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벌사회의 그늘
진중권 /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출처 : <월간 인권> 2007년 9*10월
김대중 정권 때던가? 어느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다가 답답해하던 기억이 난다. 기자가 던진 질문은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 이 물음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명백히 김대중 정권의 지지자로 보이는 기자의 태도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다. 한마디로 지식인이 아닌 이들을 지식인으로 대접해주는 게 지식인으로서 아니꼬우냐는 얘기다.
사실 ‘신지식인’이라는 말은 민중의 지위를 드높인다는 가상함 밑에 민중에 대한 더 강한 차별적 의식을 담고 있다. 왜?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농공상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채, 농▪공▪상의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도 제 영역에서 역량을 보여주면 선비(士) 계급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겠다는 얘기다. 이는 봉건적 신분제 의식 철폐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상인이든, 모든 직업은 고귀하고 신성하다고 했다. 지식인이 별것인가? 그저 하는 일이 다르고, 먹고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지식인을 존경해야 한다면, 그와 똑같은 정도로 노동자가 하는 일, 농민이 하는 일, 상인이 하는 일에도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농민과 상인과 노동자는 왜 그냥 제 직업 그대로 존경받으면 안 되고, 존경을 받기 위해 굳이 ‘지식인’으로 직업을 바꿔야 하는가?
이는 이른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는 이들의 머릿속까지도 철저하게 봉건적 신분제 의식으로 물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아예 보수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오죽 하겠는가? 신분 차별을 철폐하자는 캠페인에까지 신분제적 의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나라의 불행이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걸까?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뿌리 깊은 역사적 이유가 있다.
서구에서 신분제 철폐는 귀족계급을 평민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모든 평민이 가짜로나마 귀족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양반계급은 인구의 4%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라. 그 중에서 자기 집안이 양반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집안 내력을 물으면 100% 다 족보를 들이대며 양반계급이라고 주장할 게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근대적 평등은 귀족적 특권 철폐가 아니라, 그 특권의 ‘가상적’ 일반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가상적’이라 함은, 특권을 돈 주고 사거나, 혹은 가짜 족보를 만들어 혈통을 꾸몄다는 의미다. 특권은 소수만이 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이 누리는 것은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전 인민의 양반화가 결과적으로는 전 인민의 평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경로는 다르지만, 어차피 신분은 철폐되었다. 하지만 결과가 같다고 경로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신분제적 ‘현실’의 종언과 더불어 신분제적 ‘관념’도 사라졌지만, 한국에서는 신분제적 현실의 폐지와 더불어 신분제적 특권의식이 외려 모든 계급, 계층의 의식 속으로 더 일반화, 보편화한 것이다. 유난히 학벌을 따지는 이 사회의 습속은 여기서 비롯된다.
요즘 학력을 위조한 사람들을 적발해내느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내 경우에는 외려 반대의 경험을 한다. 나는 열심히 진짜 학력을 밝히고 다니는데, 사회가 그것을 애써 감추어두고 자신들이 내 학위를 위조해준다. 강연 가서 늘 듣는 소개 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그때마다 나는 명예박사 학위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며 농으로 받아넘기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매우 짜증난다.
얼마 전 한국 학벌주의의 폐해를 논하는 방송사 토론에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보내준 패널 소개를 읽어보니, 이번에도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란다. 황당해서. 도대체 학벌주의를 철폐하자는 프로그램에서까지 굳이 학력을 밝히려 한다. 그냥 ‘중앙대 겸임교수’라고만 하면 안 되나? 도대체 내가 어느 대학 나와서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 그게 도대체 토론과 무슨 관계인가?
대개 강연을 하면 주최 측에서는 자신들이 부른 강사를 대단한 사람으로 부풀린다. 실제로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적 없다고 수정해주면, 청중 중에는 실망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잡지사에 글을 기고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잡지사 측에서는 자신들의 기고자에게 되도록 좋은 학벌의 후광을 뒤집어씌우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일 당할 때마다 모욕을 느낀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교회에 가면 신도들 역시 내게 학위를 못 줘서 안달이 났다. “진 박사님.” “저, 박사 아닌데요.” “에이, 박사보다 유명하신데 박사나 다름없지요.” 이렇게 일상에서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박사 학위는 수정조차 안 된다는 고약한 특성이 있다. 아무리 교정해줘도, 여전히 “진 박사님”이다. 이런 종류의 ‘박사’는 분류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니, 아예 수정 불가능하다.
교수 자리 줄 테니 박사학위를 받으라고 한다. 하지만 그저 교수가 되려고 학위를 받는 것은 내 삶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 굳이 정교수 자리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데 큰 불편을 못 느낀다. 학위를 따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있다면, 차라리 미국 가서 조종사면허장(PPL)을 따고 곡예비행을 배우는 게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사회적으로 학력을 차별한다고 굳이 사회의 요구에 맞춰 학위를 딸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 상민들이 신분제를 철폐하기 위해 스스로 양반이 되려고 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실력을 갖고도 학력이 없어 인정을 못 받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쪽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마냥 사회만 탓하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개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는 그런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개인은 학력을 위조하는 위법이나 차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는 편법이 아니라, 정공법으로 그런 차별의 벽을 돌파해 나가는 존재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명예는 힘든 만큼 더 고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