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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탈목적’ 넘어설 날은

최재봉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2007년 한국 소설의 화두를 ‘역사’와 ‘장편’이라 한다면, 그 둘을 단순 결합한 역사장편소설은 작가들의 손쉬운 출구였다. 작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역사장편소설들을 쏟아냈다. 지나간 과거가 한국 소설의 미래를 책임지고자 나서는 듯한 형국이었다. 계간 <문학동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겨울호 특집을 ‘역사의 귀환’으로 삼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 특집에 글을 보탠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근대적 역사관으로부터 탈근대적 역사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문학에서 나타난 것이 “역사소설의 ‘소설역사’로의 변형”이라고 본다. “역사소설이 ‘역사 속의 인간’의 전형을 추구했다면, ‘소설역사’는 ‘인간의 역사’를 구현하고자 한다.” 역사 또는 거대담론 대신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김 교수가 주장하는 ‘소설역사’의 핵심이다. 그는 특히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데, 그에 따르면 “김훈은 인간의 계속 이어지는 삶 그 자체를 역사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근대역사소설과 다르게 목적 없는 목적론을 내재하는 탈근대 ‘소설역사’를 지향한다.”

<남한산성>을 포함한 김훈의 역사소설들에 대한 좀 더 본격적인 논의는 신형철씨의 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에 담겨 있다. 그가 보기에 김훈 소설의 핵심은 말할 수 있는 것(객관적 사실)과 말할 수 없는 것(주관적 의미와 가치) 사이의 간극에 있다. 그런 김훈의 역사소설은 기왕의 역사소설들과는 다르다. “김훈의 역사소설은 역사소설이되 역사의 목적과 진보를 승인하는 ‘역사주의’와는 무관한 곳으로 간다.” 이런 김훈 역사소설의 특징을 가리켜 신씨는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자연사소설’에 가깝다고 본다. “(김훈은)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 이 역설이 김훈 소설의 힘이다.” 역사학자와 평론가의 결론은 이 지점에서 일치한다.

소장 평론가 이경재씨는 ‘2000년대 역사소설이 넘어선 것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정래의 <오 하느님>과 조두진의 <도모유키>,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을 통해 고향과 민족이라는 가치가 최근의 역사소설들에서 유지되거나 폐기되는, 또는 폐기되는 듯하면서도 위장된 형태로 유지되는 양상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오 하느님>은 비록 무대가 한반도 바깥으로 확장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내셔널 히스토리로서의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서 고향과 민족의 가치는 가히 신성불가침이라 할 법하다. ‘임진왜란’을 일본군 하급 무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도모유키>, 그리고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를 주인공 삼은 <천년의 왕국>은 나란히 이방인의 시선을 동원하고 있어서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오히려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민족의 통일적인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김기봉 교수와 신형철씨의 글에서 보다시피 역사와 소설에서 목적과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최근 역사소설 논의에서 지배적인 경향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경재씨의 글의 결론은 목적과 의미로부터의 무한 탈주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위선과 폭력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에서 나아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건설적 사유인지도 모른다.” 탈주와 해체로부터 참여와 건설로 우리 소설은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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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소년이 본 전쟁, 잔혹함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 … 이스마엘 베아|북스코프

“처음으로 전쟁이 내게 현실로 다가온 것은 열두살 때였다.”

아프리카 적도 부근 국가 시에라리온 태생 이스마엘은 랩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소년이다. 그가 열두살 되던 해, 1993년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도시에서 열리는 장기자랑 대회에 참가하러 집을 나섰다. 그는 갈고 닦은 랩 실력을 뽐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여행길은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행이 돼 버렸다. 반군이 일으킨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이스마엘은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낸다. 총알을 피해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피난민이 된 것이다. 혼자서, 때로는 또래 아이들과 목적지 없고 굶주린 여정이 이어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밤이면 버려진 마을에서 잠을 잤고, 아침마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결정함으로써 내 운명은 결정됐다.” 그는 홀로 수십일을 밀림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의 지옥 같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소년의 회고담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비현실적 소설 같은 인상을 받는다. 소년의 눈에 비친 내전은 너무 잔혹한 나머지 한 편의 허구 드라마로 비친다.

그는 내전의 마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정부군에 발견돼 강제로 총을 들어야 했다. 이른바 소년병이 된 것이다. 처음 총을 잡았을 때 그는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열세살짜리의 전투를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그는 첫 교전에 나설 때를 “생애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검을 허리에 차고, AK47을 어깨에 메고 시신과 총성,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은 익숙해졌다. 그 힘은 마약에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주던 날 알약도 함께 주었는데, 다름 아닌 코카인이었다.

“어느샌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워졌다.”

그에게 분노와 살인은 일상이 돼버렸다. ‘런 DMC’와 ‘LL 쿨 J’를 좋아하던 소년은 마약과 무용담을 좋아하게 됐다. 낮엔 방아쇠를 당기고 밤엔 마약을 흡입하거나 ‘람보’ 같은 전쟁영화를 보며 보낸 시간은 무려 2년. 그는 “어느샌가 어린 시절이 끝나 버리고 심장도 얼어붙었다”며 소년병 시절을 회고한다. 전쟁의 상처를 더듬으면서도 천진함이 묻어 있는 문장들은 독자의 아픔을 배가시킨다. 공포스러운 기억을 불러내는 문체는 군더더기 없지만 섬세하다.

옛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찾아준 것은 유니세프였다. 유니세프는 소년병들을 막사에서 빼내 재활센터에 보냈다. 마약 중독자 이스마엘은 힘겨웠지만 재활에 성공했다. 그리고 수도 프리타운에서 삼촌을 찾아 평범한 생활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평화는 잠깐이었다. 시에라리온은 다시 반군과 일부 군인이 합작한 쿠데타로 폭행과 살인이 판을 치게 된다.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 그는 다시 사선을 넘기로 한다. 다시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홀로 이웃나라 기니의 국경으로 향한다.

그의 고백은 인간의 비이성에 대한 고발이다. 일부 내전 국가엔 아직도 소년병이 존재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의 고발은 더욱 생명력을 얻는다. 이스마엘은 현재 뉴욕의 어느 미국인 가정에 둥지를 틀었다. 고향의 ‘달 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었던 소년은 대학을 졸업한 뒤 소년병 근절을 위한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송은주 옮김. 9800원

〈서영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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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라, 폭풍우가 내리칠지라도
분쟁지역 작가들이 말하는 나의 땅 나의 문학
⑥ 바르바라 은디무루쿤도-쿠루루
 
 바르바라 은디무루쿤도-쿠루루 / 동화작가·부줌부라 부룬디 대학 교수
 <한겨레> 2007 11 01

 
» 바르바라 은디무루쿤도-쿠루루/동화작가·부줌부라 부룬디 대학 교수
 
 
글쓰기란 사회 및 세상과 공유하기에 유난히 어려운 어떤 진실들을 드러내는 왕도(王道) 중 하나다. 따라서 작가는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삶의 다양한 모습에 관한 의견을 조명하는 데에 앞장서야 할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작가의 역할이 부각되지 않는다. 아예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에는 뜨거운 현안을 소재로 삼거나 자극적 주제를 다룬 글들이 가장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 경제 분야에 보다 많은 흥미를 보이는 독자들로서는 아무래도 소설 등 문학작품에 관심을 덜 보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자기 재능을 활용하여 분쟁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 글을 통해 제시해보고자 한다. 작가란 지식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작가는 횃불을 들고 미래의 일들을 예견하며 미리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회의 일원이다. 전쟁 기간 중 작가로 살겠다고 정말 선택했다면 이는 예리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갖춘 분석가가 되기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물론 비방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소설을 발표하면 몽상가라느니 비현실적이라느니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하면 정치인이냐는 둥의 소리를 듣기도 하며, 동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이들의 미움이나 분노를 살 가능성도 있다. 둘 중 어느 경우이든 간에 아마도 작가는 인간의 법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불균형한 세상을 살아갈 위험이 있다.

작가의 행보는 제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가운데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 등장하는 알바트로스의 비상(飛上)처럼 무거워질 수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용기와 결단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시간과 공간 곳곳에 흩어진 각양각색의 독자들과 호흡을 맞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입소문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독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남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다시금 변형시킬 위험성이 농후하며 유언비어까지 퍼뜨려 집단 히스테리를 유발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횃불을 높이 들고 잠재적 독자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결은 바로 늘 진실한 태도로 오직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작가의 재능과 언어의 마술을 드러내는 소설적 문체로 진리를 감싸는 동시에 겸허하고 침착한 태도로 사건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물론 절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이 오직 전쟁만이 평화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평화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사고만으로는 세상을 안심시키기에 충분치 않다. 굶주린 민족에게 평화는 없으며 집 없는 가족에게도 평화는 없다. 학교에 다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는 고아들에게 평화는 없다. 숨죽인 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들에게 평화는 없다. 온갖 자연재해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주민들에게 평화는 없다. 주기적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평화는 없다. 언제 원자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세상에 평화는 없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길지만 일단은 이렇게 몇 가지 예로 만족하자.

분쟁지역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다. 생각의 창조자로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여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도전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맡은 선구자적 역할을 인식하는 용기 있는 작가라면 사회를 좀먹는 해악들을 고발하고 뛰어난 효능의 치료법을 각 상황에 맞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소설적 문체로 잔혹함을 맹비난하든 시적 산문으로 사랑을 노래하든, 무엇이든 좋다. 다만 까마귀를 노랗게, 오렌지를 파랗게 그리는 것만 피하면 이상적이리라. 공포를 물리치고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현재를 반영한 글쓰기를 통해 불의를 몰아내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지지하는 것, 발언권 없는 이들을 대변하는 데에 자기 삶을 바치는 것,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예술가의 머리 위로 벼락과 폭풍우가 내려쳐도 그러려니 하며 너무 좌절하지 않는 것. 분쟁지역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들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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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 서있어
분쟁지역 작가들이 말하는 나의 땅 나의 문학
 베로니크 타조 / 코트디부아르 소설가
 인터넷한겨레 / 2007 10 30
 


  » 베로니크 타조 코트디부아르 소설가
2002년 코트디부아르는 정치적, 군사적 갈등의 깊은 골로 접어들었다. 나라는 둘로 분리되었다. 반군이 지배하는 북과 친정부 성향의 남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갈등의 핵심은 ‘코트디부아르인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누가 코트디부아르인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고 있었다. 이웃한 국가들 중 북쪽 지역에 위치한 기니와 말리, 특히 부르키나 파소인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7월, 오우아가도우고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나는 2004년에 쓴 <포코우 여왕>이라는 책에서 코트디부아르의 갈등을 과거 구전전통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제기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이미 익히 알려진 전통에 따르면 포코우 여왕은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아샨티 왕국(과거 가나 왕국/역자)으로 도피를 했다고 한다. 도주자들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이 너무 크고 넓어 건너기가 힘들어지자, 포코우 여왕은 자신이 낳은 갓난아이를 물속에 던져 버렸다. 이를 통해 여왕의 추종자들과 후에 바울레 왕국(‘바울레’는 “아이를 희생하다”라는 뜻)을 세우게 되는 사람들은 무사히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바울레 왕국, 다시 말해 지금의 코트디부아르의 탄생신화를 탐구함으로써 나는 오늘날 종족 간 갈등과 정치적 야심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적 갈등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조감해보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바오인들은 거의 모두에게 ‘진짜’ 코트디부아르인으로 인정 받는다.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보면, 이들이 오늘날 가나에서 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전설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부터 이동해왔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종족을 구분하여 싸우는 일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국가가 오히려 풍성한 전통을 가진 법이다.

포코우 여왕의 희생은 내게 자신의 자식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어머니의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은 오늘날 권력 투쟁의 제물이 되고 있다. ‘소년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이들을 납치해 전선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지금도 서아프리카 몇몇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다.

내가 <아비장 블루스>라는 그 다음 소설에서 긴밀히 탐구했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소설은 현대의 코트디부아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몰락한 한 가정을 다시 세우는 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내전의 참상과 이를 고발하는 새로운 방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한 개인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얼개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개인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동시에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적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토록 전도양양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던 서아프리카의 한 모범적인 나라가 전쟁과 종족 간 갈등으로 인해 깡패국가로 바뀌어 갔는가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역사 속에 인간적 차원을 제공하려 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좀더 분명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사유가 깊고, 정치적으로 잘 교육 받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민감한 시민이 절실히 필요하다. 단지 아프리카에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서구식 미디어만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과 말을 통해서, 논쟁과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학이 바로 이 경우 새로운 전선을 열어젖히는 소중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문학은 인간을 저해하는 어떤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말의 거리감을 인정한다. 때때로 역사를 개인사 및 소설과 섞기도 한다. 현재를 다루지만, 과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쓰는 일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듣게 하고 그 속으로 인도하는 일이 문학의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존재는 바로 이 모순 위에 세워진 것이다. 때때로 완벽한 침묵으로 귀결되는 절망과 완전히 새로운 행위를 추동하는 희망,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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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뒷계단>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출처:<한겨레신문> 2007-05-11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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