단으로 보는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 중 약 65%가 이명박 당선자와 이회창 후보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런 양아치들로 구성된 정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한 것과 같다. 바꿔 말해, 이번 대선 결과는 '국민들이 양아치를 버리고 경제 집단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선거에서 보는 것은 대통령 한 명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후방세력들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자식 위장취업'을 비롯한 도덕적 흠결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선자를 둘러싸고 있는 후방세력이 더 믿음직해 보인다는 것이, 이번 투표 결과의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를 '선택'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 선택이 '거룩한' 것이고 '신성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선택이 '준엄한' 것만은 분명하다. 바로 이 선택에 따라 이제 역사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바로 이 선택에 따라 앞으로 5년간 국가가 운영될 것이고, 바로 이 선택 안에서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면서 최선 또는 차선이 모색될 것이다.
  
  2. '괴물'의 시대가 열리는가?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민 중 절반 이상이 '경제성장'과 함께 '강력한 추진력'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 문국현이 이명박의 경제성장률 7%보다 1%포인트 더 높은 8%를 제시하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문국현과 그를 뒷받침하는 정책 집단이 추진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 개인이 이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이미 한국에서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는 이명박 자신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집권 세력, 그리고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경제적 효율성'을 열망하는 대중이 모두 포괄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꺼내든 미래의 청사진은 '시장 제일주의'와 '강력한 추진력'이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반대편에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명박 당선자의 경제 공약에도 복지 공약이 들어가 있고, 보육을 포함한 여성 공약이 들어가 있다. 다른 후보자들과의 차이점은 이런 공약들이 시장 장치에 의해 움직이도록 디자인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디자인 여부에 따라 이런 장치들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국민들은 이런 장치들이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이명박 체제는 토론과 반대의견을 용납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세워 종합적인 디자인을 하고, 절반에 가까운 국민들은 단기적인 부작용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지지를 보내는 상황, 바로 이것이 이명박 체제의 작동원리가 될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의 복원'이다.
  
▲ 지난해 10월 이명박 당선자가 독일의 뉘른베르크 RMD 운하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왜 필요한지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박정희 시대는 독재자로서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종합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명박 시대에도 이런 종합성이 있을 것인가? 바로 여기에 문제의 초점이 놓여있다. 만약 이 시스템이 종합성 없이 국민경제 전체를 끌고 간다면, 이 시스템은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에게 굳건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준 경부운하 사업은, 그 사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변환을 상징하는 것이라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던 시절의 한국은 GDP 중 건설자본의 비중이 10%가 채 넘지 않았으며, 그래서 건설 부문이 커져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노무현 정부가 지난 5년 간 '한국형 뉴딜'을 통해 건설자본의 비중을 20% 가깝게 높여놓은 결과 건설업의 연착륙이 어려워진 때이며, 따라서 이 시점에서 지나치게 건설 중심으로 국민경제의 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괴물 탄생'을 예고하는 음울한 전주곡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3. 정책 기조는 변하고, 한국도 질적으로 변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남아있던 많은 규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린벨트가 그렇고, 수도권 규제에 관한 대체적인 틀도 국토종합계획을 처음 입안하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토지공개념'의 기본 틀은 노태우 시절과 김영삼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졌는데, 노 대통령이 한 일은 임기 거의 마지막 순간에 보유세 개념을 더한 정도이다.
  
  이런 규제들이 생겨난 이유는 시장을 무시해서도 아니고, 분배를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한 좌파 정책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규제들은 이전의 정부들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특히, 많은 규제들은 국민경제의 여러 자본 중 건설자본, 특히 수도권의 건설자본에 너무 많은 힘이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번 대선 결과는 이런 규제를 없애고 건설자본에 힘을 집중시키자는데 국민들이 포괄적으로 동의해 준 것과 다름없다. 국민들 대다수가 동의해 준 이런 상황을 막아낼 힘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자신의 앞가림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민주노동당은 붕괴되다시피 했다. 한나라당의 '건설자본 중심의 포괄적 자유화'는 그야말로 대세다.
  
  이 같은 건설자본 중심으로의 경제 개편에서 '금산분리의 폐지'는 삼성그룹에게 주는 보너스에 해당한다. 쓰는 김에 조금 더 써서, 이명박 정부는 '국책은행 민영화'로 지금껏 지연됐던 민영화 절차를 재가동할 것이다. (이걸 중소기업 지원방안이라는 이 당선자의 주장이 엉뚱하기는 하다. 민영화된 은행들이 고사 위기에 있는 중소기업에게 왜 자금을 지원하겠는가?)
  
  이명박 정권의 주요 경제기조를 전체적으로 전망해 보면, 새 정권은 건설자본을 전면에 내세워 '경제 살리기'에 힘쓰고, '지금껏 숨통이 막혀 있었다'고 주장하는 재벌들의 숙원을 몇 개 들어주고, 금융(은행) 중심의 민영화를 훨씬 강력하게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4. 새로운 시대, 최선을 다합시다!
  
▲ 한국은 이미 주택 가운데 70% 이상이 아파트 형태인 '아파트 공화국'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여기서 얼마나 더 나아간 '건설자본의 천국'을 구현하려는 것일까? ⓒ프레시안

  이렇게 하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청년들의 고용과 실업 문제가 해결되고, '양아치 정부' 시절의 경제적 폐해가 사라져 모두 즐겁게 춤출 수 있는 선진경제가 달성될까?
  
  시장은 효율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시장이 가지고 있는 폐해는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를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 잘 운용하지 않으면, 거시경제는 '시장 실패'라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건설자본 중심의 경기부양책이 당장 의도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외국인 노동자의 건설업 진출이다. 이미 건설 현장에서는 60% 이상의 노동력이 외국인 노동자로 채워져 있는 상황에서, 건설자본 중심으로 경기를 부양해봐야 정작 우리 국민들에게는 안정적인 정규직은 고사하고 단기 비정규직 일자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출된 자금 중 50% 이상이, 국내 경제에 투입돼 내수를 진작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국으로 송금된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가 수없이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임기 5년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고 하면 향후 한국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명박 당선자에게는 현대건설 근무 시절과 서울 시장 재임 시절에 하고 싶었지만 정부 규제로 못해본 아쉬운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숙원을 풀겠다고 시스템을 전부 건설자본 위주로 바꾸어버리면, 지금으로부터 5년 후에는 65% 이상의 국민들이 지금 이 순간을 '괴물'이 탄생했던 때로 회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항간에는 이명박 정부가 '경부운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환경부를 건설교통부에 통폐합시킬 것'이라거나 '규제철폐라는 이름으로 산업자원부를 없앨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이런 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정부 개혁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 같은 일대 사건이다. 환경영향평가나 건설사업 타당성평가와 같은 제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다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건설사업 하는데 귀찮다고 이런 제도를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담당 부처까지 없애거나 통폐합하겠다는 것은 과도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국민경제 내 건설 부문의 비중은 노무현 정부 시절을 거치며 충분히 높아진 상태다.
  
  분명한 것은 이명박 당선자는 지금 건설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국민 5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받고 국민경제의 총 지휘권을 가진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가 된 이상, 경제를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건설자본 위주로 사유할 필요도 없다. '좋은 경제'를 위한 정부의 역할은 간섭을 최소화하고, 다만 제도에 장애가 있을 때 이를 개선해 주는 것이라고 교과서에 나와 있다.
  
  이 당선자가, 건교부 장관이 아니라 국민경제 지휘관으로서, 건설자본에 2개의 혜택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을 과감히 접고 그 중 1개는 기타 자본이나 국민들의 복지로 돌리는 '작은 지혜'를 발휘해 줬으면 좋겠다. 이 당선자가, 경기순환을 거스른 인위적인 경기부양과 그 부작용에 대한 뒷수습을 하느라 경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경제성장에는 '성장률'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장 패턴'도 중요하다는 게 현대 경제학이 주는 가르침이다. 일자리에 목마른 국민들, '안정적인 삶'을 갈망하는 국민들, 그들을 위해서 좋은 경제성장 패턴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대선은 끝났다. 이 새로운 정부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집권세력은 물론이고, 야당과 시민단체들, 나아가 국민들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본의 90년대 거품공황을 우리가 반복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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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대통령 당선, 국민의 삶은 나아질까?
    from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2007-12-24 12:21 
    [새사연 이슈해설] 경제대통령 당선, 국민의 삶은 나아질까? 2007-12-24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던 2007년도 저물어간다. 역대 가장 재미없는 선거라고 했던 대통령 선거도 끝나고 한나라당 이명박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