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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떨어졌다."
“......?”
“......?”
“머리라도 잘라서 팔아 오지 그러냐?”


이 무슨 70년대 연속극도 아니고...

지난 일요일,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아내가 갑자기 툭 던져 온 말이 ‘쌀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이 무슨 보릿고개 넘던 시절 대화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 수도권 변두리 도시지만 30평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는 가정에서 나올 법한 소린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다가 답해준 말이 ‘머리카락이라도 좀 잘라서 팔아 오라’는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러고선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물론 요즘도 이 사회에선 기본 먹거리인 쌀의 부재를 염려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것 하나 해결 못 하면서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달성했다(환율 하락 덕분에 2007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불을 초과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자화자찬할 이 우라질 정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기 임기 내에 4만 불 달성한다고 설쳐대는 차기정부 구성 1순위 후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내 유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쌀’이란 존재는 지금처럼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부족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올 해는 풍년이 들어 쌀 몇 천만 석을 수확할 것이란 뉴스가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우리 집 역시 그 쌀의 존재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3,000여 평의 논을 경작하고 있어 우리 식구 먹을 식량이 전혀 부족할 리 없는 우리 집에서도 쌀은 늘 부족했다. 내 기억에 우리 집에서 쌀밥을 먹는 날은 설, 추석 그리고 가족 누군가의 생일날이었다. 3,000여 평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보리쌀로 대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양만 남긴 채 현금화되어 집안살림살이에 보태졌던 것이다. 아마도 그 덕에 내가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으리라.

이런 유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은 ‘쌀의 부재’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나에게 쌀이란 언제든 필요하면 마트에 들러 4kg, 5kg, 10kg짜리로 세분화되어 ‘**햇쌀’, ‘**청정쌀’, ‘**농협쌀’로 브랜드화 된 포장뭉치를 카트에 싣기만 하면 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려면 ‘돈이 떨어졌다’고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 때 장보러 가자고 하니까 아내는 한 번 더 해 먹을 쌀은 남았다면서 내일 가자고 한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쌀 떨어졌다’고 유난을 떨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아내는 쌀 걱정 해본 적 없는, 나보다는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다...-.-..


희망의 노래 - 류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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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후배 결혼식에 갔다 왔다. 나이 마흔에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그녀, 늦은 만큼 행복하길 바란다.



이 후배 결혼식 덕분에 십 몇 년 만에 만난 후배도 있었다. 미스 최, 그녀도 아직 미혼이란다. '신부가 부럽지 않냐'고 하니 자기는 내년에 마흔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란다.^^ 아침에 신부집에서 대절한 관광버스 타고 부산에서 올라왔는데, 다시 타고 내려가야 한다며 버스에 오른 그녀.

아마도 내가 그녀를 다시 보는 날은 다음 중 어느 게 더 빠를까? 그녀와 내가 아는 또다른 누군가가 결혼할 때, 그녀 본인이 결혼할 때.



그런데 휴대폰으로 급하게 찍어 온 사진을 피시에 저장시키고 훑어보던 중 "허걱~~." 사진 속에 내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난 분명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부의 뒤편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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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우리집 과수원의 첫모습은 아래 사진 속의 과수원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먼저 사진 오른쪽의 배밭은 배나무가 아니라 복숭아 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사진 왼쪽 끄트머리에는 딸기밭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딸기밭이 없어지고, 대학교 들어갈 무렵, 복숭아 나무를 베어버리고 배나무를 심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 과수원의 배나무는 40년이 넘은 것부터 20년 남짓한 것도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런 과수원이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야 할 운명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식들, 주로 누나와 자형의 도움으로 어머님께서 꾸려 오셨지만, 이제는 도저히 힘에 부쳐서 경작하기가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그렇게 말려도 안 들으시던 어머니께서 순순히 올해부터는 안 하신다고 그러는 걸 보면 당신도 어지간히 기력이 딸린다는 걸 아시는 것 같다.

이제 저 과수원은 온전히 남아 있는 당신의 자식들이 책임져야 할텐데, 자식들 그 누구도 이제 와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과수원의 운용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가고 있는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나오는 의견들이 고구마, 감자, 마늘, 옥수수 등을 심으면서 염소, 닭 등을 풀어 키우자는 안으로 모아지고 있는 중이다.

뭐, 자식 다 키워낸 형제자매들의 소일거리인 이상 무엇을 재배하든 무엇을 키우든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번 기회에 시골집을 다시 짓는다는 것인데, 늘상 전원 생활이 어쩌고 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저 과수원을 배경 삼아 눌러 앉는 것은 어떠냐는 고민을 시작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아내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두 마디 의논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요즘 회사일과 관련된 내 신상의 변화 가능성 때문에 갑자기 현실적인 대안의 하나로 부각된 문제라 할 수 있다. 생판 모르는 땅에 새로 집 지어서 농작물 심는 것에 비하면 이미 경작할 모든 것이 갖추어진 저 과수원은 확실히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아래 글은 아내가 3년 전, 이 즈음에 울산집에 갔다가 쓴 글이다. 저때만 해도 '생생했던' 어머니셨는데, 지금은 몸, 정신 모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집만 피우신다.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즐거운 명절이어야 할텐데..... 

2007년 9월 23일.





일흔 다섯의 노모가 일평생 살림을 불리고, 5남매의 등록금이 되었던 과수원은 집을 나서면 5분 여 거리에 있습니다. 금이 좋았던 과수농사의 옛영화를 뒤로 하고 주변에는 빚만 잔뜩 진 농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듯 수지가 안 맞아 방치된 것과는 달리, 쉼없이 오르내리며 어머님의 손길이 닿은 땀의 과수원 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배는 유난히 달고 맛있다고들 합니다. 넘칠 정도로 부지런하신 어머님을 위해 형님댁에서는 서울 근교에 얼마간 텃밭을 사서 모시려고 해도, 자식에게 신세 안지려는 마음만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대쪽이십니다.






새해에 갓 태어난 조그만 강아지였던 똘똘이가(시댁에서 기르는 강아지는 죄다 이 이름만 씀) 3개월 사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동행을 청하고, 어느 집 소가 버려진 텃밭에서 한가로이 봄볕을 희롱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먼저 온 복사꽃은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데, 아직 배꽃은 저 만큼 더디 오고 있습니다.






흙을 깨우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느라 사시사철 새까만 어머니의 손톱을 두 번밖에 깍아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움이요, 이제는 한가롭게 노니는 저 소처럼, 혹은 다른 어머니들처럼 편안한 여생을 보내실 때도 되었건만 당신 하시는대로 놔두라는 말씀이 자식들에게는 쓰라림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줄당기기에서 결국 자식들의 채근으로 듬성듬성 잘라버린 배나무의 그루 수가 적다고 어머니의 일손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오랫만에 다니러온 작은 아들이 세찬 바람에도 배나무가 잘 견딜 수 있도록 삼각대를 세우고 야무지게 묶고 있는 중입니다.






여지없이 두꺼운 흙을 뚫고 파랗게 돋아난 산나물입니다. 배나무 베어낸 자리에 어머님은 작년부터 힘들게 산에서 이것들을 캐다 심으셨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안 계시더라도 자식들이 손쉽게 뜯어다 먹게 하기 위한 준비라 하실 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부드럽게 내리쬐는 봄볓을 받아도 이보다 더 따사로울까요?

마치 종합선물 셋트 같은 어머님의 손길이 닿은 먹거리들로 며칠간은 식탁이 봄의 무공해 푸성귀들로 풍성할 것 같습니다.



과수원길 -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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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 "엥똘레랑스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글의 출처부터 밝히자면, 아래에 전문인용을 해둔 대로 <한겨레21>이다. 보시다시피 **가 인용한 부분은 박노자의 칼럼 중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이다. 뭐, 전체적인 논지를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단지 내가 이런 형태로 정식 글을 쓰게 된 것은 **가 그 글의 모두에 쓴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글 내용도 나의 습자지만한 지식을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었던지라"

여기서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그 짧은 글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박노자의 컬럼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홍세화가 프랑스적 관용으로 언급한 똘레랑스는 서로 동일선 상에서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게 들어 있기에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똘레랑스(Tolerance)'의 출발은 앙리4세의 '낭뜨 칙령'에서 유래되는데, 가톨릭만 허용하던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도 종교로 허용하면서 쓴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추되듯이 똘레랑스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이다.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

이러한 똘레랑스의 정치적 의미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파 르펜의 부상에 프랑스나 독일이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를 실천-대표적으로 이민자 추방-으로 옮기는 극우파를 경계하는 목소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똘레랑스가 무조건적인 관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를 단순하게 우리말의 '관용'이나 '자선', '너그로움' 등과 동일시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차이'를 모르면서 무슨 시혜나 베풀듯이 던져주는 적선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점.

그러나 박노자가 말하는 '똘레랑스'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자기들 동일성 내에서 통용되던 '편협한' 똘레랑스를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첫째는 '백인-남성'이라는 동일성내에서 통용되던 자기들만의 똘레랑스에 대한 비판이고, 둘째는 '똘레랑스'의 외연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통용되는 것보다 확장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경제적 토대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통용되는 '똘레랑스'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박노자의 글을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홍세화가 말했던 프랑스적 똘레랑스는 전혀 이상한 것이 되고 마는 셈이지. 하지만 나도 물론 박노자의 견해에 동의하기는 하지. 맞는 말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아니겠나.

(p.s.)그리고 논술이 단순한 '스킬'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고... 공부 좀 제대로 하고 가르치셔. 나 같으면, 그렇게 인용되어 나오면 출처가 어디고 전문 인용인지 축약 인용인지 확인하고 가르치겠다. 아,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톨레랑스, 유럽의 새빨간 거짓말

전후 장기 호황기에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였으나 70년대 이후 무슬림 차별 심해져…‘똘레랑스의 꽃’ 노르웨이에서도 가혹한 배제의 매카니즘이 지배하는 건 마찬가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21> 제587호 2005년11월30일


‘유럽적 톨레랑스’와 같은 표현은 필자의 귀에 거슬린다. 세계의 주요 문명권 중 17~18세기까지만 해도 후진이었던 유럽에서 톨레랑스가 가장 부족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유대인들은 신분적인 불평등은 따르더라도 박해받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슬람 신도들과 공존은 주변부의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20세기까지 상상할 수 없었고 유대인들은 박해와 멸시 속에 떨면서 살았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개종자들이 노비를 해방시켜 신앙적 동지로 만들고 백정들과 같이 기도하는 등 해방적 색채를 띠었지만 이것은 ‘유럽 종교의 덕’이 아니라 신분제도의 철폐가 과제였던 시대의 특수성으로 인한 일이었다. 같은 시기에 백인 천주교 성직자들은 중남미에서 흑인·인디언의 노예노동을 긍정하고 신분적 경계선들을 신성시했다. 60년 전까지 유럽 사회는 톨레랑스를 가치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타 지역보다 훨씬 더 잔혹한 인종·종교·문화적 배제·차별의 메커니즘을 개발·가동했다.

경계선 바깥의 단기계약 노예들



△ 저숙련 노동시장에서마저 쫓겨난 이슬람 출신 이민자들은 학력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도 어렵다. 청소 용역일을 하고 있는 유럽의 한 이주 노동자. (사진/ EPA)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톨레랑스가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파시즘의 광기에 반발하는 측면도 있었고 노동계급의 꾸준한 투쟁도 성과를 거뒀지만 무엇보다 1945~73년 전례 없던 장기 호황기의 분위기에서 지배자들이 각종 소수자들을 ‘다원적 시민사회’ 영역으로 끌어들여 포섭하려 한 것이다. 호황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잉여가치의 일부분을 나눠줄 여유도 있었고 끊임없이 새 노동력이 필요했다.

현재 유럽연합 총인구의 약 5.5%에 이르는 이슬람계 인구는 그때 알제리 출신들의 프랑스 이민, 모로코 출신들의 네덜란드 이민, 터키 출신들의 독일 이민 등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던 당시의 유럽에서는 노동력에 대한 갈증이 심해서 1960년대 말의 독일의 경우 해마다 난민 신청자의 85%에게 체류 허가를 내주는 것이 보통 일이었다. 난민에게 비교적으로 덜 잔혹한 노르웨이에서마저 80%의 신청자가 퇴짜를 맞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신화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그때가 바로 ‘톨레랑스의 황금기’였는데 그때라 해도 국가적 이해관계가 걸리는 문제에서는 하등의 톨레랑스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알제리의 독립전쟁 시절(1954~62)에 공산당을 제외한 프랑스의 일체 주요 정치세력들은 처음부터 탄압을 위한 무력 사용에 동의했고, 공산당마저도 사르트르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실망하는 가운데 적극적 반전운동을 펼치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성장률·이윤율 둔화, 1970~80년대 탈산업화 시작과 1990년대부터 제조업의 동유럽, 중국 등지로 본격적 이전 등으로 미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감됐고, 1990년대 이후 동유럽 등지의 ‘문화·인종적으로 동질적’ 노동의 단기적 수입·이용의 가능성으로 인해 주로 미숙련·준숙련인 이슬람 계통의 이민자들은 일감을 놓치게 되었다. 피부색이 달라도 유럽 여권을 가지고 유럽 현지 수준의 월급을 요구하고 노조에까지 가입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아프리카·중동 출신을 쓰느니 차라리 우크라이나 출신을 6개월간 들여와 한 달에 700~800달러만 주고 실컷 부려먹은 뒤에 보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현대판 ‘경계선 바깥의 단기 계약의 노예’들이 도저히 맡을 수 없는 일부 분야(택시업 등)를 빼고 저숙련 노동시장에서 구축을 당한 이슬람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은 학력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인데 가족의 문화 자본(공부를 장려하는 고학력 집안의 분위기 등)이 빈약한데다 ‘주류’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내면화돼 있는 상황이라 그것도 어려웠다.

백인 청소부를 본 적이 없다네

프랑스 대졸자 중에서 이슬람 계통들의 실업률이 유럽인 토박이보다 3배 이상 높다는 것은 과연 본인들이 못나서인가? 인종차별 방지법이 있어도 유럽 고용주들이 성명란에 ‘아흐마드’나 ‘모하메드’라고 적혀 있는 이력서를 맨 뒤로 밀어놓는 일은 몸에 밴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이용 가치를 상실해 게토에 몰려 사회복지망에 의존해서 살게 된 이슬람 계통 빈민 이민자들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붙어버렸다. 덴마크·네덜란드 등지의 극우 정권들은 반이슬람 광풍을 이용해 집권했고 이민자 청년들을 ‘쓰레기 인간’으로 명명해 구설수에 오른 프랑스의 내무부 장관 사르코지도 같은 전략을 구사해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다. 톨레랑스는 빈 명분이 됐고 앵톨레랑스(불관용)야말로 정치판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그러면 ‘톨레랑스의 꽃’으로 불리는 북유럽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떤가? 복지정책이 프랑스보다 포괄적이고, 학교에서 이슬람 여성들이 즐겨 입는 차도르(너울)를 금지해 이슬람 계통 이민자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프랑스와는 달리 다문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고 전체적인 실업률이 프랑스보다 거의 3배 낮기에 이민자 청년 폭동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별과 배제의 장치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된다. 전체 노르웨이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보통 3~4%밖에 안 되는데, 이민자의 실업률이 9~10%이고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계통 이민자의 실업률은 거의 15~17%다. 그럼 실업을 면한 이민자가 잡을 수 있는 직장은 어떤 것일까? 오슬로 주민의 약 25%가 주로 이슬람 계통에 속하는 이민자나 그 후손이지만 오슬로대학교에서 이슬람권 출신 이민자나 그 후손이 교수가 되는 경우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 게이트 구르메 노동자들의 시위, 회사가 이민자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자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사진/ EPA)



그 대신 필자가 오슬로대에서 재직하고 있는 5년여 동안 노르웨이 토박이나 백인 이민자가 대학교에서 청소부 일을 맡은 것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여태까지 본 청소부들은 다 피부색이 짙은 이민자였고 그중 대부분은 이슬람권 출신이었다. 이민자들과 그 후손이 가방끈이 짧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학력 격차도 크지만 이민자들의 학력을 노르웨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킨다. 오슬로에서 택시를 탈 때, 이라크·코소보·소말리아 등지에서 학사나 석사 학위를 받아도 그 학력을(수업 연한과 질의 구체적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노르웨이에서 인정받지 못해 핸들을 잡게 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노르웨이 안에서 대학을 나와도 ‘이슬람식 이름’에 대한 혐오 어린 시선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슬로대를 졸업한 파키스탄 계통의 학생 중에서 장기 실업자가 토박이보다 2배나 많다는 것은 학력을 구제의 동아줄로 삼아 빈곤의 수렁을 벗어나려는 유럽의 무슬림에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보여준다.

게이트 구르메 노동자들이 보여준 희망

침체기와 첨예해진 경쟁 시대에 유럽 지배자들에게 톨레랑스는 허구다. 그러나 만약 유럽의 백인 노동계급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연대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톨레랑스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지난 여름에 영국항공(BA) 기내식 납품업체 게이트 구르메가 주로 이민자 여성인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전격적으로 정리해고하자, 주로 백인 남성인 수화물 처리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들고일어나 런던공항이 마비돼 악덕 기업주인 영국항공사가 4천파운드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요즘 특히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거친 영국에서 이와 같은 연대 투쟁의 고무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톨레랑스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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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21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왜 야밤에 시비걸고 있으셔.... 내보기에 점순이 글이 별 문제 없더만...
뭐 원문 확인 안한 죄까지 묻는다면 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까칠하시구만요.
푹 주무시고 글좀 부드럽게 쓰셔... ㅎㅎㅎ

근데 두사람 덕분에 제대로 정리 안됐던 홍세화와 박노자의 차이를 정리했음. 오래도록 공부안한티 팍팍 나누만...(나 말이우 ㅠ.ㅠ) 근데 지난번에 얘기한 부커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에 공부 안한 티가 너무 나서 읽는데 좀 힘겨워 하고 있긴 하지만.... 좋은 책 소개는 고마워요.
아 글구 사과따러는 갈거유? 11월 10일쯤이 될 것 같은데....

내오랜꿈 2007-09-21 03:00   좋아요 0 | URL
으, 점순이 글이 문제 있나, 없나를 구분 못할 정도로 짧아서 파악하기 힘드니까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시간 낭비해가면서 이걸 쓴 거지... 하여튼 요새 애들 고생한다니까, 이런 선생들한테 배우고 있으니...ㅋㅋ

내 생각엔 홍세화와 박노자의 '차이'는 딱 하나 같애. '이방인' 홍세화와 '현지인' 박노자.

추구하는 이념의 순수성이나 가치에 있어서는 박노자보다 홍세화가 오히려 더 근본주의적 좌파라고 볼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의 글들을 거의 대부분 읽어 본 내 생각에는 확실다고 생각해. 하지만, 유독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똘레랑스'를 이해하는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느냐. 그에 바로 '현지인'과 '이방인'이 느끼는 차이라는 것이지.

이 '잘난' 대한민국, 그것도 70년대의 폭압적 분위기에서 살다 망명길에 오른 엘리트 한국인이 바라본 프랑스 사회는 어떤 것이겠어? 그야말로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천국' 아니었겠어? 이게 '똘레랑스'에 대한 두 사람의 이해의 차이를 가져오는 이유인 것 같아.

난, 언제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옥이가 문제네... 10월이 아니고 11월이면 갈수 있을 것 같네... 요새 이 아줌씨 정신 없네.

 


오늘 <식객>17권을 읽다가 국밥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았다. 나에겐 무척 실감나는 에피소드다. 나 역시 어떤 음식 하나를 무척이나 갈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던, 별 것도 아닌 시락국밥, 돼지국밥 한 그릇을. 국밥 한 그릇이 무에 그리 맛일을까만, 단순한 맛이 아니라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추억이라고 하기보다는 조금 슬픈 기억이랄까.

지금도 부산엘 가면 자주 돼지국밥집에 들린다. 싫다는 아내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서는 거의 반 강제로 먹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 아내도 쫑알쫑알 대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거부하지는 않는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먹고 싶었던 게 돼지국밥이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게 아래의 글이다. 아 참, 지난 여름에 안경 맞추러 가서 보니까 3,500원으로 올랐던 거 같다.




서울엔 돼지국밥이 없다


돼지 국밥,,,

먹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고기 국밥 보다 훨씬 더 맛있다(뭐 상대적이겠지만).

학교 다닐 때, 돈이 없어 소주 한 잔 하기도 만만찮던 시절,
학교앞 시장통 입구에 위치한 시락국밥집에서 파는 돼지국밥은
불과 300원의 돈도 아까워 시락국밥으로 대체당하곤 했다.
(시락국밥 500원, 돼지국밥 800원)

그 한을 품고 살아서인가?

서울 생활을 하면서 최소한 먹는 거에 대해선 궁핍하지 않던 시절,
그 돼지국밥을 먹고픈 생각이 들어 수소문 했지만
서울에 돼지국밥을 파는 곳은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93,4년 경엔 없었다.

그 이유를 파헤쳐보니 돼지국밥은 대구 이남 지방에서만
주요 먹거리로 인정되고 그 이북 지방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놈들과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말하곤 했다.

"야, 다 때려치고 돼지국밥집이나 하나 하자!"


또 하나의 차이는
부산쪽 보통의 돼지국밥 집엔 순대를 같이 판다.
500원 짜리 순대 한 접시 시켜 놓구선 소주 몇 병을 비우던 시절,
딥따 소주만 시키면서
"어무이, 국물 좀 더 주이소." 하는 소리가 당당하게 나오던 시절...

그 순대 또한 서울은 부산과 달랐다.


오랜만에 만난 부산 친구놈과
서울의 어느 순대집으로 가서 순대와 소주를 시켰는데, 뭔가 한 가지가 빠졌다.

"아주머니, 여기 된장 주세요~."
"댄장요?"(으~씨, 우리 발음이 그렇게 들렸나 보다...-.-..)
"네에, 순대 찍어 묵구로요..."
"여는 된장 없습니다. 그기 소금 있잖아요?"
..ㅡ.ㅡ...

서울 사람들은 순대를 소금에 찍어먹는 거였다.
우리는 된장(엄밀하게 말하면 막장)에 찍어 먹었는데....

부경방에 올리신 월유님의 뒷풀이 먹거리들을 보니,
불현듯 그 옛날의 돼지국밥이 그리워진다.

지금도 가끔 부산을 가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일부러라도 부산대학교 앞을 찾아 돼지국밥집을 들린다.
지금은 3,000원씩 하는데,
그 옛날, 친구들이 모여 해장하러 아침밥 먹으러 가서는
각자 돼지국밥 하나에 소주를 1병씩이나 비우던 그때의 추억은 못 살리지만
그래도 땀 흘리며 비우는 돼지국밥 한 그릇은 여전히 '추억'으로 존재한다.



200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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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순이 2007-09-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대 앞 국밥집도 괜찮지만 남산동 새벽 시장 근처에 괜찮은 국밥집이 있습니다. 24시간 영업이라 가끔 새벽에 가기도 하는데 부대 앞 못지 않은 맛입니다~ 한 그릇 사죠~^^

내오랜꿈 2007-09-19 20:18   좋아요 0 | URL
'못지 않다'? 우리 말은 참 비교급이 덜 발전한 것 같아. 덜 발전했다기보다는 일상 생활에 덜 활용된다고 해야 하나? '못지 않다'라면 '나쁘지 않다'는 것이고, 영어식 표현으로는 'not better'인데, 좋은 말로 알고 있어.

그런데 우리 생활에 있어 '못지 않다'고 하면 '그럭저럭 먹어줄 만하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표현 아닌가? 내가 우리 말 이해에 문제가 있는건가? 전문가의 견해를 한 번 듣고 싶다.

그리고, 한 그릇 먹으로 갈테니 여기서 부산 갔다 오는 차비까지 준비하고 있기 바란다!

점순이 2007-09-20 17:46   좋아요 0 | URL
'못지 않다'는 못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최소한 같거나 낫다는 뜻이겠죠.
not better과는 의미가 반대같은데.. 오늘 새벽에 수업 듣는 애 중 2명이 생일이래서 그 집 가서 국밥 먹고 헤어졌는데, 역시 맛 있더이다~ 순대도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이던데 또한 일품~(비싸서 몇 점 못 먹었지만..^^;) 이름은 금문돼지국밥~ 내려오는 길이 있으면 한 그릇 대접한단 뜻인데, 차비까지 대라는 어거지를 쓰시다니.. 서울살이 꽤나 팍팍한가 보네요.. 빨리 귀농하소서~^^

내오랜꿈 2007-09-20 19:51   좋아요 0 | URL
뭔, 억지? 살 거면 화끈하게 사라는 거지...

근데, 그게 왜 'bad'가 아니라 'better'로 되어 있지?

antitheme 2007-09-19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대학교 앞 비봉식당의 돼지국밥이 생각나네요. 거기에 부산식 막장에 찍어먹는 순대.
비가 와서인지 더 그립습니다.
제가 있는 남대문 주변 어디서 돼지국밥집 간판은 봤던 것 같은데...

내오랜꿈 2007-09-19 20:20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다른 인터넷 매체에 올렸더랬는데, 몇 가지 반응들이 오더군요. 서울 어디 어디에 돼지국밥집이 생겼다,는 류의 댓글들 말입니다. 가장 신빙성 있는 제보로는 강남 역삼동 먹자골목 뒤편으로 하나 생겼다면서 전화전호까지 남기더군요. 실제 확인은 못해 봤습니다.

아사히 2007-09-2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 토요일 비가 내리는 출출한 늦은 저녁시간 밥을 먹고 들어갈까라는 남편말에 모두 동의하고 그럼 뭘 먹지? 돼지 국밥 먹을까 돈까스 먹을까? 딸과 나, 남편은 돼지 국밥, 아들은 돈까스. 하나로 통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고집을 피운다. 다수결로 해도 돼지국밥이고, 누나와 가위바위보에서도 진 주제에 아들은 눈물로 고집을 피운다. 돈까스라는 단어를 꺼낸 남편이 미워졌다.
진짜 그런날에 돈까스 먹기 싫은데.
거금도에서 모언니가 말했던 부모의 권력 행사를 떠올리며 그래 돈까스 먹고 싶은 아이들의 입장을 백번 고려해도 난 그 순간 돈까스 먹기가 싫었다.
결국 돈까스 집앞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돈까스 하나 포장해서 돼지 국밥집에 가서 우린 돼지국밥 먹는다. ㅋㅋㅋ

내오랜꿈 2007-09-20 13:21   좋아요 0 | URL
짜~~식, 꽤 고집 있네.
누구 닮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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