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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7


» ‘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고금변증설 /

청의 고증학은 18세기 후반 조선학계에 전해진다. 고증학은 ‘이’ ‘기’ ‘심’ ‘성’ 등 극도로 추상적인 관념어를 조작하는 성리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고증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다룸으로써, 텍스트와 사실의 진위를 판정하려 하였다. 조선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이 일시에 유행했다. 무오류의 성현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사서오경 역시 진위의 심판대에 올랐다.

조선의 고증학은 곧 성과를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두 분의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알다시피 1801년 해남으로 귀양을 가고, 1808년 강진의 초당(곧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찬란하게 개화한다. 다산의 학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심은 역시 경학이다. 다산의 경학 중 단연 손꼽히는 성과는 <서경>의 진위를 논한 <매씨서평>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자 그의 저술이 서울 학계에 읽혔던 모양이다.

이 시기 정계와 학계의 정점에 있었던 홍석주가 <매씨서평>을 읽어보니 탁월한 업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청의 염약거(1636-1704)가 저술한 <상서고문소증>은 <서경>의 절반이 위작이라는 것을 논증한 고증학적 저술이다. <서경>의 고증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빼어난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 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석주는 다산에게 책을 보낸다.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은 이미 염약거가 다 말한 것이 아닌가. 순간 절망했지만, 다산이 또 누군가. 다시 마음을 챙겨 <상서고문소증>을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여 1834년 드디어 <매씨서평> 완성본을 내놓는다. <서경>의 25편이 가짜일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1783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5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또 소개할 분은 신작이다. 다산이 <서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신작은 <시경>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경> 역시 온갖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신작은 그 무수한 주장과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한 저술 <시차고>를 내놓는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이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면, <시차고>에서 신작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각종 주장과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중요한 저술 형태다. 자, 여기에 서로 대립하거나, 유사한 학설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독자가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신작 역시 엄밀한 고증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선 고증학의 두 대가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52년만에, 신작은 ‘시차고’를 28년만에 완성했다. 이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의 최고로 평가받았다. 얼마 전 유명대학의 총장이 교수들을 상대로 1,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으라고 하자 매스컴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율적 강제로 이뤄지는 경쟁은 단기간의 성과는 있겠으나 다산과 신작처럼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힘들 터다.

신작의 고심참담한 저술은 어느 날 발생한 화재로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시차고>는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은 곧 넋이 나간 삶이다. 사람들은 신작을 보고 넋이 달아난 껍데기 인간이라 불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다산을 순간 절망케 한 것이 <상서고문소증>이었다면, 신작을 절망시킨 것은 화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다시 시작했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시 시작한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책상에 앉아 검색할 수 있고 따올 수 있지만, 다산과 신작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서관이라야 궁궐 속의 규장각, 홍문관뿐이다. 민간의 학자는 집안의 서적을 이용하거나, 북경(베이징)에서 구입하거나, 수소문하여 빌려야 한다. 또 일일이 손으로 자료를 베낀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복사기가 없으니, 다시 손으로 베껴 부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고증학은 대량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료를 구득하고 해독하고 정리하고 저작하는 과정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신작은 두 번 거쳤던 것이다. 신작이 <시차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28살(1787) 때였고, 1차 완성본이 소실된 것은 39살(1798) 때였다. 마음을 추슬러 최종 원고를 완성한 것은 55살(1814) 때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8년이 걸린 것이다. 다산과 신작의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 저작들로 인해 동아시아 학계의 주류에서 조선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유명한 대학의 총장님이 자기 대학의 승진 심사의 엄격함을 말하면서 1, 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지 않으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하자, 신문과 방송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총장님과 매스컴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마디 ‘경쟁’이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만사는 아니다.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협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단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장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경쟁의 공정성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 경쟁의 결과 승자가 얼마를 차지하는가, 혹은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논의되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논의 과정이 전무하다. 오직 ‘경쟁’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 문제를 따져야 할 대학에서조차 대학 안팎의 관료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타율적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쟁은 짧은 기간 동안은 분명 성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산과 신작의 연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학문적 난제에 답을 찾는,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덧붙여 하나만 물어보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만사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왜 경쟁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는 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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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발견?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3> 유럽의 해외팽창 ①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2월 04일


  아메리카의 정복과 유럽의 해외팽창
  
  1) 아메리카와 아시아 항로의 개척
  
  동방무역과 인도항로
  
▲ 콜럼버스의 상륙

  15세기말은 서양인에게 매우 뜻 깊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이 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럽인들은 유럽을 벗어나 넓은 외부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모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선 것은 물론 아시아의 특산품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이나 자기, 인도의 면직물, 또 인도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나는 후추,정향, 육두구 등의 여러 향신료, 보석 등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동방물산을 직접 수입함으로써 큰 이익을 내기 위해서였다.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리고 중동 지역 전체와 동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동방무역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서 다른 나라들은 여기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이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귀퉁이에 있는 포르투갈은 작지만 매우 독특한 나라였다. 이미 중세 말부터 제노바와 어울려 지중해 무역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일에도 종사한 해양 국가로서 동방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 했고 1450년 대에는 엔리케 왕자의 주도하에 아프리카 중부의 카메룬 지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그들의 생각보다는 너무 큰 대륙이었고 당시에는 항해기술도 아직 부족했으므로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새로운 항로 개척은 포르투갈의 이런 해양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 포르투갈 리스본(Lisbon)항구에 세워진 발견의 탑(Parao dos Descobrimentos).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항해왕자 엔리케

  아시아와 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다 가마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콜럼버스도 제노바 출신으로 일찍부터 포르투갈에서 활동했다.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기 전에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후원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스페인도 1492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여 이른바 '재정복사업'을 끝냈다. 그래서 사기가 충천해 있던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의 모험적인 계획을 통해 해외진출을 꾀했다.

▲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
  
  그리하여 1487년에 바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에, 뒤를 이어 다 가마가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콜럼버스는 1492년에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다.

▲ 바톨로뮤 디아즈와 그의 항해로

▲ 바스코 다가마와 그의 항해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그 후 유럽 및 세계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식민지화로 식민주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길게 보면 18세기 후반 이후 확립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은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인도 항로 가운데 서양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 항로의 발견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아메리카의 '발견'은 왜 중요할까?
  
  2) 아메리카의 '발견' - '만남' - '정복'
  
  아메리카 '발견'은 창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일
  
  19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500주년이 된 해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인디언들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시위가 예상 되었으나 큰 일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반면 서기 2,000년의 브라질 '발견' 500 주년은 브라질 내 반대 여론 때문에 기념행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의 1992년 행사는 100년 전인 1892년의 행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왜 콜럼버스라는 인물의 업적을 다 같이 찬양하고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하지 않을까. 그가 한 일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 '콜럼버스의 날'에 반대하는 포스터들
  
  사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은 콜럼버스 당시부터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을 '신세계'라고 불렀다.
  
  또 유럽인들은 이 발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혜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비서인 프란시스코 고마라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창세기 이후 일어난 가장 좋은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가 예수의 탄생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의 발견'이다.
  
  아베 레이날이라는 프랑스인은 1770년에 '신세계의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간 것만큼 인류에게 관심거리는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아메리카의 발견은, 또 동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은 인류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8세기까지는 '발견'이 유럽인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20세기에 와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발견'은 지금까지도 많은 서양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발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쓸 때 그 단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와 아메리카 '발견'의 의미
  
  17세기 초부터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식민자들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특별히 콜럼버스를 칭송하지는 않았다. 이런 태도는 1770년대의 독립전쟁 이후 갑자기 바뀐다. 새로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낡은 전통이나 악습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새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창설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땅에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땅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의미가 크게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견'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아메리카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주인 없는 땅'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것을 먼저 선점한 유럽인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주장해야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단에 의해 취득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가 반드시 '발견'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발견'은 콜럼버스의 업적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아메리카 역사의 해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의 경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미국사를 미화하는 여러 역사적 신화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발견인가, 만남인가, 정복인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발견'이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것은 '발견'이라는 말이 아메리카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침입하기 전인 15세기 말 당시 아메리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 땅덩어리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에 대해 유럽인들은 그가 인도를 발견했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던 인도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메리카인의 존재와 그 문화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발견' 대신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이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발견'보다는 낫지만 적절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난다'는 것은 중립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모르던 사람을 만났다가 별 일 없이 헤어질 때는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또 그 만남이 좋은 것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만남은 그렇게 오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그것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한 세기 반 동안에 아메리카 인구의 약 90%가 줄어들었다. 또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이 되어 강제노동과 노예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사회들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고 그 파괴적 영향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만남'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덕적 판단을 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요즈음 '발견'에서 조금 나아가 '만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자신들의 죄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뻔뻔스런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이에는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 저지른 일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비롯해 중남미에서 수많은 토착 정치체들을 정복하고 파괴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명백히 침략과 정복과 학살이지 발견이나 만남은 아니다.

▲ 아스텍 제국의 신전 의식 (상상화)

▲ 스페인 정복 전야의 아스텍 제국 (살구색 지역이 예속국가, 벽돌색은 동맹국가)

▲ 정복 직전의 잉카제국

  그러니 식민주의로부터 피해를 받은 비서양지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 들여 '발견'이나 '만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분명히 침략이나 정복 행위로서 다른 어떤 말로도 대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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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과의 만남]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글 김민아·이고은, 사진 우철훈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4


-“보수로 치우치는 대선…눈을 떠도 앞이 캄캄”-

“내 입에서 어떤 수작이 나올 걸 기대하고 온 거요?” 첫 마디에 기가 죽었다. 백기완은 여전했다. 일흔다섯, 뱃속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음성은 쩌렁쩌렁했고, 이따금 부르쥐는 주먹은 강건했다. 대선 이야기를 하러 갔지만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통일과 해방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다 “꽈다당 하고 진짜 벼락이 치는 사랑, 역사를 빚어내는 사랑”을 꿈꿨다. 상식적인 질문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신문쟁이처럼 굴지 말고”라는 호통이 뒤따랐다. “매일매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틴다는 그 앞에서 기자노릇 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내 2시간이 흘렀다. 목이 타고 시장기가 돌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대학로의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백기완을 만났다. ‘이상한’ 인터뷰였다.



-대선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대선,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눈을 떠도 앞이 캄캄해. 눈을 감았을 때보다 더 캄캄해.”

-왜 그렇습니까.

“선거는 고르는 게 아니에요. 자기 생각과 뜻을 실현하고 관철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관철할 때, 마음속의 형체가 나와야 해. 그 형체가 새뚝이야. 새뚝이란 뭐냐. 아무리 침묵같이 삼키는 썩은 늪이라도 작은 돌멩이 하나로도 썩어 문드러진 침묵이 깨지는 거거든. 그 침묵이 타파되는 미적 전환의 계기를 새뚝이라 해요. 선거 때는 이게 나오고 실현돼야 해. 지금은 정상배가 날뛰는 선거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그런 사람이 없어. 우리 시민들에게 좌절·절망·허물을 강요하는 것은 정상배의 짓이라니까….”

-이번 대선에선 보수진영 후보 2명의 지지율이 60%에 이릅니다.

“선거판이 보수에 낱말 하나 더 붙이면 될 것 같아요. ‘보수 반동’이라고…. 이 사회 주된 흐름이 보수 반동이에요. 권력, 정치판 모두 이렇게 보수 반동적일 수가 없어. 언론은 다른 때보다 더 심한 것 같아. 선거판이라고 덜하다고 볼 수 없지. 사회적 기본 흐름의 반영이 선거판이니까.”

-보수화의 원인이 뭔가요.

“우리 역사를 보면 1987년 여름이 결정적 분수령이었다고 생각해요. 이한열 열사가 원통하게 죽었는데 장례식때 200만명이 넘게 길거리에 나왔어요. 그건 조문만 하자는 건 아니야. 요새 말로 민주화를 열망하고 통일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야. 양적·질적으로 민주화·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거머쥐었던 거지. 그때 마지막에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단일화했으면 군사독재는 결정적으로 청산하는 거잖아, 그런데 안했잖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어떻게 됐어. 근대 200년 동안 자생적 근대화 정신 죽이고, 자생적 삶의 터전을 망친 세력의 범죄를 합리화·합법화시켰어. 또다시 보수 반동이 기회를 얻었고, 그게 오늘날 한나라당이야. 심지어는 내가 앞장섰을 때 뒤따라오던 젊은이들도 거의 다 보수화됐어. 남의 선거운동만 했다고. 김대중·노무현…. 민주화운동 세력이 진보적 세력으로 성장을 못한 거지.”

-민주노동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노당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안할게. ‘진짜 진보’가 뭔지 물어보면 하고….”

-그럼 진짜 진보란 뭡니까.

“민노당에서 스승의 날에 나를 초청했어요. 나보고 한 말씀 하래. 진보가 뭐야? 하고 대표한테 물었더니 가만히 있어. 진보란 ‘불림’이야. 불림이 뭐냐, 춤꾼이 춤판에 뛰어들며 한 마디 외치는 소리가 불림이고, 주어진 판을 깨고 새로운 판을 이루자는 한 마디가 불림이야. 진보는 주어진 판을 깨는 거야. 제국주의,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판을 깨는 거야.”

-권영길 후보에게 도움되는 이야기를 하신다면요.

“글쎄…. 딱 한 마디만 하면, 이 자본주의 문명은 지구도 망치고 사람도 망치고 벗나래(세상)도 망칠 것이니 참된 하제(희망)를 빚자는 말, 그 한 마디.”

-직접 대선에 나가신 적이 있지요.

“전술이었다니까! 민노당을 보면 너무 전술에만 매달리고 전략이 모자란 것 같아. 전략은 불림을 외칠 수 있는 세력이 중심이 돼야 하는데, 불림을 외칠 세력이 아니고 아우성 있잖아, 아우성만 치는 체질의 젊은이들이 (민노당에) 모여 있잖아. 다는 아니겠지만.”

-반(反)한나라당 전선이나 범개혁진영 단일화 같은 논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범여권이라는 세력을 개혁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진보세력이라고 머리말 붙이는 사람도 있어요.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범여는 가장 무서운 보수반동세력이야. 미국 독점자본의 앞잡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하자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앞장섰잖아. 미국 신보수의 끄나풀이야, 어려운 낱말로 아류라고. 그 아류가, 한나라당과 아류 경쟁하는데, 하나로 만들어 어떻게 한나라당을 극복한다는 거야.”

-노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한 건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 민족끼리라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만나야 해. 하지만 만나서 뭐하냐 이게 문제야. 노대통령이 만나서 할 게 있다 이거야. 핵은 북핵이 아니야. 미국이 핵을 독점하고 있잖아. 모든 핵을 없애는 한반도 선언을 하고 왔어야 한다고.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 선언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무엇이 통일인지, 두 높은 사람이 말이라도 해보고 오라 이거였어. ‘이것이 통일’이라고 매듭짓지 않아도 좋아. 우리 민족 내부엔 더 무서운 휴전선이 있잖아. 올바른 놈과 나쁜 놈, 있는 놈과 없는 놈…. 전두환이 백두산 천지에 별장 만들어도 통일이야? 부시가 우리 한반도 지배해도 통일이야? 추상적으로 통일 문제를 제기할 때는 지났어. 진짜 통일을 말해야지. 진짜 통일은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야.”

(한동안 우리 민중해방사상의 뿌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듣다보니 조금 반발심이 생겼다.)

-민중해방사상의 뿌리가 자생적으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프랑스 시민들, 히틀러가 쳐들어올 때 적극적으로 항쟁하자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도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굴복한 사람들이 총칼 들고 저항한 전투적, 혁명적 인간보다 적지 않았고. 사람은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깨우치고 발전합니다. 발전할 수 있는 전환의 계기를 줘야 해요. 사람은 100% 자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는 믿어야 해. 우리 민중이 노망 들었다고 하면 안돼.”

-(신정아·변양균 스캔들 이야기가 나왔다.)

“(신·변씨) 이름은 대고 싶지 않아. 다만 사생활이고, 사랑 문제에는 간섭 말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말만 사랑이지, 탈든 사랑이다 이거야. 사랑은 첫사랑, 풋사랑, 갓사랑이 있는데, 갓사랑이 으뜸이야. 매일 아침 매일 저녁마다 새로워지는 사랑이지. 보면 볼수록 새로워지고 정이 들고 하는 게 갓사랑이야.”

-건강은 어떠신가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보이는데요.

“난 건강이 따로 없어. 매일매일 죽기 아니면 살기야. 전두환은 매일 등산, 골프 하겠지만 나는 부럽지 않아. 요즘은 내가 이야기하고 연극할 수 있는 ‘노나메기(같이 일하고 같이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 문화원’을 하나 차리려고 해. 이 집을 팔고 대학로 저 구석에 가면 강당이 많거든. 신학철이라고 그림꾼이 있는데, 자기 그림 팔아서 땅을 사는 데 보태라고, 그림 30점을 갖고 왔어. 그림이 기가 막혀요. 그걸 상품화해서 돈을 벌지는 않으려고 해. 양심상 팔지는 않고 보여주고 싶어. 될까? 난 좌절 안해, 좌절하면 할 게 없잖아.”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자본주의 문명에 속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자본주의는 세 가지를 우상화해요. 돈 우상화, 행복 우상화, 안정 우상화.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이 세 가지에 속으면 모든 걸 잃어요. 미국의 큰 석유회사가 석유 1배럴 생산하는 데 1달러밖에 안 들어. 그런데 팔 때는 100달러라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뺏는 거야. 뺏겠다는 환상에 빠져서 망하는 거지. 인간의 가장 치사한 바람이 돈을 우상화하는 거야. 행복에는 무슨 함정이 있냐고? 나만이 행복하겠다는 것, 강남 가면 중학생 한 달 과욋값이 수백만, 수천만원이라는데, 이름있는 대학 가서 취직해서 자기만 잘 살겠다? 행복을 제도적·문화적으로 우상화하는 거야. 행복은 늪이 돼서 빠지면 못 나오는 게 되면 안돼.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살자는 노나메기 벗나래, 그게 ‘참 변혁’이야.”

▲백기완은 누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재야인사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소장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모·작은형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젊은날 농민운동과 나무심기운동, 빈민운동에 힘썼고 67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가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가 된다. 73년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앞장섰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서울지부 의장, 전노협 고문 등을 지냈다.

87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야당의 후보 단일화·연립정부 구성을 촉구하며 사퇴했다. 92년 대선에서는 다시 민중후보로 나서 24만표를 얻었다. 2002년 월드컵 직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히딩크 감독과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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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별로 안 좋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야기 하시는 것 보니까 아직 건재하시구만. 누구나가 그 시대적 역할이 있는 것. 백선생 역시 그 시대적 역할을 충분히 하셨으니, 이젠 좀 편안히 쉬셔도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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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요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활달한 문장가, 유몽인

▣ 이덕일 역사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685호 2007년 11월 15일


유몽인(柳夢寅)은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1589) 서른한 살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관직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장원급제한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야사집을 펴낸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었다. 문장가로 자처한 그가 문장에 대해 논한 글을 보면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수광을 전송하는 글’에서 “시(詩)에는 귀신이 있는데 이름이 마(魔)이다. 그 성질은 가난, 곤궁, 질병, 방랑 등은 좋아하지만 화려, 부귀, 자신만만하고 득의에 찬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호 역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김시습의 청한자(淸寒子)나 유몽인의 어우자(於于子)는 자신들이 숭상하는 것을 호(號)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어우(於于)란 <장자>(莊子) ‘천지’(天地)조에 나오는 말로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 아닌가(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를 비웃은 장자의 한 구절로 자호(自號)한 데서 그의 기질이 우뚝하다.

△ 유몽인이 파직된 뒤 머무른 금강산 유점사와 그가 지은 <어우야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잃지 않았다. (사진/ 권태균)

광해준 즉위에 일조하며 승승장구

유몽인은 15살 때 판관 신식의 딸과 혼인했는데, 신식의 며느리가 우계 성혼(成渾)의 딸이었기 때문에 잠시 성혼에게 가서 공부한다. 성혼은 서인들이 종주로 삼는 학자로서 유몽인으로서는 서인이 될 기회였지만 그에게 성리학은 잘 맞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유몽인이 “젊었을 때 성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하자 꾸짖고 끊어버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장자처럼 활달한 처신이 성리학자의 눈에는 경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을 맞았을 때 그는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 있었다. 귀국 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로서 광해군을 보좌해 적진을 헤집고, 암행어사로서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 생활도 돌본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형이 일본군에게 죽는 큰 아픔도 이때 겪지만 나아가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가 <어우야담>에 양반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노비들의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에 관한 기록인 ‘기리단’(伎利檀)에 대해서도 쓴 것은 이때의 충격이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의식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선조 32년(1599) 유몽인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임명되는데, 이때 사관은 ‘문장이 단아하고 도량이 있었다’(文雅有餘)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 35년(1602) 경연 시강관(侍講官)으로 있던 그에 대해 사관은 “문재는 있으나 식견과 역량이 없었다’(有文才, 而無識量)라고 정반대로 평하고 있는데, 이는 당론의 시각에서 적었기 때문이다. 정작 유몽인은 이정귀(李廷龜)가 북경에 갈 때 써준 글에서 “조정의 사론(士論)이 나뉜 뒤부터 붕우의 도를 평생 보전할 수 있게 되었는가? 벗 사귀는 도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었는가? 둘도 불행하거늘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당론에 비판적이었다. 유몽인은 선조 41년(1608) 1월28일에 도승지가 되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일조한다. 다음달 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 무렵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면서 조정에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영경이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 나온 것으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해 궁궐 안을 호위하며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세자시강원 때부터 여러 번 모셨던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 일조한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시?

이런 연유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유몽인은 집권 북인(北人)의 유력인사로서 승승장구한다. 예조참판, 대사간 등의 요직을 역임하던 그는 광해군 7년(1615) 이조참판이 되어 광해군 10년(1618)까지 인사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집권 대북(大北)이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면서 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에서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사제의 연을 끊으며 폐모론에 반대하는데, <당의통략>은 이때 ‘유몽인이 정온을 도와서 중북(中北)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인 중에서는 영의정 기자헌 정도가 폐모론을 반대하고 귀양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북인들이 이른바 대론(大論), 또는 대절(大節)이라는 명분으로 폐모를 밀어붙일 때 유몽인은 반대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10년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고 있던 유몽인이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인목대비 폐모 이후 인심이 흉흉해져서 역모 고변이 잇따르는 상황에서였다.

안처인(安處仁)·안후인(安厚仁) 형제가 관련된 역모가 고변되어 시끄럽던 그해 4월 유몽인은 처사촌 정회(鄭晦)와 남산 기슭에 올라 봄 경치를 즐겼다. 술 마시며 놀다가 소녀가수인 은개(銀介)를 불러 노래를 듣는데, 하인이 달려와 추국(推鞫)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고 일렀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 어떤 도깨비 같은 자가 감히 익명(匿名)으로 고변하여 나에게 이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유몽인은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던 시를 국청에서 붓으로 옮겨썼는데 이 시가 문제였다.

△ 유몽인위성공신교서. 조선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보좌한 공으로 유몽인에게 위성공신 3등을 내린 교서이다.(사진/ 권태균)

“성 안에 가득한 꽃, 버들과 봄놀이 즐기는데/ 옥같이 고운 손, 잔을 놓고 백주장을 부르네/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짚고 일어서/ 취중에 늙은 간신의 머리 찍으려 하네.”(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盈唱栢舟, 壯士忽持長?起, 醉中當斫老姦頭)

문제의 시어는 ‘백주’(栢舟)와 ‘늙은 간신’(老姦)이었다. 백주는 <시경> ‘용풍’에 위(衛)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어 부모가 그 처 공강(共姜)을 개가시키려 하자 ‘백주’(栢舟)를 지어 절개를 맹세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백주지통(栢舟之痛), 백주지절(栢舟之節) 같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즉 유몽인이 폐모된 인목대비의 고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늙은 간신은 인목대비 폐위를 밀어붙인 대북의 대신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유학 이시량(李時亮)이, ‘백주(栢舟)의 비유와 노간(老奸)의 설(說)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자세히 조사하여 부도한 죄를 다스리고, 패거리를 곡진히 비호하며 즉시 신문할 것을 청하지 않은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유몽인은 광해군에게 백주는 자신이 아니라 은개가 부른 것이며, 늙은 간신은 변을 일으킨 안처인 형제 등을 일컬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동시에 자신이 현재의 옥사(獄事)에 대해 살펴보니 대단한 것은 아닌 듯했다면서, “어떤 자가 이런 재앙을 만들어내어 100명씩이나 연루되는 옥사가 이루어졌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광해군에게 토로했듯이 대북 일당 전제의 경색된 정국에서 잇따르는 옥사에 불만을 가졌음도 시인했다. <연려실기술>은 유몽인이, “숟가락이 남보다 조금 큰 것만 보면 반드시 고변했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은 사직을 청하는 유몽인에게 “아경(亞卿·참판)은 건성으로 처리할 직임이 아니고 국청은 시를 짓는 장소가 아니다. 일이 해괴하기 그지없으니 물러가 공의(公議)를 기다리라”라고 일단 유보적인 조치를 취했다.

양사에서는 계속 유몽인의 파직을 요청했고 결국 그해 7월 체차되고 말았다. 광해군 12년(1620) 8월 원접사(遠接使) 이이첨(李爾瞻)이 김상헌·장유 등 서인계 인물들과 함께 유몽인이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나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예문관 제학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는 광해군 13년(1621) 8월 “유몽인을 출사시키든지 체차하든지 어떠한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라고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유몽인에게 마음이 떠난 광해군은 체차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달 유몽인은 63살 고령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는 “신선과 부귀를 모두 갖기는 어렵네/ 세월은 흐르고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그러졌네”(神仙富貴兩難諧 流水人間計較乖)라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심정을 밝히는 시도 썼다. 금강산에서 혹독한 병을 앓으며 한겨울을 난 유몽인은 이듬해(1622) 서쪽의 보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해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유몽인은 이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가을 구월 내가 금강산에 들어온 것은 노년을 마치고자 함이었다. 지난 10월에 집안사람들이 서울에서 산사로 온 것은 나의 위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4월 금강산을 떠나 서쪽으로 온 것은 식량 때문이다. …도중에 구군(舊君)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가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보개산 영은사의 두 승려에게 주는 글’)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킨다

광해군 때 배척받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 벼슬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달랐다. 영은사의 두 승려가 “지금 새로운 성군께서 나라를 다스리자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 배회하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지금 산을 떠나는 것은 관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며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으로 출사만을 거부하는 것으로 광해군에게 절개를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인조 즉위 석 달 뒤인 인조 1년(1623) 7월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로 내려가 있던 유몽인에게 금부도사가 들이닥쳤다. 그의 아들 유약 등과 함께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혐의였다. 유몽인은 국문에서 아들이 자신이 지은 ‘청상과부의 탄식’이란 ‘상부탄’(孀婦歎)을 좋아해 일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무궁화 꽃 같은 멋진 남자였네/ 여사의 시 자주 들었기에/ 태임(太妊·주 문왕의 모친)·태사의 훈계 조금은 알았지/ 흰 머리에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분가루에 부끄럽지 않겠는가.”(七十老孀婦, 單居守閨?, 人人勸改嫁, 善男顔如槿。 慣聽女史詩, 稍知妊?訓,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는 ‘무궁화 꽃 같은 남자’지만 자신은 끝내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의 시였다. 조익(趙翼·1579~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에는 이때 묘당(廟堂·조정)에서 만든 통유문(通諭文)이 실려 있다.

“지난해 7월에 역적 유전 등이 맹약한 글이 고발되었을 적에, 그 글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40명에 달하였는데, 기자헌(奇自獻)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중에 유몽인은 도망쳤다가 잡혀왔는데, 형신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사형된 뒤 정조 때에야 복권돼

유몽인에게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광해군 말년 조정을 떠났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것은 삼강(三綱)의 군위신강(君爲臣綱)이나 오륜(五倫)의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평생 장자를 좇았던 그가 불의한 현실에 유자의 사생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반정정권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유몽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괄의 난을 겨우 진압한 인조 2년(1624) 11월 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가 인조에게, “유몽인이 한 번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이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서인들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사들은 유몽인이 백이숙제처럼 광해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유몽인은 정조 18년(1794)에야 복권되는데, 정조는 유몽인에 대해 “혼조(昏朝·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反正)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국조보감>)라고 그 절개를 높이 사고 있다. 한마디로 참선비의 처세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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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화 2013-03-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實學의 先驅的 선비 柳夢寅 국외자가 되어야 했던 於于公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실용 주의자였고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개화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는데 그 싱용주의는 곧 양반도 노동을 해야한다는 론리를 펼치니 성리학에 쩌든 머리를 갖인 기득권자들이 가만 놓아둘리 없었지 , 광해군이 세자때부터 그의 문학으로 있으면서 실용주의 철학을 철저히 주입하였고 광해군이 실각 하지 않았더라면 후금과 함께 명나라를 정벌하여 수백년내 중국에 밭치던 조공이 페지 되고 자주독립 국가로 웃뚝 섰을것이다 허나 사대주의 사상에 쩌들은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와 후금, 양다리 외교를 트집잡아 구테타로서 광해군을 축출하였으니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의 뜻있은 선비들은 거이다 낙향하고 뒤이어 권력을 탐하는자들이 영남과 호남에서 올라와 벼슬자리에 앉아 정파싸움에 열중하니 나라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광화문 땅밑 ‘1800년’이 살아 있다

‘시멘트’ 광화문 걷어내니 대원군 중건한 광화문터 나오고
그 밑엔 태조때 축조물 온전…뻘흙 메운 기법은 백제때 것


임종업 선임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1 30


» 광화문 본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아스팔트를 70cm 가량 걷어내자 고종 때 중건한 ‘1867년 광화문’ 터가 드러나고 다시 70cm를 걷어내자 태조 때 창건한 ‘1395년 광화문’ 터가 발견됐다. 애초의 광화문은 수천년 쌓인 뻘층에 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흙을 시루떡처럼 여섯 켜를 쌓아올려 터를 닦은 것으로 드러났다. 뻘층에서 터까지는 3m가 훨씬 넘는다.
 

29일 오전 11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금강송 숲.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적막을 깬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금강송 한 그루가 쓰러졌다. 가지를 쳐내 매끈해진 나무는 산림청 헬기에 달려 인근 야적장으로 옮겨졌다.

» 광화문 본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아스팔트를 70cm 가량 걷어내자 고종 때 중건한 ‘1867년 광화문’ 터가 드러나고 다시 70cm를 걷어내자 태조 때 창건한 ‘1395년 광화문’ 터가 발견됐다. 애초의 광화문은 수천년 쌓인 뻘층에 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흙을 시루떡처럼 여섯 켜를 쌓아올려 터를 닦은 것으로 드러났다. 뻘층에서 터까지는 3m가 훨씬 넘는다.
 
 
이렇게 강릉과 양양에서 공수한 수령 80~250년 금강송 스물여섯개는 서울 경복궁에서 1년여 동안 건조 과정에 들어간다. 나무가 마르는 한편으로 다듬은 화강석재를 쌓아올려 무지개문을 만든다. 2009년께 마른 금강송이 기둥과 대들보가 되어 누각으로 우뚝 서면 광화문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터이다.

광화문 복원작업이 후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켠에서는 이렇게 광화문에 새로운 역사를 더하고 있고, 한켠에선 시간을 거슬러 광화문에 쌓인 옛 역사의 켜를 들춰내고 있다. 복원사업을 계기로 발굴팀이 들여다본 광화문 터 땅속은 수백년 세월이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담겨 세월의 역순으로 역사의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 1968년 광화문

박정희 대통령때 만든 이 구조물은 ‘광화문’이란 현판을 빼면 온통 돌과 콘크리트다. 철거를 위해 지하 10m까지 굴삭기를 내려 기초를 뽑아냈다. 현재 고궁박물관 옆 공터에 진열된 잔해를 보면 기둥과 천장은 물론 공포와 서까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당시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하면서 시범케이스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공법을 채택했다. 1억5000만원의 공사비가 들었는데, ‘5대 궁궐 및 능원 보수’ 비용이 1100만원이었던 것과 견주면 들인 공이 비친다. ‘현지 목조 복원’(문화재관리국), ‘원래 자리 콘크리트 복원’(서울시)으로 의견이 갈렸으나 대통령 지시로 결판났다. 1968년 12월12일치 신문을 보면 3월15일 기공해 272일 동안 연인원 12만8천명이 투입돼 완성한 구조물은 길이 88.6m(양쪽 담장 포함), 높이 15.4m, 무게 7800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68년 광화문’은 콘크리트 덩어리인 점 외에 터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 1927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다 마지못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재 민속박물관 정문자리)으로 옮겨놓은 원래의 광화문 건물은 한국전쟁(1951년)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 터 역시 일제가 싹뚝 깎아 평평하게 다듬고 전찻길로 내주어 잊혀졌다. 1968년 광화문은 안으로 들여세운 총독부 정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총독부 건물을 승계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옛 남산의 신궁자리를 향하게 된 것이다.

1867년 광화문

광화문 발굴팀의 추정은 옳았다. 원래 광화문, 곧 고종 4년인 1867년 만든 ‘1867년 광화문’은 ‘1968년 광화문’보다 1 정도 앞에 있었다고 본 발굴팀은 두 달 간의 발굴 끝에 지난 9월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 떨어진 곳의 도로 아래 70cm 지점에서 동서 34.8m, 남북 10.2m(총14.7m) 크기의 ‘1867년 광화문’ 기단부를 찾아냈다. 일제가 흩뜨리고 ‘1968년 광화문’을 지으면서 일부를 파먹었지만 홍예문 자리가 분명했으며 정문의 위엄을 위해 돋운 월대와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광화문. 출처 : <신궁궐기행> (대원사)
 

‘1867년 광화문’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작업 가운데 일부. 그해 5월17일 공사를 시작해 9월18일 기둥을 세우고 10월11일 대들보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공사기간이 농번기와 겹치는 것은 서울이 도시화하면서 노임노동자가 형성됐음을 반영하고, 비교적 짧은 다섯 달만에 완공한 것은 민간 목재상의 출현, 조립식 가공기술 발달, 기술자의 직능분화 등의 결과라고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분석한다. 당시 총감독은 스물네살 김수연. 전문가 기술자인 그는 근정전 설계도 감독했다.

1395년 광화문

원위치를 확인해 1차 목표를 이룬 발굴팀은 욕심을 더 냈다. ‘1968년 광화문’이 파먹어 어차피 훼손된 ‘1867년 광화문’ 기단부 북쪽 면을 절개해 보자는 것.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파들어가자 70cm 바로 아래서 태조 이성계 때 축조한 원래 광화문 곧 ‘1395년 광화문’ 기단부 층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1867년 광화문 문설주 자리 아래를 파보니 1395년 광화문 문설주가 1곳만 일부 파손되고 나머지 5곳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1395년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무수한 발길에 반들반들 닳은 흔적이 뚜렷했다. 발굴팀은 1867년 태조 때와 고종 때의 광화문 터가 70cm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일치한다고 추정했다.

중건한 1867년 광화문을 태조 때 터 위에 그대로 세웠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발굴팀 최인화 학예연구사는 “‘특이한 것만 기록한다’는 일반적 기술원칙을 준용하면 기획자인 대원군 이하응이나 총감독 김수연은 ‘중건하는 궁궐은 원래의 자리에 세운다’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조규현씨는 “통상 100년마다 지표가 1m 정도 상승하는데 중건하면서 기존 터를 활용하면 튼튼한 터를 얻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1800년 깃든 ‘타임캡슐’

타임캡슐은 1395년 기단부 아래에도 있었다. 잡돌과 사질토를 시루떡처럼 여섯켜로 쌓은 지층이 드러났고 또 그 아래에는 10cm 굵기의 80~140cm 말뚝을 30~5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은 뻘흙층이 드러났다. 1395년 광화문 기단은 뻘흙 자리를 메우고 세웠다는 얘기다. 본래 경복궁 자리는 북악산 양쪽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의 중간 지점 선상지로, 퇴적토가 쌓이고 습지처럼 축축한 땅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습지를 판축해 튼튼한 터로 활용하는 것은 2세기 때의 백제 몽촌토성, 부여외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통기법이다. 뻘흙에 촘촘히 박은 나무기둥이 빨대가 되어 습기를 위쪽 시루떡 흙층으로 뽑아올리면 뻘흙층이 단단히 굳어 완벽한 기초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광화문 터는 1800년의 시간을 머금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베어온 금강송이 마르기 전에 타임캡슐을 어찌할 것인가 현명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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