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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의원은 ‘친북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의견광고] 북핵 반성, 최기영 출당 없다면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

자율과 연대
출처 : <레디앙> 2007-12-28


심상정 의원의 조건부 수락을 조건부 지지한다

12월 26일 최고위원회는 총사퇴를 결정하고 심상정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심상정 의원은 12월 2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비례대표 선출권을 포함한 전권을 요구하며 비대위원장에 대해 조건부 수락 의사를 표명했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연대(이하 자율과연대)는 제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은 3%는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라는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국민의 경고이자 지난 4년간 노선과 활동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당내 다수파였던 주체파의 비대중적인 노선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었다. 실제로 당내 다수파였던 주체파는 북핵 실험 당시에 사실상 북한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일심회 사건 때에도 대국민적 사과를 방기하며 최기영 전 부총장을 두둔하는 등 국민들이 보기에 이해 못할 친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자율과 연대는 당 존망의 위기에 비대위원장을 맡기려면 전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상정 의원이 비대위원장 수락의 조건으로 제기한 비례대표 선출권은 혁신과제를 수행할 도구이자 필요조건일 뿐 혁신과제 그 자체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혁신과제가 존재한다.

심상정 의원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혁신과제 두 가지

근본적인 당 혁신을 위해서는 최소 다음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이것이 심상정 당원이 감히 당의 근본적인 혁신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첫째, 심상정 의원은 민주노동당 당직자 300여 명의 성향을 포함한 신상정보를 북한 당국에 넘긴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의 행위가 대법원 최종 판결에 따라 당내 간첩행위이자 명백한 해당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를 영구 제명하여 출당시켜야 한다.

거듭 밝히거니와 자율과 연대는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은 명백히 반대하지만 간첩의 자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당직자의 신상정보를 넘긴 해당행위에 대해서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2006년 북핵 실험에 대해 주체파의 눈치를 보며 두루뭉실하게 유감을 표명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당론이었음을 확인하며 북핵 실험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당론으로 공식화해야 한다.

위와 같은 친북편향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심상정 의원 스스로가 말한 봉합과 타협의 비대위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북핵문제와 최기영 전 부총장 출당 없다면,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로 전락할 것

이미 많은 당원들은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 선출권만 요구하고, 친북 편향 문제는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심상정 의원은 자율과 연대와 전진, 그리고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이 민주노동당 내 주체파의 친북 편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국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의 혁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 선출권만 요구하고, 친북 편향 문제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당원들의 분노에 찬 절박한 요구를 왜곡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심상정 의원 스스로가 밝혔듯이 국민에 대한 기만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는 또 다시 타협과 봉합의 비대위로 전락하는 길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보적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것만이 진정한 구당(救黨)이다

우리가 민주노동당에 대해 구당(救黨)의 마음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이라는 껍데기 그 자체가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 그 자체일 것이다.

타협과 봉합의 껍데기 구당은 구당(救黨)이 아니다. 그것은 당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사당(死黨)의 길이다. 당의 진보적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구당만이 진정한 구당(救黨)의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28일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www.kdlps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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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전면 재창당을 위한 긴급성명
[의견광고] 코리아연방 패배 원인 인정하고, 친북 노선 폐기 결의해야

자율과 연대 www.kdlpsds.org
<레디앙> 2007년 12월 24일

민주노동당의 전면 재창당을 위한 자율과 연대 긴급성명


   
 
 
제17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의회 진출 이후 4년간 지속해온 민주노동당의 노선과 활동에 대해 “그 따위 진보는 필요 없다”고 냉혹하게 심판했다. 우리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이하 자율과 연대)는 이러한 준엄한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회생할 능력이 없다. 유일한 생존의 전망은 당 해체 수준의 재창당뿐이다.

왜 민주노동당은 민중의 사랑과 신뢰로부터 멀어졌는가?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은 민족이데올로기와 대안 없는 데모당이라는 양대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노동자 대중정당이라는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족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북한 핵무기에 명확하게 반대하지 못하고 간첩단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방기하는 등 스스로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였다. 일심회 사건의 당사자를 영구제명하라는 자율과 연대의 요구를 묵살하였고 북한 핵실험 당시에는 지도부가 당원들의 걱정과 우려를 뿌리치고 북한 방문길에 나서기도 했다.

또 권영길 후보는 당내경선을 통과한 직후 ‘코리아 연방 공화국’을 핵심 선거슬로건으로 제출함으로써 자신을 대선후보로 만들어준 당내 주체주의자들의 은공에 보답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선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평가 위에서 민주노동당의 뼈를 깎는 자기 혁신과 총체적인 재창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다음 사항을 공식 요구한다.

1. 민주노동당은 스스로를 친북정당으로 만들어 버린 당내 통일 지상주의, 반미 근본주의 노선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이로써 당은 민족자주당이 아닌 진정한 노동자 대중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를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임시 당대회에서 ‘코리아 연방공화국’ 슬로건이 이번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임을 공식 평가하고 ‘친북 민족주의 노선의 전면 폐기’를 명시한 특별 결의문을 채택하여야 한다.

2. 민주노동당은 지난 중앙위원회 결의대로 진보대연합을 추진해야 한다. 특히 유일한 정당체인 한국사회당과 당 대 당 자격으로 통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명과 강령 개정을 포함한 전면적 재창당이 추진되어야 한다.

진보대연합을 통한 재창당은 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정치공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지배했던 낡은 정파질서를 해체하고 당을 망친 세력, 무능력한 세력을 제압하고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은 명실상부한 재창당 뿐이기 때문이다.

3. 현 대선결과에 무한책임이 있는 권영길 후보는 당원과 국민들께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또한, 선대본의 주요 간부들과 그동안 무능력, 무책임, 무소신으로 일관했던 당 지도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2008년 비례대표 후보선출 과정 및 차기 지도부 구성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4. 이상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수렴하기 위한 임시 당대회가 소집되어야 한다. 이러한 당대회 소집요구가 묵살 혹은 지연되거나 당대회에서 위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낡은 틀에 구애받지 않는 혁명적인 내부 투쟁의 길을 걸을 것이다.

주체주의자들과의 오랜 대립은 무엇보다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함으로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진전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우리는 이제 노동자의 길을 가로 막아온 낡은 결탁을 과감히 끊어버릴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차분하게 민중의 삶을 바라 보고 그 속에서 묵묵히 진보의 미래를 고민해 온 새로운 상상력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율과 연대는 이제 잃어버린 민중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12월 24일

민주노동당 의견그룹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www.kdlpsds.org



사회민주주의 세력화를 위한 자율과 연대 특별결의문

   
 
 
NL과 PD가 장악한 민주노동당의 현 주소 :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이하 자율과 연대)는 조직의 건설 이후부터 민주노동당의 당내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실천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당내민주주의와도 멀어지고, 사회민주주의와도 더욱 거리가 멀어지는 정당이 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의 당내 여당은 친북 편향을 가진 주체파가 장악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의 제1야당 세력은 과거의 낡고 몰락한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의 습속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 양대 세력은 NL/PD라고 불리며 80년대적인 낡은 정파투쟁을 일삼으며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자초하는데 ‘일란성 쌍둥이’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친북당, 데모당, 불법적 대중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노동당 : 이들의 절묘한 동거는 민주노동당을 친북당, 데모당으로 전락시켰으며, 코리아연방공화국에 대한 편향된 집착과 소련식 소비에트 모델인 ‘민중대표자회의’라는 황당한 대선강령을 통해서도 재확인된다.

또한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투명회계’를 반대하며 국민의 세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하는 범죄행위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책임의식을 못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민주노동당은 주체파에 의해 통일전선체 정당으로 전락했고, 사회주의파에 의해 데모당의 다른 이름인 ‘운동정당’으로 전락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노선의 재확립 : 민주노동당이 국민적 희망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폭력혁명에 대한 미련과 단호하게 단절하고 의회주의 노선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를 타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낡은 관념과 완전히 단절하고 조세정책 등을 통해 ‘노동친화적’ 경제성장과 ‘노동친화적’ 재분배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노선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폭넓은 사회민주주의 세력화을 위한 자율과 연대의 특별 결의 : 자율과 연대는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사민주의 복지국가 노선을 확립할 수 있도록 ‘사회민주주의 세력화’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선언한다.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동의하는 제 세력과 폭넓게 연대 및 단결하며, 필요하다면 조직통합까지도 노력할 것이다. 또한 자율과 연대의 역량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비례대표 선거와 당직 선거를 포함한 당내 권력투쟁에 적극 결합할 것을 천명한다.

자율과 연대의 폭넓은 사회민주주의(SD) 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위기로 몰아넣은 북한 추종세력인 NL, 소련식 미련 노선인 PD세력을 제압하고 당의 중심 세력으로 거듭나는데 강력한 초석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에게 잃을 것은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와 친북편향의 낡은 진보이며, 우리가 얻을 것은 민중의 행복을 책임지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건설이다 !!

2007년 12월 15일
민주노동당 의견그룹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www.kdlps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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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세금 넘는 사회주의 시스템
[사민주의 논쟁] 김종철 비판, 시장기능 무시는 순진한 발상

정다신 /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 연구원
출처 : <레디앙> 2007 12 02


김종철(존칭생략)의 글을 읽었다. 필자는 사민넷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방향에 동의한다. 본격적인 논쟁에 앞서 논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철의 글이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이 논쟁에 끼어들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지식인들만이 논하는 고도의 추상화로 치닫지 않기를 바라며 몇 자 적는다.

김종철은 소득 불평등도를 이야기하면서 세금을 떼기 전에는 오히려 서구 사회복지 국가의 소득 불평등도가 한국의 그것에 비해 높다고 주장하며 결론적으로 서구 사회복지 국가 역시 우리보다 더욱 심각하게 양극화된 국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시장 체제란 다 똑같다는 식으로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세금을 뗀다는 가정 자체가 그야말로 가정인 만큼, 물가 수준,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의 절대 액수, 비화폐 임금(무상 복지) 등등 많은 것을 사상시킨 조금은 치사한 주장이다. 거꾸로 묻고 싶다.

   
  ▲ 옛 소련의 소비에트 회의 모습.
 
옛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실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소득 불평등도로만 치자면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그 격차가 적은 평등지수 최고의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체제를 거부하고, 김종철이 이야기하는 ‘세금을 떼기 전에는 더 불평등하다는 체제’를 더 선호하는 것일까?

A라는 나라에서 상류 계층이 평균 10만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만 원을 번다고 치고, B라는 나라에서는 상류 계층이 평균 5천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원을 번다고 치자. A라는 나라의 경우 소득 격차가 무려 9만 원이고, B라는 나라는 불과 4천 원이다.

어느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일까?? 각 나라의 물가 수준, 절대 임금 액수, 비화폐 소득, 비화폐 복지 제도, 세금 등등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주장은 그다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언젠가 단순하게 환율만으로 비교했을 때, 구 소련의 경우 한 달 평균 임금이 수 십 달러도 안 되었던 것을 들어 저임금 착취 운운하며 비판하던 황당무계한 논리가 기억난다. 그것도 비화폐성 복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없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김종철이 억지로 분리한 그 세금이 부과되고 기꺼이 자본이 이를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체제가 우리가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체제이지, 자본을 통제하는 수많은 제도들을 떼어 버린 상상 속의 체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민주의자들이 세금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김종철이 제시하는 틀에 따르더라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불평등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높은 세금이다.

그것을 통해 달성되는 주요 사회 서비스의 무상 제공 세도가 사회주의적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는데,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가리켜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고 했던 적이 있던가? 당연히 이는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적인 시스템이고 사민주의자들 자신이 도입한 제도들이다.

그런데, 무상 의료, 교육, 주택 등등의 제도는 이들 사민주의 복지 국가들뿐 아니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민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스템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이 시스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왜 사민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그야말로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아닌 시장 사회 사회주의 시스템을 선호하는가?

‘시장 체제 인정 하, 시장에서의 상위층들인 자본가, 고소득자들로부터의 높은 세금 징수와 그 기금에 의한 복지 체제’가 서구 사회복지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면, ‘시장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자본가, 고소득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가가 국가 예산에서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체제’가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나 사회주의 체제가 건재한 동안에조차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에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시장 경제의 인정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종철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비시장적 현실 국가 사회주의에서보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에서 더 제대로 작동했고 현재도 작동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이 바로 논쟁의 핵심인 것이다. 그도 바로 이 점을 길게 비판하고 있다.

김종철은 만약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세금만 스웨덴처럼 걷어서 지원할 경우의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사민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높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사민주의자들이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세금만 걷자고 하는 사람들인 양 묘사한 것은 매우 정당하지 못 하다.

이어서 그는 ‘중간의 10년을 빼놓고 한 번도 권력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스웨덴 사민당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가 권력이 온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자본가 권력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의 폭력을 제어하기는 해도 시장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에 사민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고 자본가 권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같은 자본가 권력이라도 스웨덴의 그것과 삼성으로 대변되는 남한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은 본인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스웨덴 자본 권력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여전히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으며, 자본 권력을 마음 놓고 휘두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 자본가 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스웨덴 사회가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다며 이러저러한 예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현재 스웨덴 사회의 복지 국가적 성격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화되었거나 미국식 시장 근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 비스무리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의 경도의 정도를 아는지? 이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현실과 맞지 않는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이다. 분명, 우파 집권 이후 교육, 연금, 의료, 부유세 등에 있어 복지 축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파 정권 하에서조차 복지 체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스웨덴 사회복지 여전, 신자유주의화라는 주장은 극도의 단순화

스웨덴 역시 세계 자본주의 국가와 단절하고 있지 않는 한,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외의 이유에서도 복지 국가 특유의 정체에 메스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이야기하듯, 자본 권력이 온전하게 보존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본 권력이 온존하여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스웨덴 국가-자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민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하지 못 하고 자본가 권력이 온존해 신자유주의 체제로 경도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는 상관없이 이미 그 이전에 여성의 대규모 경제 참여, 노인층의 확대, 이주민의 증가, 탈 산업주의적 산업구조 변화 및 이에 따른 새로운 고용 형태 발생, 그리고 서구 중심부 외 지역에서의 경제 발전과 그로 인한 국제적 경쟁 강화에 의한 수입 축소 등으로 국가 예산에 과부하가 걸려 국가 복지 체제에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복지 시스템 개혁을 무조건 신자유주의적 반동으로 모는 것은 극도로 단순한 주장이 아닐 수 없으며, 사태를 과학적으로 보는 시각을 방해할 뿐이다.

그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되었다던 자본가 권력은 우파가 집권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여전히 커다란 변화 없이 복지 기금에 소득의 상당 부분을 내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오히려 스웨덴 자본가들은 외부로부터의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기보다는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황당한 것은 다음 부분이다. 임노동자 기금이 성공하여 스웨덴 기업 대다수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노동자에게로 넘어 와 있다면 지금 이러한 부침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법에 대한 부분이 그것인데, 노동자 계급이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스스로 밝혔듯, 임노동자 기금의 성격이 유고의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가 겪었던 위기, 즉 기업 노동자 집단과 지방자치 위원회들이 전체 인민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적 행태’는 현실에서 좀처럼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레닌 (앞 줄 우산 든 사람)
 
노동자 직접 생산 통제의 이상이야 말로 ‘사적 소유 / 국가 소유’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적 소유’ 논의와 더불어 현실에서 이상과는 달리 매우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며, 역사에서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집행자 혹은 경영자의 기능을 무시하고, 시장의 기능마저 인간(노동자)의 민주적 토론에 의한 결정 등으로 완전히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유고 등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 혹은 자주관리의 실험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를 안다면, 노동자가 소유하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소유 형태 그 중 다수의 이익과 권한이 보장되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시장의 기능을 뺀 다양한 소유 형태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지 개개 기업 노동자 집단이 자신들의 기업과 자신들의 복지 이익만 챙겨 생기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형질 변화와 경제 침체 상황에서 복지 수준을 전 국가적으로 계속 유지하기에 벅차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게 되는 복지 시스템의 부분적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인구 증가에 비해 생산력이 증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가 복지 수준을 유지하려다 거대한 과부하가 걸려 오랜 정체 끝에 결국에는 붕괴로 이어졌던 구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에서도 보이듯, 문제의 핵심은 바로 시장 기능에 대한 것이다.

다당제 인정하면 다양한 사회경제 시스템도 인정해야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인정하는가에 대해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말하였다. 다당제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일당 외 다양한 정당을 인정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당들이 근거로 하는 다양한 경제 주체와 이익 집단이 존재하는 시장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과 같이 일당-국가가 경제와 시민 사회를 장악하지 않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이 다당제를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할 때, 다당제 인정은 시장을 현재로서는 인정한다는 식으로 제한을 둔 뒤의 그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폭력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 싸워왔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폭력적으로 탄압해 온 것은 도리어 지배 계급이거나 제국주의자들이라는 주장을 했다.

최병천이든 그 외 사민주의자든 누구든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며 행사한 폭력이나 지배 계급의 폭력에 대응한 너무도 정당한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인가? 그의 주장처럼, 대안 사회를 꿈꾸는 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인가? 문제의 핵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폭력혁명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현재 그러한 폭력혁명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주장과는 달리, ‘현존하는 모든 질서는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이…’라는 말은 실제로 과거 혁명가들에게 절대적인 것이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정치적인 변혁도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변혁이란 단순한 정치 권력 교체를 넘어 소유 체제를 변혁하는 것이었기에 그 방법은 폭력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와 지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 시장 체제를 폐절하는 것은 당연히 평화롭게 이루어 질 수 없었고,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실제로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민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소유와 시장의 문제를 인정한다면, 이제는 그러한 폭력적 변혁 방식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질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필요에 따라서는 폭력적 권력 획득 방법이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따라서는 국유화의 범위가 광범위해질 수도 있으며, 위협 정도에 따라 제한적 다당제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소유권을 박탈하고 시장을 철폐하며 경제 체제를 바꾸는 민중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과거 사회주의 체제 실패의 진정한 원인을 뒤로 하고, 그 교훈을 잊고 시장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가 권력을 온존시키는 것 운운하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죄악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사회주의 - 사민주의 논쟁의 핵심은 시장을 인정하는가의 문제

그는 국유화가 아니라 다양한 소유(작은 규모의 사기업, 협동조합 기업, 사회적 기업, 국유화된 기업 등등)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장의 폭력적 성격과 불평등한 결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대체 질서가 가능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민주의자는 없을 것이며, 도리어 이러한 주장은 사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현재로서는 시장을 인정하되…’가 아니라 ‘시장을 인정하자’는 것이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일 것이고 이 부분에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장 기능 없는 사회적 소유란 경제 발전 정체, 자원 배분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해당 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와 유리된 생산 등등 또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붕괴의 길과 유사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시장을 인정한다고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시장=자본주의라는 사고를 교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무엇보다 노동자 소유라는 문제 만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노동 인구 중 평균 12% 정도에 이르는 서구 국가들의 자영업 비율에 비해 한국에는 그 3배에 이르는 수의 각종 자영업자들이 존재한다. 무려 6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시장 없이 어찌 할 것인가?

그의 말처럼 시장은 ‘현재로서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세금을 떼면 시장 사회는 어느 국가든 불평등한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자본 권력이 없어지지는 당연히 않겠지만,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로부터 이익의 50%를 세금으로 떼어 낼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일년에 6조에 달하는 성접대비를 복지 기금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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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혁명’ 반대하면 ‘의회주의’ 뿐
[김종철에 답함] 전진 대선강령 "코리아연방 저리 가라" 수준

최병천 / 사민넷 기획담당
출처 : <레디앙> 2007 12 01


   
  ▲필자 모습.
우선 김종철의 답변에 감사드린다. 하지만 이 논쟁은 특정 김종철 ‘개인’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전진' 회원들의 답변과 참여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 논쟁은 사민넷의 공식 의견이 아닌 최병천의 ‘개인의견'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전반적 아쉬움, 그리고 소위 ‘전문가 토론’에 대해

지난 번 글의 제목은 '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였다. 한마디로 사민주의와 ‘체제’ 수준에서 변별되는 사회주의의 내용적 실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게 핵심 논지였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 불가능”이었다. 답변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사족으로 김종철이 전문가 토론의 참여를 이야기했다.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그람시, 비그포르스 등의 사람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론가들이자 동시에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레닌과 모택동 역시도 이론가이자 정치지도자였다.

그렇게 볼 때, 활동가가 논쟁을 주도하고 학자들이 결합하는 것이 모양새가 맞을 듯 싶다.

다시, ‘전진’의 대선강령을 되돌아보며 - 민중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나는 전진 김종철에게 △PT독재 △폭력혁명론 △중앙집중계획경제 △시장 및 상품 △국유화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전진을 ‘스탈린주의’로 음해하고 있다고 반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종철의 답글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지점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전진이 5월에 채택한 대선강령을 보면, 맨 마지막 부분에 「모든 권력을 민중대표자 회의에게」(이하 ‘회의’)라고 시작하는 단락이 있다. 이 부분은 내가 보기에 소비에트식 중앙집중계획경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자세한 내용은 전진 사이트에 들어가서 원문 참조하시길.)

강령의 주요 내용은 △‘회의’는 의회를 대체 △사법부와 행정부도 ‘회의’에서 선출 및 소환(3권분립 해체) △‘회의’는 (가칭)경제기획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설립 △ ‘위원회’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는 ‘초기업적’ 계획과 조절의 관철 및 정치/경제적으로 통일된 권력 행사 등으로 돼있다. 

위 내용에 따르면 국회가 사라지고, 삼권분립도 해체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위원회’로 복속된다. 이 내용을 보고 ‘소비에트식 중앙집중계획경제’를 연상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

만일 전진이 다당제와 보수정당의 집권도 용인하는 것을 전제로 전진의 대선강령이 우리의 현실에서 ‘실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야말로 ‘독재사회’가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 당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다.

당내 제1야당인 전진이 ‘그냥 한번’ 이러한 대선강령을 채택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위 대선 강령을 본 사람이라면 전진의 입장이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논쟁의 ‘역사성’에 무관심한 김종철의 답변 - 다시,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에 관해

김종철은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에 대한 나의 질문이 엄밀하지 않고 사려 깊지 못한 질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같은 세상에 누가 폭력혁명과 PT 독재론을 주장하겠느냐고 반문하며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종철의 반문은 논쟁의 ‘역사성’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발언들이다. 100년전 베른슈타인 논쟁의 핵심은 '정권 장악 방식' 혹은 '경로'가 뭐냐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의회주의 논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는데 왜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바로 당대 정통 맑시즘의 기본 입장이 ‘폭력혁명론’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NL이건 PD이건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PT 독재론 역시도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김종철이 언급한) 자본의 ‘사보타쥬’ 혹은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 두 가지 문제는 사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를 갈랐던 역사적으로 ‘핵심 변별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나라 PD 계열 운동조직 중에서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공개적’으로 폐기한 집단은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인민노련) 이외에는 들어본 바가 없다.

당시 주대환의 ‘신노선’이라는 것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시 PD 계열 조직들로부터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었다.(그 사람들이 요즘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국민들은 아직도 사회주의라고 하면 소련 아니면 북한을 생각한다. 만일 전진이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을 반대한다면 이를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정파는 그 자체로 대안정당이라는 점에서, 국민적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힐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이 답변한 ‘소유의 다양성’은 100년 전 베른슈타인의 핵심 주장

19세기 후반,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리고 80년대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권들에게 사회화란 곧 국유화였다.

   
  ▲독일 사회주의 이론가 베른슈타인.
김종철은 ‘소유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는 100년 전 베른슈타인이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했던 주장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한 스웨덴 사민당내에서도 칼레비, 비그포르스 등이 당내 국유화론자들에 맞서 ‘소유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사상투쟁을 했던 영역이다.

즉, 오늘날 사민주의 국가들의 소유의 다양성은 그냥 ‘사회주의적 이상’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의 ‘사상투쟁’을 통해서 얻은 역사적 전리품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국유화를 남발한 곳은 오히려 영국노동당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효율을 초래하여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반격을 쉽게 초래하게 되었다.)

정리하면, 김종철이 소유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사실상 100년전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며, 스웨덴 사민당내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상투쟁을 했던 ‘사민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사민주의에서 ‘좋은 것’은 사회주의 때문? 소련/북한에서 ‘나쁜 것’은 우리와 무관하다 ? 

오늘날 사민주의가 보육, 교육, 주택, 의료, 실업복지, 노후복지 등에서 (김종철의 표현에 따르면)‘사회주의적’ 요소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조차 당대 정통 사회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사상투쟁을 벌이며 승리했기 때문이다. 국유화 남발 반대(=소유의 다양성), 중앙집중계획경제 반대(=현대적 거시경제관리), 시장의 긍정성 인정 등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사회복지 확충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종철의 답변은 사민주의 중에서 ‘좋은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공로이고, 소련식/북한식 모델에서 나쁜 것은 사회주의와 무관하다는 입장인데 상당히 편의주의적 접근이라 생각한다.

또한 김종철의 답변은 위에서 언급한 전진의 대선강령과도 ‘모순’되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만일 김종철 개인의 답변을 모두 인정한다면, ‘체제’ 수준에서 도대체 사민주의와 내용적으로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유령 사회주의’ 혹은 ‘같기도 사회주의’라는 의구심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폭력혁명론을 거부하면 집권경로는 ‘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다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반대하면 집권경로는 뭐가 있을까?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 이외에는 없게 된다. 즉 ‘의회주의 노선’ 이외에는 없다. 이 부분은 지금, 현재 ‘실천적’으로 몹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주체파의 경우 여전히 ‘북한식 공산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그들의 집권경로는 ‘전민항쟁’이다. 그들에게 100만 민중대회는 전민항쟁의 예행연습이며, 전민항쟁을 위한 예비군 훈련이다.

그리고 진보연대류의 ‘통일전선체’ 운동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이며, 오늘 현재 민주노동당을 사실상 ‘통일전선체’로 전락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전진의 폭력혁명론과 의회주의 사이의 ‘왔다리 갔다리’ - 소위 ‘운동정당론’의 폐해

앞서 강조했듯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반대한다면 집권경로는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전진을 포함하여) 일부에서는 의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도정치와 대중운동의 변증법’을 거론한다. 소위 ‘운동정당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주의 심각한 혼동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한나라당도 국보법을 반대할 때 수만명이 시위를 하는 ‘대중운동’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활용은 정치적 ABC의 영역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집권경로’가 뭐냐는 근본적인 범주의 질문이다.

즉, 집권경로는 ‘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는 것이며, 대중운동은 의회주의라는 ‘전략적’ 상위개념 하에서 ‘전술적’으로 정세에 맞게 활용될 뿐이다. 한마디로 ‘레벨’이 다른 개념이다.

만일 전진이 대중운동을 통한 집권 경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전진은 80년대 남한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던 NL의 아류, 즉 ‘탈색된’ 전민항쟁론자일 뿐이다.

전진의 反의회주의와 운동정당론의 ‘실천적 폐해’ - 겸직금지와 투명회계 문제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당정치의 부재에서 찾으며, 한국 민주화의 특징으로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요약한다. 나는 최장집의 이러한 견해에 적극 동의한다. 최장집의 이러한 주장을 민주노동당의 현실에 접목한다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대체하는 ‘의회주의’ 노선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때 전진파의 反의회주의 노선과 운동정당론은 실천적으로 큰 폐해를 끼쳤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겸직금지 문제’와 ‘투명회계 문제’이다.

먼저 겸직금지 문제를 살펴보자.

겸직금지 발상은 당은 ‘대중운동의 구심’이고, 의회는 ‘분견대’라는 발상에 기초해있다. 그래서 의원단은 ‘의회주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통제’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마이너정당, 정파연합당, 통일전선체적 정당 등의 제약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정치인의 ‘정치력’이 그나마 이를 ‘돌파’ 혹은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겸직금지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족쇄를 채운 꼴이었다.

이러한 겸직금지는 결과적으로 의원들을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도피하도록 조장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중 권력을 장악한 의원들이 당으로부터 ‘책임’을 도피할 수 있는 것을 구조적으로 도와준 꼴이었다.

다음으로 투명회계 문제를 살펴보자.

2004년 총선 직전 오세훈법에 의해 지구당 폐지가 결정되었다. 원래 '지구당 폐지-투명회계-국고보조금'은 ‘한 세트’이다. 지구당을 유지하려면, 국고보조금을 반납하든가, 국고보조금을 받고자 한다면 지구당을 폐지하든가 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논리적 일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지구당 폐지가 타당한 것인가는 지금 논의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주체파와 전진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파는 '지구당 유지-불투명회계-국고보조금'을 한 세트로 선택하고 있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3가지 가치를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나와 같은 사민주의자들은 투명회계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당(公黨)’이며 당원들의 당비로 운영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야당 교체 없이 당내 여당교체 없다

전진의 소위 ‘운동정당론’은 현재 결과적으로 주체파의 ‘통일전선체론’과 절묘하게 동거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反의회주의’이다.

이는 투명회계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체파와 사회주의파의 ‘담합’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당유지-불투명회계-국고보조금'은 당내 만성적 재정적자의 근원이다. 또한 계속되는 회계부정 사건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국민의 세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하고 있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의 운명을 선관위와 검찰, 그리고 언론에 ‘위탁한’ 꼴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야당을 교체하지 않는다면, 당내 정권교체는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이 ‘사민주의자’들의 독자적 세력화가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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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진보진영 구심점 될 수 있다
[투고-사민주의 논쟁] 사민넷, 사회투자국가 대응하는 비전 없어

이영수
출처 : <레디앙> 2007 11 30


대선 시기이지만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이 <레디앙>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한 번 끼어들고자 글을 보낸다. 사민주의 국가 중에서 대표적인 나라인 스웨덴 사민주의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규명함은 물론 진보진영이 이러한 사민주의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사회주의 이상 없이는 사민주의는 불가능하다

스웨덴은 임노동자기금 프로그램을 시도하면서 사회주의 운영체제로 나아가려고 했던 사민주의 국가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웨덴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혁파하고 사민주의가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근접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를 보면 사실상 점진적인 개혁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계급타협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노력은 분명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1920년 소수내각으로 최초로 집권을 했고 1929년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면적인 사회화를 추진해야 된다는 내부 주장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대표적인 사민주의자 칼레비(Karleby)가 소유권이라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아니며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러 가지의 권리의 총합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리의 총합에 대해서 일정 정도 제한을 가하면서 사적소유권을 극복한다면 점점 사회화로 나갈 수 있음을 주장하여 스웨덴 사민당은 전면적인 사회화를 유보하게 되었다.

즉 즉각적인 생산수단의 사유화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조금씩 규제해 나가는 것 또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임을 주장한 것이다.

   
  ▲ 스웨덴 노총(LO) 건물 모습.
그래서 이러한 노선을 취하면서 스웨덴 사민당은 사민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보편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스웨덴 사민당은 노동자들이 대기업들의 초과이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대기업들의 주식을 소유하게 되는 임노동자기금에 대해서 적극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결국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스웨덴 사민주의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불가역적인 사회운영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유럽의 전통 사민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현존하는 사민주의가 사회주의의 경로로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경로가 아니다, 라고 단정 짓기 위함이 아니다.

유럽 사민주의가 지금까지는 사회주의의 경로로서는 실패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경로이며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사민주의가 사회주의로의 경로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좌로 움직이어야 하고 우리들의 사민주의 또한 사회주의와 유리되어서는 안되며 사민주의가 사회주의의 경로로서 더디더라도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웨덴의 사민주의를 언급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의 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2. 사민주의의 현상황 : 그래도 사민주의는 전진하려고 한다

사민주의를 평가하는 이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권력자원이론이고 나머지는 구조적 종속이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에는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사민당들이 집권을 하고 많은 개혁을 이루어내면서 권력자원이론이 정당화되는 듯했지만, 70년 대 대공황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사민주의가 쇠퇴하면서 구조적 종속이론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에스핑 엔더슨(Esping-Andersen)과 코르피(korpi) 등이 주장한 권력자원이론은 사민주의 정책으로 만들어진 완전고용과 무상의료, 교육 같은 복지체제가 소득재분배와 노동의 탈상품화를 이끌어서 노동계급들이 복지국가체제를 수호할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추동하는 권력자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반대로 구조적 종속이론은 국가는 구조적으로 자본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민주의 정당 또한 자본의 투자를 유발할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로 인해 자본으로부터 정책 및 전략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민주의체제는 개량적 국면에서는 자본의 타협과 양보로 일정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경제 불황과 같은 위기적 국면에서는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자본과 노동의 타협이 깨어지고 자본이 노동을 공격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민주의는 급속도로 와해되었기 때문에 구조적 종속이론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을 받아들여 경제적 효율성을 우위에 두는 체제로 전환하면서 전통적 사민주의 체제와 이별을 고했으며, 스웨덴을 비롯한 노르딕 국가 또한 사회투자국가적 요소를 복지 부문에 받아들여 기존의 체제에서 후퇴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사민주의 국가들이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사민주의체제는 개별 나라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똑같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며, 최근에는 구조적 종속이론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예견한대로 사민주의체제가 단편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잘 견뎌오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특히 노르딕 모델 같은 경우에는 평등과 효율 면에서 모두 영미식 모델을 앞서면서 성장을 위해서 분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민주의가 권력자원 이론가들의 희망대로 자본주의체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구조적 종속이론과 신자유주의가 예견한대로 체제가 해체되지도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사민주의를 통해서 권력자원을 구축해놓으면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며, 오히려 전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민주의가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비가역적인 제도를 완벽하게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을 많이 구축하면서 비가역성의 가능성을 여전히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민주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이 제시했듯이 사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비가역적이지는 못했지만 사민주의는 언제든지 다시 전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3. 한국에서 사민주의의 의미 : 보수독점체제를 무너뜨리고 진보진영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한겨레>의 몇 년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진보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절반 정도의 국민들 또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으로 영미식 모델보다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수독점체제가 더욱더 공고화하면서 일방적으로 영미식 모델로 수렴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은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는 사민주의를 통하여 영미식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한국의 보수독점 체제를 진보 / 보수체제로 재편하고 다수의 국민들을 진보진영으로 결집시킬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의 반 수 이상이 사민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사민주의는 한국적 권력자원을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고 진보진영은 이러한 부분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앞으로 지속가능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혁파할 수밖에 없는데 사민주의가 현재의 보수독점체제를 혁파하고 진보/보수의 정치체제를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노선이라는 측면에서 사민주의는 매우 의미가 큰 것이다.

4. 사민주의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 / 보수체제로의 재편은 사민주의만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민주의를 토대로 하는 구체적인 국가비전과 이러한 국가비전에 걸맞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사민주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당 내외를 아우르는 활동을 시도하고 있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러한 활동이 당원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들을 추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전 없이 당위론적으로만 흐르는 것 같아 아쉽다.

예를 들면 이미 중도개혁세력들은 사회투자국가를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국가비전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사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투자국가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는데 왜 그것이 홍시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처럼 민주노동당은 사민주의 정당인데 어떤 사민주의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를 내세우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정당화한다면 그건 한 참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일 뿐이다.

이미 소련은 해체되었고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21세기이다. 더욱이 서구의 전통적 사민주의가 변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가진 당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민주의인지 구체적인 제시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민주노동당은 사민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사민주의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성만 주장한다면 동어반복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당내 사민주의자들은 중도개혁세력들의 사회투자국가에 대응할 수 있고 당원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국적 사민주의에 대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이미 당내에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국가와 같은 국가비전을 지지하면서 사민주의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외화시켜 나가면서 당원들과 대중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사민주의 논쟁이 생산적으로 흐르기 위해서는 한국적 사민주의의 비전과 그 하위 정책방향에 대한 논의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논쟁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고민했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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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30일 (금) 07:52:50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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